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창세기 강해(27) 아브람의 성화(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01

3. 아브람의 승리(창 14:1-24)

창세기 14장에는 전쟁에 용맹스러웠던 아브람의 한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맹주로 하는 동방의 네 왕이 연합하여 소돔의 다섯 왕을 격파하고 재물을 노략하여 갔을 때,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혀 갔다. 이 급보를 받은 아브람은 집에서 키운 가신 318명을 전부 동원하여 연합군을 격파하고 조카 롯을 구원해냈다. 아브람이 승전하고 전리품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뜻밖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 그에게 축복을 받게 되고, 아브람이 전리품 중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드리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는 조카 롯을 구원하는데 저렇게도 용맹스러웠다. 실로 용감한 지휘관으로 나타났다. 그는 그가 취한 전리품에는 아무런 탐심을 갖지 아니한 깨끗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브람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골육을 구원해야 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 조카 롯이 침략을 받아 사로잡힘(창 14:1-12)
소돔지역에 위성도시 형태를 이루고 살던 다섯 왕(창 14:2)들은 당시 시날 왕을 위시한 동방의 다섯 왕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살았다(창 14:1). 무려 12년 동안 섬겨오던 다섯 왕들을 배반하고 저들을 대치했다(창 14:4-5). 그 결과 이 양쪽의 부족 왕들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창 14:5-9). 그 결과 소돔을 중심으로 동맹한 연합 왕들이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승전한 동방의 동맹한 왕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가고 말았다(창 14:11). 이때 소돔에 거하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히고, 그 가족과 종들과 재산까지도 노략을 당해 버렸다(14:12).
이 부분의 성경의 기록 목적은 이방인들의 전쟁사를 기록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는 사실상 아브람의 조카 롯의 참상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한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물질최우선주의로 의리를 저버리고 탐심을 부리던 롯이 하나님의 징계와 보응을 받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창 13:10-13).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방 연합 왕들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롯을 깨우치기 위하여 일으키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아브람의 위대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존재하는 세계 역사는 택자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2) 아브람의 전쟁(창 14:13-16)
전쟁 중에 도망한 자가 롯의 숙부인 아브람에게 이 급보를 전했다(창 14:13). 아브람은 이 급보를 듣고, 집에서 기르고 연습시킨 자 318명 전원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갔다(창 14:14). 그리고 그의 가신들을 나누어 야음을 틈타 그들을 쳐서 파했다(창 14:15). 그리고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다고 하였다(창 14:16). 조카 롯과 가족과 그의 재산뿐 아니라 소돔의 인민들과 재산까지도 다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에서 아브람이 그의 생애 중 처음으로 전투를 치른 장면을 보게 된다. 그가 헤브론에서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치른 전투였다. 그 거리는 무려 280km나 된다고 할 때 실로 대단한 용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아브람의 이러한 전쟁 행위에서 몇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 그 전쟁은 정당방위의 전쟁이었다.
침략을 목적한 선전(先戰)이 아니고, 방어도 아닌 구출을 목적한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빼앗겨버린 것을 도로 찾아내는 운동이다.
(2) 조카 롯을 구원하고자 하는 전쟁이었다.
영토확장이나 권력다툼이나 아니면 어떤 이데올로기의 대결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온전히 조카 롯과 그 가족들을 죽음의 위기에서 살려내려 한 구원전쟁이었다. 말하자면 의를 위한 전쟁이었다. 의리의 전쟁이었다.
(3) 실로 용감한 신앙 전쟁이었다.
당시 소돔의 다섯 왕을 이긴 동방의 네 왕들의 세력은 실로 막강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기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평소에 훈련시킨 318명의 가신들을 동원하여 저들을 물리치고 말았다. 이것은 사실상 아브람의 용감한 신앙심의 발로였다. 그는 조카 롯과 그 가족의 생명을 구출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움만을 바라며 쫓아갔던 담대한 신앙, 용감한 신앙, 정의의 신앙전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필승하고 말았던 전쟁이었다.
쫓아가서 파하고(창 14:14),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창 14:15),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4:16). 그것은 사실상 아브람이 받은 또 하나의 축복 체험이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는 성화의 한 수단이 된 것이다. 성도의 축복 체험은 그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성화의 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3)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아브람(창 14:17-24)
아브람이 개선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소돔 왕이 친히 나아와 그를 영접하는 장면이 17절에 나타난다. 이때 아브람은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1) 아브람은 모든 전리품을 소돔 왕에게 돌려줌으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 여유 있는 처세를 하였다(창 14:21-24).
소돔 왕은 아브람에게 사람은 자기에게로 보내고 아브람이 도로 찾아온 물품들은 취하라고 하였다(창 14:21). 이때 아브람은 소돔 왕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라고 하면서,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후에 소돔의 재물 때문에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 할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창 14:23).
바로 이것이 아브람의 신앙의 처세였다. 그는 이미 사람으로 말미암아 축복이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축복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오고 있음을 많이 체험한 자였다. 그래서 그는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소돔 왕 앞에 높이 드러낸 것이다.
아브람은 전리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취할 목적으로 전쟁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조카 롯을 죽음의 자리에서 구출하기 위함이었다. 숭고한 전쟁의 목적을 물질 때문에 더럽히기 싫었던 아브람이었다.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아브람의 빛나는 신앙처세가 아닌가?
(2)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 그에게 축복을 받고, 전리품의 십일조를 그에게 드렸다.
아브람이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의 길에 두 왕의 영접을 받았으니 한 왕은 이미 설명한 소돔 왕이었고, 또 한 왕은 살렘 왕 멜기세덱이었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람을 영접하였다(창 14:18).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람과 그 군대들의 원기를 회복시키고(칼빈의 견해), 또 승리에 대한 축하와 감사의 표시였다(델리취 견해). 그리고 아브람을 축복하기를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창 14:19)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 14:20)라고 하였다. 참으로 대단한 장면이다.
여기 아브람의 개선의 여로에 나타난 멜기세덱(qd,x,-yKil]m')은 누구인가? 그 정체는 무엇인가?
① 그 이름은 멜기세덱이었다(창 14:18).
멜기세덱은 ‘멜렉’(&l,m, 王)+‘체데크’(qd<x, 義)의 합성어로 ‘의의 왕’이란 뜻이다.
② 살렘(예루살렘)의 왕이었다(창 14:18).
‘살렘’(!lev;)은 ‘평화’라는 뜻이다. 그는 평화의 왕이었다. 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던 왕이었다.
③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창 14:18).
이것을 보면 살렘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또 다른 많은 무리가 있었고, 그들 중에 멜기세덱은 제사장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멜기세덱은 왕과 제사장의 직무 곧 정치(통치)와 종교(제사)를 겸하고 있었던 고대의 지도자였다.
④ 그는 출생이나 족보나 역사가 전혀 알려지지 아니한 자였다.
히브리서 7장 2절과 3절에 보면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하였다.
이 말은 왕이요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의 육체적 족보에 관한 말씀이 아니고, 그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 족속의 제사장 직분처럼 어떤 계통을 따라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선지자요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유사하다는 뜻이다.
그는 실재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장차 오실 영원한 참 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모형)이었다(시 110:4, 히 5:6, 7:1-17).
이런 그가 아브람을 환영하고 격려하면서 축복했다는 사실은 첫째, 아브람보다 직위가 높다는 뜻이다. 둘째, 그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경건에 있어서도 아브람보다 앞선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를 의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였다.
아브람이 이런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축복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하는 큰 축복이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드렸다(창 14:20). 이것은 첫째, 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의 기원이 된다. 나중에 야곱도 십일조를 서원한 일이 있다(창 28:22). 이때로부터 500년이라고 하는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 하나님은 이것을 모세를 통화여 법제화하였다(신 12:6, 14:22). 그리고 수세기를 걸쳐서 선민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한 예가 되었다(말 3:8-10). 둘째,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고백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장면들은 전승 후 개선하던 길에서 아브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실을 보여준다.

4) 결론적 교훈
(1) 결코 이 세상적 물질의 번영이 있는 곳이 행복의 낙원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롯이 택하여 간 곳은 ① 에덴동산 같이 아름답고 ② 애굽의 들판 같았으며 ③ 물이 넉넉하였다(창 13:10). 그러나 바로 그곳에 살던 소돔 사람들이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다(창 13:13).
우리 속담에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몽돌 맞는다.’는 말이 있다. 악한 자와 가까이 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롯이 그러했다. 롯은 저들의 전쟁에 휘말려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본다.
(2) 아브람의 관대한 신앙처신을 본다.
그는 조카 롯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는 일전을 치렀다. 그는 조카 롯의 옹졸하고 부덕한 지난날의 행동이나 처신을 탓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를 구원해 주었다. 죽음까지도 불사한 그의 구출작전은 참으로 아브람의 신앙적 위인 됨을 보여준다.
그가 죽음의 자리에까지 뛰어들어가서 적들에게 사로잡힌 롯을 구원해낸 일은 ①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까지 뛰어들어 희생의 제물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의 모습을 연상하게 해준다. ②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불신앙의 골육이 사탄에 사로잡혀 사망 아래 놓여 있는 상태를 직시하고, 영전(靈戰)을 감행하여 저들을 구원해낼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3) 아브람의 승리 후의 처신은 참으로 그의 주님을 위한 영광의 신앙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어렵고 실패했을 때도 그 처신이 참으로 중요하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회개하고 재기의 기회를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승리 후의 처신은 더 중요하다. 축복을 받은 후에는 교만하고, 방심하고, 나태하기 쉽다. 그러나 그 축복이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믿는 자는 그 승리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 가져가야 할 것이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아브람의 행위가 이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소돔 왕의 물질을 거절함이 이를 입증한다.
선한 일을 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2중 3중이다.
아브람의 경우를 보라. 전쟁에 이기고, 조카 롯과 그 가족과 재산을 도로 찾았는데, 멜기세덱을 만나 축복을 더 받게 된다. 그리고 십일조를 바치는 영적 축복도 받았다. 이것은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승리와 축복은 성화의 은총에 해당된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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