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창세기 강해(40)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12

2)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창 21:9-21)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가 된 때는 그의 생애 중 한 축복의 경점을 이루던 때였다. 그 이유는 그가 25년 전에 약속 받은 이삭을 받은 때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때는 그의 아들 이삭이 젖을 떼는 시기였다. 그때 그는 대연을 베풀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가 받은 축복의 기쁨을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와 그 소식을 들은 자가 다함께 감사하는 아브라함가의 웃음이었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이렇게 인생에게 축복이 된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 가정의 또 다른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그리고 하갈의 사건이다.
이삭이 젖떼던 날을 기념하여 대연을 배설하던 그때, 아브라함의 첩이었던 애굽 사람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사라가 목격하게 된 것이다(창 21:9). 여기 ‘희롱’이란 말은 상대방을 멸시하며 조롱하고, 나아가 살인성이 깔려있는 저주의 눈초리를 가리킨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적대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장면이다. 4000년이 넘도록 그칠 줄 모르는 오늘날 중동전쟁의 불씨이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쫓을 것을 제의했다.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을 수는 결코 없다고 하였다(창 21:10). 이때 아브라함은 또 한 번 깊은 근심에 싸였다(창 21:11).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말고 그 모자를 내어보내라고 하였다(21;12). 그러나 하갈의 아들도 아브라함의 씨이므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였다(창 21:13).
마침내 저들은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방황하게 되었다. 브엘세바는 헤브론 서남쪽 광야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통로이다. 지금 하갈의 마음은 애굽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들이 브엘세바에 이르렀을 때 가지고 간 가죽부대 속의 물은 다 떨어지고, 이스마엘은 목이 말라 기진맥진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침내 하갈은 방성대곡하고 말았다(창 21:16). 그때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였다(창 21:17). 아마 목이 말라 괴로워하며 외치는 이스마엘의 고통에 찬 소리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셨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에게 이르러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창 21:17)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자는 계속해서 하갈에게 말하기를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8)고 하였다. 그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사명을 강조한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혀 주셨다. 그 순간 그녀는 샘물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곧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했다고 하였다(창 21:19). 여기 샘물은 솟아나는 샘물을 가리킨다(창 24:11, 20, 26:19, 20, 21). 이적적으로 갑자기 솟은 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갈에게 은총을 더하셔서 샘물을 발견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유지한 그들 모자는 바란광야에 거처를 정하였다. 이스마엘은 활 쏘는 자가 되었다고 하였다(창 21:20). 여기 바란광야는 동으로는 아라비아, 서로는 애굽의 술광야, 남으로는 호렙산, 북으로는 팔레스타인 남부와 경계를 이루는 광활한 지역에 펼쳐진 광야였다. 오늘날의 에티(Et-Tih) 사막에 해당된다.
창세기 16장 12절에 하나님이 이스마엘에 대하여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고 한 예언의 말씀대로 그는 거친 사막인들의 습성을 익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활쏘는 자가 되었다’고 함은 무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 자손들이 오늘날의 아라비아족인데 그 족속들은 역사상에서 가장 호전적인 족속이었다(창 16:12).
하갈은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이스마엘의 아내를 삼게 하였다(창 21:21). 이삭이 동족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과(창 24:7) 대조를 이룬다. 바란광야에는 애굽의 식민들이 있어서 애굽여인을 취하기가 용이했던 것이다. 저와 저들의 자녀들은 역사가 계속될 동안 거친 광야에서 유랑하는 전사로 명성을 떨치며 전쟁과 파괴를 일삼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3) 결론적 교훈

(1) 아브라함의 불신앙에 대한 두 번째 가정의 비극이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했을 때 그녀가 잉태하게 되자,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는 일에서 일어났다(창 16:4-5). 그 일로 인하여 하갈이 도망을 갔다가 하나님의 권고하심으로 되돌아온 일이 있다(창 16:9).
두 번째는 그로부터 약 16-7년이 지난 후인 사라에게서 이삭이 출생한 후 3-4년이 되었을 때였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일로 인하여 다시 가정에 분쟁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은 깊은 근심에 빠졌다고 하였다. 이 일이 아브라함가의 웃음을 중단시키는 불행을 초래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아브라함의 불신앙적 소행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2) 하나님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결별을 명령하였다(이스마엘 추방).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고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네 집에서 내어보내라고 하였다(창 21:12).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은 아브라함에게 참으로 중대한 용기와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하였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사실을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30)고 인용하였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결별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 중대한 이유, 즉 이스마엘 추방의 의의가 있다.

① 이삭은 언약을 따라 태어난 언약의 자손이고,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 났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갈 4:22-29)라고 하였다.
창세기 15장 4절에 보면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이미 약속하셨다는 사실이다. 갈라디아서 4장 21-31절에서도 이 사실을 길게 언급했다. 즉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이요, 하나는 사라의 소생 이삭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삭은 약속으로 말미암고,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 났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다시 강조하기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 21:12)고 하였다. 영의 자손이 육의 자손을 추방함이다.

② 육신을 따라 난 자손이 약속을 따라 난 하나님의 자녀를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21장 9절에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고 하였다. 이 사실을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서는 ‘핍박’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것은 육체의 자손이 약속의 자녀를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된 것이다. 육체의 자손이 언약의 자손을 희롱하고 핍박함은 곧 하나님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세상 역사는 언약의 자손을 향한 육신의 자손들의 도전이다.

③ 약속의 자녀는 유업이 있고, 육체의 자녀는 유업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21장 10절에서 확실하게 다시 말하기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갈라디아서 4장 30절에는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이 기업이란 말에는 ① 유산이라는 개념이 있다. ② 적통(혈통), 적자 계승이라는 의미가 있다. ③ 영원한 기업(내세-구원)까지를 포함한다. ④ 하갈의 자손은 시내산(율법)으로 말미암고, 사라의 자손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갈 4:24).
즉 율법은 저주이고 약속은 복음(구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신약적으로 적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모두 복음의 자손이고, 불신자(육적 유대인)들은 율법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복음의 자손은 구원 아래 있고, 율법의 자손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고 하였다(갈 4:28). 하갈의 자손은 불신앙의 아들과 율법의 아들들, 곧 아직까지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 추방을 명령하였다.
성령과 육체는 분리되어야 한다. 신앙과 불신앙은 갈라져야 한다. 율법과 복음은 공존할 수가 없다. 은혜 위의 은혜, 구원의 날에는 율법이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신득의주의는 이행득구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자유주의와 성경주의, 로마카톨릭과 개혁주의(Protestant)는 갈라져야 한다. 모든 복음의 자녀들은 예외없이 율법의 사람들을 추방해야 한다.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 결코 아브라함가에서 존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3)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나타낸 하나님의 긍휼을 본다.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하갈의 추방을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있음을 본다. ① 고통하는 아이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다(창 21:17). 알고 계심을 뜻한다. 보고, 기억하고 계심을 뜻한다. ② 하갈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시며 위로하셨다(창 21:17). ③ 이스마엘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셨다(창 21:18). ④ 하갈의 눈을 열어 샘을 보게 하시고, 물을 마시게 하셨다(창 21:19).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 긍휼(불쌍히 여김)이다. 잠정적 은총, 일반적인 은총이다.

(4) 아브라함이 남긴 중동의 불씨를 본다.

창세기 21장 21절에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고 하였다.
짧은 내용의 구절이지만 이 구절은 4000년이 넘도록 기나긴 비극의 역사를 계속해오는 저 중동의 비극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나 애굽여인 하갈의 몸에서 태어났다. 유대인과 애굽인의 혼혈이다. 그런데 하갈은 이스마엘에게 애굽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아들과 그 자손의 피가 대대로 혼혈이 되어 언약의 백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장면이다. 저들이 오늘 중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랍족속이다.
이삭은 약속의 땅에서 역사를 이루었다. 이스마엘은 그로부터 멀리 떠나 바란광야에서 활쏘는 무사로 성장하였다. 그는 호전적인 족속으로서 세계적인 아랍족의 조상이 되었다. 이것은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창 16:10-12)고 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였다.
결국 이삭과 이스마엘의 대결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대적관계로 발전하고, 유대교와 알라신의 대결, 기독교와 이슬람교 즉 예수와 알라신의 대결로 발전되어 오늘까지 적대관계를 이루어오고 있다. 아무도 그 누구도 이 적대관계를 해결할 길이 없다. 언제나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중동의 분쟁은 예수 재림과 직결될 것이다. 사실상 이 관계는 혈통관계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간 종교적 대결이 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불신앙이 남긴 중동의 불씨(?)가 아닌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다. 구속사의 기록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브라함이 천국에 앉아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의 반복적 연약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허락하신 언약은 불변하고 견고하였다. 부동이었다. 신실하였다. 전능하였다. 영원하였다. 비록 아브라함이 중동전쟁의 전범자 같이 느끼게 하는 역사의 일면을 보면서도,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성취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그 자손인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