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창세기 강해(43) 아브라함과 여호와이레②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14

10. 아브라함과 여호와 이레(창 22:1-24)

아브라함 생애의 절정은 그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산에서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게 된 때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신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00세 때 아들 이삭을 얻은 것이 기적인 것처럼, 그가 받은 아들 이삭을 불에 태워 하나님께 번제로 바쳐야 하는 이것도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일이었다. 정말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됨이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호와 이레’(ha,r'yE hw"hy>)는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는 뜻이다. 예컨대 ‘여호와 닛시’ 즉 ‘여호와는 나의 깃발’(출 17:15), ‘여호와 샬롬‘ 즉 ‘여호와는 나의 평강’(삿 6:24), ‘여호와 삼마’ 즉 ‘여호와가 거기 계시다’(겔 48:35), ‘여호와 라파’ 즉 ‘여호와는 치료하시는 분’(출 15:16)이라는 말과 함께 여호와라는 단어에 함께 붙어서 따라오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아브라함의 걸음에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여호와 이레’는 창세기에 나타난 구속사적 예언의 큰 빛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 된다.

1) 아브라함의 여호와 이레의 체험은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 계시에 기초하고 있다.
창세기 22장 2절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시작이 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여호와 이레를 체험하게 된 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을 상대로 나타났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명령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명령’이란 말을 들을 때 싫어하고 염증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참된 신명(神命)은 믿는 자들에게는 축복이요 문제 해결이 된다.
천지가 하나님 자신의 ‘가라사대’의 산물이다(창 1창). 그것을 우리는 자연계시라고 한다. 그러나 자연계시는 사람의 죄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자연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능력의 창조와 통치와 섭리, 심판 등을 알려주고 있다.
사람의 죄문제와 구원문제는 또 다른 하나님의 계시인 특별계시, 곧 말씀에 의하여 나타난다. 지금 아브라함이 체험하는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구원계시에 관계되는 특별계시에 속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여호와 이레의 체험은 신적인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객관적 산물이요, 타율주의적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결코 아브라함의 여호와 이레의 체험은 아브라함 자신의 산물이거나, 타인으로 말미암은 산물이거나 아니면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하신 하나님 자신의 산물이다. 사람이 하나님 자신의 은총을 체험할 때 그것이 축복이요 은혜요 기록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2) 번제(예배) 계시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 번제 계시의 내용은 창세기 22장 2절에 나오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이었다.
(1) 번제를 지시하였다.
‘번제’는 제물을 잡아 쪼개어 전체를 불태워 드리는 최고의 제사를 가리킨다(창 22:2).
(2) 하나님이 번제할 장소도 지시하였다.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이라고 하였다. 그 산은 모리아 땅이라고 하였다(창 22:2). 여기 모리아 땅은 예루살렘 성전 산을 가리킨다. 역대하 3장 1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장소가 바로 이 「모리아 산」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스라엘에 가면 현재 이곳에는 이슬람교 회당인 ‘황금의 돔’ 혹은 ‘반석의 돔’이라고 불리는 모스크가 세워져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친 장소라고 하는 큰 반석이 자리잡고 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번제할 제물을 지시하였다.
그 제물은 바로 ① ‘네 아들’이라고 하였다. 곧 아브라함의 친자를 가리킨다. ② ‘네 사랑하는(아들)’이라고 하였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스마엘이 아닌 사랑하는 언약의 아들을 가리킨다. ③ ‘독자’라고 하였다. 이삭은 실제로 독자가 아니고 그의 이복 형제 이스마엘이 있었다. 그럼에도 성령께서 나타낸 이런 표현은 독특한 의미와 내용을 두고 사용한 표현이다. ④ ‘이삭’이라고 하였다. 곧 아브라함 가의 ‘웃음’을 제물로 지목하신 것이다. 실로 아브라함에게는 최고의 것이었다. 아니 아브라함의 전부였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번제로 지목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적인 시험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22장 1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에게 더 큰 여호와 이레의 은총을 주시기 위한 성화적 수단이었다. 결코 하나님께서 인신공제(人身供祭)를 요구함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악으로 사람을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였다(약 1:13). 또한 시험을 당하는 자체는 죄가 아니다. 욥도 시험을 당했다. 연단 없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 시험에 넘어짐이 죄가 되는 것이다.
(4) 번제 계시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앙적 순종은 참으로 적극적이고, 감심적이고, 능동적이었다.
① 아브라함은 번제 계시의 명령을 받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행동하였다.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는 곳으로 갔다고 하였다(창 22:3). 아브라함은 지체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② 사흘길을 걸었다고 하였다(창 22:4). 지금 아브라함이 살던 장소가 브엘세바(헤브론)였다(창 21:33). 거기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75km의 거리였다. 삼일 동안 종들과 함께 이 거리를 도보로 여행하는 시간이었다. 오직 신앙으로만 걸은 걸음이었다.
③ 번제(예배) 행위에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였다.
사환들은 산밑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부자(父子)만 가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사환들에게로 돌아오겠다고 그들을 떼어놓았다(창 22:5).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잡을 때 만약의 경우 일어날 종들의 제지를 예상한 행동이었다. 아마 산경으로부터 약 5km 정도 떨어진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아브라함은 사환들을 떼어놓고 번제나무를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제물을 잡을 칼과 불을 들고 두 사람만이 번제할 산으로 향하였다(창 22:6). 이때 이삭의 나이는 16-17세쯤 된 것으로 추측된다.
④ 예언자적 신앙의 태도로 나타났다.
부자(父子)만이 산경을 오르고 있는데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었다(창 22:7). 이 질문을 보면 아들 이삭은 평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번제)를 많이 보고 익숙하게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질문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을 보면 실로 예언자적인 신앙 태도로 나타나고 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의 이런 대답은 무의식적 대답이 아니고 완전하게 정리된 신앙의 말이다. 결과론적으로 그 대답은 예언자적 대답이 되고 말았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경험을 종종하게 된다. 물론 이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대신 하나님이 수양을 준비했다고 믿고 대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드릴 것을 확실히 결정한 상태였다.
⑤ 멈출 줄 모르는 전진행위였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멈추어 후회함이 전혀 없다.
창세기 22장 3절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라고 하였다. 4절에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고 하였다. 5절에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라고 하였다. 6절에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라고 하였다. 8절에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라고 하였다. 9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의 번제(예배) 행위에는 머뭇거림이나 중단이나 좌우로 치우침이 전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으로 눈을 열고 바라보면서 제단을 향해 제물을 준비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⑥ 번제행위(예배)를 본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장소에 이른 아브라함은 ⓐ 그곳에 단을 쌓았다. ⓑ 나무를 벌려 놓았다. ⓒ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올려놓았다. ⓓ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했다(창 22:9-10). 아브라함은 확실한 번제행위를 보여준다.
이것은 번제계시에 대한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과 온전한 순종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삭의 순종이 아브라함의 번제행위를 가능케 한 것인지도 모른다.

3) 대신 번제로 결말이 지어졌다.
(1) 대신 번제는 여호와의 사자의 개입으로 시작된다.
창세기 22장 11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중첩하여 부름은 위급한 상황 중에 나타나시는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다(창 46:2, 출 3:4, 삼상 3:10, 눅 10:41, 22:31, 행 9:4).
여기 하늘로부터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성육신 이전에 자기를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려준다. 창세기 16장 7절에 보면 하갈에게도 나타난 바 있다(창 21:17, 31:11, 삿 6:11-14, 출 14:19, 수 5:13-15).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자기를 나타내셨다(히 1:1-2).
(2) 화급한 하나님의 사자의 부름에 아브라함의 행동은 중단되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는 음성으로, 하나는 무언중에 실물을 통해 2대 응답을 보여주었다.
먼저 음성을 통해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하였다. 독자를 아끼지 않고 번제로 드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 경외의 입증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로 고요하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한 수양을 보여주셨다. 창세기 22장 13절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고 하였다.
① 한 마리 수양이다. ② 아브라함 등뒤에 있었다. ③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④ 아브라함이 눈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에게 보인 수양이다. ⑤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물이 된 수양이다. ⑥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수양이다.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곧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라는 뜻이었다. 하였다.

4) 아브라함의 여호와 이레 체험의 구속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1)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이레를 계시하신 것이다(욘 2:10, 요 3:16, 행 4:12, 요일 4:9-10).
(2) 절대구원계시에 대한 아브라함의 절대신앙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몇 가지로 나타났다.
① 계시의존의 신앙이다.
② 감심적이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신앙이다.
③ 죽은 자를 살리실 하나님을 믿는 부활신앙이다.
창세기 22장 5절 중에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하였다. 여기 ‘돌아오리라’는 히브리말 ‘나슈바’(hb;Wvn; 의 복수 인칭)는 1인칭 복수로 ‘우리가 돌아오리라’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도 돌아오고, 그 아들 이삭도 되돌아온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번제로 바친 그 아들 이삭과 함께 돌아온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다. 창세기 22장 12절에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 그 믿음이 무엇인가?
바로 죽은 자를 다시 살려주실 부활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하였다.
(3) 대신 속죄의 구원계시를 보여줌에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창 22:13)릴 수 있게 하였다.
여기 대신 번제물이 된 수양은 장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실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여줌에 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속죄의 양 예수를 보여주고 있다. 즉 ① 한 마리 수양 → 한 구세주, ② 아브라함 뒤에 있는 수양 → 아브라함 후에 오실 수양, ③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수양 → 십자가에 양손과 양발이 묶여있는 예수, ④ 이삭을 대신한 수양 → 우리 죄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를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이 양을 보았다고 하였다. 영적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들도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하였다(요 1:29, 사 53:1-12).
그 대신 속죄의 장소가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신 모리아산이요, 그 후에 다윗과 솔로몬에 의하여 성전이 세워진 산이요, 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장소가 된 것이다.

5) 여호와 이레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재확인된 축복(창 22:15-19)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결과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체험이 있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미 약속하신 축복을 재확인해 주시는 은총을 입었다.
창세기 22장 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을 세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번제계시(예배)를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창 22:1). 둘째로 여호와 이레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이름을 중복해서 부르셨다(창 22:11). 셋째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위하여 부르셨다(창 22:15).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신 결과는 축복이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은 예외없이 하나님을 만난 결과 구원의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하나님 편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냄으로 이루어졌다.
히브리서 1장 1-2절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하였다.
즉 옛날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마지막에 아들 예수로 말씀하시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불러내어 구별시킨 교회를 통해 말씀하신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이 말씀을 받을 수 있고,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2) 아브라함에게 재확인 된 축복
①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재확인된 축복이다(창 22:15).
첫 번째는 창세기 22장 11절에 나타났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이삭에게 손(칼)을 대지 말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을 격려하였다(창 22:12, 히 4:17-19). 그리고 여호와 이레를 알려 주었다(창 22:13-14). 아브라함은 수풀에 뿔이 걸려있는 수양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는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위하여 나타났다. 창세기 22장 15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라고 하였다. 그는 성육신 이전에 나타난 그리스도였다.
② 축복의 신적 필연성이다.
창세기 22장 16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6장 14절에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라고 하였다. 17절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필요했다. 하나님 편에서 인류의 구원이 필요했다. 죄로 인하여 멸망당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요 3:16). 하나님 자신의 맹세가 그 축복의 보증이다. 성부, 성자, 성신의 맹세이다. 맹세는 최후 보증이 된다.
③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다.
창세기 22장 1, 11, 15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목하고 나타났다. 구원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권적 선택의 은혜이다(행 13:48).
여호와의 사자 곧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축복은 ⓐ 계획적이다. 그것은 주권적 계획이고 작정이다. ⓑ 선택적이다. ⓒ 무조건적이다. ⓓ 불가항력적이다. ⓔ 궁극적이다. ⓕ 특별계시의 은총, 곧 구원의 축복이다.
(3) 축복의 내용
① 그것은 큰 복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22장 17절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라고 하였다.
여기 ‘큰복’이란 무한한 복, 한없는 복을 뜻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믿음의 복이다. 믿음의 복이 왜 큰 복이 되는가? 그것은 구원의 복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복은 영생의 복이다. 한없는 복이다. 영원히 멸망치 않고 사는 영생의 복이다(요 3:16). 그래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 것이다.
② 크게 성하는 자손의 복이다.
ⓐ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고 하였다(창 22:17).
여기 ‘씨’(너의 씨=thy seed)는 후손을 가리킨다.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고 하였다. 창세기 13장 16절에는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하였다. 이는 수적 축복을 나타내는 말이다. 후손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 땅의 티끌로 묘사하였다. 이것은 모두 다 셀 수 없는 아브라함 자손의 번성과 창대를 의미하였다. 이 복은 이미 거듭 반복되고 확인된 것이다(창 13:16, 15:5, 17:1-8).
이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에서 더 나아가 영통 자손의 무수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자손은 실제로 인맞은 자 14만 4천인으로 상징되었고(계 7:4, 14:1),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하였다(계 7:9). 바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 곧 구원받은 온 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롬 11:25-26). 그들은 모두 예외없이 언약의 백성이라고 하였다. 놀라운 것은 지금부터 4000여 년 전에, 아브라함은 영감을 통하여 우주공간의 별들의 무수함을 말하며 천문학적 표현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하였다(창 22:17b).
이는 승리와 권세의 축복이다. 여자(如字)적인 의미로는 적(원수)의 성읍을 점령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강한 민족이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즉 ‘문’은 출입하는 성문인데, 그것을 얻는다 함은 원수의 성을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창세기 24장 60절에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 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강한 민족이 됨에는 우선 정신적, 영적 강함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지적, 체력적 강함이 있어야 하고, 또한 물질적 풍요가 따라야 한다. 과연 역사상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혈통적 그리고 영적 자손들은 단연 역사상에서 머리가 되었다. 저들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전반에 걸쳐 단연 선진하고 있지 않은가?
이 말, 곧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는다’는 말이 구속사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메시야 그리스도께서 사탄이 지배하는 사망의 권세(문)를 깨뜨리고 부활 승리함으로 사망의 지배에서 인류를 해방하실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이다.
③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류구원의 복을 약속하였다.
창세기 22장 18절에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고 하였다.
여기 ‘네 씨’는 특수한 의미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繼代)(마 1:1)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그 다음에 계속해서 나오는 ‘천하만민이 복을 얻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여기 ‘천하만민’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모든 시대, 모든 공간에서 살고 있는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으로 오실 예수께서 온 세상의 구주(요 4:42), 세상의 빛(요 8:12)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실 구주가 되실 것이라고 하였다(눅 2:10-11). 선지자는 그를 가리켜 ‘만국의 보배’라고 하였다(학 2:7).
(4) 아브라함이 이런 축복을 받은 이유
창세기 22장 18절 중반절에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하였다.
곧 하나님의 번제 계시에 대한 아브라함의 즉각적인 신종(信從) 때문이라고 하였다. 감심적인 신종이었다.
창세기 22장 19절에는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내려와 산아래서 기다리고 있던 사환들과 함께 브엘세바로 되돌아온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서 여호와 이레를 체험한 이후, 하산하여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온 아브라함의 신앙은 부활신앙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창세기 22장 20-24절에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다. 나홀도 이스마엘처럼 열두 아들이 있었다. 저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동부지방 메소포타미아 서북부인 수리아지역에 살았던 아랍 족속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절대 계시, 곧 번제 계시에 대한 아브라함의 절대 믿음은 구원과 축복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번제(예배)를 명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의 전부요 본분이다. 이 예배에는 3대 요건이 있다. 곧 하나님의 계시, 번제물(이삭=예수), 아브라함의 믿음(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위함이고,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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