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창세기 강해(44) 아브라함과 사라의 무덤과 밭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15

11. 아브라함과 소유 매장지(창 23:1-20)

창세기 23장은 아브라함의 생애 중에 있었던 또 하나의 기록할만한 사건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죽음과, 막벨라굴을 매수하여 사랑하는 아내 사라의 시신을 장례한 내용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의 죽음을 기회로 그 아내 사라를 묻을 묘지를 사들이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기업을 확보하고, 그것이 장차 그의 자손의 기업이 되도록 하였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23장 20절에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고 하였다.

1) 사라의 죽음
창세기 23장 1절에 「사라가 일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고 하였다.
사라의 향년을 127세로 기록한 본문은 성경에 나타난 여자들 중 나이를 기록한 유일한 기록이다. 그는 약속된 씨의 어머니이고, 또 모든 믿는 자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벧전 3:6).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였고, 이삭은 37세였다.
사라의 죽음은 아브라함에게 슬픔의 한 토막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슬퍼하며 애통했다고 하였다. 그것은 역시 인생무상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2) 죽은 사라를 위하여 소유 매장지를 준가를 주고 샀다(창 23:3-20).
창세기 23장 4절에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라고 하였다.
창세기 23장 9절에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창세기 23장 13절에 「그 땅 백성의 듣는데 에브론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먼저 죽은 자를 위해 묘지를 구입할 뜻을 헤브론에 거하는 헷족속에게 알리고(창 23:3-7), 다음으로 에브론의 땅을 지목하고(창 23:8, 12), 마지막으로 그 땅값을 지불하고 계약절차를 밟았다(창 23:13-18).
그 값은 은 사백 세겔이었다. 창세기 23장 18절에 보면 「성문에 들어온 헷 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한지라」고 하였다. 합법적인 계약 절차를 밟아 땅을 사들인 것이다.
창세기 23장 20절에는 다시 밝히기를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고 하였다. 즉 소유주의 변경을 밝히고 있다.

3)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사람(남편)이 할 수 있는 인륜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였다(창 23:19).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의 시신을 자신의 소유지에다 묻어주었다.

4) 아브라함이 헷 족속의 밭을 자기 소유 매장지로 사들인 데에 대한 영적 교훈을 살펴 보자.
(1) 나그네요 우거자가 밭을 사놓고 갔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23장 4절에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라고 하였다.
여기 ‘나그네’란 히브리어 ‘게르’(rGe)는 ‘길옆으로 벗어난다’라는 기본 뜻에서 비롯되어 ‘거하는’(레 25:6), ‘객이 된’(신 24:21, 시 105:23) 등의 뜻을 가진 ‘구르’(rWg)에서 파생된 말로 ‘타국인’(레 17:8), ‘거류자’(렘 14:8)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자기의 고국을 떠나 잠시 이방인의 땅을 지나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언제나 고국의 땅을 생각하며 그 시민권을 포기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물론 그는 부동산이나 일정한 정착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우거한 자’라고 하였다. 여기 ‘우거한 자’라는 히브리어 ‘토솨브’(bv;WT)는 ‘앉다’(삿 1:16), ‘유하다’(왕상 11:16), ‘기다리다’(출 24:14) 등의 뜻을 갖는 ‘야솨브’(bv'y;)에서 유래한 말로 ‘체류자’, ‘객’(레 25:6)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역시 잠시 머무는 사람을 뜻한다.
헤브론, 아니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 자신은 이러한 나그네요 우거하는 실존이라고 하였다. 이런 자가 자기의 죽은 자를 장사하기 위하여 준가를 주고 땅을 샀다.
바로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행인이요, 우거자인(벧전 2:11)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우리는 나그네와 우거자로 살면서도 사람(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일을 해놓고 가야 한다.
(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낸 언약 신앙에 대한 행동적 고백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로부터 400년 이후에 되어질 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예언한 일이 있다.
창세기 15장 13-16절에 보면 ①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사백 년 간 그들을 섬기겠고, ② 그 후 하나님이 선민을 괴롭히는 나라를 징치할 것이며, ③ 그때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게 될 것이고, ④ 그들은 사 대 만에 현재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이 땅(헤브론)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 예언적 약속을 받을 때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스마엘을 낳을 때인 85세 이전에 조카 롯을 구해낸 후의 일이었다.
그 후 언제나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언약적 예언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살던 때로부터 400년 이후에 되어질 하나님의 언약적 예언을 믿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나그네로, 우거하는 자로 처신하였다. 그는 그 약속된 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히 11:13).
마침내 그 믿음을 행동으로 표식을 해놓을 때가 왔다. 사라의 죽음이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남의 땅에 묻지 않고 자기 땅에 묻는 것과 함께, 약속하신 땅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행동으로 고백한 행위가 준가를 주고 밭을 사는 일이었다.
(3) 아브라함이 약속(언약) 신앙에 따라 미래를 사놓은 행위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정한 때가 올 때, 그 자손들이 그곳으로 되돌아올 준비를 해놓는 처사였다. 말하자면 거룩한 언약의 계승이었다. 거룩한 구속사의 계승이었다. 다르게 표현하여 아브라함이 막벨라굴을 사는 행위는 바로 미래를 사는(買) 행위였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예레미야 시대에도 있었다. 예레미야는 미래를 사는(買) 사람이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영광 속에서 조국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침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백성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항복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가지만 하나님의 때(70년)가 차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것이 죄목이 되어 시드기야 왕명에 의해서 시위대 뜰에 투옥이 되고 말았다.
그때 그의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예레미야에게 왔다. 그리고 아나돗에 있는 자기의 밭을 사라고 하였다. 예레미야에게 그 가문의 기업을 무를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부의 아들 하나멜은 나라가 망한다고 하는 그의 예언에 겁이 난 것이다. 땅을 팔아서 살 궁리를 하는 현실주의자로 기울어진 것이다.
이때 예레미야는 은 17세겔을 주고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밭을 샀다(렘 32:1-15). 예레미야는 그 매매증서를 토기에 담아 보존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받았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훗날에 사람들이 그 땅을 다시 사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해 주는 미래적 사건이었다. 이런 경우 예레미야는 미래를 사는 예언자적 행동을 한 것이다. 그 시대 역사를 역행하는 신앙적 사고(思考)요 신앙적 행동이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들에게 거룩한 축복의 미래를 유산으로 남겨놓고 간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가의 전통이요, 유산이요, 역사이기도 했다.
나중에 아브라함도 거기 장사되었고, 그 아들 이삭과 아내 리브가가 거기 장사되었으며, 그 손자 야곱이 애굽에서 죽어가면서 요셉에게 자신의 해골을 조부의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창 49:29-33). 또한 아브라함의 증손자 요셉도 죽으면서 출애굽의 미래를 예언하며, 자기의 해골을 조부의 땅으로 옮기라고 유언하였다(창 50:24-25).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던 출애굽의 거사시에 모세 시대의 사람들은 그 조상의 유언을 따라 요셉의 해골을 애굽에서 취하여 어깨에 메고 가나안 행군을 계속하였다(출 13:19). 실로 엄청난 역사의 계승이 아닌가! 선민들의 위대한 언약신앙과 전통의 계승이었다.
(4) 예수께서 그의 피로 값주고 우리에게 미래를 사놓으셨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의 땅(헤브론)을 살 때 지불한 돈은 은(세겔)이었다. 예레미야도 은(세겔)이었다. 구약에 나타나는 은(세겔)은 속가(贖價)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민 18:16).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값주고 우리에게 밭을 사놓고 가셨다. 그것이 그의 몸된 교회이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였다. 이것을 포도원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이 은을 주고 사들인 막벨라굴은 저들의 시체가 묻힌 곳이지만, 예수께서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는 예수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 영적 생명의 부활을 받은 무리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러므로 지상에 자리잡은 참된 교회는 ‘미래의 약속’을 받은 무리들이 모이는 곳이다. 지상 교회에는 영원한 천상 교회로 승화되는 미래적 약속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언약신앙의 백성들은 언제나 미래를 사들이는 삶으로 충만하다. 2000년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 의하여 구속의 역사가 이어져 오고 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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