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개정 판/[1] 창세기 개관 [창세기 1장 1절]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16

"창세기 개관"
창세기 1장 1절
석원태 목사

  창세기 개관(창 1:1)

  1. 표제(이름)

  창세기이다. 영어 성경의 표제는 제네시스(Genesis)이다. 이 표제는 70인 역 성경(LXX, Septuagint)의 게네시스(ϒένεσις)에서 유래했다. 히브리어 성경의 본래 제목은 베레쉬트(tyviareB)인데, 문자적으로 발생을 뜻하나, 원천, 시작, 족보, 기원, 출생 등의 다양한 용례가 있다. 이 말은 창세기 시작의 첫 마디 ‘태초(太初)에’ 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2. 저자와 기록연대

  모세오경 전체의 저자는 모세이다. 그 시기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던 광야 40년 어간이 된다. 이 어간에 모세는 창세기를 비롯해서 다른 네 권의 책, 곧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B. C. 15세기 전의 기록이 된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당대의 세계문화를 관통한 사람이다. 애굽의 궁정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광야교회의 역사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 사건의 현장이었다.

  3. 창세기의 특징

  창세기는 기원에 관한 책이다. 곧 시작의 책이다.
  하나님 자아계시의 시작을 뜻한다. 타율주의 계시이다. 자아계시(신론; 1-2장), 자연계시(천지창조; 1:1-31), 인간계시(인론; 2:4-5), 타락계시(죄론; 3:1-8), 구원계시(구원론; 3:9-24), 문화계시(문화론; 4-11장), 선민계시(선택론; 12-50장) 등의 시작이다.
  천지의 시작(하늘과 땅), 시간의 시작(낮, 밤), 인류의 죄와 타락의 시작, 사망과 구원의 시작, 복과 저주의 시작, 빛과 어둠의 시작, 언어와 희생제사의 시작, 사회와 문명의 시작, 결혼과 가정의 시작, 기술과 산업들의 시작, 특별히 특별계시에 의한 언약 신앙의 시작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창세기는 전 성경의 묘판(苗板)이고, 모든 성경교리의 모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는 우주와 인생, 모든 존재의 시작과 기원을 알려주고 있는 보고(寶庫)이다.

  4. 모세의 저작인 창세기와 오경과의 관계성

  ① 창세기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며, 가나안 땅을 선택받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허락하신 주권의 하나님을 알려준다.
  ② 출애굽기는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구속(속량)의 하나님을 알려준다.
  ③ 레위기는 구속받은 성도들의 성별(제사)을 요구하시는 거룩의 하나님을 알려준다.
  ④ 민수기는 유랑하는 백성들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선하신 인도와 보호를 알려준다.
  ⑤ 신명기는 약속의 땅까지 그 백성을 인도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의 신실성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없는 출애굽기나, 출애굽기가 없는 레위기나, 레위기가 없는 민수기나. 민수기가 없는 신명기는 생각할 수 없다.

  5. 창세기에 나타난 그리스도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요 5:39).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구원이다. 존재하는 세계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역사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원의 장(場; 무대)이고 또 수단이다.
  그러므로 아담 타락 이후에 하나님은 곧 구원계시를 나타내었다.
  ① 창세기에는 혈통적 맥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가 있다.
  예컨대 여자의 후손(창 3:15), 셋의 후손(창 4:25), 셈의 후손(창 9:27), 아브라함의 후손(창 12:3), 이삭의 후손(창 21:12), 야곱의 후손(창 25:23) 그리고 유다의 후손(창 49:10) 등이다.
  ② 뿐만 아니라 인물들과 사건들 속에서 예표적으로 나타낸 그리스도가 있다.
  예컨대 범죄 이전의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었다(롬 5:14). 아담은 첫 창조된 사람이요, 예수는 새 창조의 사람(마지막 아담)이었다. 아벨의 열납된 제물인 어린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를 예표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멜기세덱의 신분이 예수를 예표했다(히 7:3). 언약 안에서 출생하여 모리아 산의 제물로 나타나는 이삭은 오실 예수의 희생을 예표했다. 아비 야곱에 의해 사랑을 받고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나, 결국 형제들의 구원자가 된 요셉은 오실 예수를 예표한 것이다.

  6. 창세기와 요한계시록과의 관계성

  창세기는 성경의 첫 책이고,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이다. 그렇다면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고, 요한계시록은 완성의 책이다.
  ① 창세기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말했다(창 1:1).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했다(계 21:1-2).
  ② 창세기는 해와 달과 별들의 비췸을 말했다. 그러나 계시록에는 그 성안에 해와 달과 별들의 비췸이 쓸데없고, 주님 자신의 영광으로 빛난다고 하였다(계 21:23).
  ③ 창세기는 실낙원을 말했으나, 요한계시록은 복낙원을 말했다(계 2:7, 22:2).
  ④ 창세기는 마귀의 간교한 승리와 인간의 패배를 말했으나, 요한계시록은 마귀의 결박(패배)과 인간(성도)의 승리를 말하고 있다.
  ⑤ 창세기는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낯을 피한 사실을 말하고 있으나, 요한계시록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얼굴 앞에 나아와 함께 장막에 거한다고 말했다(계 21:3).
  ⑥ 창세기는 생명나무로 나가는 길이 막혔다(창 3:24)고 말했으나, 요한계시록에는 그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의 권이 회복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계 22:14).
  ⑦ 창세기에는 저주가 선포되었으나(창 3:17),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저주가 제거되었다(계 22:3).
  ⑧ 창세기는 죄의 시작과 사망의 비극을 말했으나, 요한계시록에는 구원의 희락을 말하고 있다.
  ⑨ 창세기는 이 세상의 천지(처음 하늘과 처음 땅)를 말했으나,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이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깊은 관계성이 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바로 창세기의 성취가 된다. 그러므로 역사는 이원론적이 아니고 일원론적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시기 때문이다.

  7. 창세기와 과학

  불행스럽게도 사람들, 특히 과학이 창세기와 충돌을 하는 우(愚)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 특별히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에 기록된 모든 기원에 관련된 내용들에서 그러하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한 예를 보면, 지동설(地動說)을 둘러싸고 과학자 갈릴레오와 로마 가톨릭이 대립했던 때가 있다. 실제적인 사실은 갈릴레오의 주장대로였다. 교황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잠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한 듯했던 갈릴레오는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라고 하는 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과학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실상 많은 유의 과학은 하나님의 존재나 그의 초자연적 창조, 통치와 섭리를 부인하고 있다. 우연발생설을 주장하든지, 아니면 진화론적 우주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자들의 주장처럼 어떤 이성적 합리론에 의해서 믿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본적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친히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방법이다. 어떤 사실에 대한 나의 믿음을 내가 목도했다는 이유에 근거하는 것은 위태롭다. 그 이유는 가장 중요한 사실들과 진리들은 우리의 경험권 밖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머니 태속에 있을 때의 일을 알지 못한다.
  우리 눈은 나보다 작은 공이 굴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적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눈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지구의 자동(自動)이 우리의 시야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동뿐만 아니라 때로 우리는 보이는 사물마저도 우리 눈으로 잘 볼 수가 없는 때가 많다. 그 이유는 우리의 육안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는 사람보다 높고 크신 이의 증거가 필요하다. 바로 그 분이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신 눈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계시, 곧 말씀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의하여 믿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다.
  원천적으로 과학은 보이는 현상세계 자체의 영역(형이하학)이고, 신앙(신학)은 보이지 않는 실존의 영역(형이상학)이다. 신앙은 제1의 원리를 추구하는 것이고, 과학은 제2의 원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뉴턴(Newton)은 ‘과학자는 오직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찰하는 사람일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신앙이 필요하다. 과학과 창세기는 모순이나, 충돌이나, 반대일 수가 없다. 창세기는 과학의 제1원리요 근원이다. 창세기는 과학의 무한한 자원이요 의미요 목적이다. 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무한의 피조세계를 개발하고 탐구하고 연구하여 그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는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적절한 편리를 제공하도록 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창조신앙, 근원신앙을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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