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59] 제2장 족장 이삭의 역사 I. 이삭의 후예 야곱과에서 ①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26

"제2장 족장 이삭의 역사 "
I. 이삭의 후예 야곱과 에서 ①
창세기 25장 19~27장 40절
석원태 목사
 제1장 족장 아브라함의 역사(창 11:27-25:18)
 제2장 족장 이삭의 역사(창 25:19-27:40)

  이제 아브라함 가(家)의 계승자 이삭의 역사를 보게 된다. 이삭의 생애는 정말 평화로운 삶이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고대 동서 문명국들을 통과해야 하는 길고 지루한 여정도 없었다. 그 아들 야곱처럼 파란만장한 분투의 장면도 없었다. 브엘세바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비교적 무사하고 평화로운 일생을 보냈다. 정말 잔잔한 인생여정이었다.
  그의 청년기는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행위에 절대 순복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모리아 산의 사건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사실상 모리아 산상에서의 그 아름다운 순종이 이삭의 일생을 가름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아마 이삭 자신도 한평생 살 동안 그 모리아 산에서의 여호와 이레의 체험을 깊이 간직하고 살았을 것이다.
  이삭의 역사는 이삭의 후예, 곧 야곱과 에서의 출생(창 25:19-34), 이삭과 아비멜렉(창 26:1-33), 야곱과 에서의 적대관계(창 26:34-28:9) 등으로 나눌 수 있다.

  I. 이삭의 후예 야곱과 에서 ① - 야곱과 에서의 출생(창 25:19-26)

  창세기 25장 19절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라고 하였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 하나님께 받은 아들이었다.

  1. 야곱과 에서의 출생(창 25:19-26)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아 결혼하였다(창 25:20). 이삭은 결혼하고 20년 동안 자식이 없었다(창 25:21). 그러다가 60세 때에 쌍둥이 아들을 얻게 되었다(창 25:26). 야곱과 에서의 출생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이러하다.

  1) 기도하여 응답으로 받은 아들이었다.

  창세기 25장 21절에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라고 하였다.
  이런 경우는 성경에 많이 있다. 그의 어머니 사라(창 11:30)도 그러했고, 라헬(창 29:31), 한나(삼상 1:2), 엘리사벳(눅 1:7)의 경우도 그러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통해 그 자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창 17:21, 21:12) 이삭은 결혼한 지 20년 동안이나 자식이 없었다(창 25:20, 26).
  첫째,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바라는 믿음(소망)과 인내와 연단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둘째, 생명의 출생이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 자신에게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셋째, 사람은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을지라도 그 약속을 성취시킴에 있어서 ‘기도’라고 하는 간절한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런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노력과의 상호관계성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가 주권적으로 예정하신 자를 구원하신다. 그럼에도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 사람의 전도를 통하여 성취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고전 1:21).
  결코 이삭의 기도가 아들을 낳게 되는 동기나 결과는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이삭의 기도 전에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후손을 약속하였다. 그 약속 성취의 수단이 이삭의 기도였던 것이다.

  2) 쌍둥이로 받은 아들이었다.

  창세기 25장 24절에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라고 하였다.
  아마 이삭이 하나님께 쌍둥이를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삭은 그저 자식을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저에게 쌍둥이를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영역이다. 이러한 성경에서 생산의 주권이나, 성별의 주권이나, 생산되는 자녀의 수도 사실상 하나님 자신의 주권 영역임을 알게 된다.

  3) 선택과 유기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1) 그 쌍둥이는 태에서부터 싸웠다고 하였다.
  창세기 25장 22절에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고 하였다.
  여기 ‘싸운다’는 말은 ‘요동하다’라는 뜻으로 두 아이가 서로 치고받는 듯한 강렬한 움직임을 보여 주는 말이다. 이 일로 인하여 리브가가 하나님께 물어보았다고 하였다. 즉 리브가는 기도하였다.
  (2) 두 국민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25장 2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고 하였다.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느끼고 리브가가 ‘어찌할꼬’ 하며, 가서 여호와께 물은즉 여호와께서 대답하신 내용이다.
  여기 ‘두 국민’이란 ‘두 민족’을 뜻하는 말이다. 한 태에서 두 길을 걸어갈 자손이 생길 것이라고 한 것이다.
  (3) 복중에서부터 나누어져 출생하는 아들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25장 23절 중에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고 하였다.
  이는 두 아들이 숙명적으로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고, 갈등하고, 적대하고, 불화하는 관계에 놓여있음을 뜻한다.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고 함으로, 이것은 결코 인위적인 소행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작정된 계획임을 보여 주고 있다.
  (4) 어린 자가 큰 자보다 강하다고 하였다.
  창세기 25장 23절 중에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였다.
  이 말은 쌍둥이 중 두 번째 나올 아들이 모든 경우에 우세할 사실을 가리킨다. 영적으로나 후손(혈통)적으로, 물질적으로 강할 것을 가리킨다. 특별히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한 말은 예언이다. 장차 에서가 그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빼앗기고, 그의 후손 에돔 족속이 동생(이스라엘)과 그 후손에게 종속될 것을 가리킨다.
  (5) 큰아들은 에서였고 두 번째 출생한 아들이 야곱이었다.
  쌍둥이가 출생하였는데, 먼저 나온 아들은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다. ‘에서’란 말의 뜻은 ‘털이 많은 것’을 의미한다. ‘갖옷‘이란 ‘가죽이나 털가죽으로 지은 옷’으로, 에서의 전신이 갖옷 같다는 말은 몸에 털이 많아 털옷을 입은 사람 같았다는 말이다(창 25:25).
  두 번째 나온 아들이 야곱인데,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뒤따르는 자’, ‘발꿈치를 잡은 자’, ‘밀쳐내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나올 때부터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마치 형을 밀치고 자기가 먼저 나오려고 하는 자세였다. 뒤지지 않고 앞장서려는 모습이다. 이 모습은 마치 야곱의 성격과 그의 일생을 미리 단면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다. 이름에서부터 ‘선수 치는 자’, ‘속이는 자’, ‘빼앗는 자’ 등의 초창기 그의 교활한 속임수의 성격을 나타내 주고 있다. 호세아서 12장 3절에도 이 사실을 가리켜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라고 하였다.

  4) 에서와 야곱의 출생에서 보여 주는 하나님의 주권교리

  (1) 에서와 야곱의 출생은 인간의 뜻(의지) 이전에 하나님의 뜻이 선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2)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기초한 것이다.

  쌍둥이의 출생이라든지 자식을 허락하는 시기(창 25:21, 26), 태중에서 싸움을 하는 일 등은 인간 이성의 한계에서 벗어난 일이다.
  (3) 그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구속사에 나타나는 선택과 유기를 보여 주고 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예언이다.
  말라기 1장 2-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고 하였다.
  신약 로마서 9장 10-13절에도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교리에 대해서 불신앙하거나 도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4-18)고 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기를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롬 9:19-24)라고 하였다.
  결국 이 사실은 장차 이스라엘과 에돔(에서의 아들)의 두 민족 간에 긴 투쟁이 있을 징조요, 그 시작이 되고 말았다(암 1:11, 겔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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