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강)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마 5:10-12)
우리는 팔 복의 그 마지막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을 접하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말입니까?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 것이 왜 축복입니까? 손해보고,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기독교의 본질을 보여주는 말씀이고,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성품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진리 중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지고,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고,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면 생명을 얻고, 생명을 얻고자 하면 생명을 잃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습니다.'라는 말씀 등등입니다. ◀제목소개!▶
여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의롭게 살기 위해 고통을 받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후 곧이어 '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산상 팔 복 가운데 '복이 있나니'하는 말씀이 두 번 반복되는 곳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에게 뿐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는 갑절의 복이 부여됩니다. 예수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후 곧 이어 '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복이 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 핍박이 따릅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병신, 쪼다 취급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핍박을 받을 때, 오히려 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담대히 주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라고 예수께서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아멘!/
▶우리나라 초대교회에 이기풍이라는 사람은 평양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 사서오경을 읽었고 12살에 백일장에 급제했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방자하여 젊어서 술을 많이 먹고 나쁜 짓을 많이 한 깡패였습니다. 한 번은 평양 좌수의 행렬을 가로막고 좌수를 땅에 집어 던진 죄로 석 달을 목에 칼을 쓰고 옥고를 치른 일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마포삼열 목사님에게 이마에 돌을 던져 피를 흘리게 하고 넘어지게 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평양이 피바다가 되자 이기풍은 원산으로 피신하여 여기서 스왈렌 선교사를 만나 양심에 가책이 되던 마포삼열 사건을 고백하고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평양 신학교에 입학 1회 졸업생 중 한사람으로 그는 안수를 받고 길선주 목사와 함께 일하다가 최초로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 받아 인천항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그마한 목선으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배는 파선 모두 사망했지만 이기풍 목사는 헤엄을 쳐서 추자도에 상륙하여 구출되었고 그 후 제주도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동네 깡패들이 예배 장소에 쳐들어와서 예배를 방해하고 이 목사님을 붙잡아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예수쟁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이 동네에서 대장인데 예수님을 중심한 하나의 단체가 그 동네에 생기기 때문에 자기들의 지역전통이나 체면이 안 서며 또 예수쟁이들의 행동은 자기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옛날 깡패 실력으로 싸우고 싶었지만 꾹 참고 박해를 받았는데 나중에는 복음의 큰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하에서도 일본사람들이 한국 사람을 지배 할 때에 제일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예수쟁이였습니다. 모두가 일본신인 신사에 참배해서 통솔이 되는데 예수쟁이는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박해의 첫 번째 이유는 예수를 믿는다는 그 차체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의를 위하여 당하는 핍박입니다.
성경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후3: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갈4:29절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또한 롬8:17-18절에서도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요15:18-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①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백 년 전 백인 선교사가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선교하러 갔을 때, 흑인들은 사람은 얼굴이 검어야 하는데 얼굴이 흰 것은 '사람일 수 있는가? 귀신'이라고 해서 백인 선교사를 쫓아냈답니다.
까마귀들의 모임에 백로가 갔더니 까마귀들은 흰 것이 어찌 새인가 하고 백로를 내어쫓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은 의로운 사람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을 경우가 많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미워하여 돌로 쳐 죽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 신을 섬기는 아합 왕과 이세벨 왕후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악한 시대를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헤롯 임금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로마에 가면 옛날부터 내려오는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장 유명한 예배당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성 베드로의 예배당이고, 또 하나는 성 바울의 예배당입니다. 이 두 예배당의 유래를 보면,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그 자리에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졌고, 바울이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은 그 자리에 성 바울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할/
기독교의 역사는 핍박의 역사였습니다. AD64년 네로 황제 때부터 313년 밀라노 칙령이 있기까지 약 250년 동안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카타콤 성전이 세워졌고, 원형극장에서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당했습니다. 그때 당한 핍박은 개인이나 가족이나 사회적으로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심한 고문과 불에 달군 쇠로 지짐을 당했고, 눈을 빼고 사지를 찔렀으며, 사자 밥이 되기도 하고, 십자가형으로 죽이기도 하고, 기름 가마 속에 넣어 튀겨 죽이기도 했으며, 가죽을 벗기고, 맷돌로 누르기도 하고 얼음 속에 넣어 동사시키는 등,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다.'는 말이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할/
▶왜 성도가 핍박을 받는가? 몇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⑴성도는 세상의 불의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미워합니다.
⑵불신자를 향하여 죄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⑶성도는 우상 숭배를 배격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황제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것인가?' 양자택일의 위협을 받았을 때에 단호히 황제 숭배를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가이사의 형상에 숭배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 하는 박해 속에서 폴리갑은 기둥에 묶여서 감사기도를 드리며 순교했습니다. 오늘날도 제사에 참여 안 해서 따돌림을 당하고 심지어 어느 장로님은 회사에서 고사를 지내는데 절하지 않는다고 모가지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변함 없는 신앙에 감격한 다른 회사 사장님이 그를 그 회사가 전격 스카웃 해 가셨다고 합니다.
⑷성도는 주님 뜻대로 살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주일 낮 예배만 참석하는 것으로는 미움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녁 예배, 수요예배, 철야, 구역예배, 새벽기도에 나오다 보니 미움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별나게 믿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⑸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다가 핍박을 받고 감사헌금 때문에도 핍박을 받습니다.
⑹성도는 불신자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을 예언하다가 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만 믿지 않는 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타는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당신, 천당 가봤어'하고 핏대를 세웁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습니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②의를 위한 핍박이 아닌 것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일을 잘못 처리한 결과로 어려움이나 공경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핍박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벌입니다.
어느 설교 가는 핍박과 처벌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핍박이란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하여, 나쁜 사람에게 받는 것이요, 처벌은 나쁜 일을 한 것에 대하여 좋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씀 같아요! /할/
그런데 우리는 종종 우리가 받고 있는 것이 처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핍박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⑴우리의 실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닙니다. 벧전2:20절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또 벧전4: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무슨 말씀인가? 살인, 도적질, 악행, 또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 잘못되어 받는 고난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의를 위하여 당하는 핍박이 아니고 처벌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⑵어떤 정치적인 이유로 누구를 반대하기 위하여 받는 핍박은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정당 또는 어떤 주장은 반대하기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고 혹은 죽음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오늘 본문에 의 때문에 받는 핍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위한 투쟁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 때문에 믿는 핍박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절대화하고 신성화하기를 원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일)과 사람의 것(일), 땅의 것(일)과 하늘에 것(일)'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아멘!/
⑶자신이 미련해서 받는 핍박도 본문의 의 때문에 받는 핍박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좀 슬기로워야 합니다. 지혜의 영인 성령 님의 인도를 받으면 절대로 미련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습니다. /믿/ 성령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할/
⑷어떤 사람은 성격이 못되고, 고집이 세고 남을 무시하는 태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의 때문에 박는 핍박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필요한 고집, 제한된 자기의 경험과 지식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의견을 존중해 주면서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⑸광신적인 열정 때문에 받는 고난도 본문의 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92년인가 언젠가 잘못된 종말론 때문에 우리 기독교가 얼마나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혼자만의 지나친 열정 때문에 가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주님은 마10: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비둘기는 순결의 영이신 성령 님을 의미하고, 뱀의 지혜는 에덴동산에 하와가 뱀의 감언이설을 듣고 유혹이 되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뱀이 하와의 마음을 사로잡아 감동시켰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녹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롭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말과 동일어입니다. /할/
⑹대의명분을 위해 받는 고난도 있는데 이것 역시 본문의 의가 아닙니다.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혼합시켜서 그것이 마치 의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받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에 참여하고, 미디어 법에 반대하고, 노사문제에 개입하고, 어떤 정당에 반대하다가 투옥을 당하고 고문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 희생하고 행동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위한 일이고 의를 위한 일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민주화를 위해서 분신자살을 합니다. 그것은 그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희생된 것뿐입니다. 잘 분별하는 영의 지식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할/
③그렇다면 무엇이 본문이 말하는 핍박입니까?
▶11-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라는 말을 정확히 해석하면 '나(예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인 것입니다. 딤후3:12절에서 바울 사도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삶이 변화되어 경건한 삶을 추구하다가 받는 핍박이 바로 본문에 해당되는 핍박입니다. 바울은 갈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위하여 당하는 모든 핍박과 환란이 있을 때 진정한 천국이 임하고 하늘의 보상이 있습니다. /아멘!/
성경은 의 때문에 고난을 당한 분들이 많습니다. 구약의 아벨입니다. 그는 의로운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가인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또 다윗을 보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사울에게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레미아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그는 구덩이에 처박히는 수모를 당했고, 쫓겨나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산다는 말이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순교자는 주기철 목사님이십니다. 일본의 천황 신사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맨발로 못 박힌 곳을 걸어야 했습니다. 아까도 잠시 말씀 드렸지만 초대교회 폴리캅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주후 155년 2월 23일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가 순교 당하기 전에 자기가 베고 있던 베개가 불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어떤 영감을 받았든지 '나는 산채로 불타 죽을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후에 폴리캅이 체포되어 총독 앞에 끌려갔습니다. 그때 총독이 폴리갑에게 '너는 로마 황제 형상 앞에 경배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고 하면서 엄포를 놓다가 그를 회유하기를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내가 예수님을 섬긴 지가 86년의 세월이었는데 그 세월 속에 주님은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나의 구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거절했습니다.
화가 난 총독이 '그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하니 폴리갑은 그 총독을 향하여 '당신은 잠시 타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지만 당신은 앞으로 다가올 심판 날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짐을 받을 자'라고 하면서 '어서 나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군인들이 폴리갑을 형틀에 묶으려 하니까 '나를 이대로 두고 불을 지르시오, 우리 주님은 나를 불에 견디게 힘을 주실 것이며, 나는 그 불길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겠소!' 군병들이 장작덩이에 불을 붙이자 폴리갑은 마지막 기도를 이렇게 드렸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를 순교자의 반열에 세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할/ 얼마나 고귀한 신앙인의 모습인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충성스러운 신하가 돋보입니다. 집안이 어려울 때에 현숙한 아내의 슬기로움이 드러납니다. 소나기와 대나무의 절개는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는 돋보이지 않지만 엄동설한 논밭에서 그들의 푸른 절개가 돋아납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은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핍박은 당할 때는 우리 주님이 더욱 가까이 계셔서 감당할 은혜를 주십니다. 고후1:5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할/
④하나님은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을 허용하는가?
⑴핍박은 진정한 성도를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성도 아닌 사랑이 누가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기에 예수님도 사랑하며 그리스도인이기에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15: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토마스 와슨은 '가짜 성도는 예수님을 따라서 감란 산까지는 갈 수 있으나 갈보리까지는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⑵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성품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핍박은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성품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히12:10절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그리고 롬5:3-4절을 보세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할/
서양 속담에 '흐르는 시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시냇가의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돌들이 있기 때문에 시냇물은 흘러가며 노래를 창조합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난의 아픔이 창조적인 인격을 완성해 나갑니다.
시119:67절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⑶핍박은 주님을 만나는 체험의 계기가 됩니다. 다니엘 3장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칠 배나 더해진 풀무불 앞에서 외쳤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욥은 환란 중에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했으며, 요16:33절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승리의 약속이며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⑤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여기서 천국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현재적인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둘째, 죽어서 올라가는 천국,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팔 복은 천국으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을 맺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의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11-12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천국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핍박의 내용을 세 가지로 알 수 있습니다.
⑴욕하고 조롱하는 것, ⑵육체적으로 고문을 하고 핍박하는 것, ⑶거짓으로 모함하고 악한 말로 윽박지른 것을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2절에서는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어렵더라도 참고 기다리라'고 하시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할 때는 갈등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핍박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⑴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핍박과 역경보다 더 위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 풍랑도, 바다도 잠잠케 하신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롬1: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또 고전1: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⑵천국 때문입니다. 지상의 삶이 전부요, 현재의 삶이 전부라면 무엇 때문에 의를 위해 핍박을 받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천국의 약속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권력, 배경만 있으면 자신만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종류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예수님과 천국이 우리의 배경입니다. /믿/
⑶'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천국에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톤 경기는 이미 고대 그리이스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올림픽 경기에 있어서도 마라톤은 하이 라이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던 로마 시대에도 마라톤 경기가 있었습니다. 고전9:25절에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하는 말씀이 있는데 마라톤 경기를 빗대어 한 말입니다.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자에게 월계수 나무로 만들어진 관이 씌워졌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찬사를 받았습니다. 월계수 나무로 만들어진 영광스러운 관이 시간이 지나면서 잎은 시들고 가지는 마르고, 조금 있으면 잎이 다 떨어지고 바싹 마른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됩니다. 이때쯤 되면 박수와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지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 고린도전서에서는 '썩어질 면류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썩어질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달음질을 합니다.
집권자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충성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다가 훈장이라는 것을 고안해 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고한 사람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내며 훈장을 달아주는 것입니다.
레닌이 공산혁명을 할 때에도 혁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훈장을 가슴에 달기 위하여 담대하게 혁명에 가담했습니다. 히틀러는 용감한 군인에게 철 십자가 훈장을 달아 주었습니다. 병사들은 이 철 십자가 훈장을 가슴에 달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 이 시간 공산혁명으로 받은 훈장이나, 히틀러의 철 십자 가 훈장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썩어질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생명을 거는데, 하물며 '영원한 것, 신령한 것, 하늘의 것'을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영광과 상급은 시간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썩어질 세상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썩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화로운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고, 거짓된 말로 거스림을 받을 때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아멘!/
롬8:18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계2: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1:3-4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할/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빛을 미워하는 어둠이 가득 찬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악한 영은 하나님을 거슬려 진리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진리를 위하여 산다면, 빛을 위하여 산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즐거워해야 합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 가운데 속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할/ 행5장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붙잡혔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채찍에 맞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주님 때문에 능욕 당하였음을 기뻐하였습니다. /아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위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위하여 손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자'고 말하지만 십자가가 어디 있습니까? 환란과 핍박이 어디 있습니까? 옛날 믿음의 선배들은 신앙이냐 죽음이냐를 선택하여야 했습니다. 옛날 믿음의 선배들은 '신앙 없이 살 것이냐? 아니면 주님 때문에 어둠 컴컴한 지하 동굴에 살 것이냐? 감옥에 갇힐 것이냐?'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믿음을 위하여,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베드로는 거꾸러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택하였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우리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님들의 피 흘림을 통하여 든든히 세워진 교회 안에서 평안히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화형 당할 일도 없고, 돌에 맞을 일도 없고, 감옥에 갇힐 일도 없고, 순교 당할 일도 없습니다.
옛날 환란 당하던 믿음의 선배들은 이러한 평화의 때가 오기를 사모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요, 내가 받은 축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멘!/
이러한 은혜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가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거룩한 주일마저 지킬 수 없단 말입니까? 주님이 축복의 근원이신데 주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재물의 손해를 볼 수 없단 말입니까? 의의 주님 앞에서 불의함에 맞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수 없단 말입니까?
여러분, 이제부터라도 주님을 위하여 삽시다.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손해를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나의 시간과 재물과 내 영광마저도 포기할 줄 아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있습니까?
⑴기쁜 마음을 가지십시오, 성도는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과 삶을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 있도록 연단 시킵니다. 약1:3-4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아멘!/
⑵더욱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더욱 더 기도하고 열심히 모여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 다 잃었어도 믿음 하나만 붙잡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됩니다. 요일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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