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20강) 살인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마 5:21-2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39

(제20강)     살인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마 5:21-26)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살인죄입니다.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살인죄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가치관이 너무나 혼동된 세상이라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죽이듯이 합니다. 우리는 '지존파 일당'의 사건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제자가 선생을 죽이고, 안동에서는 19살 먹은 한 청년이 자기를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고 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옛날에는 살인에도 명분이 있었습니다. '부모의 복수를 한다느니 친구의 복수를 한다느니' 그런 명분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살인에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즉흥적이고 감상적으로 저지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세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을 했습니다.
  ▶어느 날 다 퇴근한 백화점 안에 원숭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원숭이는 너무나 심심하여 가격표를 모조리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튿날 백화점에 질서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비싼 것이 싸게 팔리고 싼 것이 비싸게 취급되었습니다.
  오늘날 상태가 그렇다고 표현합니다. 귀한 것이 값싸게 취급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너무나 귀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라고 이 학자는 표현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본문은 살인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제목 소개!▶

 

  성경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보다도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깊은 산을 헤매셨던 그 열심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찾으시는 목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그 사람의 값을 제대로 아셨습니다. 그래서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할/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시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함으로써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요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롬5:8절에서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
  세상에 자식을 대신 죽이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대신 죽게 하고 인류의 죄를 청산하고 생명을 파멸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더 쉽게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꾼 존재입니다. 그 분이 내대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사랑을 입은 존귀한 자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는 가끔 자신을 생각할 때, 왜 이렇게 못났을까? 왜 내가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할까? 왜 이렇게 내가 무식하고 지혜가 없을까? 나의 부족함을 보고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그런 나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믿/
  얼마나 가슴이 벅찬 사건입니까? 하나님이 이처럼 깊은 사랑의 대상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보다도 한 생명을 귀하게 보십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당부하시기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처럼 귀하게 여기신 바로 네 생명을, 네 자신을 그처럼 사랑한다면 네 이웃의 영혼도, 생명도, 네 몸처럼 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할/
  그래서 하나님은 제 6계명으로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제 6계명은 생명에 관한 계명입니다. 생명은 신비에 속합니다. 용량도 무게도 아닙니다. 작은 씨앗에서 새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달걀 속에서 병아리가 나오고 모태에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탄생합니다. 세상에서 생명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기운을 불어넣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산에서 말씀하셨다하여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산상보훈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인의 삶의 황금률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지켜 행해야 할 덕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의 기준과 원리가 '의'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의가 무엇입니까? '의롭게 살아야 한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의야 말로 모든 크리스천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들이 가르침이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와 같은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여섯 가지 예를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⑴21-26절까지는 '살인에 관한 문제'입니다.

  ⑵27-30절까지는 '간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⑶31-32절까지는 '결혼에 관한 문제'입니다.

  ⑷33-37절까지는 '맹세에 관한 문제'입니다.

  ⑸38-42절까지는 '보복하는 일에 관한 문제'입니다.

  ⑹43-48절까지는 '원수 갚는 일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인 '살인에 대한 크리스천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1절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죄를 지은 인간의 최초의 행동은 살인입니다. 창4:8절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또 창4:23절에 라멕이 독백하기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라고 토설하고 있습니다. 살인은 실로 죄의 열매요 결과입니다. 가인 이후에도 살인은 끊임없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나는 다른 죄는 몰라도 살인죄와는 상관이 없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살인말고도 간접 살인, 심리적 살인도 있습니다.
  살인은 히브리어로 '라지크'인데 즉 '깨뜨리다, 산산조각이 되도록 부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미워함으로 그 심령을 깨뜨리는 것은 살인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분노하는 일, 형제를 저주, 정죄하는 일, 이런 것들도 간접 살인으로 봐야 합니다.
  '옛사람에게 말한바'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옛 사람은 모세 이후에 구약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모세는 옛사람에게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선포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만 죽이지 않는 이상 자기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요, 전혀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생각들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들었으나' 그 당시에 일반 대중들은 성경을 거의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의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통해 교훈을 받아서 들어서 알뿐이었습니다. 성경은 직접 읽을 수가 없었기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보았으나'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어진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가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
  여기서 '너희가 들었으나'의 또 다른 견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다 그들의 전통이 섞여진 것은 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오리지널은 가르치지 않고 그들이 거기에 다른 해석을 가미해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잘못된 부분은 지적해 주고 계십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 다음에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은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이 전통의 말입니다.
  여기서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형사재판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레24:17절에 보면, 성경은 살인하면 반드시 죽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성경해석을 거절하시면서 올바른 율법해석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살인죄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보겠습니다.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씀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굉장한 선언입니다. '너희들이 구약 성경을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배웠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정도로 배웠는지 모르지만, 내가 이제 이 계명에 들어있는 참 뜻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가 계명을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주신 당 자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이 계명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이제 밝혀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유권해석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어떤 수준의 거룩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지금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씀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권위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절대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대 랍비들은 '율법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은 장차 올 세계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더 경건한 랍비들은 '만일 어떤 사람이 율법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지만 어떤 것은 예외이고, 모세가 자기 말을 한 것이라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심판을 받고 그의 영혼은 마땅히 멸망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율법에 대하여 모순을 말씀하시고 대신에 당신의 교훈을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권위입니다. /할/
  17절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모세의 율법은 결과론 적이었으나 예수님의 교훈은 살인죄에 이르게 된 동기, 즉 근본적인 원인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살인이란, 칼이나,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 살인이 아니라 살인의 동기, 곧 근본적인 원인을 중요시하셨습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은 살인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 가는 교훈하고 계십니다. 세 가지로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⑴'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
여기서 말하는 형제는 나 외에 모든 이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그리고 '노'란 마음의 분노를 말합니다.
  마음의 분노가 강하게 일어날 때에 사람을 죽을 수 있습니다. 창49:6절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라고 했고, 약1:20절에서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물론 의분이라는 것도 있긴 합니다만 이유 없이 분노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옳지 못한 분노, 악의에 찬 분노'를 말합니다. 헬라어에는 분노에 대한 두 가지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두모스'인데 '밀집에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것으로 빨리 타오르고 빨리 꺼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르게'라는 말인데 '뿌리깊은 분노, 정착된 분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않는 분노'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분노입니다. 대부분의 보복 살인자들이 이 분노를 가졌습니다. 이런 분을 가지고 있으면 자살해 죽이면서도 이를 갈고 죽습니다. 분노는 무섭습니다. 여기 '두모스'의 분노든지 '오르게'의 분노든지 우리에겐 유익이 안 됩니다. 
  '키 케고르'는 '노를 가리켜 아무 것도 바르게 할 수 없고, 분별력 있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고, '세네카'는 '분노는 짧은 광기'라고 했습니다. 한문으로 분노는 '나눠진 마음, 즉 정신분열증'과 같습니다. 분노는 미움과 시기에서 시작됩니다. 첫 살인자 가인은 아벨을 왜 죽였습니까? 시기, 미움 때문입니다.
  요일3: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심령을 살펴 모십니다. 하나님은 살인행위 그 자체보다도 살인의 동기는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살인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구를 정말 죽일 만큼 미워했다면 그것이 곧 살인이라고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가 이웃을 미워하지 않았는가? 주의 종도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 분노는 살인을 내포합니다. 여러분, 사소한 분노를 품지 맙시다. 죄는 죄를 낳고, 분노는 분노를 낳습니다. 작은 분노가 쌓이면 분노하는 체질이 됩니다. 공연히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살기 등등, 오기 등등할 사람을 보게 됩니다. 분을 일으키면 성령이 소멸되고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 누가 손해인가? 우리가 손해입니다. 엡4:26-27절에서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할/
  ⑵욕하는 자가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여기서 '라가라'고 하는 말은 '남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히브리인들의 욕설'인데 '쓸데없는 놈, 머리가 텅 비어 있는 놈'이라는 의미입니다.
  분노가 있다면 그 다음 단계로 나타나는 것이 욕이므로 욕도 역시 살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140:3절에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말이라도 다른 사람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며 힘을 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의 죄는 '공회에 잡히게 되는 죄목'이라고 했습니다. 공회는 산헤드린이라고 불리는데 유대인의 최고의 법정입니다. 공회의 결정은 대법원 판결과 같이 절대적이고 결정적입니다. 남을 멸시하는 것이 최고 법정재판을 받은 죄라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가리켜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란 말입니다. 인간과 인간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가 인간관계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인간관계 속에 삽니다. 인간관계가 바로 되어야 인정을 받습니다.
  이 인간관계를 깨는 조건이 무엇이냐? 여러 가지 있겠지만 상대방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모욕하는 것, 자존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존심 때문에 먹을 것도 안 먹고, 볼 것도 안 보고 돌아섭니다.
  남을 멸시하고 모욕하고 자존심을 깨뜨리는 것, 인간관계를 깨는 것이요, 이것이 분노를 일으켜 살인의 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예수님은 이 죄가 마땅히 공회에 잡히게 될 죄목이라고 했습니다. 남을 무시하지 맙시다. 사람은 남을 인정해 줄 때 자기도 인정을 받습니다. 남을 인정 안 한다는 것은 자기를 나타내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됩니다. 잠16: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할/
  ⑶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앞에서 '라가'라는 말이 '정신적인 것에 대한 모욕'이라면, '미련한 놈'이라는 말을 '전인격에 대한 모욕'입니다. 명예와 인격은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낙인찍어 버리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용이나 명예를 상하게 하는 자는 무엇보다 중한 심판인 지옥 불에 타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뚝하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싸움질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명예가 귀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 지옥은 '게헨나'인데 '게이' 흰놈, 즉 흰놈의 골짜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서남쪽에 있는 흰놈의 골짜기를 아하스 왕 때 불을 예배하는 이방신인 몰록에게 아이들을 태워 재물로 바치는 곳인데, 불이 그치지 않고 늘 타고 있는 곳입니다.
  요시아 왕이 새로운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그곳은 영원한 저주받는 곳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지옥의 불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22절을 상고해 봅시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를 품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으며 '라가라' 욕하는 자들을 법정 최고형으로 간다고 했으며 '미련한 자'라고 한 자는 지옥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지옥에 갈 사람들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깊은 의중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엄격한 율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각성시키고 우리들 모두가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질 자임을 자학시키고 있으며, 아무리해도 인간의 힘과 능력과 수단과 방법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에 의지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의도가 갈려있는 그런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아멘!/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남을 미워한 일, 분을 일으키게 한 일, 또 남의 인격을 전적으로 무시한 일이 있다면 '내가 살인죄를 지었구나' 하며 애통하며 회개할 일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회개하는 심령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씻음입니다. /믿/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살인 관을 잘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지금 본문에서 형제를 향해서 마음 속에 분노를 갖고 있는 그 자체가 살인하는 행위요, 형제를 향해서 말속에 분노를 담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행동 전에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먼저 주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칼을 들고 사람을 찔러서 피를 흘려야 살인인줄 알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손에 칼을 들기 전에 벌써 마음에 칼을 갈고 있는 사람도 살인한 자와 똑같이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라고 대상28:9절에서 말씀하셨고, 또 잠16:2절에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해 보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행동으로 살인하지 않았으니 나는 괜찮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마음의 깊은 곳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살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남을 미워하고 남을 증오하는 감정이 있으면 하나님은 벌써 살인한 사람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일서 3:15절에는 결론적으로 말씀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입니까? 누가 그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습니까? 멀리 있어도 우리 생각을 통찰하시고 우리의 감정을 읽으시는 하나님의 눈을 누가 피할 것입니까?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분노를 쌓아놓고 있는 사람을 살인자라고 규정하시는 말씀 앞에 우리는 두려워 떨면서 무릎을 꿇고 '아멘!' 해야 합니다. 분노가 살인이라고 하는 이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가를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자주 체험합니다. 또 자주 봅니다.
  미국의 문화를 흔히 분노의 문화라고 말을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화를 잘 냅니다. 감정이 폭발하면 앞뒤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제일 잘 하는 것이 총을 들고 나가는 것 아닙니까? 다 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총을 들고 나가서 난사를 함으로써 1년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살인입니다. 마음에 분노를 품은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멘!/
  살인에 대한 말씀을 해주신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살인하지 않은 방법을 두 가지로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계십니다. 23-25절까지입니다.

 

  ▶23-25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여기서 형제에 대하여 좀 알아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형제라는 말은 '아주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 눈을 뜨면 날마다 보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일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교인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형제라고 합니다.
  '맥스 루카도'라는 기독교 저술가는, 우리가 날마다 눈을 뜨고 보아야 하고 살을 비비고 살아야 하고 그래서 분노하기 쉽고 욕하기 쉽고 어떤 면에서는 서로 상처주기 쉬운 사람들을 일컬어서 '꼼짝없이 매인 사람들'이라는 재치 있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실 짜증이 나고 혈기가 나는 관계는 사돈에 팔촌도 안 되는 모르는 사람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들 형제라고 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때문에 짜증이 자주 납니다. 화가 자꾸 치밀어 오릅니다.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 자꾸만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형제에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형제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숨기고 있을 뿐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으면 오늘날 약 80% 정도의 부부가, 마음에 숨겨놓고 쌓아놓고 있는 분노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모든 문제의 뿌리가 그 분노 속에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해서 삭이지 못하는 분노가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볼 때마다 가끔 치밀어 오르는 화가 있습니다. 자식을 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하루에 몇 번씩 아내를 죽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몇 번씩 남편과 자녀를 죽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마음에 쌓여 있는 분노가 나중에 증오의 감정과 뒤섞여서 결국은 어떤 사람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감정,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이것은 남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죽입니다.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본문에서 '분노와 남에게 욕하고 남을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해결방법'입니다. /아멘!/
  23절은 대상이 '교회이고, 형제들'입니다. 25절은 그 대상이 '세상이고 원수들'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과 밖에서 형제들과 원수들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를 보여 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 다 다 불편할 관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두 긴급 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화해하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예배를 드리다가, 혹은 예배를 드리러 오다가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고 생각되면 예배드리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먼저 처리하고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또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지금 마음에 원한을 갖고 이를 갈고 있으면 먼저 사화하고 화해하고 와서 예배 드려야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은 제사만 지내면 어떤 죄든지 다 용서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스스로 회개하지 않고 가슴에 그대로 담고 있는 죄가 있으면 그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먼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마6:15)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를 안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형제를 향하여 분노를 갖고 있는 사람은 먼저 분노부터 처리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형제와 화목 하는 것입니다. 만약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를 품고 욕을 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안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외우는 주기도문을 보세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늘 우리가 고백하는 주기도문입니다. 먼저 용서해 주고 그 후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마18:1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눈에 보기는 화려한 예배의식이 아니라 정말 한 형제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귀한 제사'라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은 ⑴형제 화목이 하나님께 대한 제사(예배)보다 먼저 해결해야 될 일이요, ⑵또 형제화목이 제사응답과 직결되어 있음이요, ⑶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이 없을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다는 진리(요일4:20)를 교훈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주님이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죄와 불의를 미워하십시오, 그러나 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화목하십시오, 먼저 가서 화해하십시오,
  또한 세상에 나가서 송사하는 사람과 길에서 만날 때 '급히 사과하라'고 했습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서로가 어떤 문제로 인해 미워하고 분노하고 대적하는 관계를 가진 사람이 서로가 소송을 한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재판 날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길에서 만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재판하는 자리까지 가기 전에 먼저 사화하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분을 삭이고 서로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재판할 때까지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여나 우리가 이웃과 불화하고 미움과 시기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것을 풀어야 합니다. 형제와 화목하십시오, 용서하시고 관용하시고 사과합시다. /할/
  ▶그런데 이런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지키려면, ⑴자기 의를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해석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살인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인자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이 조용히 다가가서 내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공개해 놓고 보니 살인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수 있는 의라는 것은 나에게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아직도 자기는 남보다 선하다고, 그래도 의롭다고 하는 은근한 교만을 갖고 다니시는 분들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가 그만큼 의로워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겨 있는 도덕적 표준이 얼마나 높고 고상하고 완전한가를 모르기 때문에 즉 한 마디로 무지하기 때문에 스스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버리십시오. 우리가 계명을 바로 이해하면 계명은 살아나고 나는 철저히 죽어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내 놓을 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인정해야 합니다. /아멘!/
  ⑵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철저하게 의지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분을 믿고 그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됩니다.
  ⑶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하게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은 도우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는 보혜사입니다. 성령은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롬8: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할/

 

  ▶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의는 한 점의 불의라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로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살인범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분노, 경멸, 시기, 또 부채 등을 짊어진 죄인으로 반드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우리가 심판을 면하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감사감격한 일입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열심히 믿음으로 달려가십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