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54강) 선택받은 열두 제자! ③ (마 10:1-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06

(제54강)     선택받은 열두 제자! ③ (마 10:1-4)

 

  예수님의 12제자 속에는 세 그룹이 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입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입니다. 세 번째 그룹은 작은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롯유다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그룹에 속해 있는 8명의 제자들을 알아보겠습니다.

 

  ①빌립은 어떤 제자인가?
  그의 고향은 베드로와 같은 동향인으로 벳세다 출신입니다. 빌립은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학설에 의하면 1세기에 벳세다 고을의 통치자 중에는 빌립이라는 지도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당시 말을 타고 늠름하게 다니며 고을을 다스리는 모습을 빌립의 아버지가 보고 홀딱 반해 그의 이름을 빌립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가운데 유명한 신앙인의 이름을 짓는 것은 보통 상식적인 일인데, 빌립 집안은 상당히 자유적인 성향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 같습니다.


  ▶성경은 빌립에 대해서 4차례 소개하고 있습니다.
  ⑴요1:43-46절에서 빌립이 처음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1:43절에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전날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빌립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 이 명령에 무조건 그가 좇았습니다.
  빌립은 아주 결단력이 있는 제자였습니다. 신앙은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를 했습니다. 요1:45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여기서 빌립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었던 사람입니다. /할/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은 '도대체 나사렛에서 무슨 인물이 날 수 있겠는가?'하고 냉소해 버리자 다시 빌립은 '와 보라'고 확신 있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려면 확실한 구원관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요1장에 보면,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6절에 세례요한이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39절에 예수께서 '와 보라', 41절에 안드레가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46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종합해 보면 '오라!, 보라!, 말하라!'입니다. 즉 전도의 3가지 명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오라'는 말씀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라'는 말씀입니다. /할/ 신앙의 첫 번째 단계는 주께로 나와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생명의 구속 자이기 때문입니다. 행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예수께로 나와야 죄 사함을 받습니다. 예수께로 오는 자가 소망이 있습니다. 주께로 와야 치유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오라! 이것은 주님 자신의 초청입니다. /할/
  두 번째, '보라'는 말씀은, '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사43:19절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또 고후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세 번째, '말하라'는 말씀은, '이런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라'는 것입니다. /할/ 이렇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요4:29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 '와 보라'고 전도하였고, 그 말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여인의 진지하고 확신 있는 전도로 예수께로 나왔습니다.
  요4:29-30절에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할/
  ⑵요6:5-11절에 나오는 그 유명한 '벳세다 광야의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해 보시려고 '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십니다. 물론 예수님도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일 떡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이런 질문은 가끔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우리가 못할 것을 분명히 아십니다. 그러면서도 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그것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아멘입니까?/
  그러나 빌립은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하고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있어도 이 광야에 떡이 없어 절대 불가능합니다.'라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실 빌립은 수치와 계산의 명수입니다. 그러니까 과학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과학이 아닙니다. 신앙은 기적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립이 한마디로 믿음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서는 이처럼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립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인내로 양육시킵니다. 신앙은 훈련받으면서 자라게 됩니다. /믿/할/
  ⑶요12:20-22절에서도 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헬라 사람 몇 명이 빌립을 찾아와 예수님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이 사람들은 직접 예수님께 자기가 직접 인도한 것이 아니고 친구인 안드레에게 소개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상한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세밀한 사람 같기도 합니다.
  ⑷요14:8-11절에서도 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시고 나서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보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시자, 그때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하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네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고 하시며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빌립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뒤 어떤 일을 했습니까? 초대교회 문서에 의하면 그는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라오디게아, 골로새, 갈라디아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 자들에게 붙잡히어 몰매를 맞고 십자가를 지면서 매를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먼 훗날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져 로마에는 빌립을 기념하는 빌립 기념교회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할/

 

  ②바돌로매는 누구인가?
  흔히 나다나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고향은 갈릴리 '가나' 출신입니다. 여러분, '가나' 지방을 많이 들어 보셨지요? 그곳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첫 번째 기적을 베푸셨던 곳입니다. 그 유명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곳'입니다.
  나다나엘은 요1:45절 이하에 단 한 번 나옵니다. 친구 빌립이 예수님을 전도하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인물이 나오겠느냐?' 그러면서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의심 반, 진심 반으로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참 이스라엘이구나, 네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착하고 깨끗하고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의 단점을 보시지 않고 장점만 보시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본 받아야 합니다. /아멘!/
  요1:48절을 보면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하고 놀라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무화과나무가 정자나무입니다. 그래서 그 아래서 성경을 읽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은 성경은 읽는 사람이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두 가지로 평가했습니다. 하나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참'이라는 말은 진짜 이스라엘인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원래 '간사'라는 단어는 물고기를 낚기 위해 미끼를 쓸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간사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잘 가려야 합니다. /아멘!/


  ▶그의 신앙 관을 한번 보겠습니다.
  ⑴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⑵구세주임을 고백했습니다. 요1:49절에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장차 오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만 왕의 왕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할/
  그의 생애를 보면, 초대교회 1세기의 성경 외의 문서에 의하면, 그는 말년에 브랏지아에 내려가서 전도를 했고, 또 아르메니아 심지어 그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어느 날 곤봉으로 심히 맞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생명의 위기를 넘겼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석 달이 지나서 칼로 살 갓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매달린 채 머리를 떨어뜨리고 죽은 뒤 그의 시체는 자루에 넣어 묶은 후 바다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비참한 죽음으로 보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장렬한 순교입니다. 사도들은 모두 다 이렇게 장엄한 순교를 했습니다. /할/

 

  ③의심 많은 도마도 변화 받고 충성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의심이 많은 제자입니다. 그의 또 하나의 헬라어의 이름은 '디두모'입니다. 도마는 아람어입니다. 이름의 뜻은 '쌍둥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쌍둥이들의 심리는 서로 의심하는 심리입니다. 똑같은 옷, 똑 같은 대우를 해줘야 했는데 항상 자기는 '좀 못하게 대해 주지 않는가?'를 의심한다고 합니다.
  고향은 갈릴리 출신이라고 하지만 성경에는 그의 고향이 안 나옵니다. 사복음서에 제자들의 이름이 소개될 때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만 사복음서 중 유일하게 그의 기록은 요한복음에서만 취급하고 있습니다.
  ⑴요11:16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유대로 가시려할 때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는데 왜 또 그리고 가려 하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선생님만 위험한 곳에 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같이 가서 죽읍시다. 이런 의미로 말했다면 도마는 아주 용기 있는 의리의 사나이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하는 빈정대는 소리로 들을 수 있습니다.
  ⑵요14:2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시자 이때 도마가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의심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할/ 여기 도마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반쪽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도마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확실히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⑶요20장 이하에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 저녁 제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거기엔 도마만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자 '내가 만져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친절하게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그대에게 있을지어다.'고 하시면서 도마로 하여금 주님의 손을 만져보게 하시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게 하셨습니다. 도마는 그때 충격을 받고 '나의 주시여,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있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의심은 불 신앙입니다. 약고보는 약1:6-8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페르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에데스'라고 하는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어떤 원주민의 창에 찔려 죽음을 당하면서 마지막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만을 예배합니다.' /할/

 

  ④세리 마태도 성경을 기록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패오입니다. 그의 처음 이름은 레위입니다. 아마도 레위지파인 것 같습니다. 막2:14절을 보면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아마도 마태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지어준 것 같습니다. 그의 직업이 세리입니다. 당시 동족들에게 매국노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 인신매매 단이나 마약 밀매단과 같이 취급하는 직업입니다.
  당시 죄인, 창녀, 이방인, 세리가 지나가면 침을 뱉고 소금을 뿌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풍속이 있습니다. 왜 소금을 뿌리는 지 아시지요?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소금을 뿌립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름 앞에 돈도, 직업도, 그의 미래도 모두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후에 마태복음의 성경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할/ 경멸받는 세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사복음서 중에 첫째 권입니다. 그만큼 권위가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유대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말년에 에디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했고, 거기에서 애굽으로 향해서 돌아오는 도중에 박해 자들을 만나 창에 찔려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⑤작은 야고보입니다.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이 상당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세 사람을 뽑는다면, ⑴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수석제자입니다. 그는 헤롯 왕에 의해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한 제자입니다.
  ⑵행15:13절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나옵니다. 초대교회 감독까지 했습니다.
  ⑶작은 야고보입니다. 제 삼의 야고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라고 소개하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소개하는 것은 야고보를 분별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를 가리켜 '작은 야고보'라고 합니다. 키가 작았나 봅니다. 사복음서에서 12제자들을 소개할 때 빼놓고는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과 대화한 기록이 하나도 없습니다.
  행1:13절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름뿐인 이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도 예수님의 승천도 목격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초대교회 문서에 보면 이 사람은 열심당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민족 독립 운동의 투사'로 있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열심 당에서 나왔습니다.
  유대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작은 야고보를 가리켜서 '그는 약대의 무릎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묵묵히 기도한 제자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오는 핍박 자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탑에서 아래로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아서 돌과 몽둥이를 때렸고, 그래도 죽지 않아서 톱으로 짤라 죽였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할/

 

  ⑥다대오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입니다.
  이 제자를 연구할 때 가장 힘든 제자입니다. 이유는 인물 자체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이 제자의 기록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그를 소개할 때 세 가지로 나옵니다.
  ⑴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열두 제자를 소개할 때 이 사람을 '다대오'라고만 했습니다.
  ⑵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다대오라는 이름 대신 '유다'라고 했습니다.
  ⑶그런데 행1:13절에는 다락방에 들어가 기도하던 제자의 명단이 기록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다대오를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부릅니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사람의 본명은 유다이고, 별명은 다대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롯유다 때문에 이 사람의 이름이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제자의 기록이 성경에 단 한 곳에 만 있습니다.
  요14:22절에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빨리 세상에 알리셔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선교적 관심에서 질문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만 메시아로 알게 하지 마시고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해서 구원받게 해야 될 것을 염려해서 말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제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긴 자입니다.
  그의 생애는 학설에 의하면, 한때 나다나엘과 짝을 이뤄 시리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특히 아르메니아에서 복음의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는 시리아에서 핍박 자들에 의해 칼을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⑦가나안 사람 시몬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거의 성경에 자료가 없는 제자가 바로 이 사람 시몬입니다. 제자들의 이름은 소개할 때 이 사람을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마10:4절에서는 '가나안 인 시몬'이라고 했고, 행1:13절에서는 '셀롯인이라 하는 시몬'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 '셀롯인'은, 성경 아랫부분에 그 해석을 보면 '열심당원'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작은 야고보와 같이 '열심 당원'에 속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열심당원은 대단한 민족 애국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마사다'라는 관광지가 있습니다. 사해 바다를 따라서 내려가면 서남쪽에 위치한 높은 언덕 위에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랬지만 돌아가신 후에도 유대인들은 로마의 강압적인 정치에 시달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이 예언하신 것처럼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파괴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은 로마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민족적인 수난을 당하면서 유대 민족들은 힘이 연약하고 세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심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이 '마사다'라는 높은 곳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곳은 헤롯 궁전의 잔재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 피난처가 되었고, 비가 오면 빗물을 담아서 연못처럼 모아둘 수 있는 큰못이 있어 물의 공급처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로마인들과 장엄하게 싸웁니다.
  그런데 로마 군병들이 끊임없이 밀려 올라와 이제는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천여 명이었습니다. '우리는 로마인들에게 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죽이고 집단 자살을 한 곳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서약을 할 때 이 마사다에서 행한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마사다는 결코 다시는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자를 관광 용품에 다 찍어 넣었답니다. 바로 이 마사다 언덕에서 끝까지 투쟁을 했던 당파가 바로 열심당원들입니다.

 

  ⑧가장 불쌍한 배신자 가롯 유다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은전 30냥을 받고 팔아먹은 배신자입니다. 가롯유다의 별명은 많습니다. '강도제자, 주님을 판 제자, 수전노 제자, 위선자, 구원받지 못한 제자'라고 표현해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롯유다에 대해서 '처음에는 잘 믿다가 나중에 타락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박태선 장로도 처음에는 잘 믿었는데 타락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많은 학자들이 '그들은 처음에는 잘 믿었다.'고 주장합니다.
  요6:64절 이하에 보면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가롯유다를 가리켜 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가롯'은 그의 고향이며, 유다는 그의 이름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양한다.'는 의미인데, 그는 그와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가롯유다 이전에는 유다라는 이름을 굉장히 선호했는데, 가롯유다 뒤 그 이름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가롯유다는 거짓 인도주의자 행세를 했습니다. 요12:5절에 마리아가 옥합을 깨어 드릴 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하니, 성경의 대답은 6절에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단에 사로 잡혔던 자입니다. 요13:2절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그의 죽음은 자살입니다. 배가 터져 창자가 다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할/

 

  ▶가롯 유다를 다시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⑴가롯 출신으로 늘 '단도를 휴대했다.'는 그는 민족해방 운동가로 예수님을 혁명의 우두머리로 삼아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예수님을 세계의 왕으로 삼으려는 야무진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에 실망하여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⑵가롯 유다는 12사도 중 회계를 맡았습니다. 요12:6절에 '그는 돈궤를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2장을 보면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부을 때,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 수 있겠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도적질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⑶그는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예수께로부터 그의 죄상을 지목 받았습니다. 주님은 성만찬 석상에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마26:23)고 그를 지목했고,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라'(요13:26)고 했으며, 또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로라'(요13:26)고 까지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한 조각을 가롯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요13:27절에 보면, 가롯 유다가 그것을 받자마자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고 한 성경을 이루게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⑷마26장을 보면, 가롯 유다는 만찬석상에서 나간 후 곧 유대 교권주의자들에게 달려가서 은30냥을 받기로 하고 예수님을 잡아주는 앞잡이가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시고 주님 앞에 다가와 입맞춤으로 예수를 잡는 암호로 삼았습니다.
  ⑸그는 후회는 했으나 회개는 없었습니다. 마27장에 예수께서 결박을 당하여 빌라고 법정으로 끌려가 심문 당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은30을 도로 돌려주며 말하기를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노라' 하고 후회했으나, 그는 결국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가롯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스스로 목 매여 죽었습니다(마27:5).
  ⑹그는 결국 천고에 불명예와 저주의 표본이 되어 버렸습니다. '스승을 판자, 예수님을 버린 자'로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비참했습니다.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오는 최후를 남겼습니다. /할/
  행1:18-19절에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 밭이라는 뜻이라' 
  가롯 유다의 죽음과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짐은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했는데 유다가 예수를 팔고 난 뒤, 심문 당하는 것을 보니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은 30냥을 쥐고 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잠시 실수해서 예수를 팔았으니 이 돈을 도로 받고 예수를 놓아주시오' 하자 그들이 말하기를 '네가 그 피 값을 당하라. 우리는 책임지지 않는다. 한번 팔았으면 끝난 것이지 또 무르려고 하느냐!'고 하므로 가롯 유다는 너무 괴로워서 그 돈을 성전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이 돈은 사람의 피 값인데 성전 고에 넣어 두면 안 된다'고 하며 돈을 꺼내 그 돈으로 나그네의 묘지를 산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개 같은 자의 돈은 성전 고에 넣어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판돈이니 더러운 돈이라 하여 그 돈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을 사 가지고 거기다 죽은 사람들을 묻어 주는 공동묘지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 밭은 '피밭, 불의의 밭'이라고 하는 아람 방언으로 '아겔다마'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것도 이미 예언된 내용입니다.
  행1장에서 보면 가롯 유다의 죽음이 마태복음의 기록과 조금은 다릅니다.
  마27:5절에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고 했으나, 행1:18절은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사건이 다르게 표현됐습니까? 마태복음의 기록은 전반부의 기록이고 사도행전의 기록은 사건의 후반부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유다가 죽은 곳은 낭떠러지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목매어 자살한 뒤에 목에 매였던 줄이 끊어지면서 떨어져 돌에 창자가 부딪쳐 터져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유다의 죽음의 방법을 기록한 것이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죽음의 비참한 결과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가롯 유다를 보면서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⑴하나님을 절대로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⑵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해서도 안 됩니다. ⑶하나님의 소명과 직분을 포기하는 것도 안 됩니다. ⑷우리 모두 충성합시다. /할/
  열두 제자를 배우면서 가롯 유다만 빼고 다 변화를 받아 주의 바른 제자의 길을 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톰 해리슨'이라는 사람이 쓴 'I am OK, You are OK'라는 책에 보면, 사람이 타고난 본성을 바꾸기가 참 어렵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바뀐다거나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힘이 듭니다. 그런데, 톰 해리슨은 그의 책에서 '세 가지 연유가 있으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주 어려운 고통을 당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모든 지식과 의지를 다 버릴 정도의 환난이나 고난을 당하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떤 경우에 사람이 달라지느냐 하면, 소망이 끊어질 때라고 했습니다. 내 지식이나 내 생각으로 볼 때에 '이제는 다 끝났다' 싶을 때, 인간의 능력과 그 의지의 한계를 넘어설 때에야말로 그 절망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생의 새로운 궤도 수정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새로운 것을 찾았을 때, 내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내가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을 때, '아, 이것이다'하고 감격할 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의 없는 줄 알았는데, 사랑이 있다. 나는 버림받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고 계셨다.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나를 소중하게 쓰시고 계신다.' 이 위대한 역사를 발견하는 순간에 사람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할/
  나다나엘은 '주님께서는 벌써 나를 아시고 계셨다. 내 작은 진실까지도 다 아시고 계셨다.' 그 순간에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다나엘 뿐만이 아니고 주님의 열두 제자가 다 주의 말씀에 변화를 받아 순교하면서까지 사명을 잘 감당한 주의 거룩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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