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56강) 지혜롭고 순결 하라! (마 10:16-2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09

(제56강)       지혜롭고 순결 하라! (마 10:16-23)

 

  본문도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전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핍박하고 무시하고 반대하는 일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일은 보통 강자가 약자를 지배합니다. 힘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지배합니다. 권력을 쥔 자가 돈 있는 자가, 배운 자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세계만은 약자가 강자를 정복하고 지배합니다. 다만 복음 안에서 약자가 사랑으로써 강자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나 성도를 양으로 비유하셨고, 세상을 이리로 비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원수 마귀가 공중의 권세를 잡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볼 때에 굶주린 이리 떼와 같이 헤치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우는 사자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세상에 나가 승리하려면 뱀같이 지혜로워야 하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제목 소개!▶

 

  ▶16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우리가 아는 대로 뱀과 비둘기는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동물입니다. 성경에는 뱀은 항상 혐오의 대상으로 나옵니다. 그 간교함, 기민성, 예측할 수 없는 돌발성 때문에 불길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반면에 비둘기는 순결, 온순, 순종, 평화의 상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러한 느낌과 생각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 갈 때 뱀 같은 기민성, 신중함, 분별력, 굳건한 의지, 사태를 파악하는 지혜가 필요한 동시에 비둘기 같은 순수함과 부드러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심리학에서도 참으로 성숙한 사람은 남성적인 면(강하고 굳센 의지)과 여성적인 면(부드러운 면과 따뜻한 정)의 상반된 성품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것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생활 양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 때 한마디로 정직하고, 순결하고, 순진해야 합니다. 타협이나 불순함이 없는 사람, 교활하거나 오염되어 있지 않은 사람, 비둘기가 주는 순결한 인상처럼 평화의 상징이어야 합니다. /할/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감동적인 사람은 영웅이 아니고 순결한 사람입니다. 순결이 능력입니다. 순결,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변함 없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바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해야 합니다. 정말 깨끗하고 순결하면서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 바보 취급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눈도 마음도 반짝거립니다. 사심이 없습니다. 총명합니다. 할 말 안 할 말 참 잘 가립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조심합니다. 혀를 제어합니다. 그 반짝이는 지혜로, 깨끗한 마음으로 언제나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줍니다. 편안하게 해줍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우리의 활동 무대인 이 세상은 이리떼들이 득실거리는 그런 세상으로 비유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을 양으로 비유합니다.
  시23편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로, 성도는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양은 온유하고 순종을 잘하는 동물로 상징합니다. 양은 구약의 제물로 많이 쓰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가리켜 단번에 속죄양으로 비유하시기를(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성도를 양으로, 세상을 이리로 비유했습니다. 양들의 최대의 적은 이리 떼입니다. 이리 떼는 숨어서 양들의 동태를 살핍니다. 자기의 모습을 잘 나타내지 않습니다. 사탄의 세력들은 숨어서 활동하는 것이 특기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없는 틈을 타서 또는 밤을 이용하여 양들을 순식간에 공격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습이 굶주린 이리 떼들이 숨어서 양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어떤 인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환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⑴지혜가 부족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좀 '띨띨'하다는 것입니다. 풀도 무엇이 독초인지 꽃인지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양은 자기 집을 절대로 혼자 못 찾아온답니다. 길눈이 없는 맹한 동물 좀 멍청한 놈입니다.
  ⑵약합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모든 동물을 보면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보조 기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말은 굉장히 빨리 달립니다. 소는 뿔이나 뒷발질에 힘이 있습니다. 또 염소는 뿔에 힘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없지만 스컹크 같은 것은 냄새를 풍겨서 적을 멀리 떠나나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각자 특기가 있습니다. 어떤 놈은 잘 달리고 어떤 놈은 힘이 있고, 또 어떤 놈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보호색도 없고, 힘도 없고, 그렇다고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양은 언제든지 목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양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양으로 부르셨습니다. 저나 여러분은 양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목자가 되시는 주님이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자를 잘 따르면 우리의 삶은 부요롭습니다. 시23: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양에 대한 개념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양에 대한 개념을 우리보다 조금 더 다르게 생각합니다. 양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라는 의미로 압니다. 제물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양이 사람을 대신해 죽음으로서 사람의 죄를 대속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을 살게 하는데 양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너는 가서 죽고 너 때문에 세상이 살도록 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종교학에서 보면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구분하는 데는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고등종교는 줄줄 아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하등종교는 달라고 하기만 하지 줄줄 모릅니다. 점쟁이에게 가서 요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라고 얘기해 줍니까? 아닙니다. 그저 어디 가야 복 받는다는 것만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미신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이 관심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⑴세상이라는 것은 이리 떼들이 득실거리는 악한 곳이지만, 이 세상은 결코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포기하거나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산으로 도망가면 안 되고 교회 안에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이리 가운데 들어가서 자신을 죽이고 사람의 힘으로 그들을 전도해야 합니다.
  ⑵양은 이리 가운데 보내는 예수님의 심정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는 부모의 마음에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모든 것이 통제를 받습니다. 기압도 있고, 팟다도 있습니다. 고된 훈련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걱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면서 두 가지를 당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
  ▶하나는 '지혜로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의 상징으로 뱀을 비유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뱀을 지혜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뱀은 위험이 다가올 때는 잘 피합니다.
  지금은 뱀도 사람들이 다 잡아먹어서 그리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렸을 때 만에도, 산에도 들에도 뱀 천지입니다. 그래서 산의 숲 속을 갈 때도 들판을 갈 때도 행여나 뱀을 밟을까 걱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뱀을 밟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뱀이 얼마나 지혜가 많은지 잘 피합니다.
  뱀은 한마디로 배로 기어다니면서도 못 가는 데가 없습니다. 뱀은 무척 조심성 있고 신중합니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더 능한 것이 뱀입니다. 특별히 뱀은 아주 총명하고 똑똑한 것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도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지혜란 '사려가 깊은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물론 지혜에는 위로부터 임한 지혜가 있고, 세상으로부터 배워서 얻어진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자는 능력자라고 해서 뽑아서 쓰곤 합니다.
  '지혜롭다'는 말의 기본 개념은 '적당할 때에 적당한 장소에서 적당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혜롭다는 말은 눈치가 있고, 때를 잘 압니다. 어떤 사람은 눈치가 없어서 한말을 안 하고 안 해야 될 말을 막 합니다.
  또 때를 몰라서 고통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축복의 때, 봉사의 때, 훈련의 때가 있습니다. 때를 잘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또 장소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자기의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자기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장소에서 적당한 말과 적당한 행동을 하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참 지혜로우셨습니다. '누구에게 세금을 바칠까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을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드리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또 '이 여자를 돌로 쳐죽일까요?' 군중들이 물었을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지혜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혜로운 말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지혜로워지라고 했습니다. ▶뱀의 지혜로운 전도자가 됩시다.
  ⑴뱀은 낮고 조용하게 접근합니다.
뱀은 조용히, 낮은 자세로 사냥감을 향해 다가갑니다. 뱀이 사냥할 때에 그 목표를 여럿으로 분산하지 않습니다. 한번에 하나씩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전진합니다. 이렇게 전진할 때에 조용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낮은 자세로 나아갑니다. 뱀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시끄럽지 않습니다. 조용히 자기가 찍은 목표를 향해 전진합니다.
  뱀이 하와에게 접근할 때에 아주 친절하게 접근합니다. 하와는 뱀에 대해 조금도 경계를 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시기를 노리는 것입니다. 성도의 전도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의 전도접근도 낮은 자세로, 조용해야 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하도록 해야 합니다. /할/
  ⑵뱀은 한번 물면 다시 놓는 법이 없습니다. 뱀은 사냥감을 물면, 그 이빨을 통해 독을 주입합니다. 그러면 조용해집니다. 아무리 발버둥치던 것도 독이 들어가니 그만 조용해져 버립니다.
  우리 성도는 불신자에게 사랑의 약을 주입시켜야 합니다. 그 사랑을 맛보면, 그 영혼은 사랑의 그물에서 달아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 안 믿으려고 발버둥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그만 힘을 잃고 머리를 숙입니다. 사탄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은 독약입니다. 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은 유일한 치료제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를 만나서 그들의 심령에 다른 것을 집어넣어 주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으로 인한 죄사함.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집어넣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죄로 찌들어 죄를 먹고 마시며 사는 영혼이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의 심령에 주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전도 대상자의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을 주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순조로워집니다.
  ⑶뱀은 천천히 소화시킵니다. 뱀은 아무리 큰 사냥감이라고 해도 통째로 삼키지 찢어 먹는다든지 혹은 잘라서 먹지 못합니다. 그리고서는 천천히 소화시켜 나갑니다. 거기에는 더러운 것도 있습니다. 딱딱한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모든 것을 삼키고서는 천천히 소화시켜 나갑니다.
  우리 성도는 태신자를 통째로 안아야 합니다. 쓴 것도 있고, 단것도 있습니다. 전도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너무 기쁜 점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자신의 가슴에 담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들고, 딱딱한 것도 천천히 소화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한 생명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렇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전도는 한번에 하고 치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에 해야 할 일입니다. 마치 뱀이 조급하게 서둘지 않고 천천히 소화시켜 나가듯이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을 천천히,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아멘!/
  ▶두 번째는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고 하십니다. 노아 홍수 때에 물이 어느 정도 줄었는지 궁금해서 노아는 비둘기와 까마귀를 내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까마귀는 안 돌아오고 비둘기는 돌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단지 하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까마귀는 사람의 시체 등 썩은 것을 먹고사니까 먹을 것이 많아 돌아오지 않는 것 같고 비둘기는 깨끗한 동물이니 그저 돌아오지 않았나 추측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 발붙이고 살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도 순결한 삶을 살기를 힘쓰는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순결은 교회의 생명이고 성도의 생명입니다. 비둘기는 순결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순결의 영, 비둘기와 같은 성령을 달라고 했습니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또한 희생제물을 드려지는 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 때 한마디로 정직하고, 순결하고, 순진해야 합니다. 타협이나 불순함이 없는 사람, 교활하거나 오염되어 있지 않은 사람, 비둘기가 주는 순결한 인상처럼 평화의 상징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제일 감동적인 사람은 영웅이 아니고 순결한 사람입니다. 순결히 바로 능력입니다. 정부도 대통령도 정치인도 순결히 최고입니다. 부정이 있으면 동네북입니다. 어떤 인물이 아름답습니까? 팔방미인이 아니라도 순결한 여인입니다. 부부관계도 이 순결을 잃어버리면 파산입니다.
  믿음관계는 순결입니다. 어떤 남자가 멋있는 남자입니까? 한 여자만 우직스럽게 사랑한 사람, 즉 나 같은 사람입니다. 한 하나님만을 섬기는 여자, 한 교회를 위해 충성하는 남자, 얼마나 든든한 일꾼입니까? 우리 모두 그런 비둘기같이 순결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생활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생활의 모습에서 예수가 증거되고 하나님이 높여져야 합니다. /믿/


  ▶17절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사람들을 삼가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사람입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되는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도 있습니다.
  렘17:9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외모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항상 조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되고 가장 비밀을 보장해 주어야 할 사람이 비밀을 폭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조심할 것은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을 삼가라'고 했는데 그 뜻이 무엇인가?
  ⑴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람은 절대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한 학자들이 있습니다.
  ⑵복음을 핍박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경계하는 자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의 예수님이 조심하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탄에 억눌려 있는 사탄의 종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네 부류로 '17절, 18절, 21절,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7절에서는 '종교적으로 조심할 대상'을 말씀하고, 18절에서는 '사회적인 집단에서 조심해야 할 대상'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①17절에서 '종교적으로 조심해야 할 대상'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가르칩니다. 그들은 메시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사단의 앞잡이들입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얼마나 당했습니까? 바울도 이들에게 엄청나게 당했습니다.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핍박이 구체적인 유형입니다. 당시 유대교를 믿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39대씩의 매질을 했습니다. 바울은 고후11:24-25절에서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씩이나 맞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곤장을 때리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큰 주걱 같은 것으로 때리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채찍을 가죽 끝에 쇳덩어리를 달아 살이 찍히게 되어있습니다. 이 매를 바울은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다가 이런 종교지도자들에게 끌려가 핍박을 받을 수 있다고 그들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18절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②정치적인 지도자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총독, 임금은 당시의 정치지도자들입니다. 사실 잘못된 정치와 정치가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당했습니까?
  정치는 중요한 것이지만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기보다는 권력을 행사하는 조직으로 변하기 쉬운 속성을 가기고 있는 것이 세속정치입니다. 정치인들은 좋은 말만 다 골라서 합니다. 그러나 정작 당리당략에 어떤 손해가 되면 국민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치구조가 잘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고 가족이 흩어지고 평생은 불행하게 살며 심지어는 조국을 잃어버리라고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참된 정치란 인간의 정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정치를 만들려고 할 때 왕을 세우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왕을 세워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인간의 정치는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부패를 낫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정복에 끌려가 고난을 당하고 순교하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외정 때 신사참배 거부로 많은 순교자들을 냈습니다.
  그 대표적인 목사님이 주기철목사님입니다. 재암리 교회는 6.25 때 공산당들이 얼마나 교회를 핍박했고 주의 종들을 죽였습니까?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종교지도자들이 붙잡아 때리고 협박한 후에 세상 임금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도 먼저 종교지도자들이 심문했습니다. 그 다음에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끌려가셔서 심문을 당했습니다.
  오늘 파송을 받는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에 가롯유다만 빼고 거의가 순교를 당했는데 이런 식으로 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순교자의 피를 통하여 더더욱 증거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게 될 대 그것 때문에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는 사건 때문에 간수장과 그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또 바울사도가 가이사 황실에 끌려가서 아그립바 벨릭스 총독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수난을 당할 때 그것을 정치적 고통이 아니라 전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파송하는 제자들에게 비록 너희가 정치적인 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구약에 요셉은 정치가가 아니라 신앙 가입니다. 그가 고난을 복음증거의 기회로 삼았더니 하나님이 정치적으로 높은 위치에까지 올라갔습니다.

 

  ▶19-20절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한마디로 핍박을 받을 때, 세속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이나 투쟁으로 해서는 안 되며 정치적으로 고난을 겪을 때 돈이나 어떤 세상 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고난을 피하지 말라는 것이 성격의 원리입니다.
  본문의 바른 의미는 핍박 자들이 너희를 어떻게 심문을 하더라도 너희는 염려하지 말고 성령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라,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최선의 대답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핍박 자들 앞에서도 전도할 때 불신자들 앞에서도 주의 성령이 우리의 입술을 주장해 주십니다.
  요14: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한국 초대교회 김익두 목사님은 한국강단에 붙을 붙인 종입니다. 그분이 서당 훈장님을 전도했습니다. 전도를 받은 서당훈장이 '여보시오, 하나님이 어디 있단 말이요, 하나님이 참으로 있다면 왜 악한 놈들 대가리를 때리지 왜 죄 없는 나무에나 돌에다가 벼락을 내린단 말이요' 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김익두는 속으로 대답할 말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훈장에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왜 훈장님은 항상 학생들 대가리만 때립니까? 자리바닥을 때리든지, 책상을 때리든지 에끼 이놈들하고 야단을 치시지' 그러자 훈장이 '그거야 훈장 위업을 보이기 위해서' 그런 다는 것입니다.
  그 때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자비하신 하나님은 그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바위 나무를 치는 것이지 죄인의 머리를 다친다고 하면 세상에서 상한 놈 어디 하나가 있겠소!' 하자 크게 깨닫고 훈장도 예수님 믿었다고 합니다. /할/
  ▶무디는 무식합니다. 당시 의도적으로 무디를 골탕 먹여 매장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식한 무디에게 아주 논리적인 질문 공세를 가해서 코를 납작하게 하겠다고 자신한 사람이 무디에게 '당신은 성경을 다 믿으냐?'고 하자 '물론 다 믿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다 알고 믿느냐?' '성경을 다 모르고 믿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믿는 것을 보니 역시 소문대로 무식하구만,'
  이때 무디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왔습니다. '그럼 당신은 이 건물 안에 들어올 때 철근이 몇 개 들어가 있는지 알고 들어왔습니까?' '다 모르고 들어왔습니다.' '이 빌딩에 철근이 몇 개나 들었는지 모르고 당신이 들어올 수 있단 말이오' '물론 건축에 하자가 없이 잘 지었을 것을 믿고 들어왔습니다.' '봐라 당신도 다 모르고 믿지를 않느냐? 다 알고 누가 믿겠느냐? 나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믿는다.'고 했더니 그 사람 꼼짝 못하고 항복했습니다.

 

  ▶21절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③가정 안에서 조심해야 대상을 '믿지 않는 가족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핍박은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옵니다. 그러니까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부모가 다른 것을 다 이해하는데 유독 예수님을 믿는 문제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형제도, 남편도, 가까운 이웃이 복음의 원수가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22절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④세상 적으로 조심해야 할 대상은 '이 모든 사람'입니다.
여기서 '이 모든 사람'이란 사회의 모든 계층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세상에서 환영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핍박받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네 가지 경우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22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핍박을 받지만 그러나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사랑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승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중'이라는 말의 헬라어원 적인 뜻은 '끝, 결론, 마침, 목표'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표준 새 번역 성경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개역 판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할/
  ▶18세기 유럽대륙을 정복한 바 있는 나폴레옹이 사관학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사관학교의 교관이 사관생도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제군들, 똑같은 병력, 똑같은 지형 조건에서 똑같은 무기를 가진 두 군대가 싸운다고 하자. 과연 어느 편이 이길 것 같은가?' 이 때에 나폴레옹이 일어나서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5분까지 견디는 자가 이길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자가 이길 것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인내로써 결정됩니다.'
  이 대답은 오늘날까지 유명하게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야 이기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견디는 자가 이길 것입니다. /할/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요,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나선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끝까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입니다. 핍박을 받지만, 그러나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사랑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에게는 구원과 승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견디다'라는 말은 결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적극적이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단순히 참고 버틴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견딘다는 말의 진정한 뜻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단순히 어느 사람의 말로나 다른 것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12:2-3절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견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절에서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빌라도 법정에 서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여기에서 견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인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엄청난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괴로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굴욕을 당하셨지만 결코 당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저주를 받으셨지만 결코 낙심치 않으셨습니다.
  욕을 당해도 맞받아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원수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견딘다'는 말의 뜻입니다. /할/
  '견딘다'는 것은 '많은 고통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고통을 면한다는 것도 아니요, 고통을 피한다는 것도 아니요, 달리 가해자를 죽여 버린다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 가운데 있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맡기신 사명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면서 만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있든 감옥밖에 있든 가리지 않고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주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했습니다. 끝까지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아멘!/ 우리가 이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믿/

 

  ▶23절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이 동네에서 핍박이 심하면 일할 수가 없으니 일할 곳으로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이 동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면 저 동네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온 천하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인자가 오리라' 주님의 재림의 약속입니다. 이 재림의 신앙을 가지고 나가면 우리는 어떤 일도 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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