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59강) 요한의 질문과 주님의 답변! (마 11:1-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12

(제59강)     요한의 질문과 주님의 답변! (마 11:1-6)

 

  이런 웃기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강에 국회의원하고 수녀가 함께 빠졌습니다. 119 긴급 구조대가 출동을 하더니 한강에 뛰어 들어가 국회의원만 끄집어 내 왔습니다. 그러자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왜 국회의원만 사람이냐, 수녀는 왜 버리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구조대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회의원을 그냥 한강에 놔두면 한강 물이 오염될까 봐 건져 내왔다'고 말하더랍니다.
  이 세상은 힘으로 개혁으로 혁명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으면 히틀러가. 나폴레옹이, 무솔리니가, 일본 천황이, 김일성이 이미 다 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변화는 힘도 아니고 무기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섬김과 십자가의 희생의 정신으로 비로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아멘!/ ◀제목 소개!▶

 

  10장은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선택하여 자기를 대신하여 세상에 복음전파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환영받는 길이 아니라, 고난과 핍박이 깔려 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제자의 삶은 고난과 핍박의 삶이요, 전투적인 삶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 것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시면서, 하물며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시는 세밀한 간섭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알아서 필요할 때에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11장으로 넘어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 동네, 저 동네로, 복음사역에 직접 뛰신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팔래그람(동그라미) 표시가 앞장 40절에서 시작되어 본문 1절에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지로 10장과 1절이 자연스럽게 글의 흐름이 연결됩니다. 1절은 앞에 10장에 그대로 연결 시켜도 관계가 없으나 편리상 현재와 같이 장, 절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11장에서 나누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장, 절을 누가 언제 나누었는가를 참고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성경의 장을 구분한 것은 주후 1248년에 '휴고'라는 사람이 하였다고 합니다. 절은 1551년 '라벗 스텐븐스'가 신약의 절수를 나누었고, 그 후 1661년에 유대인 '아다야쓰'라는 사람이 구약의 절수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은 10장과 연결된 부분이고, 2-6절은 세례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1절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리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마치시고' 12제자를 파송하기 위해 주셨던 교육을 마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이 이런 길이다. 그러니 이렇게 걸어가라'는 교훈을 마치시고는 직접 전도하시려고 그곳을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교육시킨 장소는 가버나움입니다. '저희 여러 동네'는 당시 예수님의 전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갈릴리 사람들과 연결시켜 갈릴리 주변의 성읍들을 가리킵니다.
  막6:30절을 보면 이 전도 여행을 끝마친 후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다시 모여 자신들이 행하고 가르친 모든 일들을 주님께 보고한 장면이 나옵니다.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가르친다는 것과 전도한다는 것은 여기서 분명히 구별해 놓으셨습니다. 즉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모여드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교훈을 전하신 한 것'이고, '전도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나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교역자들의 주 임무가 성도들을 교육시키는 것과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2-3절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요한이 지금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그는 4:12절에서 잡혔습니다. 왜 옥에 갇혔습니까? 14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14:3-4절에 보면 헤롯왕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을 지적하다가 옥에 갇혔던 것입니다. 이는 있을 수 없는 부정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일을 맹렬하게 질타했습니다.
  왕이 그러한 일을 행하게 되면 백성들은 무엇을 배우며 어떻게 행동할지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례 요한을 헤롯이 반가워할 리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게 된 이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세례 요한은 회개를 외치며 심판을 이야기했는데 그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커다란 무리를 이루게 되자 헤롯은 정치적인 소요가 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중심에 서 있던 세례 요한을 잡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즉 세례 요한으로 인해 정치적인 요소가 일어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미리 그를 잡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지적하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는 행동하는 양심이었습니다. 10:2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잠깐 세례요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얼마든지 일신상의 안일과 평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었으나 일찍이 사명을 깨닫고 세상의 명예와 현세 지위를 다 버리고 사명 자로써 영력을 얻기 위해 저 유대 광야에 나가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가면서 신령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를 가리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극찬하셨습니다. 그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나 정치지도자들에게 서슴없이 '독사의 자식들아' 외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불과 같았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 세례요한이 어느 날 예수님의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탄성을 질렀고, 자신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진정 따라야 할 분은 바로 저분이라'며 자기 제자들은 다 예수님께 양도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그에게 세례 받기를 원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세례를 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말씀하실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때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는 것이 보였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할/
  이 모든 것을 체험하고 알고 있던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런데 보십시다. 그런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바리세인이나 서기관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받았던 그가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요한이 감옥에서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이 정말 메시아이십니까? 정말 하나님이 약속한 그 메시아입니까? 당신이 진짜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까?'
  한마디로 세례요한에게 신앙의 의심과 갈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하늘의 음성을 들었고,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던 것을 보았던 세례요한에게도 이런 의심이 있었다면 지극히 평범한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에 대해 한두 번 의심을 갖는 것을 오히려 당연한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잘 믿다가도 어느 순간에 신앙의 침체에 신앙의 수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지만 속에서는 '내가 믿는 것이 사실인가? 정말 천국이 있는 것인가?' 한두 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영원히 의심 없이 잘 믿는 사람은 이 지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목사 건, 장로 건, 권사 건, 집사 건, 성령을 받았던 안 받았던 우리는 인간적인 의심을 한두 번씩 하게 됩니다. 세례요한도 의심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처럼 위대했던 세례요한이 이런 의심에 덫에 걸리게 되었을까요? 2절을 보면 '요한이 옥에서...' 요한이 지금 헤롯 임금의 미움을 받아서 옥에 갇혀 있습니다.
  캄캄하고 습기 차고, 춥고, 고문이 있고 먹은 것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그런 감옥입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소망이 끈긴 상태에서는 누구든지 절망할 수 있습니다.
  왜 요한은 이런 생각을 하게 했을까요? 의로운 삶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요한은 예수님께 뭔가를 기대한 것입니다. 예수가 진정 메시아라면 나를 구해 주시지 않을까라는 기대 말입니다.
  아니 이것은 어쩌면 자기를 구해줄 것에 대한 기대이기 보다 악한 헤롯을 멸하실 것에 대한 기대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요한은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심판의 주님으로 묘사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3:12절에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즉 악한 자들을 멸하고 의로운 자들을 새롭게 이루실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바로 지금 메시아가 악을 진멸 하시므로 의로운 요한은 구원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악한 헤롯은 더욱 악해지고 의로운 자신이 옥에 갇혀 고통 당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면회조차 오시지 않았습니다. 가끔 오셔서 요한을 격려하시며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고 하면 좋을 텐데 주님은 편지 한 장도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요한의 갈등은 시작된 것입니다. '더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이 분이 아니고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나?' 이 얼마나 심각한 갈등입니까? '내가 진리를 위해 외쳤는데 남은 것이 이것뿐입니까?'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 적인 요소를 틈타 사탄은 의심의 독을 품어 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학자들 간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⑴'메시아가 왔는데 왜 이런 고생을 해야하나?' 하고 믿음이 약해져서 물으러 보냈다는 해석입니다.
  ⑵'자기의 제자들이 메시아가 왔는데 선생이 이렇게 갇혀 있어야 하는지를 너희들이 직접 예수께 물어 보라고, 교육적인 의미로 예수께 보냈다'는 해석입니다.
  ⑶'스스로 메시아에 대하여 의심이 생겨서'라는 견해입니다.
  ⑷'제자들이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는 견해입니다.
  ⑸'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메시아임을 선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견해입니다.
  ⑹이때에 비로소 '메시아에 대한 믿음이 생겨서'라는 견해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만 많은 학자들은 두 번째와 네 번째 '교육적인 의미로'와 '제자들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는 견해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일찍이 예수님의 선구자로써 길을 예비하러 온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슴없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면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겸손했던 그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러면 그렇지 세례요한이 누구라고' 다시 한 번 그의 위치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할/
  세례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4-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근본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환경의 어려움, 육신의 고통 때문에 그 마음에 좌절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한마디로 위대한 상담학자요, 심리학자입니다. /믿/ 아마 '지금도 네가 너무 고통스러워 잠깐 그런 것이다' 이해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과 체질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대결을 벌려 하늘에서 불을 이끌어 낸 능력의 종입니다. 그 날 갈멜산의 대결은 엘리야를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또 하나님이 참 신인 것을 증명했고, 바알 선지자 850명을 기손 시냇가에 끌고 가 다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이 화가 나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야단입니다. 그러자 그토록 용감하였던 엘리야가 한 아녀자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앙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로뎀나무 아래까지 도망 나와 거기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한 여자의 말 앞에 이렇게 약해져 버린 엘리야를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까마귀를 통하여 고기와 떡을 주면서 먹고 자고 쉬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찰력입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불 신앙 때문인가? 아니면 조건과 환경 때문에 일시적인 흔들림인가를 깊이 통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인들 가운데 한때 주님을 잘 섬겼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탈진상태에 빠져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도하는 것도 귀찮고 전도하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재미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근본적으로 없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 주님이 먼저 아시고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그래 우선 쉬어라! 그리고 다시 생각하라'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멘!/
  제가 목회하면서 깨달은 것은 신앙이 탈진하고 내려간 자들은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목회를 합니다.
  저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간섭을 하지 않으면서 목회를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목사님이 너무 약하게 목회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래 내가 바로 그로다, 내가 바로 메시아로다' 이렇게 답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이사야서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간접적으로 답변을 하십니다.
  ⑴소경이 보며, ⑵앉은뱅이가 걸이며, ⑶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⑷귀머거리가 들으며, ⑸죽은 자가 살아나며 ⑹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여섯 가지의 표적은 모두 메시아의 이적으로 구약 이사야서에 예언한 것입니다.  
  사35:4-6절에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또 한군데서 인용하셨습니다. 사61:1절에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할/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 이사야의 예언은 메시아의 신임장으로 알았고, 모두 다 그런 메시아를 갈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하셔서 그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신앙에서 모든 의심은 성경에서 풀어야 합니다. /믿/
  한마디로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그대로 즉 구약에서 메시아가 나타나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되어진 그대로 예수님을 통하여 이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너희들이 본대로 들은 대로 가서 얘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하신 일이 바로 '고치는 사역, 천지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인용하신 말씀을 해석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얘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런 역사를 행하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 이 복을 받으십시다. 소경이 눈을 뗬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은 예수님이 직접 행하신 것입니다.
  저는 영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영의 눈이 떠져야 합니다. /믿/ '하나님!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시옵소서! 앉은뱅이 같은 나의 신앙이 벌떡 일어나게 하시고 문둥병처럼 더러워진 나의 죄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게 하시고 나의 들을 귀가 열리게 하시며 나의 죽은 심령이 살아나 뜨거워져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누구에게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들려집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있는 것 다 팔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자복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마음입니다. /아멘!/
  그런데 회개는 아무나 합니까? 태진아의 노래 '사랑은 아무나 하나?' 처럼, 회개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냥 눈물 흘리고 우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고,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꼼짝못하게 만들어 회개케 하십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만드시는 작품입니다. 고난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고난 당한다고 다 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맞았다고 다 선한 사람되는 것 아닙니다. 회개란 마음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주님이 계실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 속에 있는 내 생각, 내 경험, 내 명예, 내 직위 등등, 이러한 것을 비워야 합니다. 이 빈 공간에 복음이,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이 공간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니오, 쉽게 만들어지지 않고, 바로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단순해집니다. 무릇 사람이란 소원도 많고, 마음도 복잡하지만 고난을 당하게 되면, 아주 단순하게 됩니다. 특별히 가치관이 내세 지향적이고 영원 지향적으로 바꾸어집니다. 이것이 가난해진 마음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통해서, 고통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십니다.
내가 무엇이 부족하다 생각할 때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오는 시기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곤란을 당했거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시간임을 잊지 마세요. 누가 병원에 입원했거든 소중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절대 빈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고, 질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나에게 주어지는 축복임을 깨닫고, 복음과 함께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이제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신 다음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절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직역을 하면 나(예수)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넘어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넘어뜨리고 인간을 속이고 인간에게 상처를 주고 인간을 망하게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를 인하여 실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여기에 예수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들은 물론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예수 때문에 넘어지고 예수 때문에 속상하고 예수 때문에 울분이 일어나고 예수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유대주의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다가 예수 때문에 넘어지지 않기 바랍니다. 예수 때문에 실족하지 않기 바랍니다.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금은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옛날 속담에 '번쩍이는 것이라고 반드시 금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도 참된 믿음이 있고, 거짓된 믿음이 있습니다. 복된 믿음이 있고 복되지 못한 믿음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어떤 믿음이 복된 믿음입니까? 실족하지 않은 믿음이 복이 있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믿음이 실족하지 않은 믿음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8:14-15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실족이 무엇입니까? 돈에 채어 넘어진 자들입니다. 어떤 것에 의해 신앙이 넘어졌다면 실족한 자들입니다.
  언제 실족합니까? 왜 실족합니까? 왜 우리가 예수 때문에 넘어집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넘어진 자를 세워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소경을 보게 해주는 자입니다. 앉은뱅이를 걷게 해 주는 자입니다. 문둥병자를 고치는 분이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시는 분인데 왜 그 좋으신 예수 때문에 우리가 넘어지냐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다가 실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①말씀이 뿌리가 약한 사람입니다. 말씀이 무지해서 넘어집니다. 예수를 바로 모르기 때문에 넘어집니다. 한 가지 역설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예수를 다 바로 아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내가 예수를 바로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바로 안다는 말은 그 분의 의도하심을 깨닫고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내게 원하는 것을 내가 깨닫고 그 분 앞에 내가 믿음으로 응답을 해야만 내가 예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할/
  예수를 믿으면서도 지금 그 예수님이 영광 받을 일을 내게 주셨는데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면 나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를 모르므로 실족합니다. 무지함으로 실족합니다. 이 무지함을 극복해야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무지를 극복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영적인 무지를 극복하려면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우리가 넘어집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은 개관적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영지'입니다. 영적인 지식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내가 예수를 안다는 것은 신앙고백서를 외우기 때문에 내가 영적으로 유식한 것이 아니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안다고 하는 개념은 전부 '인격성'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지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조직신학이라는 신학서적을 다 읽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을 만나주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러 가는 사울을 예수 그리스도가 빛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울은 율법의 선생입니다. 그는 구약성경을 능통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메시야 예언을 능통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부활하여 살아 계시는 예수님은 몰랐습니다. 부활하여 살아 계시는 그 예수가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사울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사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 예수가 인격적 예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나와 동행하는 것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해야만 영적 무지가 극복되는 것입니다.
  ②합리주의자들입니다. 자기 편한 대로 믿다가 어려워지면 실족합니다.
  ③너무 신앙에 자만하다가도 베드로처럼 넘어집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한 베드로, 그 밤에 예수님은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④의심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고 나갈 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믿음은 어떤 과학적인 논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이기에 무조건 믿는 복입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할/
  ⑤세속주의자들이 실족했습니다. 신앙 안에 살라고 하면서 자꾸 세상 쾌락이 그리워 쫓아가다가 믿음을 실족하고 큰 사건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어떤 사람이 실족했습니까?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믿었던 사람들이 실족했습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열심당원이 있었습니다. 시몬, 가롯유다, 같은 사람들은 당시의 열심 당원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은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세력을 다 무찌르고 이스라엘은 해방시키고 또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아 관을 가졌습니다.
  특히 가롯유다가 이 사상이 짙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서부터입니다. 가롯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뭔가 한 자리 해 먹고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것이 아니니까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가 조금씩 이런 사랑을 처음에는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후 부활의 주님은 만나고 성령 충만함을 받고 그들이 새롭게 되어졌습니다. /아멘!/
  주님은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손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한 성도가 목사님을 찾아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바로 믿을 수가 있습니까?' 그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그 성도를 데리고 뒷동산 낭떠러지까지 올라갔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을 바로 믿는 비결을 가르쳐 줄 터이니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것이냐고 묻자, 그르겠다고 대답한 성도에게 저 절벽 위에 나무로 올라가시오, 성도는 영문도 모르고 올라갔습니다. 이제 그만 올라갈까요? 더 끝까지 올라가시오, 다 올라간 성도에게 이번에는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이제 한 손을 놓고 한 손으로 붙드시오' 또 다시 '이제 그 한 손마저 놓아 버리시오' 했더니 '예? 목사님 그러면 떨어져 죽습니다. 저는 절대로 이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숨을 몰아쉽니다.
  그제야 목사님은 그 성도를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하고는 말씀하기를 '형제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믿겠느냐고 그 비결을 가르쳐 달라했는데 바로 그 손을 놓으면 죽는 것처럼, 예수님을 붙잡고 살면 잘 믿는 것이요, 예수님을 놓으면 죽은 믿음입니다.'라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나무에서 떨어지면 죽은 생명입니다. 요15:4절에서 우리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몇 가지 알아야 합니다.
  ⑴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알아야 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의 주체입니다.
  ⑵성도끼리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이것을 친교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⑶희생입니다. 내 것이 닳아 없어지는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내 시간, 내 육체, 내 물질이 희생되는 조건입니다. 희생의 기쁨도 잇습니다. /할/
  ⑷순종의 삶입니다. 순종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⑸기도입니다. 기도의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하라!'입니다. 마7:7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할/ 둘째는 '믿으라.'입니다. 막11:2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셋째는 '받은 것으로 주장하라'입니다. 막11:24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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