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강) 요한에 대한 주님의 증거! (마 11:7-15)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이 세상에 온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면서 동시에 신약의 첫 번째 안내자입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 된지 400년이 지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그 때 400여 년의 침묵을 깨고 한 선지자가 광야에 나타나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메뚜기와 야생 꿀을 양식으로 먹었고,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나 낙타 털옷 한 벌을 입고 사는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입을 열어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이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자들에게 요단강 물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람을 '세례 요한'이라 부릅니다.
사람들이 '당신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십니까?'라고 물을 때 '나는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니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메시아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인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만큼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오' 그러면서 '나는 그 분의 신들메를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오' 겸손하게 예수님을 소개했던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오시는 예수님을 뵙자마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이시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화려하게 소개했던 위대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인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 아직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예수를 향하여 '저 예수님은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 참으로 아름다운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헤롯 임금이 자신의 동생의 아내, 제수 씨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맞았을 때, '회개하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으니 회개하지 않는 자는 찍어 불어 던지 울 것이다' 담대하게 외친 사람입니다.
그런 세례요한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헤롯대왕의 불의를 책망한 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불의가 지배하는 현실을 볼 때 '과연 이 땅에 메시아가 온 것인가?'라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라면 왜 오늘의 현실이 이처럼 암담합니까?'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비판하지 않으시고 구약의 성경을 상기시켜 줌으로 메시아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제목 소개!▶
▶7절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선지자 중의 선지자인 요한의 외치는 음성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군중들을 향해 주님이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보기 위해 애를 씁니까?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려고 이 교회당에 나와 있습니까? 정말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잃어버린 채 껍데기에 매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껍데기를 가치 있게 여기고 거기에 목매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할/
'저희가 떠나매' 요한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날 때입니다. 이는 요한의 제자들의 뒷모습을 아직 바라볼 수 있는 만큼의 거리에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대하여 말씀하시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불쑥 나타나서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가다가 그것을 목격하고 있던 무리들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비판하고 정죄하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아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 변명을 해 주고 계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상대방이 보는 앞에서는 좋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떠나면 비판하고 흉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오히려 그를 변호해 주었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11절을 보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이 말씀은 인류사에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지만 영웅 중의 영웅은 세례요한이요, 성자중의 성자는 세례요한임을 미리 결론을 내리신 것입니다.
7절 이하에서는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위대성을 네 가지로 비교하면서 안박하는 논리로 풀어 가십니다.
⑴먼저 세례요한을 갈대와 비교합니다. ⑵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과 비교합니다. ⑶선지자와 비교하고, ⑷선지자보다 더 큰 자, 선지자보다 더 위대한 자와 비교하십니다.
'너희들이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이 광야는 유대광야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의 복음을 선포한 장소요, 물로 세례를 베풀어 준 광야입니다.
실로 유대인들은 오래간만에 하늘의 메시지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하늘의 음성이 침묵을 지킨 지가 약4-5백년 되었습니다. 이때를 가리켜 신구약의 중간 사라고 합니다. 영적 암흑기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별안간 유대광야에 세례요한이 나타나 하늘의 우레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자 많은 군중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이 질문은 '너희가 광야에서 요한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았느냐? 너희들이 세례요한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을 했다고 해서 요한을 형편없이 여기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세례요한의 변하지 않은 위대한 신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흔들리는 갈대냐?' 여기 갈대란 요단강 하류 쪽에 많이 자라는 식물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례요한을 너희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았느냐? 그러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님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처럼 지조 없는 사람, 신념이 없는 사람, 소신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의 장점은 바로 꿋꿋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세례요한이 타협했으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위대한 영도력을 가진 사람입니까? 말을 바꾸지 않는 사람입니다. 태도를 바꾸지 않은 사람입니다. 처음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처음과 같이 한결같은 사람이 존경스런 사람입니다. 돈에 흔들리지 않고 권력과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조롱을 받을지라도 손해를 볼지라도 죽음이 올지라도 자기의 뜻을 끝까지 밀고 가는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아멘!/
어떤 의미에서 세례요한은 고집스럽게 광야에서 약대털옷을 입고, 험한 음식을 먹고,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무섭게 했던 사람입니다.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추상같은 질책을 하여 결국 처형당한 사람입니다.
한 인간이 갖는 위대함의 첫째 조건은 지조입니다. 변하지 않는 신념, 확신, 태도입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할/
▶8절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너희들이 광야에 간 것이 부드러운 비단 옷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세례요한을 보기 위해서냐?'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은, 사치하고 호화로이 연락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세상 향락에 빠진 사람들, 인간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르고 험한 광야에서 살았던 영의 사람입니다.
'왕 중에 있느니라' 권력 주변에서 아첨하는 사람들을 지적한 것입니다. 왕이 잘못한 것 옳다고 하여 아부해서 한 자리 얻고 호화로이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세례요한은 추호도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왕의 불의를 책망했습니다. '어떻게 동생의 부인을 가로챌 수 있느냐?' 세례요한은 자기를 위하여 호화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권력에 아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의를 귀중히 여기고 의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안 사람이 세례요한이고, 세례요한을 바로 안 사람은 예수님이십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 나타나서 세례를 줄 때에는 많은 무리들이 요한을 따랐으나 감옥에 갇힌 후에는 사람들이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 바로 알고 증거해 주셨습니다. /할/
▶9절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소개했고, 더 나아가서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라고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7절에서 변함 없는 확신, 신념, 지조를 가진 것, 귀한 것입니다. 또 8절에서 자기의 명예와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의를 위해 사는 것,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예수님 밖에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9절에서는 말하는 선지자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은 인간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는 죄 많은 세상에서 그것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할/
세례요한에게는 불같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정치 경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썩어 가는 세상을 향해 추상같은 메시지를 던진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기에 생명을 걸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구약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던 사람들은 바로 예언자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을 살다가 갔더라도 그 이상 하나님의 사람은 없었습니다.
구약에 예언자들은 많았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느헤미야, 이들은 정말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례요한을 가리켜 이들보다 큰 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세상에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자기보다 후배요, 집안도 제사장 가문인 세례요한에 비해 훨씬 열등한 형편없는 목수 집안인 그런 사람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쳤습니다.
이 외침이 바로 '저분이 바로 메시아이시다.'라고 예수님을 바로 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요한을 혹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할/ 그러니까 '선지자보다 나은 자', 11절에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는 것이 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평가입니다. 우리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우리를 가장 정확하게 보시는 주님께 어떤 평가를 받을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할/
▶10절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본문에서는 주님이 세례요한이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임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제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마디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다거나 영국을 방문하게 되면 먼저 선발대가 가서 모든 것을 예비합니다.
'누구와 회담할 것인가? 그 주제는 무엇인가? 또 누구와 만나고 어디서 연설할 것인가? 또 신변 호보 문제, 그러니까 경호문제도 다 협의하고 돌아와 모시고 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임금이 행차할 때면 먼저 나팔을 불고 선발대가 지나갑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예비자라고 합니다.
10절의 말씀은 구약 말3: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예언의 초점을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를 기다리고 메시아를 가르치고 메시아를 예언하는데 모든 예언자들의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 메시아를 직접 만나서 준비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데 그 길은 예비하고 영접한자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세례 요한을 보고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한 것은 '예수를 영접한 사람, 예수를 전하는 사람, 예수를 높이는 사람은 예언자 보다 더 큰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하고 예수님을 전하고 높이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위대함이라는 것입니다. /믿/
▶11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다 여자가 낳은 사람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이라는 말은, 인간 중에서 인류역사상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인류사가 진행되어온 가운데 인간이 한 역할 중에서 세례요한보다 더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를 잘해서 국민을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 중요합니다. 경제를 살리는 것, 고급 문명문화를 이루는 것,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견해는 우리의 생명의 구속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전하고 높이는 일이 최고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할/
'그러나 천하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보고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이 지옥에 갔다고도 말합니다.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세례요한보다 크므로 세례요한이 천국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진리입니다. 여기서 천국이란 말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천국이라고 할 때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됩니다. 즉 ⑴마음의 천국, ⑵교회 ⑶천년 왕국 ⑷ 영원한 하늘나라를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인데 구약시대를 세례요한 때까지라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신약시대가 전개됩니다. 신약시대 교회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예수님을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진리와 또 승천사건과 성령강림사건, 그리고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 재림 사건을 세례요한은 몰랐으나 신약시대의 성도는 유년부 학생에서부터 이 진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세례요한 당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다 성취하시기 전이므로 세례요한이 모르는 진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주님의 십자가죽음과 부활 승천 재림을 다 알고 있습니다.
세례요한보다 신약시대 성도가 잘나서 큰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더 많이 안 자가 되었기에 큰 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분량대로 영적 세계가 크게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많이 체험한 자가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 작가는 506장에서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소원, 내 평생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라고 찬양했습니다. /아멘!/
▶12절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먼저 예수님이 천국을 어떤 것으로 비유하셨는가를 먼저 알면 본문을 이해하기가 더 쉽습니다. 마13: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⑴'천국은 마치 밭에' 밭은 교회입니다. 농부의 삶의 터전은 밭입니다. 농부는 밭에 가서 일을 함으로 기쁨을 얻습니다. 그리고 수확을 기다립니다. 밭에 나가지 않는 농부는 게으른 농부입니다. 그렇습니다. 농부가 밭으로 나가야 하듯이 성도는 교회로 나와야 합니다. 나와서 믿음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나와서 예배를 드리다 보면, 말씀을 듣다 보면, 봉사하다 보면, 농부가 밭에서 보화를 발견하듯 천국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할/
⑵'감추인' 그렇습니다. 천국은 아무에게나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마13:11절에 보면 천국의 비밀을 우리에게는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상상으로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반드시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단지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발견되지 않을 뿐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택함 받은 우리들에게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엄청난 축복입니다. /할/
⑶'보화와 같으니' 감추어진 보화는 예수 십자가 구원의 비밀을 말합니다. 이 복음 안에 죄 사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진리가 들어 있고 천국에 이르는 영원한 생명의 열쇠가 있습니다.
천국! 우리가 들어보지도 못한 진귀한 보석으로 꾸며진 곳입니다. 천국에는 열 두 문이 있습니다. 모두 진주로 된 문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직접 예비하신 최상의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입니다.
⑷'사람이(농부)' 농부는 전적으로 하늘을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농사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저 비 오기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존재여야 합니다.
⑸'이를 발견한 후' 어떤 사람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으나 택하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천국의 백성된 우리에게는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늘 천국이 발견되어지고, 천국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⑹'숨겨두고' 왜 숨겼는가? 자기가 발견한 '보화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천국은 빼앗겨서도 안되고, 남에게 양보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교회에 안 다녀도 우리 집사람은 열심히 잘 믿으니까 나도 천국의 근처는 가겠지!' 여러분, 천국 근처는 없습니다. 천국이면 천국, 지옥이면 지옥 둘 중에 하나입니다.
⑺'기뻐하여 돌아가서' 천국은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천국이 임하면 우리의 마음에는 남이 빼앗을 수 없는 절대적인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은 너무나도 기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아치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기쁨을 마음속에 소유한 사람은 세상 적인 것, 시시한 것 때문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여기 '돌아가서'의 원어로는 '뛰어가서 팔았다' '뛰쳐나가 팔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진리를 발견했을 때 그 진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미적미적해서는 안 됩니다. 축구 경기를 하는데 골이 내게 왔으면 즉시 패스를 하든지, 센터링을 하든지, 슛을 하든지 해야지, 가지고 머뭇거리면 그 사이에 상대방이 수비를 강화하거나 공을 빼앗습니다.
⑻'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반쯤 팔고, 반쯤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 팔았습니다. 천국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가진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얻기 위해서는 소중히 여기는 것을 포기하는 결단과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소유를 팔았는데 다 바치지 않고 얼마를 감췄다가 혼이 난 부부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입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 파시기 바랍니다. 전적으로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전적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대가라도 지불해야 할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사람은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그 보화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엄청난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우리도 어떠한 희생이라도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도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자기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배와 그물을 다 버려 두고 예수님의 뒤를 좇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거룩한 욕심이 있어야 그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믿/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보세요!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세례요한의 때까지 구약시대는 끝나고 그 후부터 신약시대가 시작됩니다. 문학적으로는 세례요한시대부터 마태의 시기입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이 천국은 세례요한 때부터 침노를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침노를 당한다'는 말의 뜻은 두 가지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은 계속해서 압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종교의 상징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세례요한은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권력의 상징이라고 불리던 헤롯왕에 의해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결국 사형까지 당하고 맙니다.
또 하나는, 천국은 빼앗는다는 의미입니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힘써 침노하여 들어가면 천국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침노한다는 것은 용기 있는 자들을 통하여, 강한 집념을 가진 자들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혹시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한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침노하는 자'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하여, 결사적인 노력과 헌신을 아끼지 않은 강하고 용기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할/
'빼앗느니라' 원어적인 설명을 하자면 마치 야수나 거친 도적들이 마냥 무엇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력을 다해 움켜잡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의 의미는 당시 '배경 적인 설명'이고, 두 번째의 경우가 바른 '복음적인 해석'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복은 탐내는 자의 것입니다. 세상 것도 욕심내는 자가 차지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을 노리고 탐내고 욕심내는 자들은 통하여 천국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에게 나태한 자에게는 그런 천국의 복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매달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전에 충성하고 정말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축복이 쏟아집니다. /믿/아멘!/
▶구약에 야곱이라는 인물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이 사람은 하늘에 복이 아니면 살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에 '당신이 나에게 복을 주지 않으면 절대로 놔 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야곱을 진단해 보자!
⑴야곱은 운명에 맡기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빼앗고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장자만이 복을 받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원칙이며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차남입니다. 이 자리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서열입니다. 영원한 동생의 자리입니다. 호적에도 주민등록에도 차남입니다. 둘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둘째이기를 거절했습니다. 법적으로 자연적으로는 둘째일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둘째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첫째가 되고 싶었습니다. 축복은 바로 이런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운명을 거부하고 축복의 세계에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속담에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 이런 속담들은 양반 상놈 사회에서 양반들이 지어 놓은 것들입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가 어디 있습니까? 사다리 놓고 올라가고 소방차 갔다 뻗쳐 놓으면 아무리 높은 나무도 다 넘습니다. 송충이가 솔잎만 먹고산다는 말도 틀린 말입니다. 송충이는 버들잎도 먹고 갈잎도 먹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능력자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며,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믿/아멘!/
⑵야곱은 기회를 꼭 붙잡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야곱이 축복에 도전했어도 복 받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축복의 기회가 올 때마다 기회를 꼭 붙들어서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냥하고 돌아오는 형에게 배고픔을 알아채고 팥죽을 줄 테니 장자 권을 달라고 했습니다.
축구선수들을 보면 골문 앞에서 골을 넣는 사람이 기회포착에 능한 선수가 유능한 선수가 됩니다. 아무리 잘 뛰고 패스를 잘하고 경기 운영을 잘 해도 골을 넣지 못하면 결국 지고 마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가 축복기도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어머니를 통해서입니다. 평소에 어머니의 사랑을 에서보다 더 받아온 터입니다. 부정적 측면으로 보면 야곱을 편애한 리브가 같지만 긍정적 측면에서 보면 야곱이 어머니한테 사랑 받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랑을 받은 만큼 줍니다. 잘하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친구사랑, 부부사랑, 부모사랑, 모두 다 상대적입니다. 똑같은 자식도 잘하는 자식한테 부모의 사랑이 더 가는 것입니다.
형이 산에 짐승을 잡으러간 사이에 양을 잡아 진미성찬을 준비한 야곱, 그는 기회 포착, 기회 활용에 능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축복의 기회를 놓치면 일생 후회합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붙들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회는 찾고 노력하는 자에게 다가옵니다. 게으로고 나태한 자에게는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도 지금 받아야 합니다. 축복도 지금 받아야 합니다.
⑶야곱은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천사와 씨름을 했는데 야곱은 날이 샐 때까지 천사에게 끈질기게 매달려 이스라엘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환도 뼈가 부러진 후에도 매달렸습니다.
여러분, 매달리는 신앙, 이것은 끈질긴 기도를 의미합니다. 정말 야곱처럼 환도 뼈가 부러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리는 기도의 사람, 이런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천국은 빼앗고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아멘!/
▶13-14절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여기서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은 구약을 가르치는 것이고, 구약의 전체를 선지자와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까지라는 말은 바로 세례요한까지가 구약의 끝이라는 말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침묵의 기간이 흘렀으나 구약시대는 아직 마감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세례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통해 구약은 최종 마감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전개된 것입니다. /아멘!/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엘리야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능력의 종입니다. 그는 왕하2:11절을 보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수백 년 후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바로 그 엘리야가 보냄을 받을 것이며 와서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말4:5-6절의 예언하였습니다.
본문은 이 말씀을 인용한 말씀으로 요한의 엘리야의 심령으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것을 말합니다. 요한의 태어나기 전에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주의 사자는 그에게 요한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눅1:17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15절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종종 사용하신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복음의 영적인 진리를 은유적으로 묘사할 때 진지한 호기심을 갖도록 흔히 사용하셨습니다. 특히 '들을 지어다'라는 말은 '단순히 들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의하여 듣고 깨달으라'는 강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아멘!/
사실 당시 유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오늘의 사는 현대인들조차도 분명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이를 무시하며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나 듣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귀가 열린 자라야 주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의 귀를 다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할/
계2:7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리고 계2-3장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거듭거듭 예수님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렘10:1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렇다면 듣을 수 있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⑴열린 마음입니다. 계3: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마음을 가지면 자연계에서도, 세상 모든 메스 콤을 통해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참으로 복을 받습니다.
⑵동정하는 마음, 동화된 마음입니다. 주님 말씀에, 주님 사상에, 주님 마음에 일치 공명하여 주님이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주님의 소원이 내 소원이 되고,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있는 혼연 일체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⑶잘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롬10: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할/
⑷잘 들어야 복을 받습니다. 눅11:2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⑸잘 듣는 자는 깨닫는 자입니다. 마13:23절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 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깨닫는 것이 복입니다. 시49: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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