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61강)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비유! (마 11:16-2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13

(제61강)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비유! (마 11:16-24)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삽니다. 남을 도와주기도 싫고, 남에게 도움을 받기도 싫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어릴 때에는 부모의 도움을 받고, 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친구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선배와 형제, 친지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남편의 도움, 혹은 아내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라의 도움이 절대 필요합니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이미 받았고, 현재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할/ 4절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그리고 8절에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아멘!/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요한을 변론해 주신 말씀을 배웠습니다. 세례요한의 위대함은 '변하지 않는 그의 신념'이라고 했습니다. 그를 '갈대로 보았느냐? 아니다. 그는 갈대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처럼 지조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잠시 세례요한의 메시아 관이 흔들렸다 해서 그를 갈대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의심에서 중요한 것을 또 하나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진실하고 정직한 의심은 참된 믿음의 길로 통한다'는 사실입니다. '의심'과 '비판'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고 진실한 의심도 있지만, 미움과 분노 때문에 의심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후7: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할/
  또 예수님은 '너희가 광야에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고 물으셨습니다(8). '너희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세례요한을 보기 위해서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드러운 옷을 입었다'는 것은 사치하고 호화로이 연락하는 사람들입니다. 왕궁 권력 주변에서 아첨하는 사람들은 지적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선지자보다 큰 자라고 예수님께서 변론해 주시고 나서 15절에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적으로 정확히 구분하지 않고서는 바른 진리와 믿음에 이룰 수 없음을 깨우쳐준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정확하게 그 의도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영의 분별력'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세례요한을 읽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악의에 찬 불 신앙의 사람들을 향하여 비유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16-19절까지는 이 세대를 비유해서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비유'해서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20-24절은 그라신과 벳세다를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분류했습니다. ◀제목 소개!▶

 

  먼저 16-19절의 비유의 배경이 무엇인가? 그 당시 세례요한의 '삶의 정황'을 밝히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 세상에서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금식도 많이 했습니다. 옷도 소박하게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는 저래야 한다, 얼마나 금식과 기도생활을 많이 하며 얼마나 소박하냐? 참 훌륭한 지도자다.' 이렇게 칭찬을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아니 사람이 먹는 재미에 사는데, 안 먹고산다니 혹시 머리가 돈 것이 아니냐? 미치거나 귀신들린 것이 아니냐?' 그렇게 욕을 했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정반대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먹고 마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반대했으니까 이번에는 정반대로 예수님을 칭찬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역시 그 분은 대중하고 함께 하는 훌륭한 분이십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하시니 얼마나 좋으냐?' 이렇게 칭찬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잘도 먹는구먼!' 예수님을 아주 비난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웃었습니다. 당시는 이른바 훌륭한 사람, 의로운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나 높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경건한 사람들끼리 같이 하는 것을 가장 최고의 복으로 생각하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멀리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을 비판하시면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에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오히려 '야! 이것이 은혜로구나, 너무나 감사하다'라고 칭찬해야 하는데 오히려 비난했습니다.
  예수님보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비난이지 칭찬이 아닙니다. 이렇게 비난하고 믿지 않는 불 신앙의 세대를 향하여 우리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외침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듣고 받아들이는 바가 전혀 없는 답답한 그 세대를 비유하여 생각해 보면 매우 장난기 섞인 비유를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철없는 어린애들의 노는 모습 그대로를 옮겨 진리 앞에 무감각한 세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저희들끼리 놀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피리를 불면 너희들은 춤을 추어야 하는데도 왜 춤을 추지 않고 있으며, 우리가 애통하며 울고 있으면 너희들은 가슴을 치며 따라 울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가만히 있기만 하느냐'며 답답해하는 것과 같이 '이 세대가 마치 그와 같다'는 비유입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자세하게 상고하겠습니다.

 

  ▶16-17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여기서 예수님은 무감각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악의에 찬 한 세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시대정신, 시대조류, 사대사상을 가리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정의했습니다.
  요즘 우리 세대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를 진단한다면 '총체적 위기'입니다. 정치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습니다. 국민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지도층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그 시대를 표현해 주는 시대상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세대란 '뿌리가 같은 한 족속'입니다. 동시대 사람들 또는 30년으로 끊어지는 한 기간 등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는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시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비유할꼬'란 말은 '비교하다'로써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그 닮은 것을 겉에 두어 비교한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또 비유란 '나란히 던진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어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어떤 상황을 들어서 교육하시는 모습입니다.
  가령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실 때, 밭에서 농부들이 씨 뿌리는 모습을 보시면서 비유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바라보시면서 들에 핀 백합화를 가리키면서 예수님은 비유를 주셨습니다.
  지금은 시골장터가 많이 없습니다만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장터는 어린이들의 최고의 놀이터였습니다. 유대나라 어린이들도 부모를 따라 시장에 가서 부모가 물건을 사고 팔고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장터에서 놀이를 합니다.
  흔히 장례식놀이와 결혼식 놀이를 많이 합니다. 우리 때만해도 이런 것은 아이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놀이문화입니다. 아이들이 나름대로 신랑을 정하고 신부를 정하고 피리불고 춤추는 놀이를 합니다. 또 장례식 놀이도 합니다. '아이고! 아이고!' 가슴을 치며, 장례식 흉내를 내면서 노는 놀이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은 결혼식과 장례식입니다. 결혼식은 어떤 배필을 만나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장례식에서는 인생 길에 무엇을 남겼느냐가 중요합니다.
  당시 아이들은 시장 거리에서 주로 결혼식 놀이나 장례식놀이를 하며 지냈던 것 같습니다. '넌 신랑, 너는 신부하고, 너는 피리 부는 사람하고, 너희는 춤추는 사람들'하고 배역이 맡겨지고, 결혼식은 시작되고 잔치는 점점 흥겨워져서 피리 소리가 들리고 모두는 춤을 춥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결혼풍습이었습니다.
  이제 어린아이들이 배역을 정했는데 그 배역에 마음이 맞지 않으면 아이가 불만을 가집니다. 시키는 자가 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만을 가집니다. 그래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곡을 할 테니 가슴 치는 역을 하라고 해도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으므로 결혼의 참된 기쁨이 없는, 그러니까 예식은 있으나 함께 즐거워하는 예식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을 표현한 것이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으므로 놀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들어서 그 세대를 이해시키고 계십니다.
  바로 이 시대가 이와 똑같다고 예수님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심히 통곡할 만한 대도 슬퍼하지 않고 애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가리키는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라고 외쳤건만 그들은 바른 회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비유로 들어 당시 사람들의 천국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천국에 대하여 무관심했습니다.
  더욱이 천국의 약속을 먼저 받은 유대인들이 더욱 그랬습니다. 이 비유는 이들을 향한 어리석음과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장례식 놀이의 비유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의 생활과 메시지는 '절제와 통회와 자복'이라는 엄격한 메시지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고 애통하며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요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이러한 메시지에 대하여 무관심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결혼식의 비유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절제를 유보하고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받은 죄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기뻐 춤추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나라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무관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장터의 아이들에 비유하였습니다. /할/
  즉 '세례 요한의 회개로의 초대에도 취미가 없고 예수님의 구원의 기쁨으로의 초대에도 참여치 못하는 세대의 안타까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회개의 촉구에도 관심이 없고 따라서 구원의 기쁨의 초대에도 무감각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비유의 앞뒤에는 하나님 나라는 침노를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무관심의 대상이 될 정도로 무가치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서로가 빼앗으려고 할 정도로 귀한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저들의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저들은 무관심하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학생은 머리가 나쁜 학생이 아닙니다 다 배워서 다 안다고 주장하는 학생입니다. 가장 고치기 어려운 환자는 중병을 가진 환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병이 없다고 생각하고 의사에게 솔직 하려 하지 않는 환자입니다. 가장 구원하기 어려운 죄인은 흉악한 죄인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믿/

 

  ▶18절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아까 잠시 말씀드렸습니다만 세례요한은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금식하며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래! 정말 훌륭한 종교지도자야, 금식하며 절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니 얼마나 훌륭한가?' 이래야 되는데 정반대입니다. '아니 사람이 먹는 재미로 사는데 안 먹고살라니 혹시 머리가 돈 것이 아닌가? 미치거나 귀신들린 것이 아닌가?'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비유를 잘 생각해 보면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세례요한은 금식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비난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먹고 마시기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같이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비난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비유와 연관시켜 말한다면 세례요한은 장례식에 애곡한 경우이고, 반면 예수님은 결혼식에 피리를 분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애곡에 가슴을 치는 응답을 거절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거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음식물이라고는 메뚜기와 석청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회개의 삶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세상을 등지고, 인간의 기쁨과 즐거움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그의 청을 거부합니다. 그를 배척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초청해주신 잔치에는 그들이 참여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가 어떤 신분이건, 어떤 직업을 가졌건, 그의 삶이 얼마나 얼룩졌건 개의치 않으시고 찾아오시고,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잔치 초대도 거절했습니다. 대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소개하신 이 세대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이 세대의 모습을 주목해 봅시다. 먼저 그들의 삶은 기준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결혼식 놀이를 하자니까 삶은 비탄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희희낙락하느냐고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장례식 놀이하자니까 그것 또 슬퍼서 싫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보고는 너무 비관적인 인물이라고 불평하고,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낙관적이라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목해 보십시오. 이들의 삶이 대단히 깊이가 있는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의 예수님을 인용해 세례요한을 비판하고, 세례요한을 인용해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삶에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칙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류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방원이가 지은 시조처럼 그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입니다. 이것이 그 세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대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세대의 한 단면이고 현실입니다. /할/
  ▶이 시대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 현대를 가리켜 3무 시대(三無時代)라고 합니다.
  ⑴무관심: 타인과 공동체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사회와 정치, 경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합니다. 이웃에 대하여도 무관심합니다. 영혼에 대하여도 무관심합니다.
  ⑵무감각: 무관심은 무감각으로 발전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 함께 사는 사회에서의 윤리, 자기 혼자 즐기고 안되면 죽는 혼자만의 세상을 살아갑니다.
  ⑶무기력: 나 혼자 열내서 무슨 소용 있나? 나 혼자 바르게 사는 것은 결국 나 혼자 비뚤어지게 사는 것은 아닌가? 두 눈 가진 토끼가 한 눈 가진 토끼 마을에 가서 병신 소리를 듣게 되니 한 쪽 눈을 빼 버렸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무기력해졌습니다.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고 포기 해 버립니다.
  ▶이런 3무의 시대에 현대인들이 가진 질병은 암이나 백혈병 보다 더 무서운 병을 앓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⑴배우지 않는 병입니다. 컴퓨터를 배우고 운전을 배우고 영어를 배워도 '사람됨의 도리를 배우지 않는 병'입니다.
  ⑵가르치지 않는 병입니다. 피아노를 가르치고 태권도를 가르치고 영어와 컴퓨터를 가르쳐도 '사람됨의 도리를 가르치지 않는 병'입니다.
  ⑶배워도 행치 않는 병입니다. 학교에서도 배우고 교회에서도 배웁니다. 문제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죄를 범하는 병'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이 세대를 비유할꼬?'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이 세대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할/

 

  ▶19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님은 세례요한과 정반대로 먹고 마시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을 보고 욕을 했으면 이번에는 정반대로 예수님을 칭찬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야! 저분은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시며 우리 같은 서민하고 먹고 마시니 얼마나 겸손한 분이신가?'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본 절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몇 가지로 폄하했습니다.
  ⑴'먹기를 탐하고' 밥만 쳐 먹는 대식가로 욕한 것입니다.
  ⑵'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으로 매도했습니다.
  ⑶'죄인의 친구로다.' 이 말은 예수님도 '세리와 죄인들과 같다'는 말입니다. 즉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는 그 친구는 바로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가 젊으면, 경험이 부족하여 불안하다고 하고, 늙으면, 시대에 맞지 않고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목사가 잘 생기면, 제비 같아 위험하다고 하고, 못 생기면, 품위가 없어 틀렸다고 합니다.
  목사가 자식을 많이 낳으면, 무절제 한 사람이라고 하고, 자식이 없으면, 혹시 무슨 저주나 받은 줄 압니다.
  목사가 아들만 낳으면, 욕심이 많다고 하고, 딸만 낳으면, 기도해서 그 정도도 해결 못 받았냐고 합니다.
  목사가 가난한 집을 심방하면, 인기운동을 한다고 하고, 부잣집을 심방하면, 잘난 놈들과만 어울린다고 합니다.
  목사가 좋은 집에서 잘 살면, 사치한다고 하고, 못 살면, 축복도 받지 못한 목사라고 천시합니다.
  목사가 좋은 차를 타면, 어려운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과소비 한다하고, 나쁜 차를 타면, 장로님들과 교인들에게 사랑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목사가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면, 돈만 안다고 하고, 안 하면, 가르치지 않는 무책임한 목사라고 합니다.
  목사가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면, 너무 냉정하다고 하고, 잘못을 지적치 않으면, 정의감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세인들이 사사건건 주님을 물고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요한의 증거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는 것이 지혜이고 받지 않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평할 때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의원이 필요 하느니라' 한마디로 초림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할/
  ▶우리 노회 두 목사님의 대화를 들고 저는 웃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90Kg가 넘는 뚱뚱한 목사님이요, 다른 한 분은 비쩍 마른 갈비씨 목사님입니다. 뚱뚱한 목사가 '목사가 저렇게 말라서야 무슨 은혜가 있겠는가? 목사가 자기 마음에도 은혜가 없어서 저렇게 비쩍 말랐으니 어떻게 되겠느냐?' 갈비 목사님은 '세상이 이렇게 죄악된 것을 알면서도 살이 피둥피둥 찌다니 어디 저게 목사인가?' 우리 모두 웃었습니다. 뚱뚱한 것은 허물이 되고, 마른 것도 허물이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금식도 허물이 되고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는 것이 허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잔칫집을 비유하시면서 우리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임을 알게 됩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기쁨, 죄인 하나가 돌아옴으로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돌아온 탕자의 집이요, 나아가 잔치 마당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황홀한 감격으로 기쁨과 찬송과 감사가 넘치는 계속적인 잔치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잠언에 의하면 지혜는 하나님을 의인화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옳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세례요한을 보내서 '회개하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복음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옳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고, 우리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시류가 우리의 원칙이 아닙니다. 정치지도자가 우리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만이 참된 진리이심을 기억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삽시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은 이 세대처럼, 시류에 따라 살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원칙을 하나씩 세워나갑시다. 그리고 그 원칙을 포기하지 맙시다. /아멘!/

 

  ▶20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0절 이하에서 불 신앙적인 태도를 가진 자들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잘못을 책망하는 것을 싫어하고 잘못하면서도 오히려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다. 더욱이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은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잘못에 대하여 단호히 책망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시면서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셨지만 전혀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음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먼저 많은 권능을 베푸신 고라신과 벳새다를 책망하시고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여기 권능이란 '두나미스' 즉 이적을 말합니다. 이적은 초자연적인 행위의 사건을 가리킨 말입니다.
  본문은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의역해 보면,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자가,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자가 오히려 배신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할/

 

  ▶21절 "화가 잊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잊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화가 잊을진저' 이 말은 어떤 저주스런 말씀같이 받아드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회개치 않은 도성을 바라보시며 연민의 정을 가지고 '슬프다'라는 표현의 감탄사입니다. '고라신'은 가버나움 북쪽 10리쯤 떨어진 곳으로 신약성경에서는 본문에서만 취급됩니다. '벳세다'는 갈릴리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써 이곳에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요한, 빌립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곳 베세다 광야에서 큰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게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5천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신 곳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선교 기지가 바로 갈릴리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정하신 것은 우연히 정한 것이 아니고 구약의 이사야 선지가가 예언한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사9:1절에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 주님은 그곳에서 많은 이적을 보셨습니다. 직접 예수님이 진리를 가르치셨고 이적을 행하신 곳인데도 그들이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회개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메시지의 초점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이고 예수님의 복음의 제일성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즉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복음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14: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두로와 시돈'은 대표적인 이교도의 도시이고, 구약에서 늘 책망 받던 도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두로와 시돈에서 이적을 행하였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께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는 우리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지 않은 곳 같습니다.
  여기 '베옷을 입고'는 당시 유대인들의 회개의 방편입니다. 또한 '재에 앉아'라는 말은 '재를 뒤집어쓰는 것'을 말 합입니다. 그러니까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자기가 죽은 자기의 장례를 상징한 것'이고, '재를 뿌리고 티끌을 날리는 것'은 '티끌보다 재보다 못한 인간이 심판 받아 마땅한 것임을 나타내는 자기비하'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란 자신을 낮추고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아멘!/

 

  ▶22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본문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심판에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두로와 시돈은 이방에 속한 곳으로써 심판을 받은 곳입니다.
  두로와 시돈을 예수님의 권능을 보지 못하고 죄악 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지만 고라신과 벳세다는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한 것을 보고도 회개치 않았기에 두로와 시돈 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큰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만큼 더 마음이 완악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 앞에 가서 큰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23-24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전도의 본거지로써 예수님의 표적을 가장 많이 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심혈을 기울이었던 만큼 또 배척과 냉대도 이 가버나움에서 받았습니다.
  ①그들은 다른 도시에 비해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직접보고 설교를 직접 듣고 이적을 직접 행하셨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사랑은 더 많이 베풀었고, 더 많은 은혜를 주었는데 그 사람이 배신하고 은혜를 잊어버리면 몹시 괴롭고 섭섭하고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화있을진저'라고 한 것은 '아 슬프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분노가 큰 만큼 그 못지 않게 슬픔에 젖은 연민도 크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②똑같은 죄라도 믿지 않은 사람의 죄보다 믿는 자의 죄가 더욱 책망할 것이 큽니다. 성도 중에도 일반 성도보다 권사, 여 집사, 권사, 구역 장 등이 더 바로 해야 합니다. 집사보다, 장로보다, 목사의 잘못과 죄악이 더 큰 것입니다.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최대의 번영과 특권을 누린다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가장 많이 은혜를 입고 혜택을 입은 가버나움이 오히려 교만의 머리를 하늘로 쳐들은 것을 의미합니다.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지옥을 가리키는 말로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 두 도시는 로마 군과 유대군 사이에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된 곳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에서 죄로 멸망 받은 상징적인 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통해서 심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벧후2:6-10절에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예로 든 것은 그만큼 가버나움의 죄악이 심각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은혜 받은 우리들이 은혜를 망각했다면 그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직분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 직분에 충성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회개하고 새로워지라'는 메시지입니다. /믿/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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