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62강)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초청! (마 11:25-3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13

(제62강)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초청! (마 11:25-30)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자들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은 모든 인생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고하는 곳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 피곤하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저는 유치원 가방을 든 두 어린아이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한 아이가 제 친구더러 '아이 피곤해' 그럽니다. 제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물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피곤하냐?' 그랬더니 '아저씨 유치원 갔다 와서 피아노 치러가고 미술학원에 가고 주산학원에 가고 무용학원에 가는데 어떻게 안 피곤하겠어요?' 저는 아무 소리도 못했습니다.
  짐작하건대 그 아이는 집에서 제 부모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듣고 배운 것 같습니다. 어째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현대인을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힘들다. 피곤하다, 고독하다, 외롭다'는 말들은 결국 편히 쉴 곳이 없다는 고백이며 절규입니다.
  본문은 세상일에 시달려 안식과 평안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또 날마다 무거운 짐에 억눌려 고통 당하는 사람을 향하여 주님이 부르시는 초청장입니다.
  '다 네게 오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안식을 찾아 헤맵니다. 소위 '스트레스를 풀어보자! 어디 화끈한 데가 없을까?' 산을 찾기도 하고, 강을 찾기도 합니다. 운동장을 찾기도 하고, 노래방을 찾기도 합니다. 술을 찾기도 하고 심지어는 마약 속에서 안식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술이 인생을 평안하게 해주지 못하고 마약이 우리를 쉬게 하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효과는 있겠지만 깨고 나면 더 허전하고 불안합니다. 참다운 인생들의 안식은 세상 속에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 첫머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쉴 때만이 참 안식이 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참 안식이 있고,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네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할/ ◀제목 소개!▶

 

  25절의 주제는 '천국은 어떤 사람에게 보여지는가?' 즉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에게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께서는 한마디로 '어린아이와 같이 진실하고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고 느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교만하고 비판적이고 불 신앙이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감추어진다고 하셨습니다. /할/

 

  ▶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복음에는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세상의 지식은 지혜로운 사람, 슬기로운 사람,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빨리 배웁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세상말로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도 그 마음에 밭이 옥토와 같은 사람들은 아주 잘 쉽게 깨닫습니다. 성경은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적으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슬기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은 감추어진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이 최고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은 당시의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칭 자신들이 지혜가 있고 성경을 많이 안다고 착각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종교적으로 열심히 있고, 헌신했다 하더라도 만약 그에게 천국이 감추어졌다면 이것은 큰 비극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천국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누가 천국을 느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의하면 어린아이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은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인은 천국을 깨달을 수 없고 아이들만 천국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연령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⑴자신이 연약함을 아는 자를 의미하고, ⑵겸손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진실합니다. 순수합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⑶마음이 옥토처럼 잘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순진성입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한마디로 여기서 '어린아이'라는 말은,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들과 반대의 뜻입니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며 교활하지 않고 순진하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세상 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아닌 영적이며, 신령한 영혼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마5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영혼,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할/
  천국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감사는 어떤 감사입니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타나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천국은 오히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겨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지적인 교만이 천국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입니다. '풀루머'라는 사람은 '복음의 정착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고 했습니다. /아멘!/

 

  ▶26절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여기서 '옳소이다'라는 말은 '맞습니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점이 있고, 하나님의 관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천국에 들어갈 자는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훌륭하게 보이는 사람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전1:27-29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혜롭고 슬기롭고 세상 적으로 똑똑한 사람에게는 천국이 가리어져 있답니다. 왜요? 그들의 지식이 그것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천대받고 멸시받지만 그 영혼이 가난하고 진실하며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천국을 보여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큰복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내 속에 완전히 들어온 것처럼 느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생각 만해도 눈물이 쏟아지는 사람, 하나님 생각 만해도 감사가 넘치는 사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느낀 사람이요,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습니다.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할/
  27절의 주제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자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것입니다.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요14:9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친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요17:5절에서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주 후 2000년경에 '저스틴'이라는 변증학자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보려고 가진 노력을 하였으나 알 수가 없어서 고민 속에 빠졌습니다. 그가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니는데 어떤 사람이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내고 있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닷물이 얼마인가 되 보는 것이요?' 저스틴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요 불가능한 일'이라며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오히려 '당신은 나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요'라고 대꾸하면서 '어떻게 인간의 머리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계시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라고 말하고는 어디론지 사라졌다고 합니다.
  결국 저스틴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기독교를 변증하다가 순교를 당한 사람입니다. '계시'란 '감춰진 것을 드러낸다. 펴 보인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을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를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믿/ 28절의  주제는 안식의 초대입니다.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초대를 받습니다.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이 울부짖으며 아지랑이 아롱대는 봄 동산의 초대는 아가씨들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또 시원한 바람, 그칠 줄 모르는 바다, 녹음방초 우거진 낭만이 긷든 여름, 산과 강은 젊은이들에게 낭만을 줍니다.
  가을은 어떻습니까? 단풍이 붉게 물들고 황금 물결치는 오곡백과의 초대, 우리를 풍요롭게 해줍니다. 그런가 하면 눈 덮인 겨울 설경은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답습니까? 이와 같은 초대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자연의 초대입니다.
  이와는 달리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초청이 있습니다. 생일초대, 약혼식, 결혼식, 개업초대, 회갑잔치 등, 그런데 이런 인간들의 초대는 극히 제한된 초대요,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과의 초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청이 있습니다. 여기는 차별이 없고 상하가 없습니다.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부자도 가난한 자도 병든 자도 건강한 자도 실패한 자도, 성공한 자도 남여노유 빈부귀천 막론하고 누구나 제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 누구라도 일단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아멘입니까?/ 본문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을 향해 천국에서 들리는 음성이요, 하늘의 초청입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심령이 가난하고 진실하고 겸허한 영혼들을 향하여 천국의 문을 활짝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거지나 창녀도 살인자도 죽을병에 걸린 자도 누구나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가정에서 쫓겨나고 갈 데 없이 버려진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인생의 본질'이 '수고하고 짐은 지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들이 지고 있는 짐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 짐은 전통적인 짐이었고 율법의 짐이었고 유전의 짐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 그 전통의 짐, 유전의 짐, 율법의 짐을 지라고 강요했습니다.
  거기에 백성들은 각자의 생활에서 주어지는 짐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죄의 짐, 운명의 짐, 질병의 짐, 죽음의 짐까지 포함되었습니다. 또 당시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로마의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무 소망의 짐이 가장 무거웠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짐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내가 영적 해방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마음의 고통에서 자유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죄의 속박에서, 율법의 구속에서, 정신의 모든 불안에서 해방을 얻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할/
  ▶인도의 성자 '선다싱'은 불교를 열심히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기독교를 반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을 불태우고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 18세가 넘어서자 그의 마음에 불안과 초조함이 그를 짓눌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지런히 석가의 가르침을 읽었습니다. 또 여러 수도승들을 찾아가 보았으나 그 마음에 번민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선다싱은 불안과 공포와 초조함과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결심했습니다. 그가 자살 직전에 생각하기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성경책을 펼쳐보았습니다. 그가 편 곳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선다싱은 두 눈이 확 띄었습니다. '그렇구나, 예수님 안에 참 안식이 있었구나' 새로운 광명을 발견한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히말라야산맥을 넘나들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고 주의 사랑을 실천했고, 큰 능력을 얻어 인도의 사도 바울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수고한다'는 말은 '사서 고생하는 능동적인 고생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잘못했거나 죄를 지어서 하는 고생이 아니라 '스스로 고생을 만든 것'입니다.
  '무거운 짐'은 피동적인 고생입니다. 원치 않은 환경 속에서 주어진 고생입니다. 그렇다면 왜 언제부터 이 수고와 무거운 짐이 우리에게 왔습니까? 한마디로 죄 값에서 온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전에 에덴동산은 아무 짐이 없는 즐거운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은 낙원, 파라다이스였습니다. 항상 그곳에 기쁨이 있었고, 근심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범하므로 그 에덴에서 쫓겨난 후로는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게 되었고, 인간은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만 먹고 살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고난을 당하든지 원치 않는 고난을 받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은 다 고생 속에 삽니다. 저 사람은 고민이 없겠지? 하고 만나보면 고민이 몇 배나 더 있습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고민이 다 있습니다. 있는 것도 고민, 없는 것도 고민, 부부간의 고민 등, 화려하고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생은 고뇌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남몰래 흘린 눈물과 한숨을 다 모아 본다면 얼마나 많을까요? 사람들은 겉으로는 웃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우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남모르는 한숨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 아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다는 것이 죄로 인해 저주받은 인생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절망하는 인생을 향해 두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 길에 나타나는 일상의 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짐을 잠자리까지 가져갑니다. 그래서 잠이 평안치 못합니다. 어떤 분들은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잠자리에 갈 때는 놓아야 하는데 포기를 못하고 내려놓지를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머릿속이 복잡하면 온몸이 경직되어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습니다. 놓아야 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또 운명의 짐이 있습니다. 이것도 참 무거운 짐입니다.
  ▶또 욕망의 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욕망은 한이 없습니다. 이 욕망은 가장 큰 바다와 같습니다. 이 바다가 큰 사람일수록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을 조사했습니다. '10억 원 이상 돈을 준다면 당신은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전체에서 53%가 예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관계의 법을 무시하면서까지 돈 버는 것만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를 중시하는 삶입니다. 돈은 언제 사라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금통장에 예금하지 말고 인간통장에 예금해야 하는 것을 오늘 너무 소홀히 하고 살아갑니다. 이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지 않으면 결국 부모도 형제도 배반하게 됩니다. 가족갈등이나 형제 갈등 그리고 배반 등이 거의 모두가 이 돈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그 욕망을 포기하기 전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불화가 끝나지 않습니다. 빨리 내려놓아야 합니다. 조금 손해보고 내려놓으면 모두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게 와서 배우라 그리고 내 멍에를 메라'고 부르십니다. 
  ▶또 '관계의 불화'의 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은혜는 화목입니다. /믿/ 욥22:21절에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고 했고, 잠21:9절에서 '다투는 여인과 큰집에서 사는 것 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좋다'고 했고, 잠17:1절에서 '제육이 가득한 집에서 다투는 것 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한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짐 중에서 또 무거운 짐은 이 관계에서 오는 갈등의 짐입니다. 부부는 참 좋은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고 이웃이고 동반자이고 평생 동행자입니다. 그런데 관계가 이렇게 좋지만 그것도 관계가 좋을 때 좋은 것입니다. 서로 관계가 악화되면 이 관계처럼 무거운 관계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혼 사유 중에 가장 많은 사유가 성격 차이입니다. 관계가 안 좋아지면 그때부터 사사건건 충돌하게 됩니다.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부의 불화의 이유를 보면 대부분 '내 기준대도 하라'는 요구 때문입니다. 서로 상대방을 이기려 하고 길들이려 하고 내 방식대로 따라오라는 요구가 많습니다. 아주 서툰 삶의 방식입니다. 어떻게 내가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서로 맞추려고 해야 합니다. /할/
  어떤 부흥사가 부흥회를 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찬 바다는 '썰렁해'이고 가장 뜨거운 바다는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은혜를 받은 어느 집사님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찬 바다는 썰렁해인데 가장 뜨거운 바다는 무슨 바다인줄 아느냐?' 그랬더니 남편이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오늘 내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나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묻자 남편이 '아이고 열바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평생 걸어가야 할 그 두 사람의 짐이 삶을 더 무겁게 하고 힘들게 하고 더 고달프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게로 와서 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할/

  ▶주님의 초청은 어떤 초청인가?
  ⑴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찾으려 노력하다가 지친 사람들, 선해지려고 노력하다가 절망에 빠진 사람들, 자기의 사명을 찾으려다가 지치고 실망한 사람들 등입니다.
  ⑵죄의 짐 진자들을 오라고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무섭습니다. 짐 중에서 이 죄의 짐이 인생을 가장 고뇌스럽게 합니다. 이 죄의 짐은 보이지는 않으나 마음을 사정없이 짓누르고 생각을 억압하고 온몸을 짓누릅니다. 그리고 이 죄의 짐은 기쁨도, 즐거움도, 행복감도, 재미도, 평안도 다 뺏어갑니다.
  16세기에 면죄부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어 지옥 불에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무거운 죄들이 면죄부 한 장만 사면 용서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면죄부는 처음에는 선행자에게만 주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도 면죄부를 주었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돈이 부족하니까 앞으로 지을 죄에 대해서도 미리 앞당겨 면죄부를 발급하였습니다.
  이 면죄부만 사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면죄부를 사 갔습니다. 이 죄의 문제는 이렇게 누구에게는 심각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숨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어디 가서 숨겠습니까? 세상에서 살인죄를 지으면 어디 가서 숨어살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 어디라고 숨어살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와서 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열 번, 아니 백 번이라도 찾아가야 합니다. 염치는 없지만 또 찾아가야 합니다. 그때 내 무거운 짐이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걱정할 것을 위해서 걱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걱정할 것은 '나는 천국에 갈 것인가' 하는 걱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죄 속에 방황하는 자들을 오라고 했습니다. 마9:13절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십니다. 
  ⑶질병의 고통 받는 자로 오라고 했습니다. 사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눅5:17절 하반절에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할/
  ⑷육신의 짐, 생활의 짐, 자녀들의 염려도 다 주께 맡기라고 말씀하십시다.
  여러분, '인간이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도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 신앙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할/
  ⑸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자도 다 초청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본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면이 있습니다. 한 면은 인간의 측면이요, 다른 면은 하나님의 측면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나 자신이 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길은 예배를 통하여 만나는 길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요6: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할/
  다음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쉰다'는 말은 '새롭게 한다, 다시 살려준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쉴 곳을 찾아 쉬어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음악에도 쉼표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내가'라는 말과 '마음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뜻은 참 안식을 주님이 주시는 참 안식은 마음에 쉼을 얻는 것입니다. 찬478장을 작사한 쿠싱은 '주 날개 밑 내가 평안히 쉬네/밤 깊고 비바람 불어 쳐도/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주 날개 밑 즐거워라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라고 노래했습니다. /할/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이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⑴짐을 덜어 주시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다 내게로 오라' 얼마나 다정한 초청의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너희가 정말 나를 믿느냐? 그러면 그 짐을 다 내게 맡기라'는 뜻입니다. 시37: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그리고 잠16:3절에도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할/
  어떤 사람이 늘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지고 있는 짐은 너무 무거워' 그러면서 늘 지쳐서 힘겨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다가 지쳐서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 설원 풍경이 나타났습니다. 소복하게 쏟아진 눈길 위로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 보니까 한 사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이 몹시 지쳐 있는데 또 한 사람이 그를 업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이 생각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도 나처럼 지쳐 있구나' 그런데 유심히 보니까 업고 가는 사람은 주님이었고, 등에 업힌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고맙게도 주님께서 꿈속에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해 주셨던 것입니다. /할/
  ⑵쉼을 주시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진정한 쉼은 예수께 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쉼은 가정에 가야 얻을 수 있고, 영의 안식은 주님께 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참 안식처이고 쉼터입니다.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신앙 인들의 고향이고 안식처입니다. /아멘!/
  가끔 어떤 중년 신사 한 사람이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고 갑니다. 신분도 밝히지 않고 낮에 와서 한참 기도를 하고 갑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모습이 아주 특이합니다. 와서는 혼자 앉아서 큰 소리로 실컷 울고 갑니다. 참 푸짐하게 울면서 얼마 동안 기도하고는 돌아갑니다.
  언젠가 그 사람이 그렇게 기도하고 나오는데 그 교회 장로님과 딱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민망해 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렇게 한번 풀고 가야 당분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인고 하니 교회가 고향이라는 말입니다. 고향이기에 와서 그렇게 실컷 울고 가면 상당 기간 동안 위로가 되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
  ⑶감당할 힘을 주시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아무 짐도 지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주님께 모두 갖다 내려놓는다고 해서 아무 짐도 지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본적인 짐은 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부모 공경의 짐은 져야 합니다. 그 짐은 아무리 무거워도 져야 합니다. 불신자들보다 더 철저하게 져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의무의 짐도 져야 합니다. 국민의 의무의 짐도 져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실패의 짐도 져야 합니다. 나의 실패가 주님의 뜻이라면 그 짐도 기쁨으로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종말을 맞이했을 때 죽음의 짐도 져야 합니다. 그것은 누가 대신 져 줄 수 있는 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게로 오라 와서 내 멍에를 메라,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짐을 질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믿/
  하나님은 사람이 약하면 약한 대로 사용하시고, 강하면 강한 대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환경에 맞게 감당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감당할 힘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
  ⑷깨달음을 주시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때로 몰라서, 무지해서 가벼운 짐인데도 무겁게 지고 사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생각에 따라서 짐이 무거울 수도 있고, 가벼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송구봉이라는 사람이 지은 한시 가운데 '족부족'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족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여유가 있고 족하지만 부족하다고 여기면 언제나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9-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안식을 얻는 구체적인 비결 두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이 만들어 주신 멍에를 지는 일'이요, 두 번째는 '예수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내 멍에를 매라' 지금까지 나 혼자 매던 그 멍에를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 즉 같이 매는 멍에를 매라는 것입니다. '내가 걸머메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나에게로 가져오너라. 그리고 내가 주는 가벼운 짐인 사랑, 축복, 은혜, 감사, 기쁨의 짐을 가져가라'고 하십니다.
  더러운 것 가져다 놓고 깨끗한 것을, 무거운 것 가져다 놓고 가벼운 것을, 죽을 것 가져다 놓고, 영원히 사는 것을 가져가라는 교환 조건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거스틴은 '이 짐이야말로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늘을 날을 수 있는 날개'라고 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이 말씀은 자신이 메시야 임을 공개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온유와 겸손의 대명사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칭호였습니다. 그리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은 '내가 곧 길이고 방법이고 모든 구속에서 헤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제자가 되라'는 당부입니다.
  제자는 그의 스승에게 배우는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배워야 잘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인생이란 전부가 배우는 과정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을 배웁니다. 사람되는 법을 배웁니다. 평생 죽는 순간까지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본 교과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은 곧 예수를 배운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다는 말은 예수님을 배워 구원받은 인생을 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배우라는 말씀인가?
  ⑴주님의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벌판을 질주하던 고집 세고 거친 야생마를 잡아서 훈련 시켜 온순하게 만들어 교통수단으로 쓸 때에 파생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온유라는 말은 원래는 야생마처럼 거칠고 난폭한 성품이었는데 예수님에게 길들여져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변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아멘!/
  ⑵주님의 겸손을 통한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겸손하니'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곳에서 아버지의 뜻인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좋게 여기도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주님께 맡기는 비결은 바로 온유와 겸손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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