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63강)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 ① (마 12:1-8)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14

(제63강)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 ① (마 12:1-8)

 

  마18장은 예수님은 오랜 전도 여행을 마치시고 갈릴리 가버나움에 돌아오셨을 때 제자들 간에 '누가 더 높으냐?'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 높아지느냐의 문제는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 이대로, 인간 모두가 생각해 왔던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쟁론하다가 결론이 나지 않자 드디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천국에서 누가 큰 자니까?'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가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19:1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어린이를 칭찬하시면서 '천국에서 큰 자, 천국의 주인공'이라고 하시면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있습니다.
  ⑴진실합니다. 정직합니다. 숨김이 없고, 가식이 없고 꾸밈이 없는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⑵겸손합니다. 겸손하기 때문에 배우면서 자랍니다. 겸손한 자는 새로운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려 합니다.
  ⑶신뢰심, 즉 믿음이 강합니다. 어른은 독립성을 자랑으로 삼고, 자기를 과시하려 하지만 어린이는 부모를 의지하고 부모의 말을 들으면서 성장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아이입니다. 성도는 아버지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야 천국백성이 됩니다.
  ⑷어린아이는 돌이킬 줄 압니다. 어른이 되면 체면과 가식이 많아지고 책망을 듣기보다는 자기 합리화와 변명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책망을 들을 줄 알고 금방 돌아설 줄 압니다. 회개가 있고, 눈물이 있고, 울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큰 자, 천국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은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요? 엡6:4절을 보세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한마디로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이삭이라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했을 때, 두 말 없이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비록 내가 많은 자식이라도 그 생명을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127: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할/
  부모들은 자식을 키울 때 하나님께서 한 생명을 내 가정에 보내셔서 나로 하여금 키우게 하셨다고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키워야 합니다. 또 자녀를 축복기도 가운데 키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은 부모가 자식에 때에 축복하는 기도 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삭이 야곱을 12아들은 축복기도 했습니다.
  진실한 신앙 가정에서 진정한 자녀가 자랍니다. 모세에게는 훌륭한 어머니요, 요게밧의 신앙교육이 있었고, 사무엘에게는 어머니 한나의 기도가 있었고, 디모데에게는 어머니 유니게의 성경 교육이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신앙 안에서 양육시켜야 합니다. 신앙의 자녀는 절대로 딴 길로 가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 된 우리가 바로 신앙의 길로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제목 소개!▶

 

  구약의 레위기서는 우리에게 귀한 규례를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행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책입니다. 레위기는 가장 중요한 요절을 레11:45절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당신께 속한 당신의 자녀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레11:45절에서 말하는 '거룩한 자니라'는 말은 윤리 적은 개념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개념은 제사의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별되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 믿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별된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구별된 생활의 가장 대표적이고 중요한 것이 바로 주일 성수입니다. 이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때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저 사람들 성경책 들고 교회에 가는구나, 오늘이 예배드리는 날인가 보다, 저 사람들은 신자들인가 봐' 그들과 신자들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거룩한 주일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사이에 벌어진 안식일 논쟁입니다. 즉 형식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 또 의식주의자와 은혜주의자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에 대하여 뭔가 트집 잡을 것이 없을까? 곤경에 빠뜨리고 제거시킬 만한 무엇이 없을까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기회는 이때다' 하고 시비를 걸어온 것입니다.
  본문을 잠시 간추려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는 중에 제자들이 몹시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항의했습니다.
  외식 자들의 눈에는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을 추수로 보았고 그것을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타작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남의 밀을 낫으로 베지는 못하나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허용된 것'입니다(신23:25).
  그때 예수님은 다윗이 시장할 때에 성전에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은 일을 상기시키면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겠습니다.

 

  ▶1절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가실 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안식일은 원어로 '샤바트'인데, '그치다, 그만두다, 쉬다'라는 뜻입니다. 이 안식일에 관한 계명은 언제부터인가? 이 제 4계명은 아담 때는 없었습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제 4계명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 이전에는 안 주셨을까?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명령하지 않아도 그들이 지켰기 때문에 특별히 엄격한 이런 계명을 주시지 않아도 됐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분명히 제 7일에 하나님께서 쉬셨다고 합니다. 하나님만 쉬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도 그 날은 쉬었습니다. 그때 쉰다는 말은 단순히 낮잠을 잔다든지 일을 안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날은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날로 알고 그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기 때문에 구태여 그들에게 명령을 주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부터 이것이 막 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으로써 선민으로써 가나안 땅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40년 간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선민으로 살 것을 가르치고 훈련시킨 것이 바로 시내 산에서 주신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 기념일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잊어버렸고, 마침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날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고 보다 더 올바른 관계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에 '이 안식일 날'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 보면 이것은 좀 기쁜 나쁜 일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남의 밀밭에 들어가서 이삭을 짤라 먹다니...' 그러나 구약의 배경을 보면 이 사건은 굉장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배고픈 주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런 행위는 율법에 보장된 것입니다. 율법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배고픈 사람들이 남의 밭에서 시장기를 면할 수 있도록 보장하였습니다.
  신23:24-25절에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
  구약의 율법은 이렇게 자비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장치를 통해 유대 사회가 서로를 배려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배고파서 죽는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것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란 그 정신이 자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위한 것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위해 율법이 존재하는 것임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율법이 사람을 얽어매기 위함이 아니고 사람을 편하게 살도록 배려하기 위한 장치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할/
  구약의 정신은 여행자가 또 나그네가 배고플 때 포도밭에 들어가서 시장기를 면할 정도로 포도를 따먹고, 곡식을 배며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단 포도를 따서 집으로 가져갈 수는 없고 또 곡식에 낫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만주지방에 가면 옥수수 밭에 들어가서 따먹는 것을 아무리 따먹어도 괜찮은데 그것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가면 죄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정신과도 같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을 따먹은 것은 도적질도 아니요, 구걸도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에 시장기를 때울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법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법을 비판하고 나선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하나님의 제도를 종교적인 여러 제약으로 싸서 인간의 율법으로 바꾼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인가? 2절에 보세요! 바리세인들입니다.

 

  ▶2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이들은 말 이삭을 잘라먹는 제자들의 배고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율법의 문구에만 관심을 가졌고 이것은 그 문구를 이용하여 사람을 얽어매고 죽이려는 불순한 의도임이 본문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진정한 정신인 자비는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잘못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잘못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비판하고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본문 2절에서 몇 가지 진실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⑴'바리새인들이 보고' 바리새인들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그 사건을 목격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고 악한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약점을 잡으려 했습니다.
  요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파 놓은 함정에 그 여자가 빠졌습니다. 그 기회를 포함해서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⑵이삭을 따먹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하고 있는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가 책임을 지게 되고 학생이 잘못하면 선생에게 그 책임이 미치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공격하기 위해 이 문제를 들고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⑶그들이 문제삼는 것은 곡식을 따먹는 것 자체보다도 안식일을 범했다는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원래 출20:8-11절에 있는 제4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이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은 귀한 날입니다. 거룩한 날, 축복된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다고 성경에 없는 것까지 만들었습니다. 즉 안식일에 하지 못하는 일 39까지를 정하고 그 하나 하나가 또 여섯 개의 세목으로 구별되어 이를 안식일에 행치 못하도록 했습니다.
  ▶즉 234가지인데 몇 가지만 알아보겠습니다.
  ⑴안식일에 글자를 두자 까지 쓰는 것은 용납되지만 두 자 이상 쓰는 것은 죄입니다.
  ⑵옷을 깁는 바늘 한 개라도 옮겨 놓으면 운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안식을 범하는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⑶안식일에 사람이 위기에 처해도 도와주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9절 이하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고 넘어졌습니다.
  ⑷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도 1.8Km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예수님이 지키나 안 지키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15:3절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단호히 책망하셨습니다. 계22:18-19절을 보세요!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그 마음보다는 자기들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고 기득권을 잡으려는 도구로 하나님을 이용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트집 잡고 제거하려고 한 것은 기득권싸움입니다.
  요즘 정치계나 종교계나 어디나 할 것 없이 소위 말하는 기득권자들 때문에 문제입니다. 이 기득권자들은 자기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권한과 좋은 것들을 잃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을 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 있어서는 바리새인, 사두개파, 엣센파, 열심당원파가 있었는데 모든 인기가 예수님께로 가고 그들은 국민들의 시선에서 멀어졌고, 존경도 못 받게 될 것 같아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공모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기초로 하여 대답했습니다.

 

  ▶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님은 여기서 두 가지 구약의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⑴유대인이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다윗의 예입니다. 삼상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니다 너무 시장하여 놉 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갑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성전 안에 있는 제사장만이 먹는 진설병을 줍니다.
  우리는 성막을 배웠습니다. 성소에는 그 안에 분향단이 있고, 좌 쪽에는 금촛대가 있고, 우편에는 떡상이 있는데, 이 떡상에 12개의 떡이 놓여있습니다.
  이것은 12지파를 상징한 것이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양식을 의미하는 떡인데 이 떡은 제사장이 매주 금요일에 구워서 그 다음날 안식일에 하나님께 바칩니다.
  안식일이 지나면 그 떡을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그 떡을 먹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건은 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러한 예를 들어서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다만 구약에서 다윗의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나치리만큼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을 성경의 근본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 예를 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기본 관점은 '안식일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니 너희가 안식일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해석해 놓은 조상들의 유전에 대해 사람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 제동을 건 것입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은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소년들에게 떡을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바리새인이라고 한다면 시장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는 당연히 용납했어야지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⑵5절은 레24:8-9절에 있는 말씀인데 제사장들이 안식 일날 성전에서 오히려 많은 일을 합니다. 번제를 드리기 위해 짐승을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그것을 번제단에서 태우는 일등은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전 봉사를 하려면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주일을 위하여 회중을 모으기 위해 수송하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일은 주일을 범하는 일이 아님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주의 날 봉사하는 것은 주님을 위하는 일이지 주님의 일을 거역하거나 방해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할/
  안식의 참 의미는 무슨 일을 하고 안하고 무엇을 먹고 안 먹고 가 아닙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리듬입니다. 창조와 안식,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원칙입니다. 창조 없이 안식 없고, 안식 없이 창조 없습니다.
  안식이란 인생이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누리고 기뻐하고 감사하여 휴식을 취하며 새롭게 일할 수 있도록 힘을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믿/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감격하는 것이고, 구원 주 예수님을 만나 감격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에게 안식이 있습니다. 그 안식은 하나님의 위로와 평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더 더욱 굳게 붙잡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이 자리가 안식의 주인이신 주님 만나는 자리입니다.

 

  ▶6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만일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성전을 봉사하는 일이 그들의 직무상 적당한 일이라고 한다면 제자들이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다니면서 시장해서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숭배 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성막, 성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믿/ 요2:19-20절에서 예수님께서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향하여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보다 더 큰 것입니다.

 

  ▶7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호6: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서가 구약에서 복음적 요소는 가장 확실하게 나타낸 성경 중의 하나로써 범죄하고 타락한 고멜을 용납하여 다시 불러오도록 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 호세아가 기록한 말씀이 바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입니다. 하나님께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는 진정 사랑을 베푸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네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형제와 싸우고 미워하고 사기를 치고 거짓말하고 상처를 입히고 그대로 와서 경건한 예배의식에 아무리 참여 해봐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식이나 의식 그것보다 우리마음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말로만 아멘하는 신앙은 하나님이 웃으십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사랑을 알고 감사, 감격하는 마음으로 이제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아멘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본문의 바른 뜻은 가난한 자와 고통 받는 자를 사랑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보고 시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먹을 것을 좀 제공해야겠다'는 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안식일을 범하고 율법의 계명을 대적했다'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는 형식적인 신앙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8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⑴안식일은 어떤 날인가? 유대인들이 휴일로 지키는 토요일을 말하며 히브리어 샤밧(shabbath)은 '쉬다' 도는 '중지하다'라는 뜻을 어근으로 합니다. 안식일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6일 간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 일째 날에 안식하신 것에서 유래합니다(창2:1-3).
  특별히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만드신 것으로, 이 날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필요는 물론 우리의 전인적이며 신체적인 요구까지 충족되는 날이었습니다(출23:10-12/막2:27). 모세는 시내 산으로 가는 도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지키라고 명령했고요(출16:23),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을 뿐 아니라 안식일을 범할 경우엔 돌로 쳐서 죽였으며(민15:32-36), 선지서에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사56:2/렘17:19-27/겔44:24).
  ⑵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거룩한 휴식의 날인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세대를 거쳐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안식일은 창조사역의 일곱 번째 날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땅에서 구원하신 일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신5:15). 또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 관계에 있음을 상징하여, 안식일을 준수하느냐의 여부가 곧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헌신의 척도가 되었습니다(출31:12-17/사58:13-14).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동으로부터 휴식하는 것을 통해 안식일을 준수했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종이나 집안의 짐승까지도 일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출23:10-12).
  ⑶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안식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히브리 구전 율법서인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의 일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밭갈이, 파종, 수확, 건물을 짓거나 부수는 일, 방직, 바느질, 사냥, 도살, 망치질, 요리, 빵 굽는 일, 글 쓰는 일, 불을 켜거나 끄는 일 등입니다.
  이것들은 '토라'로부터의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정해진 것들이지만 점차 더 많은 제재들을 부가하여 율법을 확장시키려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이렇듯 안식일에 대해 예수님과 견해를 달리한 바리새인들은 점차 예수님과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은 병 고치는 일, 길가 밀밭의 이삭을 잘라먹는 일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안식일을 만들었으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응수하셨습니다(마12:12).
  예수님은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음'을 들어(레24:8-9) 성전에서는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을 만큼 높은 권위가 있지만, 예수님에게는 성전보다 더 큰 권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6).
  또한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라고 하시며, 안식일의 근본 정신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마음이 전달되는 데 있음을 밝히셨습니다(7). 그리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할/
  ⑷본문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주일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가장 큰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하를 창조하신 일입니다. 이 일을 마치시고 하나님은 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이 율법에 의한 안식일입니다.
  신약에서 가장 큰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날은 '주의 날' 곧 그 날을 주일로 지킵니다. 그리고 이날 곧 부활 후 40일 만에 주님이 승천하셨고, 승천 후 10일 만에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120문 도가 성령을 받고 교회를 세웠으니 바로 이날도 주의 날이며 오늘의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의 완성인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의 완성 자이신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안식일의 완성인 주일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우리는 줄곧 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이라는 말속에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안식일과 주일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그 말의 사용부터 잘 사용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오늘 거룩한 안식일 날'이라고 하는 것은 옳은 표현이 아닙니다. '오늘 거룩한 주일에'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주일날 예배하는 것으로 주일은 온전하게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가운데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날 예배 한번 참석하는 것을 굉장히 크게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것으로 주일성수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율법적인 수준의 주일 성수'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 자이십니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러한 율법의 테두리에 머무는 주일성수를 원치 않으십니다. /믿/
  눅6:6-10절에 보면, 주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비방하는 이들은 그가 안식일을 범했다고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매'(9)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를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일은 선을 행하는 날로 지켜야 합니다. 주일은 생명을 구하는 날로 지켜야 합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은 이러한 날로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
  ▶초대 한국교회사에 보면, '날 연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연보는 말 그대로 '헌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날 연보'는 말 그대로 '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주일로 정하여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듯이, 초대 한국교회 성도들은(우리의 선배들은) 일주일 중에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을 정하여 그 날 주를 위하여 이웃에게 봉사하곤 했습니다. 이 날 성도들이 모여서 지역사회를 위해 구제하기도 하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아 주기도 하고, 전도하기도 하고,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이것이 초대 우리나라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날 연보' 전통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삶인지 모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성도들만이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백 여 년 전에 일제에 의해 강점 당해 고난 중에 있는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그런 아름다운 삶을 친히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런 좋은 전통을 오늘날도 계승해야 합니다. /아멘!/
  ⑸여기서 안식일과 주일에 대하여 다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안식일은 히브리어로 '삽바톤'이라는 말로, 그 의미는 일곱 번째 되는 날이라는 뜻이며 몸과 마음을 쉰다는 뜻입니다. 창2:2절에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 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주일은 영어로 Lord's day로 '주인의 날'이라는 말인데 다른 말로 말하면 '만물과 만유와 인간의 주인이신 주님의 날'이라는 말입니다. 계1:10절에 사도 요한이 예수를 증거 하다가 밧모섬으로 귀향을 가서 신령한 체험을 하고 고백하기를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안식일은 창조 기념일이고 주일은 새 창조 기념일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6일간에 걸쳐서 천지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되는 날 쉬셨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주일은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날이 안식 후 첫날(주일)에 인류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주에서 해방을 시켜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주일날은 우리 주님의 새 창조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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