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강)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 ② (마 12:9-21)
안식일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만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 주신 축복의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던지 10계명에 넣어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날 가운데 최고의 날인 이 축복과 안식과 자유의 날을 단순히 인위적으로 거룩하게 지키는 형식과 관습의 날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기쁜 마음으로 지켜야 할 안식일이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39가지를 정하고 그 하나하나에 6가지 세칙을 부쳐 234항목을 만들어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 마12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씌워놓은 껍질을 벗겨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제사장이 주는 떡은 안식일에 먹어도 좋고 제사장은 성전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괜찮다는 구약의 율법을 설명하시면서 '성전보다 더 큰 예수 그리스고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의 정의는 '성전 안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아멘!/
②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와 긍휼입니다. 7절에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기본정신을 망각한 채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법규와 세부규칙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로 안식일 준수의 여부를 판가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법규를 지키거나 제사를 드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자비와 긍휼을 원하십니다. /할/
평생 앞을 못 보던 소경이 안식일에 눈을 뜰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날 수 있고, 귀신들린 자가 자유를 얻을 수 있으며 비록 바리새인들이 정한 안식일의 법규를 무시해도 그것은 '안식일을 정말 잘 지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이 정신을 똑 바로 이해했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③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의 뜻입니다. 주인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을 어떤 사람에게 주고 싶으면 그냥 주는 것입니다. 물질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누가 왜 주느냐고 따지고 시비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에서는 창조기념일을 안식일로 지켰다고 했습니다. 신약에는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부활 기념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문자 적인 율법주의 안식일교회 사람들은 우리를 일요신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그랬지 '주일을 성수하라는 말이 어디에 있느냐'고 따집니다. 성경은 잘 모르는 초신 자들은 '정말 그래! 성경에 주일 성수하라는 말이 어디에 있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그랬지 않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한말처럼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한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전체를 봐야 합니다. 성경은 전체적인 면에서 신약시대에 있어서 창조기념일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활 기념일인 주일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여져 버렸습니다. 결국 천국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그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이어지고 그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는 천국에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바로 주일에 예수님의 부활로 완성된 것입니다.
⑴창조기념일인 안식일이 그림자라면 부활 기념일인 주일은 실체요 원형입니다. 사진보다는 실물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일이 있기 전에는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주인 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주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⑵계1:10절을 보면 요한사도는 밧모섬에서 주의 날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면서 계시해주셨습니다. 주의 날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늘의 계시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날이 오늘 주일입니다.
⑶초대교회 사도들이 주일을 지켰습니다. 사도들은 주님 부활하시기 전에는 안식일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일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는 주일로 지켰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아주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삶의 표준이고 모델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그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도들은 바로 우리들의 삶의 모델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될지를 가르쳐준 부분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도들이 믿었던 것처럼 그렇게 믿는다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으로 간주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의 표준인 사도들이 주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주일을 우리는 안식일 대신 지키는 것입니다. ◀제목 소개!▶
안식일의 기본정신은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어떤 형식과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칫하다가는 어떤 형식과 틀 속에 갇혀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 예배드리는 형식이 있습니다.
주님은 '예배드리다가 형제의 싸운 일이 생각나거든 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그것이 참된 예배라고 했습니다. 사1장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나에게 가져오는 모든 피에 나는 지쳤다.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수많은 집회도 이제 나는 식상했다. 그 찬송소리도, 그 헌금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너희들이 형제하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무슨 예배냐'고 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용서에 있고, 화해에 있습니다.
본문은 다시 바리새인과 예수님과의 안식일에 대한 논쟁입니다.
▶9-10절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셨는데 마침 그 자리에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돌을 다루는 석공이 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오른손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 중풍으로 오른손이 피가 통하지 않아 말라 버린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어디 두고 보자'는 심사로 예수님을 잔뜩 벼르고 있는 중에 예수님은 저렇게 불쌍한 사람을 보고는 그냥 참지 못하는 분이니 분명히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는 병도 아닌데 안식일에 고치는 것이 가한가 하는 것입니다. 눅13:10절 이하에 보면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진 한 여인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다하여 회당장이 분을 내어 하는 말이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며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는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기서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 사건을 놓고 예수님을 송사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 묻는 말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전통에 의하면 생명이 위급한 경우에는 안식일이라도 병을 고쳐줄 수 있지만 위급하지 않은 경우에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병이 들어 있지만 생명이 위급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말고 그 다음날 고쳐 주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이 항상 지혜롭게 대처했습니다. 처음에는 구약성경을 응용해서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11-1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졌다고 할 때 바리새인들의 규정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건져 주지 않으면 당장 죽는 경우에는 안식일에라도 건져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건져주지 않아도 내일까지 살 수 있다고 판정되면 건져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루 먹는 것, 갖다 주고 다음날 건져주어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런 규범으로 인해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그리고 12절에 가장 본질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에 깊은 의미를 다시 한 번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양보다 인간이 더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살리기 위한 안식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보십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안식일이어야 하고 안식일에 선을 베푸는 것이 참된 안식일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할/
▶13절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면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정신을 보여주시기 위해 내일 고쳐주어도 될 일을 오늘 고쳐주신 것입니다. 좋은 일은 내일로 미룰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일은 오늘 해야 합니다. 내일 미루면 못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좋은 마음이 생겼다면 오늘 결정하십시오, /할/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하실 때 그냥 치료하지 않으시고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야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이 임합니다.
물론 손을 내밀지 않아도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믿/ 우리는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기도의 손, 봉사의 손입니다. /할/
여기서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상고해 보겠습니다.
⑴예수님은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괴롭히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면 올무에 걸립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할/
⑵행동을 통해 안식일을 새롭게 정의해 주셨습니다.
⑶주님은 또 다시 불치의 병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친히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어떤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창피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때문에 할 만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 앞에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습니다.
▶14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여기서부터 그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참말로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인데 예수님께서 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었고, 믿을만한 증거를 많이 보여주었으나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멍청한 사람은 꾀를 내어도 죽을 꾀를 낸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신 것과는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악을 꾀하여 사람을 죽일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안식일에 주인'이라고 한 것에 대한 불만입니다.
▶15절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다 알고 거기를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시고...' 신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머리칼이 몇 개인가를 아시고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무엇을 아셨을까요?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를 아셨다고 우리는 쉽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물론 방법 상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더 큰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해서 무서워서가 아니고 복음을 받지 않기 때문에 떠났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시려고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마다에서 육신의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영혼의 병든 자도 치료해 주셨습니다. /할/
아무튼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병든 자를 보시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모든 병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증거였습니다. 마8:17절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병이 마음에서 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마음이 치유되면 육신의 병까지 치유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지금도 성령의 은사가운데 치유사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추상적인 하나님의 나라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죄 사함 받으면 이 땅에서도 건강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약5:15-16절에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기도는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할/
다만 조심할 것은 '주님은 약을 쓰지 않고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도 약을 쓰지 말아야 하고 병원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사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약5:14절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할 것이니라'
기도만 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기도 없이 현대 의약만 의지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모두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적절하고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치유 자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16절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자기를 나타내게 말라 경계하셨으니' 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사람이 두렵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한 가지 이유는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자기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지금 유명해지면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명해지면 어떤 세력들이 그 주위에 모입니다. 권력 앞에 불순 세력이 모이게 되어있습니다. 옛날의 대통령의 자식들의 주변을 보세요. 김현철씨나 김대중씨의 자녀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조용히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해 놓으신 말씀을 이루게 하려고 했습니다.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을 예언했습니다. 성경에서 제일 먼저 메시야를 예언한 곳은 앞부분에서 말씀드렸듯이 창3: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우리는 '메시야'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 지나가야 우리 신앙에 도움이 됩니다. 메시야란 말은 단9:25절에 나오는 단어인데, 우리 성경에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어떤 사람을 한 분야에서 최고 지도자로 세울 때, 행하는 예식이 '대관식, 위임식, 혹은 취임식'인데 옛날 전제 군주 시대에 왕이 권좌에 오르면서 대관식을 할 때,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인류는 어떤 특별한 사람을 높이 세울 때, 꼭 기름을 머리에 붓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옛날 인간을 위해서 한 왕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왕을 호칭하여 막연히 '메시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워지는 왕마다 혹시 자기가 '그 메시야가 아닐까?'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높여 자칭 메시야라고 했고, 왕의 이름을 천하에서 높여 '황제'라고 칭하기도 했고, 절대자란 의미에서 '가이사'라고 칭하기도 했고, '대왕'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메시야는 그런 절대 권력과 힘을 가진 세상 적인 왕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고, 자기가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그런 왕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 몸을 희생하는 왕,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 받기를 자청하는 그런 고난의 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메시야인가?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야의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호칭합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야라는 말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⑴예수님은 인간과는 다른 신비한 방법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동정녀 탄생이라고 부릅니다. 현대 유전 공학의 발달은 남자와 여자 관계 없이도, 남자의 세포만으로도, 혹은 여자의 세포만으로도 남자나 여자를 복제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마리아의 몸 속에 동정녀 탄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의 세포가 마리아의 난자와 수정될 수 있도록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현대과학은 믿고, 하나님의 전능 성을 믿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도리어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할/
⑵예수님은 고난 당하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분명 왕이셨습니다. 그분의 말 한마디에 바다가 잠잠해 지고,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물러가고, 짧았던 팔이 늘어났고, 절었던 다리가 정상이 되었으며, 소경이 눈을 뜨고, 문등병자들이 깨끗해 지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할/
주님은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왕 예수님의 권세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 전부를 통치하십니다. /믿/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뱀의 후손이란 사탄에게 속한 세속적인 사람들이며, 여자의 후손이란 하나님께 속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불신자와의 의로운 한 판 승부를 벌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면서 세 가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면 됩니다.
첫째는 자신과의 싸움이고, 두 번째는 마귀와의 싸움이고, 세 번째는 세상풍조와의 싸움에서이기고 승리해야 합니다. /아멘!/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신입니다. '죄 용서함의 확신, 구원의 확신,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동행의 확신으로이기고 승리합시다. /할/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 예수가 이 땅에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 어디에 올 것인가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7: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1: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사53:1-9절까지는 예수가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예언했습니다. 특히 4-6절까지를 보세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할/
▶18절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8-21절까지는 사42:1-4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나의 택한 종'은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나의 택한 종'이란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란 단어로 하인이나 노예의 개념이 아닌 신뢰받고 총애 받는 아들이란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고 신뢰하는 종 그 종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분이 바로 메시야이십니다. 빌2:6-7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이 종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택함을 받아야' 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존재'여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 두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여자 중에서 한 여자를 택한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 여자도 택하고 저 여자도 택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축복 받은 존재입니다. 엡1:3-4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택해 주셨습니다. 자격도 없는 우리를 조건 없이 하나님이 사랑으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종이라고 했습니다. 마3:17절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미 증거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에게 임하시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
마17장의 변화 산에서도 홀연히 빛난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택하신 종이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종입니다. 그 사랑하시고 기뻐하는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또한 메시야의 특징 중 하나는 성령을 무한히 받아야 합니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성령자체이십니다. 그분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메시야의 특징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선포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본 절에서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심판'이란 '복음'이라는 원어와 같습니다. 메시야의 가장 귀한 직분은 바로 이방인에게 구원을 베푸는 일입니다. /할/
▶19절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특징을 또 말씀하고 계십니다.
①'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사53: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어떤 일에도 투쟁하지 않으셨습니다.
②들레지도 않으셨습니다. 큰소리로 소리 지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셨습니다. 그는 한 번도 소리 지르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의 재판 때 사형선고를 받을 때에도 예수님은 조용히 침묵하고 그 불의한 재판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요즘 누구나 자기선전, 자기 과장, 자기주장을 외쳐댑니다. 어떤 사람은 재판정에서는 난동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조용히 침묵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자랑하지도 나타내지도 않으셨습니다.
▶20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여기 '상한 갈대'라는 말은 인간의 마음을 묘사한 말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고, 펄벅은 '우리 민족은 살아있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했습니다. 어찌 여자뿐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갈대와 같습니다.
여기 상한 갈대란 꺾어져버린 갈대입니다. 피리를 만들 수 없는 갈대, 아무 곳에도 쓸 수 없는 갈대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 난 영혼, 그래서 아무 소망이 없는 심령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갈대인데 그 중에도 상처 입은 갈대라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인간은 상처를 쉽게 입습니다.
바람이 좀 지나가도, 태풍이 불면, 전염병이 지나가도, 전쟁이 나도, 경제가 좀 어려워도, 부부싸움 좀 하고서도, 부모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습니다. 또 친구의 충고한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고 평생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상한 갈대와 같은 인생이지만 주님은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상하고 실력 없으면 한 순간에 배신하고 업신여기고 떠나갑니다. 실력 없다고 생각하면 인정사정 없이 짓밟아버리는 것이 세상 인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 감싸주고 안아주십니다. 상처 입은 세리 삭게오도, 간음하다 현장에 잡혀온 여인도,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도 찾아오셔서 다시 세우신 주님이십니다. 시147:3절에 '하나님은 상한 심령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 하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상한 심령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아멘!/
'꺼져 가는 심지' 상한 갈대가 인간의 연약성을 말한다면 꺼져 가는 심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명감이 소멸되어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양심의 불이 꺼져 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신앙의 열정의 불이 꺼져 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엡5: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두 종류의 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연기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연기에는 빛이 없습니다. 불도 없습니다. 타던 불이 꺼지면 연기만 내게 되었습니다. 연기만 있는 곳에는 어둠과 눈물과 염려와 근심이 있을 뿐입니다.
또 하나는 '불이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불에는 빛이 있고 뜨거운 열이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에게는 치유가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방향이 있습니다. 화해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가슴이 있습니다. /할/
중요한 것은 '기도 시간에, 예배 시간에, 헌신하는 시간에, 공적인 모임에 빠지기 시작하면 신앙의 빛과 열을 잃게된다는 사실입니다. /할/
▶21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언제까지 기다리시느냐? 심판하여 이기실 때까지입니다. 복음이 승리할 때까지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이방 사람들까지 그 복음의 소식을 받아 천국 인이 될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참고 오래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할/
결론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구덩이에 빠진 양이 있으면 건져내야 되지 않겠느냐?' 즉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구덩이에 빠진 사람, 우상의 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내야 합니다. 안식일의 참된 개념은 '구원의 최고의 목적이요, 최우선적이어야 하며 최고의 가치에 두라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건지시고 안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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