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67강)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 13:1-2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17

(제67강)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 13:1-23)

 

  마13장에서는 비유가 일곱 가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마5:7장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말씀하셨다고 해서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밭에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는 것도 있었고, 또 더러는 돌밭에 떨어지는 것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는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 다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나아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 복음의 씨앗을 뿌릴 때, 이런저런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길가처럼 마음의 문을 닫아놓고서 아예 복음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돌밭처럼 흙이 얇아서 그저 말씀을 듣는 척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보다는 세상일에 관심이 많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믿음이 깊이 박히지 못하는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 같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옥토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씨뿌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능력입니까? 재능입니까? 말 잘하는 것입니까? 웅변을 잘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그저 뿌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부지런히 나아가서 뿌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할/

 

  ▶1-2절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셨을 때에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때는 아마도 씨앗을 뿌리는 초봄인가 봅니다. 예수님은 밀려오는 군중들을 약간 떠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무리는 해안에 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배가 예수님의 강단이었고, 바닷가에 모여든 큰 무리가 주의 말씀을 받고 있었던 그 날의 청중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바닷가 저 건너편에서 씨를 뿌리는 농부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그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농촌에서는 언제나 일손이 딸리는 곳입니다. 농부들은 잠시도 쉴 새가 없습니다. 이른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 뙤약볕에서 김을 메주고 비료도 주며 비지땀을 흘리면서 수고합니다. 또 병충해를 방지하면서 오래 참음으로 가을에 풍성한 곡식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썩지 아니하는 생명의 씨앗'이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밭'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우리의 마음 밭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아서 정성껏 농사를 짓는 농사꾼과 같습니다. 농부가 풍년이 들기를 원하고 수확을 많이 거두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의 씨앗을 통하여 믿음의 충만한 열매를 많이 수확하기를 원하십니다. 요15: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할/
  본문은 3-9절까지는 비유의 말씀이고, 10-17절까지는 비유의 목적입니다.
  18-23절은 씨 뿌리는 비유를 친히 해설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공관복음서인 막4:1-9절과 눅8:4-8절에서 공동으로 취급한 비유입니다.

 

  ▶3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여기서 우리는 비유란 무엇이며 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비유란 '나란히 던진다, 비교한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원어 적인 말은 '파라볼레'란 말로, '옆으로'와 '던지다'의 합성어인데, 한 사물을 다른 사물 곁에 놓아두고, 대조하고 비교함으로써 그 사물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게 하여 진리를 가르치는 하나의 교육 방법입니다.
  비유란 쉽고 간단하게 말하면 천국의 심오한 영적 세계의 진리를 우리가 잘 아는 이 세상 이야기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유는 굉장히 재미가 있습니다. 비유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해보면 설교는 본문도 잊어버리고 제목도 잊어버리고, 다 잊어버리는데 예화만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화 찾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설교내용에 맞는 예화를 열심히 준비해서 예화설교를 하면 '목사님, 그 예화는 다섯 번째 들어요!' 이렇게 그 예화를 다섯 번째 하는 것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비유예화가 성도들에게 재미도 있고, 기억하기도 좋고 깨닫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문에 맞는 예화 설정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4-9절까지는 18절 이하에 말씀과 묶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까? 제자들이 묻었습니다. '예수님!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쉽게 노골적으로 설교를 하지 않고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11절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1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두 가지 목적입니다. 하나는 '택한 자에게는 천국의 진리는 쉽게 깨닫도록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택함 받지 못한 자에게는 은혜의 수단으로, 쉽게 말해서 저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알려지도록 하나님께서 허락을 했지만 반대로 저들 '불택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택자와 불택자, 그러니까 택함을 받은 사람과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에게는 전부가 다 구원의 비밀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막4:11-12절에서 더 자세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깨닫는 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한마디로 불택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들어도 이해를 못하고, 오히려 비판만 합니다.
  구약에 인물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음행 함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이 범한 죄는 '간음죄, 살인죄'입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는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왕이여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자고 하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사람은 아무 것도 없고, 총 재산중의 하나가 암양 새끼 한 마리입니다. 이 사람은 암양 한 마리를 식구처럼 돌봤습니다. 그런데 부잣집에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 집에 양이나 손을 잡아서 손님대접을 하기가 아까워 가난한 사람의 집에 가서 양 새끼를 강제로 빼앗아서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나단선지자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는데 다윗 왕이 듣고 노발대발하여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마땅하다'고 대노합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외치기를 '왕이여! 당신이 바로 그 장본인입니다.' 이때 다윗이 깨닫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할/
  본문을 보면 네 가지의 밭이 나옵니다. ⑴길가와 같은 밭, ⑵돌밭과 같은 밭, ⑶가시떨기 밭 ⑷옥토 기름진 밭입니다.
  밭에 씨앗을 뿌렸다고 했는데 이 씨앗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여기에서 씨앗입니다. 이 씨앗은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에 뿌리를 내리면 열매를 맺지마는 우리의 마음의 밭이 길가와 같거나 돌밭과 같거나 가시밭과 같으면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주신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도 대개 이 네 가지 마음의 밭인데 똑같은 교회에서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늘 예배에 참석해도 어떤 사람은 열매가 없이 그냥 매일매일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주 짧은 시일 내에 열매를 맺어서 그 생활이 변화되고 가정이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런 마음의 밭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할/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나오는 네 종류의 밭을 자세히 살펴보고, '우리의 마음의 밭이 어떤 밭이 되어야 하겠는가?'를 생각해 보고 도전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①길가의 밭입니다.
  ▶4절 "뿌릴 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길가는 사람들이 왕래함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곳입니다. 이는 곧 마음이 굳어져서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상태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은 복음에 관심을 두지 않고 마음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알량한 학식이나 경험을 최고로 생각하고 그것만을 고집하는 교만과 독선의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를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기에 진리에 대해 불 신앙을 하게 됩니다.
  이때 새들이 와서 씨(말씀)를 먹어버리게 됩니다. 여기 '새'는 '악한 자'로 곧 '사단'(막4:15)이요, '마귀'(눅8:12)입니다. 사단은 진리를 경험할 수 없게 씨앗을 먹어버립니다.
  여기 '먹어버렸고'는 '철저하게 먹다'는 뜻인데 이는 조금도 남김없이 먹어버린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단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치워 버립니다.
  요10: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할/
  또 길가 밭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고작 생각하는 것이 '이 설교는 아무개가 들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⑴완악한 마음, 굳어진 마음입니다. 폐쇄적이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신하의 말도 듣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종국에는 멸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굳게 닫힌 심령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굳게 닫혀진 마음속에는 주일마다 설교를 해도 그 마음속에 다른 것으로 꽉 차 있어서 반응도 없고 감정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교만한 마음에서 옵니다. 성경에서 가장 하나님이 싫어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교만입니다. 특별히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같은 교만한 마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무관심한 마음에서 옵니다. 신앙은 관심입니다. 사랑도 관심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무관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가 지금 어떻게 사는지 전혀 무관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관심입니다. 교회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십시오,
  ▶게으른 마음에서 옵니다. 신앙생활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르고 나태하면 세상일도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게으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자인 '펙크'는 '게으름은 악의 주요 원인이요, 인간관계에서 실패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했습니다.
  게으름의 태도는 '내일로 자주 미루는 습관'입니다. 그런데 그 게으름의 태도로 가장 큰 재미를 보는 마귀는 '내일 마귀'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헌신도, 전도도, 봉사도, 기도도, 다 하기는 하되 지금 오늘 하지말고 내일 하자고 속삭인답니다. 그러니까 내일로 미루는 마귀입니다.
  ⑵깨닫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심판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때에 노아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홍수심판을 자초했던 자들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⑶사탄이 틈타는 마음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즉각적으로 새들이 먹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씨(복음)는 보화와 같습니다. 구약의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보물창고를 적군의 사신에게 보여 주었다가 침략을 당한 왕입니다.
  이것은 마치 도둑에게 자신의 보물 있는 곳을 알려 주는 것과 같습니다. 보물은 자기의 소유가 되는 즉시 숨겨야 합니다. 숨기지 않고 방치 하니까 새들이 와서 씨앗을 주워 먹듯이 사탄이 마음속에 있는 복음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봅니다. 길가에 밭은 굳은 마음, 완악한 마음, 교만한 마음, 거만한 마음 편견과 선입관으로 닫혀있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굳어져 있고 닫혀있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방법이 제일이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제일이고,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의롭고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잠16: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우리의 마음의 밭이 길가와 같은 밭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길가와 같은 밭을 해석한 구절이 18절 이하에서 나옵니다.
  ▶18-19절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같은 내용을 취급한 말씀인 막4: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여기서 예수님은 말씀을 빼앗는 자를 '사단'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 아멘으로 화답해야 그 말씀이 내 말씀이 됩니다. 닫힌 마음은 아멘이 없습니다. 그때 사단이 와서 빼앗아 갑니다.
  이 말씀에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입니다. 존 번연이 신앙생활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무 감동이 없었습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했는데도 수없이 설교를 들어 왔는데도, 종교적인 환경에 젖어있는데도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존 번연이 본문의 말씀을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떨어지는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이 사단이라는 사실 앞에 그는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부터 존 번연이 설교를 듣는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9절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②돌밭과 같은 밭입니다.
  씨를 뿌렸습니다. 돌밭이니까 그 밑에 바윗돌이 있으면 자연적으로 흙이 얇게 깔릴 수밖에 없습니다.
  ▶5-6절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이 말씀은 예수님이 20-21절에 해석하신 것입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러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듣으면서 '맞았어, 그래, 아멘!' 그런 사람입니다.
  어떤 성도는 설교시간에 보면 아멘도 잘하고, 은혜를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 타령입니다. 쉽게 감동되고 쉽게 충동을 받습니다만 이 마음속 깊이 말씀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늘 그 신앙이 시들시들합니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신앙으로 사는 것 같은데 조금 있으면 넘어지고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그리고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에 순종이 없는 사람이요, 불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은 불 신앙과 불 신앙으로 꽉 들어차서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믿는 것도 아닌 미직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뜨겁든지 차갑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은 토해 내쳐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믿/
  이런 사람들은 교회 일을 하다가도 조금만 어려우면 기분 나빠서 일 못하겠다고 그만두는 스타일입니다.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집니다.
  여기 '해'(6)는 환난과 핍박을 뜻하고 있습니다. 여기 '넘어지는'것은 죄에 빠지고, 배반하고 배신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때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으로 인해 희생과 충성이 요구될 때는 거북이 목처럼 숨어버리는 감정적 신앙을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그 어떤 환난과 핍박이 와도 지키는 것입니다. 딤후3: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래서 신앙의 길이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참고 견뎌야 합니다. 찬383장에서 찬송시인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라고 노래했습니다. /아멘!/.
  어떤 사람은 환난이 오고 핍박이 오면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십시오, 그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환난이 오고 핍박이 오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원망 속에 묻히다보면 그 사람은 신앙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여기 돌밭과 같은 밭은 얕은 마음을 말합니다. 돌짝 밭은 곡식이 뿌리를 내리되 깊게 내리질 못합니다. 심지가 깊지 못한 마음에서 위대한 사상이 나오지 않습니다.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는 위대한 사상가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환경을 개선해 나갑니다.
  ▶돌밭과 같은 밭은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인간이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류하려면 얕은 마음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돌 밭 마음은 말씀을 들을 때 깨닫기는 빨리 하지만 의심이 많아 확신에 이르지 못합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곧 말라죽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와 큰 일을 도모하다가는 화를 당하게 됩니다. 말씀에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뿌리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뿌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감정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느낌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만 합니다. /아멘!/

 

  ③가시떨기와 같은 밭입니다.
  ▶7절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실제로 농사할 때에 씨가 가시밭에 떨어지면 가기가 기운을 다 흡수함으로 곡식이 잘 되지 못합니다. 비료를 주어도 가시가 다 빨아먹고 곡식은 잘 자라지 못하며 번번이 결실하지 못합니다. 여기 '가시가 기운을 막았다'라는 것은 숨을 쉴 수 없게 질식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가시밭이 무엇입니까? 이곳은 토양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씨가 떨어졌을 때 뿌리가 나고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만큼 자라다 보니 땅 속에 가시나무 뿌리가 자리잡고 있어 영양분을 다 빼앗겨 버립니다.
  교회에 가시밭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를 열심히 듣습니다. 은혜도 곧잘 받습니다. 믿음자라는 소리가 쑥쑥 납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충성하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주일 받은 은혜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월요일 밤이면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와장창 납니다. 수요일쯤 되면 한숨소리가 푹푹 터져 나옵니다. 금요일쯤 되면 불평소리 터져 나오고 풀이 죽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침내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한두 번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이에 믿음을 잃어버리고 말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봉사도 부지런히 합니다. 행동에도 빈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보면 밑바닥에 가시뿌리가 보입니다. 그 가시뿌리가 은혜의 자양분들을 다 빼앗아 먹고 말았습니다. 그 가시에 남도 찔렸고 자신도 찔렸습니다. 찌르는 인생 실패합니다. 사랑의 보자기로 감쌀 줄 알아야 됩니다.
  ▶왜 가시가 생겼습니까? 언제부터 가시떨기가 생겼습니까? 처음 에덴 동산에는 가시와 떨기가 없었습니다. 저주받을 때 하나님께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겠고, 그래서 창3:17절 이전에는 가시가 없었습니다.
  저주를 나타내는 이 가시는 신앙을 방해하는 악마의 소행으로 나타납니다. 타락이후 가시떨기는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서 자라는 당연한 부산물이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서 은혜는 단절되고 가시떨기는 풍성했습니다.


  ▶가시떨기의 구체적인 이름을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여기서 두 개의 가시를 말합니다. 첫째 세상의 염려, 둘째 재리의 유혹입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눅8:14절에서는 이 두개의 가시 외에 '일락' 즉 세상의 쾌락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또 막4:19절에서는 '기타 욕심'이라는 가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공관복음을 종합해 보면 네 가지의 가시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세상의 쾌락, 기타 욕심입니다.
  ⑴이 세상의 '염려'입니다. 때로 의식주에 대한 염려들이 겉보기에 무해한 것 같으나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속 에 뿌려진 은혜의 씨를 질식시키는 묘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해 무익! 백가지 해가 될지언정 유익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염려는 '메림네오'라는 말로, '물어뜯는다. 찢는다. 쪼갠다'와 '마음'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된 말입니다. 영어의 염려는 '날카로운 이빨로 갈기갈기 찢어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염려는 인간의 행복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입니다.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마6:25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또 마6:27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할/ 벧전5:7절을 보세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아멘!/
  ⑵재리의 유혹입니다. 그러니까 돈에 대한 유혹입니다. 좀 더 많이 가지고 싶은 탐심에 대한 유혹입니다. 탐심에 사로잡히면 천국 가기가 참 힘듭니다.
  예수님께 한 부자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청년은 젊습니다. 관원입니다. 부자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꿇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고 하자 청년은 물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천국을 포기하고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물질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더 성실하게 노력해서 어떠하든지 바른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벌어서 선한 곳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에 매이거나 물질을 사랑하게 되면 안 된다고 성경은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눅12장에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골3:5절에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딤전6:10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서 자기를 찔렀도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주일에도 나가서 일하면 돈을 얼마 더 벌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십일조 안 드리고 모으면 돈이 얼만데..'하고 돈으로 계산하면 헌금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재물을 모으기를 원하십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신8:17-18절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⑶세상의 쾌락입니다. 좋은 장소에서 적당한 휴식을 취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락이 주업이 되고 쾌락이 목적이 될 때 그건 무서운 일입니다.
  ⑷기타 욕심입니다. 끊임없는 욕심을 말합니다. 빈손 들고 온 인생 빈손 들고 하나님 앞에 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울었다고 하는 알렉산더는 '내가 죽거들랑 관에 구멍을 뚫어라. 그리고 내 손을 밖으로 내밀어 벌려 놓아라. 빈손 들고 온 인생 온 세상을 정복했다고 하나 빈손 들고 가는 게 인생이니라' 이게 인생입니다.

 

  ④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입니다.
  ▶8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좋은 땅에 떨어지는 씨는 100, 60, 3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보겠습니다. ▶23절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 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같은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눅8:15절에서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강조 점은 '지킨다'는 것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말씀을 깨달아 지키어 인내함으로 마침내 결실을 맺는 사람들의 마음은 좋은 땅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 좋은 땅은 옥토입니다. 좋은 땅은 열려진 마음입니다. 굳지 않은 부드러운 마음의 밭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단순한 마음입니다. 그저 일편단심으로 섬기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을 받지 않은 마음입니다.
  말씀이 떨어질 때에 그 말씀은 잘 수용합니다. 그래서 곧 회개하고 복음을 믿습니다. 복음의 좋은 밭은 그 말씀을 잘 지키는 잡니다. /할/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 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요, 복입니다. 시49: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⑴좋은 땅도 여러 형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좋은 땅인데 결실은 다릅니다. 어떤 땅은 100배, 어떤 땅은 60배, 어떤 땅은 30배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땅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100배입니까? 60배입니까? 30배입니까?
  좋은 땅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땅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땅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땅은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가 아주 좋은 땅이 되어야 합니다.
  이 비유의 중심교훈은 종자의 문제가 아니라 땅에 관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땅이 좋아야 100배의 결실이 가능합니다. 누구라도 땅만 좋으면 최소한도 30배는 거둘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자기반성과 성찰의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 믿음이 못 자랍니까? 왜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이 없습니까? 그것은 내 마음의 밭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길가이거나 돌밭이거나 가시 떨기 밭이기 때문에 씨가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⑵좋은 땅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토질을 바꿀 수 있습니까? 호10:12절에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하십니다. 묵은 땅은 갈아엎어야 토질이 바뀝니다. 호세아가 말한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은 마음의 밭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땅도, 역사도, 인간도 하나님이 고치십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새롭게 하시는 능력에 덧입기만 하면 우리의 심령의 밭이 옥토가 됩니다. /아멘!/
  결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나 자갈밭과 같은 마음이라도 혹은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이라도 개간하고 갈아 없기를 바랍니다. 이는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지만 오직 성령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할/
  그러므로 성령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 마음에 옥토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풍성한 열매가 100, 60, 30 맺을 수 있습니다. 축복의 귀한 삶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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