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68강) 가라지의 비유! (마 13:24-30, 36-4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18

(제68강) 가라지의 비유! (마 13:24-30, 36-43)

 

  마13장은 전체가 예수님의 비유로 구성되었습니다. 앞에서 배운 1-23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마음의 자세에 관한 중심이 된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해 주셨고, 오늘 본문은 씨 뿌리는 비유의 연속으로 나오는 가라지 비유인데, 이 비유는 앞에서 배운 '씨 뿌리는 비유'와는 각도가 완전히 다른 주제입니다.
  앞에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나오는 그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인데 비해 여기 가라지 비유에 나오는 씨는 하나님의 자녀, 천국백성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주의해야 될 점은 어느 한 곳에 씨를 말씀으로 나왔으므로 모든 성경에서 나오는 씨를 말씀으로 본다면 이것은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보고 예수님이 무엇을 중심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가를 분명히 알고 접해야 합니다.
  본문에 들어가지 전에 몇 가지 단어들을 찾아 그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37절을 보면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즉 택한 백성'이며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39절을 보면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며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사복음서 중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이 비유는 주님이 직접 해석해 주고 계십니다. /할/

 

  ▶24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예수님이 계속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12장에서 나왔듯이 당시 예수님께 대한 격렬한 반대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파, 율법사, 제사장들입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마다 무리들이 따랐지만 무리 속에는 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그들 앞에 또 비유로 베풀어 가라사대' 그러니까 반대 세력들 앞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반대파들과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작전이며, 또 비유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더 받아 넉넉하게 되는 그런 유익을 얻게 하시려고 비유법을 쓰신 것입니다. /아멘!/
  지금도 유명한 정치인들은 비유법, 또는 상징 법, 은유법 등을 씁니다. 비유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당시 반대 세력들, 당시 예수님의 교훈을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 비유가 직설적이 아닌 애매한 말로 들렸기 때문에 충돌이 그 자리에서 직접 일어나지 아니하고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가만히 생각하는 중에 '아 그것이 그런 뜻이구나!'하고 깨닫게 하는 그런 효과를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여기서 천국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천국을 이해할 때 저 세상 '하늘나라'로만 이해하도록 우리의 생각이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천국개념이 더 많은 경우 미래 적인 의미보다는 현재적인 의미로 쓰여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천국 개념이해의 핵심은 하늘나라 천국 그런 장소 적인 차원보다는 통치 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할/
  쉽게 표현하면 한국은 이명박 대통령이 통치하는 나라요, 미국은 오바마가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여기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 나라는 누가 통치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천국은 장소 적인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인 '천국'을 약화시킨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 천국을 누려야 하고 죽어 저 세상에서도 영원한 천국이 들어가야 합니다. /아멘!/
  그런데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서 굉장히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나 가는 저 세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대 심방 때 어느 권사님 댁에 가서 찬송을 부르는 데 '날 빛보다 더 밝은 천국'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고 나서 곤욕을 치른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게 곤욕을 치를 일이 아닌데, 평상시에는 잘 부르지 않다가 장례 때에만 불렀기 때문에 이 천국에 대한 찬송이 장송곡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천국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의 번역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천국을 '하늘 나라'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하늘 나라' 하니까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면 미래에 의미를 두게 되고, 저 멀리 어떤 '곳', 어떤 '지점'을 가리키게 됩니다. 이를테면 사람이 죽은 후에나 가는 '하늘 나라'로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평상시에는 그 찬송이 듣기가 싫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런데 이 번역을 바로 잡으면 '하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 집에 오시고, 우리 집을 다스리시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할/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하신 천국은 가시적인 천국, 즉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있어서 천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나라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섞여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열한 제자는 좋은 씨이고 가롯유다는 가라지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주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곧 성도를 가리킵니다.
  성도 여러분은 거룩한 씨입니다. 그리고 밭은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밭입니다. 고전3:9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특별히 가시적인 교회로써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를 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 밭에 뿌렸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참 교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뿌려 놓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참 행복한 밭에 하나님이 뿌린 좋은 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

 

  ▶25-26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이 비유의 결론부분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가라지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가라지와 함께 자란다는 것이 두 번째 비유의 요점입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여기서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라고 38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의 밭인 이 세상에 사단은 악한 가라지를 뿌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 천국의 원수가 실존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경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세상에 뿌려진 가라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지으신 모든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단은 악을 뿌렸고 이에 따라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악들이 점점 세상에 만연하게 됩니다. 오늘날도 이 세상에 교묘하게 사단이 악의 가라지들을 뿌립니다. 악한 자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전에는 부끄러워하며 숨어서 행하던 악들이 전면에서 당당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입니다. /믿/
  ②'교회 공동체에 뿌려지는 가라지'가 있습니다. 교회공동체 안에도 사단이 가라지를 뿌리는 일은 계속 되어 왔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 안에도 사단은 가라지들을 뿌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도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곡식인양 위장한 채 들어옵니다. 그 뿐 아니라 가라지가 상징하는 잘못된 사고와 전통이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③'그리스도인들 마음에 가라지'를 뿌립니다 세상, 교회 뿐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도 알곡만이 아니고 가라지가 자리잡기 마련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단은 우리 가슴속에 세상의 소리들을 심어 줍니다. 그래서 세상적 사고를 심어주고 세상적 철학의 지배를 받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인 것 같은데 세속적 가치관을 지닌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라지는 사람들이 잘 때 원수들에 의해 뿌려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 때 뿌렸다는 것은 교묘한고 은밀한 활동을 의미합니다. 교묘하게 사단은 침투합니다. 죄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세상이 다 그렇다고 적당히 타협하게 만듭니다.
  청소년들은 자라나면서 수많은 죄의 소리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세상의 가치관에 길들여지게 됩니다. 가라지를 뿌린 것도 잠을 자는 동안이었습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잘 때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깨어야 합니다. 세상의 가라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지켜야 하고 우리들의 건전한 문화를 지켜내야 합니다. /아멘!/
  그렇다면 본문의 가라지가 무엇인가? 가라지는 본문 13장에서 8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비유는 농촌에서 살아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인데 여기서 말하는 가라지는 털이 있는 일종의 잡초로써 독 보리입니다.
  일본성경, 중국성경에서는 독 맥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밭과 논 가운데 보리나 밀밭에 나오는 귀리와 흡사합니다. 귀리는 어렸을 때에는 보리와 너무 흡사하기 때문에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또 논농사 때 보면 벼와 함께 자라고 피 역시 어릴 때에는 벼와 분별이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독 보리, 즉 귀리나 논에 피는 주인이 씨는 뿌리지 않아도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자라는 것은 오히려 돌피와 귀리의 가라지들이 더 잘 자랍니다. 자라는 동안에는 뿌리를 보지 않고서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벼의 뿌리는 약간 붉은가 하면 피의 뿌리는 하얗습니다. 저도 뽑아봤습니다. 그러니까 가라지를 뽑으려면 뿌리를 보아야 알 수 있고 뿌리를 보려면 뽑아야 하는데 그러다간 잘못 알곡을 뽑아 버리기가 쉽습니다.
  이처럼 자라는 동안에는 아슬아슬함이 없습니다. 가라지는 뽑는다고 뽑았는데 알고 보니 알곡은 뽑을 정도로 비슷하고 똑같이 보면 됩니다. 어떻게 보면 가라지가 오히려 더 보기 좋고 충실하게 자랍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주신 의도가 어디에 계십니까?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약한 세력들은 어디에나 숨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있고, 우리 가정 안에도 있고, 우리 자신 안에도 있고 이 민족 안에도 있습니다.
  문제는 '양의 탈을 쓴 이리' 이것이 문제입니다. 형상과 모양은 비슷한데 본질은 다릅니다. 피와 벼는 비슷한데 뿌리가 다릅니다.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은 본질이 다릅니다. 선을 행하는 경우 진실을 행하는 선행이 있는가 하면 목적이 다른데 있는 위장된 선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좀 덜합니다만 옛날에 보면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길도 닦아주고 다리도 놓아주고 가로등도 달아주고 별일을 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이 다른데 있기에 선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어째든 겉으로 보면 선한 것 같은데 뒤에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옛날 미국이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고 난 후 미안한 마음에서 그들에게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메리칸 인디안 명부에 등록하게 하고, 땅도 주고 집도 주고 월급과 생활비 그리고 노후대책까지 완전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원주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놀고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정말 잘 하는 정책 같습니다. 지금도 괌이나 사이판 원주민들에게 미국은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도 않고 아이들만 많이 생산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식구 수에 따라 수당이 더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똑똑한 인디언들은 명부에 등록을 하지 않고 그 편안한 조건들은 다 포기하고 직접 돈을 벌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한 정책은 백인들이 자기들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원주민들은 할 일이 없으니 먹고 마시고 아편하고 그러다 보니 알코올중독, 아편중독, 싸움 등 생활이 엉망입니다.
  공부도 안 합니다. 한마디로 미국 정책은 똑똑한 사람이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정책입니다. 그저 시키는데 고분고분하게 듣게 하는 정책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민족혼을 망가뜨리는 정책입니다.
  겉으로 보면 얼마나 선한 정책입니까? 그러나 뒤에는 그런 음모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걸하는 일에도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사람은 앞마당도 깨끗하고 뒷마당도 깨끗해야 합니다. /아멘!/
  본문은 가라지 비유입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욱 찬란하게 보입니다. 독버섯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교회 안에도 독버섯과 같은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초 신자들이 처음에는 큰 기대를 가지고 출발합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 안에는 선한 사람, 착한 사람만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가라지 같은 성도를 보면서 크게 실망하며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알곡 성도는 신앙에 바른 행실이 나옵니다. 초 신자들은 목사 신앙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선임 성도들의 신앙을 따라갑니다. /믿으시면 아멘!/

 

  ▶27절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집주인의 종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말합니다. 가라지가 대체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룻밤 자고 났더니 원치 않는 것이 자라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기 '집 주인의 종들'이 누구입니까?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부를 때 주라는 호칭과 선생이라는 호칭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까?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알고 메시야임을 믿는 사람들의 고백인데 당시 제자들을 비롯한 신앙이 있는 무리들을 예수님을 주로 알았습니다.
  여기서 주라 함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즉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이해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도 유대 지도층에 있는 자들을 예수님을 선생, 랍비로 불렀습니다. 랍비라 함은 예수님을 다만 예언자 중의 하나 또는 본받고 따라야 할 모범으로만 인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는 대속자시며 구원자이시므로 마땅히 우리가 불러야할 호칭은 랍비선생이 아니라 '퀴리오스' 주님이어야 합니다. /아멘!/

 

  ▶28절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39절을 보면 원수를 마귀라고 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먼저 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왔습니다. 사탄이 들어가지 않은 곳은 지상에 한 군데도 없습니다.
  교회에도 사탄은 들어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기도하고 나면 곧 마귀가 달라붙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앙을 교란시킵니다.
  가라지가 내 주위에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였고 사랑했는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기도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충동질을 합니다.
  예수님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정체를 늘 영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이때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당장 가서 뿌리째 뽑아 버릴까요?' 조급하고 성급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예수님, 하늘의 불을 내려서 당장 멸하게 해 버릴까요?'라고 말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당장 뽑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29-30절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예수님은 첫 번째 반응은 '가만 두어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뽑다가 좋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악인이 선인과 공존하는 이유는 여기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저 나쁜 사람들, 마귀의 자녀들은 다 멸해 버리지 않고 무엇 하실까?'하고 원망 투로 말하기가 일수입니다.
  그러나 가만두는 이유는 의인이 다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둘 다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했습니다. 왜 추수 때까지 가라지는 공존하게 하실까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몇 가지 알아보겠습니다.
  ①인간은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체적으로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가라지나 밀은 너무나 흡사해서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단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단의 뜻은 알면 됩니다. 이단이란 끝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출발했지만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과 같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합니다.
  ②하나님은 가라지를 통하여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연단 시키십니다. 가라지와 함께 한다는 것은 괴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가라지와 같은 악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순수하게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고 환난을 통하여 강하게 되면 참된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성장입니다. 강하게 자라야 신앙이 승리합니다.
  ▶어느 사장 집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한 집에서 너무 귀하게 자라 한 번도 매를 맞아본 적이 없는 때려 본적도 없습니다. 거기다가 공부도 잘하고 성품도 착해서 주위로부터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런 그가 군대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툭하면 욕지거리요 툭하면 매를 맞고 욕을 먹고 자라야 합니다. 저도 군대 생활할 때 한 밤중에 하사관이 깨웁니다.
  '야 담배 사와' 그래서 예하고 서 있는데 또 다시 '담배 사와'그럽니다. 그래서 '돈을 주여야지요' 했더니 '이 새끼 돈이 있으면 왜 내가 너를 시키나?'고 그럽니다.
  신앙생활도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은 훈련입니다. 기도도 훈련이고 봉사도 훈련입니다. 특히 환난과 고통을 통해 더더욱 하나님께 매달리는 알곡 성도가 됩니다.
  ③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요, 은혜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가라지도 알곡이 될 수가 있는 가능성의 기회 안에 살고 있습니다. 죄인도 회개하면 의인이 됩니다. 아직도 빛의 나라를 향하여 문이 열려 있는 시간입니다. 가라지도 새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입니다.
  ④분명한 것은 추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30절에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여기서 추수 때는 29절에서 세상 끝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했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이 말씀에 오해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악에 대해 방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이것은 우리들의 판단이 완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누가 가라지인지 지금은 정확하게 모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가라지처럼 보이는데 후에 그것이 알곡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알곡을 보호하려는 주님의 의도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세상 끝이 올 때까지 뿌리뽑을 생각을 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라지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악의 뿌리를 뽑아 낼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교회 안에 악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도 환상에 불과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가라지로 생각되는 사람을 뽑아 내버리면 교회가 잘될 것 같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교회를 찾을 수 없고 완벽한 사람을 만날 수 없습니다. 완벽한 목사, 장로, 권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대하면 시험에 빠지고 내 영성에 손해를 입습니다.
  그러나 세상 끝 즉 추수 때가 옵니다. 이 날은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되는 날입니다(39-42절). 최종적인 판단과 함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 때가 있음을 기억하며 우리는 비록 지금은 빛이 나지 않아도 알곡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는 그 날이 옵니다. /아멘!/
  30절까지의 해석의 36-43절까지 나옵니다. 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다 마치시고 집으로 오실 때 제자들이 말합니다.
  37절부터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좋은 씨는 뿌리는 자는 인자요'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38절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밭은 세상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넘어 본 세상에 퍼질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또한 밭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어거스틴은 교회 안에는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공유한다고 했습니다.
  '천국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해 법적 권리 즉 상속권을 소유한 아들의 신분입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입니다. /할/

 

  ▶39절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가라지는 원수마귀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원수마귀가 득실거립니다. 우리는 이 원수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어떻게 벧전5: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할/
  추수 때는 세상 끝입니다. 우리 주님 재림의 때입니다. 추수꾼은 천군 천사들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세상의 끝은 옵니다. 큰 추수의 때가옵니다. 하나님의 큰 날이 옵니다. 곧 심판의 날이 옵니다. 그렇지만 그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40-41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으라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때는 가라지와 알곡이 너무나 현저하고 분명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먼저 거둘 수가 있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먼저 거둡니다.
  세상에서 악을 행한 자, 교회에서 장애물이 될 수 있고, 거침돌이 된 자입니다. 불법을 행한 자는 반듯이 먼저 거둘 것입니다. 허위와 가식으로 된 자들도 불 심판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헌 단으로 묶음을 당합니다.
  한 묶음은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한 묶음의 향락주의자들, 한 묶음의 박해자들, 한 묶음의 외식자들'입니다. 왜 한 묶음씩 묶습니까? 쉽게 풀무 불에 불사르기 위해서입니다.
  가라지가 쭉정이가 최후에 들어갈 곳은 풀무불 밖에 없습니다. 깨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할/

 

  ▶42절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풀무 불'은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가리키는 말로 이는 하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무서운 불로 영원히 형벌을 받은 장소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불 못, 또는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그곳은 너무 너무 뜨거운 곳이기에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되어있습니다.

 

  ▶43절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얼마나 멋있는 나라입니까? 우리가 사모하는 올라가야 할 나라입니다.
  여기 '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믿음을 지킨 자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 곧 천국에서 해와 갈이 빛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여기 '귀 있는 자'는 영의 귀를 가리킵니다. 영의 귀가 있는 자라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무지한 사람은 일러줘도 모릅니다. 보여 줘도 모르고, 손에 갖다 쥐어 줘도 모릅니다. 그래서 천국은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가끔 사람이 운명하는 모습을 지켜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을 참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입니다. 그 순간에는 그곳에서 인생의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종말을 보게 되고, 인간의 실존을 심각하게 느끼게 됩니다. 또 그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하게 되고, 내세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 산에 가서 하관을 할 때에도 많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인생의 무상을 그곳에서 목격하게 됩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아찔해집니다. 그저 살다가 죽으면 누구나 저 땅 두 평 위에 아무 소리 못하고 누워 묻혀 버리는 인생, 겨우 그것인데 거기에 무슨 뜻이 있으며 거기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들 그렇게 거드름을 피고, 교만하고, 고집을 부리고, 유별나게 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봅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 일을 하고 있을까? 저 사람들이야말로 인생에 대해서 심오한 교훈을 받고 살겠지' 그런데 보면 그런 것 같지 않고 무감각한 것같이 보입니다. 사람의 죽은 시신을 매만지면서도 감각이 없어 보입니다. 고작 관심이 있다면 술 한잔 더 얻어 마시는 것, 그리고 일을 마친 후에 용돈이라도 좀더 받을 것에 대해서만 골똘한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은 잔치 집에 가지말고 초상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야말로 참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보잘것없는 종말의 쓸쓸한 모습을 그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곳에서 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숨겨져 있어서 보지 못하던 그 어떤 세계를 그곳에서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영감을 가진 인간입니다.
  그런 엄숙한 실존의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런 마음의 열림이 없다고 하면 그게 바로 버려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손에 갖다 쥐어 줘도 모르는 사람은 모릅니다. 눈앞에 바짝 갖다 보여 줘도 모르는 사람은 모릅니다. 그래서 천국은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비밀을 영어로 '시크릿'(secret)이라고도 하고, '미스터리'(mystry)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가 전하는 비밀의 의미는 각각 다릅니다. '시크릿'은 보여 주지 않아서 모르는 비밀을 말합니다. 그런데 '미스터리'는 보여 줬는데도 사람들이 모를 때, 그 비밀을 뜻합니다. 성경에 보면 '천국의 비밀'이라고 말할 때 비밀을 '시크릿'이라고 하지 않고, '미스터리'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천국을 사람들에게 이미 다 보여 주셨습니다. 알게 해 주시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모릅니다. 보여 주었는데도 모릅니다. 그래서 천국을 미스터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깨닫는 사람들은 비유로 말씀을 하자마자 곧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할/
  ▶다시 한번 정검해 보는 마음에서 가라지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⑴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누구입니까? '인자'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⑵밭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세상'입니다.

  ⑶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입니다.

  ⑷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⑸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입니다.

  ⑹추수 때는? '세상 끝'을 가리킵니다. /할/

  ⑺추숫군은? '천사들'이고,

  ⑻가라지의 운명은? '불에 사르는 것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⑼천사들을 보내시는 분은? 역시 '인자'이십니다.

  ⑽천사들이 이 땅에서 거두어 낼 가라지들은 무엇입니까?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⑾가라지들이 던져질 곳은? '풀무 불'입니다.

  ⑿그곳에서 가라지들이 보일 반응은?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할/

  ⒀의인들이 갈 곳은?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⒁의인들이 받을 영광은? '해와 같이 빛나리라' /아멘!/

  ⒂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마감하시면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귀 있는 자는 들으라'입니다. /할/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알곡입니까? 가라지입니까? 가롯유다는 가라지 성도입니다. 그의 최후는 비참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교회를 사랑하는 자, 추수를 준비하는 자,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이 세상 밭에 살지만 새 하늘과 새 땅과 저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사는 자들이기에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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