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66강)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 (마 12:38-5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16

(제66강)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 (마 12:38-50)

 

  본문의 38절은 '그때에'로 시작합니다. 그 때는 언제가 하면 그 앞에 있는 9절 이하에 보면 한편 손 마른 병자를 주께서 고쳐주시므로 두 손이 똑 같아지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또 그리고 이어서 안식일에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시니 벙어리 되고 눈멀었던 사람이 말하게 되고 또 보게 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 22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서도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 낸 것'이라고 우깁니다. 즉 예수님도 귀신이 들렸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저들은 예수님을 도전하고 비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다른 모든 죄는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 훼방 죄만을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완전히 패배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번에는 메시아로써의 표적을 구하고 나섰습니다. 바로 '그 때'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예를 들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그들에게 가르쳐 줌으로 그가 메시야임을 또 한 번 입증시키고 계십니다.

 

  ▶38절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때에' 안식일 사건 이후 계속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저들의 태도가 이번에는 '선생님이여!'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들의 이런 부드러운 말조차도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모함하고 매도하려는 의도입니다.
  속으로는 강퍅함이 그대로 있으면서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교활 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겉모양은 조금 변한 것 같은데 속 중심은 하나도 안 변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본문의 바리새인과 같이 속 다르고 겉 다른 교활한 자입니다. 이리를 가리켜 교활한 짐승이라고 합니다.
  '표적 보여 주시기를' 유대인들은 표적을 참 좋아했습니다. 고전1:22절에서도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사람이고,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참된 예언자나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 특히 메시야는 특별한 표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서기관은 성경을 오랫동안 전문적으로 연구한 가장 권위 있는 율법학자들인데 그중 일부학자는 사두개파에 속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모세가 행한 표적과 같은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말은 '당신이 정말 메시야인지 아닌지 메시야로써의 표적을 보여 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 후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미 표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표적을 믿지 않았습니다.
  같은 바리새인임에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은 바리새인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한밤중에 예수님께 와서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1-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바리새인들 중에도 이렇게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예수님께 독을 품고 칼을 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3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표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이 시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⑴'악하고'라는 말은 그들의 마음이 교활하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에서 악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떠난 자를 말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으며 하나님이 없으면 양심은 없어지게 됩니다.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는 법인데 하나님이 없으면 자연히 양심이 마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공의도, 정의도,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으며 혼란과 방종과 방탕만 있을 뿐입니다.
  ⑵'음란한' 어떤 윤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약에서 많이 나오는 음란이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신랑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신부는 몸도 마음도 늘 깨끗해야 합니다. 남편 이외 다른 정부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였습니다. 바알신, 아세라신 등 여러 이방 신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현대적인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물질만 쫓아가고 권력을 좋아하고 인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가끔 점치는 것 등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기 '세대'란 그 시대와 당시 사람이 결합한 복합어로서 예수님 당시 시대를 가리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보아온 표적만으로도 무엇이 부족 하느냐? 이런 책망입니다. 그러시면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영적 상태와 그 시대정신을 동일하게 보셨습니다.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 사람들은 당시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한마디로 악하고 음란하게 세상을 오염시킨 장본인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막강하게 영향력을 미쳤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악하고 음란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모든 백성들이 악하고 음란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지도자, 특별히 잘못된 영적 지도자가 한 세대에 미치는 영향력을 매우 큽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나면 국민이 평안해집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에 대해 세 가지로 대답하셨습니다.
  ⑴39-40절에서 '너희들이 원하는 표적이 아니라 내가 제시하는 참된 표적을 가르쳐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⑵41-42절에서는 '거짓된 표적을 구하는 자가 받는 심판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⑶43-45절에서는 '앞으로 이 시대가 겪어야 할 영적인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첫 번째 표적이 39절 이하에 나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어떤 학자들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친 설교를 이해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그런 회개의 복음으로 보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는 외침이 아니고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지내다가 살아난 사건을 의미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앞으로 보여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3일 만에 부활하는 그의 죽으심을 말한 것입니다. /할/

 

  ▶40절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사는 표적이라는 뜻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처럼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준 표적은 기적이 아니라 죽는 길입니다. 즉 십자가의 표적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들처럼 그렇게 악하고 음란하고 강퍅한 세대에게 보여줄 표적은 내가 죽는 길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처럼 완전하고 궁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는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풍랑도 잔잔케 하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은 보여주셨지만 그 모든 것은 부활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최대의 표적은 십자가의 죽음과 제 3일 후에 부활입니다. /믿/ 요2:19-20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1절에서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쳐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표적은 십자가의 죽으셨다가 장사된 지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이 최고의 표적입니다. 세상에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난 일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멘!/
  이제 41-42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받을 심판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41절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 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요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면 요나의 전도로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사람들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전도를 받은 대상들의 반응은 서로 정반대였습니다. 즉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신 예수님의 전도와 이적을 보고서도 결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전도와 이적을 보고서도 결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요나보다 더 큰 이'이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 분은 '심판자시오 만왕의 왕'이신 분이십니다. /아멘!/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 말은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요, 하나님도 모르고 구약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인데도 그들은 요나가 가서 경고했을 때 왕으로부터 비롯하여 온 국민이 금식을 하고 회개를 선포했으며 하나님께로 돌아왔는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구약을 알고 있으며 또한 이적을 보았고 말씀도 들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니까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42절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있느니라"
  여기 남방은 구체적으로 왕상10장에서의 스바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곳 스바는 유대인들이 땅 끝으로 보고 있는 아라비아 서남부의 한 왕국입니다.
  왕상 10장을 보면 스바 여인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 먼 나라에서 많은 선물을 가득 싣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은 왕이었으나 예수님은 친히 지혜의 본체이신 분이십니다. 지혜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을 전하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심판 때에 시바 여왕이 와서 '너희들은 정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심판 때에 정죄를 받게 됩니다.
  이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바로 살지 않은 오늘의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솔로몬 때에 남방 스바의 여인은 솔로몬의 지혜의 소식을 듣고 그것을 얻으려고 먼 길을 찾아와서 들었으나 여기에 교만한 자들은 솔로몬보다 더 큰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므로 받을 심판이 큰 것을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것입니다.
  43-45절에서는 악한 세대에게 일어날 영적 현상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43-45절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본문의 말씀은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로 하신 말씀인데 이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사람과 집은 하나이며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악한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해서 더 사악하게 되느냐에 대한 말씀을 이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귀신이 들린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서 귀신이 나갔습니다. 귀신이 나가자 그동안에 그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수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간 귀신이 다시 와서 살려고 하니 집이 청소되어 있어 더러운 자기가 살기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전보다 사정이 더 악해졌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을 향한 비유입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그런 그들이 우상에 빠졌습니다. 저들이 마구 우상을 섬기자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70년의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 동안에 그들은 회개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바로 살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70년 후에 하나님은 저들을 회복시켜서 본국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종교의 의식 등 많은 것을 고쳤습니다. 즉 집을 깨끗하게 수리하고 소제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저들은 깨끗하게 소재하고 수리된 집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나라의 영적 형편이 옛날보다 더 악하고 더 음란하게 우상을 섬기는 나라가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을 보면서도 메시아를 보면서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나옵니다. 집은 수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이 비어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 아니하면 성령님을 모시고 살지 아니하면 모양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전보다 더 악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⑴날마다 기도로 무장하고, ⑵성령으로 충만하고, ⑶말씀으로 무장하고 , ⑷신앙의 열매로 충만해야 합니다. /아멘!/할!/
  귀신이 나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마귀가 아무리 우는 사자처럼 덤벼도 우리 속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내 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지 아니하면 귀신은 더 악한 귀신을 데려와 나를 더 나쁜 상태로 만들게 됩니다.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할/ 이제 46-50절까지는 하나님의 참 가족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46절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한참 무르익어 갑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더 악랄하게 예수님을 모함하고 방해합니다. 때로는 귀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막3:21절에서는 미쳤다고 하면서 모함하고 방해합니다.
  한편 예수님의 가족들이 이런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 그들에게 동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은 넷이 있었는데 그 동생들이 다 몰려온 것 같습니다. 그때 아버지 요셉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아버지가 안 찾아온 것을 보면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나지 않았나 그렇게 추측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복음사역 현장에 그의 가족들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온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격려해주려고 왔습니까? 아닙니다. 소문을 듣자하니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었고,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잡아가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가장 이해하고 사랑 받아야 할 관계가 바로 가족 아닙니까? 차라리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아니면 반대파에게 당한다면 상처는 덜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이해하고 협력해야 될 가족들에게 지금 예수님은 비판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배경이 같은 사건을 다룬 막3:20-21절을 보면 더 뚜렷하게 나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아마 가족들이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데로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오해한 것 같습니다. 식사도 안 하면서 무리하게 고된 사역을 하고 있다든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충돌하고 있다든지 그리고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기적을 베풀고 있다든지 하는 소문들의 가족들에게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47절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지금 밖에 서 있는 가족들이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선생님! 어머님과 동생들이 밖에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모친'은 마리아를 존칭하는 말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이후에 아기를 낳지 않았다는 무태설을 주장을 합니다만 예수님의 형제는 '야고보, 요한, 요셉, 유다 그리고 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평생을 동정녀로 살다 간 것이 아닙니다.
  또 1950년대부터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죽지 않고 승천했다하며 마리아 승천설을 주장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웃기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여러 동생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입니다. 후에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아! 이 분이 메시아구나!'하고 믿어서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아직 믿기 전이라 소문을 듣고는 예수님이 미친 줄 알고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와 보니 예수님이 집 안에 계신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가 복음서에는 밖에서 사람을 보내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 있으니 나오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누가복음서와 마태복음서를 보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용신을 할 수가 없었는데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맨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져서 그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만나려고 밖에 와 있다고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족들을 무시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자랐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고,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번째 이적도 어머니의 부탁에 순종해서 행하신 일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실 때에도 어머니를 걱정해서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시다.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고 하셨고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처럼 잘 모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효도하는 아들이었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는 이 말씀은 '가족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 가족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은 누구입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인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가문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누구든지 될 수가 있습니다. 김씨는 김씨대로, 이씨는 이씨대로, 박씨는 박씨대로 타고 난 가문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빈부귀천의 관계가 없습니다. 지식에 관계가 없습니다. 인종에 관계가 없습니다. 혈통에 관계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가 있습니다. 50절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48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예수님의 반응이 여간 차갑지 않습니다. 소식을 전하던 사람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주석학자들은 '예수님의 언성을 높였을 것'이라고 주석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가족관계를 부인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가족들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19:26-27절에서 예수님이 가족관계를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이 어떤 장면인가하면 십자가 위에서 지금 죽음 직전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가족 관계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 이렇게 냉정하실까요? 그것은 혈연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멘!/ 여러분! 혈연관계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영적인 관계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형제자매입니다. 혈통적으로 형제자매가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 보면 전부다 한 공동체입니다. /믿/
  공동체 의미가 귀합니다. 공동체란 좀 유식한 말로 표현하자면 '유기적인 관계'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느 손가락을 깨물어도 다 아픔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손가락을 꽉 깨물면 손가락이 '아야!' 소리쳐야 되는데 손가락은 아프다는 말을 안 하고 입이 '아야!' 그렇습니다. 이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온 몸이 다 통하기 때문입니다. 입하고 손가락하고 온몸이 전부 다 연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공동체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교회가 바로 공동체요,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아프면 함께 아파하며 그것을 위해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할/
  그런데 우리는 혈통만을 중요시하고 동창들끼리 고향사람들끼리 같은 종씨라고 끼리끼리 뭉쳐있었는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육적 친족 관계를 지상 적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혈연관계는 이 세상뿐 아니라 저 영원한 천국에서도 함께 누리는 삶이었습니다. /할/

 

  ▶49절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참 가족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원문에는 맨 앞에 '볼지어다.'라는 감탄사로 시작된다고 합니다. 본문의 '모친과 동생들'이란 존칭은 참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 정말 예수님의 친 가족은 누구입니까? 그런 의도에서 '나의 모친과 동생들을 보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얼마나 인상깊은 장면입니까? 제자들은 또 얼마나 우쭐했겠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기들을 가리키면서 '이들이 내 자매요, 형제요, 모친'이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굉장히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들이 나의 가족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천국가족은 혈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 살아가는 사람들이 천국 가족입니다. 이 진리는 영적인 모든 영역에서 다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믿고 나면 친구의 개념도 달라집니다. 옛말에 그렇게 친하던 친구가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참 복음을 알고 나면 피를 나눈 형제도 옛날처럼 되지 않습니다. 참 우정, 참 사랑 이 모두가 영적인 데서 시작합니다.
  부부관계도 영적으로 맺어진 부부로 일체감이 있기 때문에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이 깊은 부부라도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잘 안 믿으면 때로는 영적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누리며 사는 외롭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찬송가 278장에 가사가 은혜롭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며 즐거운 찬송 부르세' /할/

 

  ▶50절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본문의 말씀이 한마디로 천국가족의 기본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천국의 가족, 진정한 예수님의 참 가족은 누구입니까? 피를 나눈 사람이 아닙니다. 한 고향에서 자란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동창, 동기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믿/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것은 새로운 개념의 가족입니다. 인간 중심적 가족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 가족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모두 한 가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영적인 가족관계는 가문이나 부귀나 계급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천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가정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가정입니다. 이것은 피는 다르고 우리가 사는 환경은 다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면 그 안에서 누구든지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가정은 국경과 나라와 족속과 인종과 언어와 문화의 모든 장벽을 초월하는 것이며 해와 달과 모든 별을 넘어서 온 우주를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세상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할 때 온 세계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하여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아벨은 그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누구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부부도 하나될 수 없고 가정도 하나될 수 없고 국민도 하나될 수 없고 세계도 하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함으로 온 인류가 한 가족처럼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중간에 막힌 담이 헐리고 형제가 하나가 되는 길이 열리고 전쟁이 그치고 세계가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에 원수가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백성들이며 하나님이 지으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선지자 요나는 민족주의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은 선택받은 백성이며 다른 민족은 버림받은 민족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자, 요나는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강제로 그를 니느웨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고통에 신음하고 죄악에 사로잡히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요나의 전도를 듣고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기뻐해야 할 요나가 그들이 구원받는 모습을 보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멸망 받아 마땅하다 생각한 원수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요나에게 '내가 그들을 지었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아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래서 그도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족 복음화, 민족의 복음화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할/
  ⑴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가족의 입문입니다.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사람이 천국의 가족입니다.
  ⑵영접한 뒤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요17: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⑶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입니다. 요삼1:4절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⑷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요일4:7-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할/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입니까?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천국의 가족입니다. /할/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⑴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요6: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니라' 예수님을 보고 믿어서 영생을 얻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할/
  ⑵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워서 살아가는 사람을 제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곧 예수님의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아멘!/
  ⑶거룩함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4:3절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세상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지 말고 구별된 삶, 말에도, 생각에도, 행동에도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⑷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5: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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