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69강)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마 13:31-35)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19

(제69강)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마 13:31-35)

 

  마13장에는 일곱 가지 천국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이란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이 땅에 임하여 말씀의 선포로 확장되며 주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됩니다.
  이것은 농사에 비하면 마치 씨앗을 뿌리고 자라며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배운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는 한 쌍이라고 할 만큼 동시적이고 유사성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비유들이 나오는데 학자들은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쌍둥이 비유라고 합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의 성장에 관한 과정과 결과를 말씀하신 한 쌍의 비유입니다.
  먼저 겨자씨 비유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외적인 성장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겨자씨는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겨자나무가 성장하는 과정은 볼 수가 없지만 그 결과는 볼 수 있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아서 우리나라 민들레 꽃씨 같습니다. 겨자씨는 볼펜으로 점을 찍어 놓을 정도로 모든 씨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이를 밭에 심으면 4-5m나 되는 큰 나무로 자라나 피곤하고 지친 새들이 찾아와 깃들어 안식을 얻습니다.
  성경에서 큰 나무는 큰 왕국을 상징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천국 안에 들어와 영적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겔17:23).
 겨자씨 한 알의 비유는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 시작은 작고 미미하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인류 역사에 큰 영향력을 미칠 만큼 크게 자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부터 크고 장엄하게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5세의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믿음의 씨를 심으심으로 복음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는 점점 자라나 후에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초라하고 무력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는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자라나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 역사도 겨자씨 한 알과 같았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이 학벌도 지위도 없는 어부들이었고 숫자도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수의 12명의 제자들에게 믿음의 씨를 심었습니다. 당시는 아무도 이 역사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양성 역사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온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세계 선교에 대한 불타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 사슬에 매여 로마에 가서 셋집에서 1대1의 복음 사역을 했습니다. 이런 일은 당시에는 마치 바다 한 가운데 돌을 던지는 것처럼 무모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셋집에서 한 1대1의 역사는 생명력이 있어 점점 자라나 마침내 AD 313년에는 거대한 로마 제국을 복음으로 삼켜 버렸습니다. /할/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커다란 각광을 받지 못하는 두 목사님이 앉아서 자신의 피곤한 목회 생활을 이야기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지나간 3년 동안 사역을 했지만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난 성도는 로버트 마펫이라는 청년 한 사람 밖에는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한 주간 동안 부흥회를 가졌는데 커다란 기대를 걸고 이 집회를 인도했지만 한 사람 밖에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수 년 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한 목사님을 통해서 3년 만에 얻었던 한 명의 결신자 '로버트 마펫'은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를 놓았던 선교사가 되었고, 일주일간의 부흥 집회를 통해서 얻었던 유일한 결신자인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불을 지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의 작은 겨자씨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겨자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반대로 누룩비유는 교회성장의 내적이고, 질적인 면을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누룩은 우리가 '이스트'라고 불리는 빵을 만들 때 사용하는 효소입니다. 그것을 물에 타서 가루에 넣으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하루가 지나면 그 가루가 부풀어오릅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빵을 만듭니다.
  이렇게 누룩이 눈에는 안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크게 부풀어 나듯이 마찬가지로 교회는 외적으로도 성장하지만 내적으로도 부풀어오르고 성장한다는 그런 비유입니다. 마치 집에서 아이를 기를 때 부모들이 볼 때는 도무지 크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빨리 자라라고 좋은 우유도 먹이고 이유식도 먹이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 눈에 보면 안 크는 것 같은데 어쩌다가 보는 사람은 '아이고 많이 컸네요! 언제 저렇게 자랐지?'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할/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의 배경을 보면 저기에는 제자들의 낙담입니다. 제자들의 실망입니다. 제자들의 좌절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천국 운동을 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아주 영광스럽고 장엄하게 아주 크고 멋지게 성장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전도할 때에 귀신도 쫓겨나고 병도 고침을 받는 여러 가지 역사가 나타났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에 도무지 성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운동이 도무지 이래서야 되겠는가?' 제자들이 실망하고 낙담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는 겨자나무 알지? 그 씨앗이 얼마나 작으냐? 처음에는 미미하고 보잘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러나 나중에 보아라, 그것이 저렇게 성장해서 거기에 새들이 와서 깃들이고 살지 않느냐? 또 너희들 누룩 알지? 누룩은 물에 풀어 가루 서 말속에 집어넣었을 때, 눈에 보이더냐? 안보이더냐? 그러나 나중에 보면 반죽이 부풀지 않더냐?'
  복음 운동은 이렇게 외적으로는 '겨자씨 나무처럼 성장하고 외적으로는 누룩처럼 점점 부풀어 영향을 주는 것이니라' 이렇게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겨자씨 비유는 교회의 외적이고 양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고 누룩 비유는 교회의 내적이고 전적인 변화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가 말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는 두 가지 변화가 다 일어나야 합니다. 먼저 양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인들 수가 자주 늘어나야 됩니다. 양이 없으면 질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뭐니, 뭐니 해도 교인 수가 늘어나고 봐야 합니다.
  또한 질적으로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인들 하나, 하나가 신앙이 성숙해져야 하고 기관의 부서가 구역이 날로, 날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안타깝게도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후퇴하고 있으니 가슴이 아픕니다.

 

  ▶31-32절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본문의 비유가 본 장에서 세 번째 비유가 끝나고 새롭게 시작될 때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여기서 천국은 교회를 바꿔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자라는 나무에는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그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새들을 위한 그늘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이 그러했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안겼습니다. 많은 유럽 제국들이 기독교의 품에 안겨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난 후에 진정한 안식을 경험했습니다. 돈으로도 권세로도 누릴 수 없는 그런 힘을 느끼고 그 천국에 안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러해야 합니다. 진정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이라면 이런 면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력이 심겨지면 성장하는 것입니다. 점점 자라나면서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깃들일 수 있는 넉넉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게 오면 큰 그늘이 느껴질 수 있는 그런 삶이 되는 것이 천국입니다. 누군가에게 늘 기대며 사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를 위한 그늘이 되어 주고 든든한 언덕이 되어 주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고 그것이 천국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편안함을 누릴 수 있음이 기쁨이 되는 삶 그것이 천국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는데도 늘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고 대접받아야 한고 인정받아야 하고 정작 나는 대접할 줄 도 남을 기쁘게 할 줄도 섬길 줄도 모르는 그런 사람은 유아적인 상태입니다.
  나는 성장하고 있습니까? 그 성장이라는 것이 교회 생활의 경력과 이력이 싸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내가 큰그릇이 되는가' 입니다. 우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보다 큰 우산 말입니다. 누군가가 내 우산 밑에 들어와 비를 피할 수 있는 그런 우산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처음에는 미미하게 시작되었으나 나중에는 커진다는 비유입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업이나 삶에 범사는 겨자씨 같다는 것입니다.
  욥기서에서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에는 심히 창대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겨자씨 비유에서 상대적이면서도 재미있는 표현 둘을 발견하게 되는데,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집약시키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것과 큰 것,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것으로 자란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이 '작다'는 것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식물학 상으로는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앗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앗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작은 것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겨자씨 같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을 말할 때, 혹은 속이 좁은 사람을 가리켜 말할 때 '바늘구멍' 같다고도 하고, '밴댕이 속 같다'고도 합니다.
  각 나라마다 작다는 표현이 다른데 이스라엘은 제일 작은 것은 말할 때 겨자씨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마17:20절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믿음을 가리켜서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겨자씨만 한 믿음도 귀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겨자씨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자랍니다.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할/
  ▶어느 날 '폴리카르푸스'(70-155 사도들에게 교육받음, 그리스도를 목격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개종. 사도들에 의해 서머나 주교로 임명됨)의 젊은 제자가 겨자나무에 기대어 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선생이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슬퍼하는가?' '하나님 나라 확장속도가 너무나 느립니다. 모처럼 신앙에 들어가는 자가 있다 싶으면 다시 신앙을 버리는 자도 많으니, 이래서야 도대체 언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슬퍼집니다.'
  선생은 그가 기대고 있는 겨자나무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그를 격려했습니다. '근심하지 말게. 하나님 나라는 지금 자네가 기대고 있는 겨자나무처럼 처음에는 작은 씨지만 성장함에 따라 구름을 찌를 정도의 거목이 된다네. 그 성장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여기에 세월을 빌려주기만 하면 차차 무성해진다네. 하나님 나라의 성장 역시 이와 같다네. 자네도 희망을 크게 갖고 날마다 자기의 직분에 충실하며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좋겠네' /할/
  오늘 본문에 보십시오, 자라서 새들이 깃 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겨자씨에 대하여 더 한번 깊이 알아보겠습니다.
  겨자는 배추 과에 속한 식물로써 일년생 또는 이년생 풀로써 씨가 많고 향기롭기 때문에 양념과 약재로 사용되며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이용된다고 합니다. 또 겨자씨는 심기만 하면 성장들이 매우 높답니다. 특히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약 3M 이상 자라 마치 나무처럼 무성하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겨자씨를 정원수로 심기도 합니다.

  ▶겨자씨가 지니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①'은밀 성'입니다. 씨가 매우 작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성장해나갑니다. 천국은 노출되지 않은 채 조용히 성장해 갑니다.
  ②'확장 성'입니다. 처음에는 적은 씨가 시작하지만 나중엔 큰 나무가 되듯 천국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12제자, 다음 70명의 전도인, 다음 120문도, 500문도 다음엔 하루에 3천명, 5천명으로 일취월장해 갑니다. /할/
  ③'변화 성'입니다. 겨자씨는 크기에 반해 놀랄만한 변화를 남깁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아주 작은 믿음에는 불구하고 끝내 크고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 비유가 주는 주제는 바로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크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알아보겠습니다.
  ①천국은 작게 시작해서 크게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증거도 그렇습니다. 한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정이 동네가 민족이 세계로, 하나님의 나라는 적은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류를 사랑한다, 인류를 위해서다'라고 거창하게 외칩니다. 그러나 인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자기 옆에 있는 거지는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 옆에 있는 부인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민중을 사랑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큰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고 했습니다. 욥8:7절을 보세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 /할/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할/
  어떤 사람은 작은 일에는 시시하게 여깁니다. 교회 직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작은 일한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자기에게 작은 일이 맡겨졌다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작은 일은 맡는 순간 우리는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믿/
  지극히 작은 일을 맡은 사람에게 천국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적은 것에 충성하는 자가 큰 것에도 충성'한다고 했습니다.
  ②천국은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결코 갑자기 자라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과정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갑자기 방언을 받고 기가 막힌 은혜 속을 지나면 그 다음날 천사가 된 줄 압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지 않게 계속적으로 내 안에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씨)이 우리 안에 있기만 하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어제의 사람이 아니며 과거의 사람도 아닙니다. 오늘이 중요하고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후6:2절에서 바울 사도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아멘!/
  허물을 벗듯이 날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과거를 벗어버리고 새롭게,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비록 과거에 우리가 무슨 죄가 있었다 할지라도 무슨 허물이, 무슨 상처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벗어버리면 됩니다. 옷을 벗어버리듯이 그 허물을 벗는 것,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 거듭나는 것, 성장과 변화,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겨자씨 비율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 그러나 하루도 쉬지 않는 변화'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③그러면 성장과 변화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겨자씨 안에 있는 것은 생명입니다. 천국은 성장과 변화를 일으키는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죽음을 삼키고 없는 것을 있게 합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어떤 절망도 어두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자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때는 느껴지지 않지만 끊임없이 꾸준히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 나무가 숲을 이루듯이 생명의 숲을 이루게 됩니다. 천국은 생명입니다. 교회는 생명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살아있습니다. 겨자씨 씨앗이 살아 있듯이 생명의 씨앗이 살아 있기 때문에 변화되고 확장되는 것입니다. /아멘!/할/
  ▶한 중년남자가 임종을 눈앞에 두고 목사님을 모서 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목사님은 '당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데 왜 나를 오라고 했습니까?' 그러자 답답한 숨길로 그 사람은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초등학교 3-4학년까지 교회에 나갔습니다. 교회에서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을 듣고 배웠는데 내가 세상으로 나온 후로도 마음속에 항상 '예수 사랑하심은' 그 찬송이 나오고 종 탑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크게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교회에 가리라 했는데 세상 것을 못 끊어서 지금까지 못 갔는데 내가 지금 임종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없어서 부득불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예수님을 영접시키고 세례를 주고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이 사람을 보십시오, 초등학교 3-4학년 때에 몇 번 교회 나가서 장난치고 연필 몇 자루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예수 사랑하심은' 이것이 마음속에 겨자씨와 같이 자라 50년 동안 따라 다닌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임종 시 '예수 사랑하심은' 그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나라에 간 것입니다. /할/
  이것이 겨자씨입니다. 왜 우리의 신앙이 죽어갑니까?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병든 자는 성장이 없습니다. 우리 다시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능력을 얻어 오늘 겨자씨 비유처럼 크게 성장하는 신앙 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겨자씨 비유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복음의 씨앗인 겨자씨를 먼저 심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는 천국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씨를 뿌리는 기회가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며, 뿌린 것이 없으면 기대할 것도 거둘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3:1절에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겨자씨 비유에서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보잘것없는 것이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작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관심도 두지 않고 무시하는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뿌리고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하심은 우리 사람들의 생각을 초월하십니다. 바울은 고전3:6-7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그리고 아무 것도 심지 않은 자는 분명히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합니다. 또한 육신을 심으면 육신에서 악을 거두고, 영을 심으면 영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은 그것이 비록 보잘것없이 작은 것, 미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먼저 심어야 합니다. 심은 것을 자라게 하시고 결과를 내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께 맡기고, 부지런히 심으십시오.
  시126:5-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할/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하심을 믿고 심고 뿌립시다. 그리하여 많은 추수를 예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33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은 무엇입니까? 누룩 비유는 앞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보다 더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 보면 누룩은 어떤 때는 나쁜 뜻으로, 어떤 때는 좋은 뜻으로 해석됩니다.
  ▶먼저 나쁜 뜻으로 쓰인 부분을 알아보겠습니다. 막8:15절에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그리고 마16: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여기에 보면 경계하면서 주의하라고 합니다. 그 말은 나쁘다는 뜻입니다. 나쁘니까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은 외식주의를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잘 믿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딴 짓을 한다는 그 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열심히 진실하게 기도하는 척하면서 사실 그 기도는 진실된 기도가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중언부언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경건하게 금식하는 것처럼 하면서 뒤에서는 많이 먹는다는 그 말입니다. 잘 믿는 것 같은데 사실은 외식주의, 형식주의,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이요, 사두개인의 누룩입니다.
  이것이 들어가면 자꾸 번집니다. 누룩의 특징은 번지는 것입니다. 부풀어 나갑니다. 전체를 오염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다음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헤롯은 아예 외식조차도 없습니다. 헤롯은 완전히 세속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헤롯의 누룩은 바로 세속주의입니다. 세속주의, 향락주의, 그들에게는 천국이고 뭐고 없습니다. 이런 세속주의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누룩을 아주 좋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교회를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비유했습니다. 본문의 여자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누룩을 집어넣습니다. 본문에서 누룩은 좋은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 누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복음입니다. /아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누룩을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집어넣었더니 이것이 점점 부풀어 예수님의 생명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가루 서 말은 우리나라말로 서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용량의 단위인 '스아'를 말하는 것인데 '세 스아' 정도 되는 양입니다. 우리나라 서 말의 큰 용량이 아니고 세 스아는 손님이 좀 오면 빵을 반죽하는 양입니다.
  '벵겔'이라는 성서학자는 서 말을 '전 인류로 해석'을 했습니다. 노아에게는 함, 셈, 야벳,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벵겔은 이 셋이라고 하는 숫자는 함, 셋, 야벳, 그러니까 전 인류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 인류에게 복음을 넣어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바로 그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랑케'라는 성서학자는 '이것을 삼중적인 인간성'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영, 혼, 육 세 가지가 있는데 바로 그것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인간에게 넣어줄 때 그것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부풀어 간다는 해석입니다.
  여기서 가루 서 말이 전 인류를 뜻하든지 아니면 개인적인 삼중적인 인간성을 뜻하는지 그것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중요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희들이 복음을 듣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때'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듯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개인이면 개인, 가정이면 가정, 교회면 교회, 사회면 사회를 점점 부풀게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할/
  여러분, 지금 우리의 심령 속에 뿌려진 누룩은 과연 어떻습니까? 점점 부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있습니까? 그 누룩이 좋은 누룩입니까? 나쁜 누룩입니까? 만약 세속주의, 쾌락주의, 외식주의, 형식주의 같은 것들이 우리 심령 속에 뿌려져서 점점 우리를 부풀게 한다면 이것은 큰 불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가 점점 부풀어서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입니다. /아멘!/
  ▶미국의 조상은 청교도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청교도 정신은 참 훌륭한 것입니다. 오늘의 미국이 저렇게까지 번영된 것은 다름 아닌 청교도들의 신앙과 경건한 행위에게 비롯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청교도인의 조상은 누구입니까? 어디서 그들이 왔습니까? 영국에서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국의 조상은 해적의 대명사인 바이킹입니다. 한마디로 도적놈들입니다. 그런데 바이킹들이 머리가 매우 우수했습니다. 그래서 이 머리 좋은 해적들이 해적의 후예를 어떻게 훌륭하게 이어나갈 것인가를 생각한 중에 깨끗하고 정결한 여자를 찾아 결혼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그 주위에 여자들은 방탕하고 병이 많아 위험해서 결혼하기가 무섭고, 그러한 결혼을 통해 자식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깨끗한 여자가 누구입니까? 기독교인들이 깨끗하기 때문에 그들이 이 나라 저 나라에 다니면서 예수 믿는  여자들을 붙잡아다가 강제로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깨끗하고 훌륭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적들은 자식만 낳았지 다시 바다로 도적질하러 갔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누가 키웁니까? 비록 억지로 끌려와 해적의 아내가 되었지만 이 아이만은 신앙으로 키우는 것이 엄마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읽어주고 기도를 가르치며 신앙으로 키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라온 아이들이 청교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해적들의 자식 속에 예수님의 복음의 누룩이 들어가서 그 누룩이 펴져서 예수님의 나라를 건설하게 되었고, 오늘날 대영제국과 미국을 건설하게 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할/ 고전5:6절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누룩의 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①누룩은 회개운동을 일으킵니다. 히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누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룩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회개를 가져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속에 회개할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마음에 복음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으면 예수님을 만나면 회개하게 됩니다. 유대인들도 가슴을 치며 '어이할 고' 외쳤습니다.
  ②새로운 피조물을 만듭니다. 고후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누룩이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복음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새로운 피조물이 만들어져 가고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멘!/
  ③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면 예수 믿기 전과 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활이 변화되고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목적이 달라지고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누룩의 능력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누룩의 능력은 말씀의 능력이요, 복음의 능력입니다.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능력은 내가 아니라 나 속에 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껍데기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씀을 많이 듣고,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믿/

 

  ▶34-35절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34절의 말씀을 가지고 성경을 전부가 비유라고 하면서 선악과를 비유로 다 갖다 부친 집단이 바로 문선명의 통일교 원리 강해 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어떤 한 구절에만 집착하면 성경은 전부 비유로 다 보게 됩니다.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당시 배경 상황, 앞뒤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흐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시면 큰 충동이 일어날 것이기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35절의 말씀은 시78:2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그러니까 구약에서 벌써 하나님께서 메시아가 오시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겠다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천 년 전에 예언입니다. 그 예언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깊은 진리를 비유로 말씀하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론입니다. 겨자씨 비유는 외적 교회 성장입니다. 누룩의 비유는 내적 교회의 성장입니다. /할/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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