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강) 바다의 그물 비유! (마 13:47-58)
본 장은 비유가 무려 일곱 가지나 나옵니다.
⑴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주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 우리가 그 말씀을 '어떤 마음에 밭에 받아들어야 하는가?'입니다. 물론 최고의 밭은 옥토입니다.
⑵알곡과 가라지 비유입니다. 농부가 알곡만 뿌렸는데 그 밭에 농부가 뿌리지 않은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닌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역사하는 그곳에 사단이 함께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은 움츠리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알곡 성도인가 가라지 성도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⑶겨자씨 비유입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작은 것을 말할 때 아주 대표적인 것으로 예를 드는 것이 바로 '겨자씨'입니다. 그런데 작은 것만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으면서도 위대하게 큰 것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겨자씨 하나가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일 만큼 자라난 거창한 수목을 겨자씨 하나를 통해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⑷부풀어오르는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부풀어오르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 누룩은 부패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단체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문제 투성이의 단체, 그것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문제투성이 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대한 단체가 있다면 그것 역시 교회입니다.
이처럼 문제투성이의 교회는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이 신비롭기 조차합니다. 문제와 아픔을 지닌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며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나타내십니다. /할/
⑸보화의 비유입니다.
⑹진주의 비유는 소중하고 귀중한 보화와 진주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모든 것을 팔 때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화요 진주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소유하기 위해 우리의 소중한 것이라도 투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취급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13장입니다.
오늘은 비유의 그 마지막으로 천국을 '바다의 그물'로 비유하셨습니다. /할/
▶47-48절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본문의 배경입니다. 1절에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지금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일곱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비유가 결론적인 비유인데 당시 예수님은 여러 사람이 그물을 치며 끌어올리는 모습들을 직접 보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물 비유는 당시 갈릴리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인상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본 비유와 가라지 비유를 가리켜 쌍둥이 비유라고 합니다. 두 비유는 모두가 다 종말론적인 비유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 이렇게 구별되어진다는 점에서 이 두 비유는 같습니다.
성경은 항상 두 가지 종류가 상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과 염소,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들' 그런데 가라지 비유에서는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고 하십니다. 왜? 마지막 때에 알곡과 가라지는 분별하겠다는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런데 그물 비유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가라지 비유는 소극적임에 비해 그물 비유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가라지는 알곡이 될 수 없고, 못된 고기는 좋은 고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문자 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이나 노력이나 수단으로는 할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실 때 좌 우편 강도와 같이 달리셨습니다. 좌편강도는 예수님을 욕하고 비웃었지만 우편강도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예수님께 맡길 때 주의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그 마음속에 심어주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거듭났습니다. 그 순간 그는 알곡이 되어진 것입니다. /할/
여기 그물 비유에서 '바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인류가 사는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은 넓은 바다와 같습니다. 합1:14절에서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고해와 같은 바다로 말을 합니다. 또 '그물'은 복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고기를 잡을 때 그냥 잡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물이 되는 교회를 통해서 고기를 잡습니다.
여기 '고기'는 한 영혼, 영혼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이제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교회가 그물이라는 말은 교회의 조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는 당회가 있고, 제직회도 있고, 남, 여 전도 회도 있고, 특별히 조직 가운데 가장 작은 단위 조직은 구역입니다. 그런데 그물에 구멍이 생겨 고기가 다 빠져나가는 경우를 봅니다.
본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기잡이에 대한 당시의 배경을 살펴봐야 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취미로 낚시를 합니다만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생업으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고기를 잡는 방법이 세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⑴낚시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마17장 끝 부분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성전 세를 받는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오자 그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라. 처음 낚인 고기의 입을 열면 그 속에 한 세겔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 나와 너를 위해서 그 사람들에게 주도록 하여라' 낚시로 고기를 잡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⑵그물을 던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그의 형제 안드레와 더불어서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낚시를 던져서 잡는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라, 그물을 던져서 한꺼번에 많은 고기를 잡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뒤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복음의 그물을 던져서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⑶큰 그물인 예인 망을 이용해서 고기를 잡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그물의 한 쪽 끝을 해변 가에 고정시킵니다. 그리고 수십 미터, 때로는 수백 미터가 되는 아주 큰 그물을 배에 싣고서 일직선으로 펴기 위해 배가 바다 한 복판으로 노 저어 갑니다.
그물 위에는 부유물이 달려있습니다. 둥둥 뜹니다. 그러나 밑에는 무거운 추가 달려있습니다.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긴 그물이 벽처럼 일직선으로 펼쳐지게 되면, 배는 다시금 원을 그리면서 해변가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 갇혀있는 고기들을 그물로 계속해서 쪼여 들어갑니다. 그물이 완전히 조여지면 어부들은 그물을 물가로 끌어냅니다. 그리고는 앉아서 그 속에 있는 고기들을 분류합니다.
상품의 가치가 있는 것들은 그릇에 담습니다. 가까이 가는 것은 소쿠리에 담기도 하고, 또 멀리 가는 것은 고기를 물 속에 넣어서 보관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상품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버리는 고기입니다.
이 예인 망으로 고기를 잡으면 여러 종류의 고기들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습니다. 본 비유에서 또 '그물 안에 잡힌 고기'는 각종의 신자들을 상징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진리는 그물 안에 잡힌 고기를 그물을 던진 사람의 손에 있습니다. 일단 그 그물 속에 들어가면 고기는 꼼짝도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코가 낀 성도들입니다. 끄는 대로 따라가야 수지맞습니다. 그물 비유의 초점은 마지막 심판 날에 심판이 있다는 예언적인 비유입니다. 히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할/
▶48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이것은 가라지 비유에서 추수 때가 되면 농부가 알곡을 모아 곳간에 넣고 가라지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넣는다는 것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쓸 만한 물고기와 버릴 물고기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산 그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의인은 의로운 대로 불의한 자는 불의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구원받은 자의 심판이 있고,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는 구원받지 못할 자의 심판이 있습니다. /믿/
본 비유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진리는 '교회는 여러 사람들의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잡음이 있고 사건이 있고 허물과 실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오염되지 않은 완벽한 이상적인 장소가 결코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의로운 사람도 있지만 죄인도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도 있지만 미성숙한 사람도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용서와 관용이 필요하고 자비와 긍휼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술을 못 끊고 오는 사람, 담배를 못 끊고 오는 사람, 고스톱을 못 끊고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나오지 말아야 됩니까? 아닙니다. 그대로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술 한 잔 먹고 교회 나올 수도 있고, 밤새 고스톱을 하고도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교회 나온 일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심판 때까지 술, 담배, 고스톱을 끊어야 합니다.
▶49절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본 절에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갈라내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상의 끝이 오기 전에는 악인과 의인이 함께 공존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 끝에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분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사실을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추수 때까지는 밭의 가라지가 곡식과 함께 자라게 둡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절대로 가라지는 곡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 불사르게 됩니다.
똑같은 사실을 예수님은 그물의 비유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거듭해서 말씀하셨겠습니까? 주님은 지옥을 만드신 분입니다. 지옥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지옥에 들어가면 안되겠기에 예수님은 거듭거듭 연민의 정을 가지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러번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완악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우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예수님의 거듭된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에 미국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엄청나게 무서운 폭탄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원자탄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아무런 경고 없이 원자탄을 일본에 떨어뜨린 것은 아닙니다. 히로시마에 투하하기에 앞서, 여러 날 전부터 크고 작은 전단지를 만들어 비행기로 공중에서 살포했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광도 시민 여러분! 1945년 8월 6일 원자탄이 투하될 것입니다. 반경 50km밖으로 피난 가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서 빨리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거짓말하고 있네. 세상에 그런 폭탄이 어디 있어? 자기들이 전쟁에서 질 것 같으니까 일부러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려고 그러는거야!' 그러면서 아무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1945년 8월 6일 실제로 원자탄이 떨어져 '꽝!'하는 순간에 반경 2km는 완전 쑥밭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피하지 않고 있던 20만 명 이상이 순간적으로 3초 내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0만 명 넘는 사람이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경고를 무시하다가 30만 명 이상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바다에 친 그물이 계속해서 안쪽으로 쪼여져 들어갑니다. 그 안에 있는 고기들은 어리석게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자기 앞에 무한히 헤엄칠 수 있는 바다가 언제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따금씩 그물이 고기의 몸을 닿을 것입니다. 깜짝 놀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헤엄쳐 나가면 언제라도 바다가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그물은 계속해서 안쪽으로 쪼여오고 있건만,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언제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따금씩 복음을 받고 감동을 얻기도 할 것입니다. 또 심판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저 세상에서 영원토록 자유롭게 살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조만간 하나님의 심판의 그물이 완전히 조여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낼 것입니다. 철저하게 골라낼 것입니다.
살전5:3절에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50절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러분, 지옥이 상상으로 꾸며낸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죄짓지 말라고 겁주기 위해서 만들어낸 장소라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명한 무디 목사는 '만일 지옥이 없다면, 우리는 구태여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차라리 찢어서 불태워 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지옥이 없다면,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예배당을 건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있는 예배당들도 차라리 오락시설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지옥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어떤 선지자들보다도 신약의 어떤 사도들보다도 지옥의 고통을 생생하게 거듭거듭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어떠한 곳인가?
⑴본래 지옥은 사람을 위해서 만든 곳은 아닙니다. 마25:41절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귀와 사자들, 곧 귀신들을 위해서 만든 곳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마귀를 추종하면 마귀와 더불어서 그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에 떨어져 귀신들과 더불어서 영원토록 살수밖에 없습니다. 귀신들이 울 부르짖으면서 발광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⑵지옥은 불타는 곳입니다. 50절 상반부에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집에서 가스레인지를 틀고 그 가스 불에 엄지손가락을 대고서 약 5분 정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가스 불 정도가 아닙니다. 풀무 불입니다. 얼마나 더 뜨겁겠습니까? 거기다 엄지손가락이 문제가 아닙니다. 전신이 들어가서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또 5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끝없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인지 눅16:24절에서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고통 가운데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이같이 불타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⑶지옥은 흑암의 나라입니다. 빛은 전혀 없습니다. 천국은 빛과 사랑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옥에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세상의 불은 타오를 때 빛이 납니다. 그러나 지옥의 불은 그곳에 있는 자들에게 고통만 줄 뿐, 전혀 빛이 나지 않습니다. 마22:13절에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지옥은 어둠의 나라입니다. 전혀 빛이 없는 곳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곳입니다. 어린 시절에 캄캄한 밤을 혼자 걸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소름이 좍 끼칩니다. 이렇듯 어두운 밤을 걸어가도 무서운데, 지옥은 전혀 빛이라고는 없습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⑷지옥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가면 안됩니다. 막9:43절에서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세상의 불은 재료를 다 태우고 나면 자동적으로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의 불은 꺼지는 법이 없습니다. 몸에 고통만 줄 뿐, 몸 자체가 영원토록 존재하기 때문에 지옥의 불은 결코 꺼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 고통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 벌입니다. 48절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왜 구더기가 죽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시체가 사라지면 구더기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의 구더기는 사람의 몸을 괴롭게 만들 뿐, 사람의 존재 자체가 영원하니까 구더기도 죽지 않습니다. 영 벌입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⑸지옥은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 50절 하반부에 보면 '거기서 울며' 왜 웁니까? 뉘우침의 눈물입니다. 고통의 눈물입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고집 피우지 말고, 예수님을 믿었어야 하는 건데' 뉘우침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또 거기서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를 갑니까? 너무 고통스러워 참느라고 이가 자동적으로 갈립니다.
여러분, 심판 날에는 하나님은 절대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가짜 의인처럼 행사한 사람도 그 날에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었고, 거룩한 척한다고 해서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믿고 바로 섬기고 바로 신앙생활 하는 길이 축복의 길입니다. /할/
▶51절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가르치신 이 일곱 가지 비유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묻기를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바르게 깨달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물어보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말씀을 많이 하셨지만 이렇게 확인하는 질문을 하시는 경우를 흔치 않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천국'이라는 주제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 아닐까요?
예수님의 질문 앞에 '그러하오이다'라는 말은 '알았습니다'라는 대답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의도하신 모든 것은 제자들이 다 알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았다는 그 말씀을 듣고 이제 더 놀라운 진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52절의 말씀입니다.
▶5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이 말씀이 일곱 가지 천국 비유로 결론짓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종합적으로 생각해볼 때 그것은 마치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곳간의 창고에서 물건을 내려오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향해 야단을 치시고 저주하신 일이 있습니다. 특별히 마23장에서는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을 무려 일곱 번씩이나 나옵니다. 이 말은 '저주받을지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기관이라는 단어를 천국을 잘 이해한 사람에게 쓰신 것입니다.
먼저 서기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서기관은 에스라 시대 때부터 내려온 사회종교계급입니다. 원래는 아주 귀한 하늘의 직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읽고, 옮겨 쓰고 해석하는 사람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말씀의 해석 자요 선포 자(목사)와 같습니다.
에스라가 그런 서기관입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을 잘 보존하고 해석하고 전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해석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들이 원래 의미를 상실하고 위선적인 종교 사기꾼으로 전락해갔습니다.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았지만 뒤에서는 돈을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팔아서 제도의 이름을 팔아서 종교적으로 억압하고 사기를 쳐서 욕심을 만족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화있을진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렇게 비판하였던 서기관의 이름을 역설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본래의 뜻을 되찾고자 한 것입니다.
천국을 바로 깨달은 사람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과 같습니다. 이 사람만이 천국의 보화를 꺼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천국의 보화를 꺼내올 수 없습니다.
'여기 서기관'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모든 성도들을 가르치고 새것을 새 계명을 말하고, 옛것은 옛 계명을 말하고 곳간은 신구약 성경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여기 곳간이란 하늘창고를 의미합니다.
하늘창고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 하늘 창고에 있는 모든 것을 빼 낼 수 있는 사람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입니다. 여기서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바로 깨달은 자, 신구약 성경을 바로 깨달아 전재 주는 잡니다.
진정으로 천국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이 신령한 축복들, 이 기름진 축복들, 이 엄청난 하늘의 보화들'을 오늘 이 현실 속에서 많이 빼어 쓸 수 있습니다. 그 속에는 지혜도 있고, 건강도 있고, 성공도 있고, 재물도 있고, 땅도 있고, 기업도 있습니다.
천국의 창고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창고입니다. 오늘 먹으면 다 떨어질 쌀독이 아니라 퍼내어도 끝이 없고 한도 없는 곳이 하늘 창고입니다. /믿/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새것과 옛것을 곳간에서 내어온다고 했는데 여기서 '내어온다, 꺼내온다'는 말의 원어에는 '아낌없이 제한을 받지 않고 물건을 내어 던진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퍼내어도 끝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창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써 그 영적인 축복을 꺼내어 쓰는 사람들입니다. /할/
▶일곱 가지 비유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⑴천국은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계심을 분명히 믿습니까? /아멘!/ 하나님이 분명히 계심을 믿는 사람은 세상은 아무렇게나 막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삽니다.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 자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수1:9절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사41:10절에서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이 믿어짐 '아멘!' 합시다. /할/
⑵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천당이 아니라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⑶천국에는 끝이 없는 보화가 있습니다. ⑷분명한 것은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53-5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는데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신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53-57절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거기를 떠나서'는 갈릴리 바닷가를 떠나서 일곱 가지 비유를 선포하신 현장을 떠나서 어디로 갔습니까?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보통 예수님의 고향이라 할 때는 자라나신 곳 나사렛입니다. 왜 갑자기 예수님께서 고향을 찾으셨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고향을 찾을 때는 명절 아니면 무슨 경삿날이나 찾습니다.
또 타향에 와서 고생한 끝에 성공한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보고 싶어합니다. 또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에 왔는데 큰 실패를 하거나 몸에 병이 들었는데 사람들은 여지없이 고향을 찾아 낙향합니다. 고향은 영원히 그리운 곳이요, 피곤한 인생의 안식처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가족이 있습니다. 본문에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와 그 누이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어렸을 때 같이 놓던 친구들도 있었고, 고향 선후배도 있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그 고향 친척들을 만나러 가셨습니까? 친구들을 만나 옛 추억을 회상하려 회포를 풀기 위해 고향에 갔습니까? 아닙니다. 54절에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고향에 간 것은 부모형제를 만나러 갈 것이 아니라, 또 친구들은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이 우리들과 다릅니다. 정말 사랑하시기 때문에 생명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러 가신 것입니다.
마12:1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이냐?'고 반문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의 혈육은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혈육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의 사람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고 천국 백성이 되는데 있습니다.
다음으로 환영해야 할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배척 당하고 반대를 받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믿을 만한 사람, 가까운 사람에게 배척 당하는 것은 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다른 동네에서 배척받았다면 별로 상처를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자기를 이해하고 사랑해야 할 고향 사람들에게서 또 친구, 친척 가족에게서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을 받았습니까? 나쁜 짓을 했습니까? 도적 적인 문제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이유는 54절에서 밝혔듯이 놀랍게도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 때문에 배척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지혜롭고 너무나 능력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늘의 지혜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혜였고, 사당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지혜입니다. 고향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통해서 한 번도 돌아보지 못했던 영생과 천국과 구원의 말씀과 죄의 문제, 이혼의 문제, 살인의 문제를 비롯한 일상적인 모든 삶의 내용들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전했습니다.
그 말씀 속에 찔림이 있었고, 가책이 있었고, 새로운 도약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능력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총격을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말씀 앞에 그들이 굴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둘려야 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왜냐하면 ⑴질투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 민족성과 똑같습니다.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픕니다. 남보다 공부 잘하고 출세하면 축복하고 인정하기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⑵그들이 어설픈 지식 때문입니다. 57절에 '예수를 배척한지라' 이 말은 '넘어졌다. 기분이 상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질투와 예수님을 잘 안다는 착각 때문에 그들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이스라엘의 속담을 인용한 것입니다. '선지자가 다른 곳에서는 환영을 받지만 고향과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8절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본 절에서 중요한 결론을 맺어줍니다. 믿지 않으면 능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믿지 않으면 능력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그 사람의 믿음대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는 다 기적을 일으켰으나 나사렛 고향에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믿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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