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강) 변화 산의 음성(교훈)! (마 17:1-8)
예수님의 생애의 6대 사건을 꼽는다면 예수님의 탄생(성육신),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재림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변형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매우 중요하기에 공관복음에서 똑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산들이 나옵니다. 구약의 에덴동산에서부터 신약에 겟세마네동산까지 크고 작은 산들이 있습니다.
호렙산 혹은 시내산으로 알려진 모세의 산도 있습니다. 그가 죽은 '느보 산'도 있습니다. 엘리야의 산으로 알려진 갈멜산도 있습니다. 이런 산들에서 성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산이 되었고, 이 산들은 이런 역사를 간직한 채 지금도 시내반도나 팔레스틴 땅에 우뚝 서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한 산이 나오는데 그저 높은 산으로 나왔기 때문에 확실한 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가버나움에서 가장 가까운 다볼산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고, 가이사랴 빌립보성에서 가장 가까운 헬몬산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헬몬산이라고 합니다. 이 산은 해발 약2,850M도 그 산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어 그 눈이 녹아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지역에 물을 공급해주는 산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산입니다. 그러나 그 산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저 '높은 산'으로 알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산중에서 이 산만큼 유명한 산도 없습니다. 이 산에서는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 뿐 아니라 예수님도 함께 계셨습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산에서 예수님은 그 용모가 변화하셨습니다.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이제까지 제자들이 보지 못했던 찬란한 모습으로 변화하신 것입니다.
거기다가 하늘에서 음상이 들려오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는 주의 음성이 들여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은 ◀변화 산의 음성▶입니다. /할/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겠습니다.
▶1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엿새 후에' 이 말씀은 마16:13-28절 이후에 새로 전개될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적 설명구절입니다. 즉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그 다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말씀하셨고, 심판이 있음을 예언하신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똑같은 배경을 설명한 눅9장에서는 '8일쯤'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에 8일쯤 되어 변화하셨는데 신앙고백을 한 그 날과 변화하신 날을 합하면 여드레가 되고 그 이틀을 빼면 엿새가 됩니다.
이 산에 예수님과 함께 동행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이들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12제자 중에 이 산에 함께 올라와 큰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사람은 세 사람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따로 택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조직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백성과 지도자가 있습니다. 최고 지도자와 중간 지도자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와 성도가 있습니다. 회사에는 사장과 사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직 속에는 언제나 최고 책임자가 있고, 그 책임자를 보좌하는 참모 진이나 비서 진들이 있습니다. 혹은 임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서관들이나 참모들 중에 소위 측근이라고 불리는 핵심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들을 심복이라고도 부르고 오른팔이라고도 부릅니다. 정치인들에게도 있고, 경제인들에게도 있고, 군인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핵심참모들이 주님에게도 있습니다. 그 핵심제자들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수제자, 심복제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지금 예수님의 산행에 동행한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중요한 사역의 현장에 늘 함께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현장에 그 아버지와 함께 입회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또한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기도회도 이들이 동행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영광 중에서도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세 사람의 영광의 이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예루살렘교회를 설립했으며 야고보는 주님을 위해 첫 번째로 순교한 제자가 되었고,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님의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집필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들처럼 교회의 핵심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 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이 왜 모든 제자들 중에 세 제자와만 산에 올라가셨을까요?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그때 모든 제자들을 향하여 산에 올라가자고 했는데 세 제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 높은 산에 올라가기를 꺼려했다고 합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빴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를 댔습니다.
그런데 이 세 제자는 만사를 제쳐두고 우선 따라 올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바로 이들이 움직여 나갔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시기를 바랍니다. 변화 산에 오르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바다를 가르고 샘물을 내고 모세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늘 문을 여는 엘리야의 기도를 원하십니까? 산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누가 모세처럼 됩니까? 엘리야처럼 됩니까? 그 산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산에는 모세도 엘리야도 있었습니다. 그 산은 주의 산이라고 합니다. 산은 기도를 의미하고 능력을 의미합니다. 주의 산에서 기도하면 엘리야의 능력도 모세의 능력도 얻을 수 있습니다. /할/
그럼 왜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오르셨을까요?
①은밀한 장소를 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형하시기 위해 은밀한 곳을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가지려면 세상과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도봉산을 자주 올라갑니다.
②기도하시려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가르치고 산에서 기도하여 산에서 변형하셨습니다. 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할/
▶2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모습이 순식간에 변화되는데, 너무 신기합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납니다.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막9:3절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빨래를 잘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정도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속으로부터 발산되어 옷까지 변화된 사건입니다. /할/ 이 내용이 눅9:29절에서 좀 더 상세하게 보충되었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기도하실 때에 변화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께서 변형되실 때, 기도 중에 변형되었다면 우리도 더욱 기도하므로 변화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딤전4: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말씀으로 거룩하게 변화되고 기도할 때 거룩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기도하는 사람은 변화가 됩니다.
창36장을 보면 사기꾼, 약탈자라고 별명을 가졌던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깊이 기도하다가 변화되었는데 이스라엘도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겨뤄 이긴 사람, 승리자란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이길 수가 있고, 누가 승리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믿/아멘!/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여기 '변형되었다'는 말은 '변한다'는 말과 '형상'이란 말이 합해진 단어입니다. 변형이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것인데 외관상의 변화가 아니라 본질상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변형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어떤 다른 형태로 본질적으로 변화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빌2:6-9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예수님은 본질에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셨는데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변형되셔서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인간이 되기 이전의 모습,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모습은 계1:13-16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할/
이것이 바로 승천하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 천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지금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보여주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영광과 거룩한 신성의 위엄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예수님의 변형되신 모습은 제자들이 지금까지 보아 왔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는 초라하고, 고생하시고, 연약한 육신을 가지신 모습만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심히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까? 이는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앞에 8:29절에서 예수님께서 '인 자가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한다'고 했을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절대로 그런 일 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간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이런 제자들의 근본 문제는 고난을 싫어해서라기보다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철저한 실패요,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도저히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복음 역사도 망하고, 자기들의 인생도 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심으로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 후에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승리와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 사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시청각교육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변형되심으로써 최후 승리와 영광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도록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할/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변형되신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변화산 사건을 기억하면서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그의 서신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는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권능을 친히 본 자라'(벧후1:16)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장차 크신 권능으로 재림하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아멘!/
▶예수님의 변화사건은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①소망을 주시기 위해 변화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주님 앞에 휴거될 때 홀연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신랑 되신 예수님 앞에 서서 공중에서 혼인예식이 있습니다. /할/
②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확신이 없고 마음에 의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왜? 믿음을 까먹어 버리고 은혜를 쏟아버리면 사단이 우리를 조롱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의심을 심어줍니다.
의심이 생기면 목사도 별수 없고, 장로도 별수 없고, 권사도, 집사도 별 수 없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도 별 수 없었기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결론이 아닙니다. 반드시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③오직 예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며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변화산에서 체험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할/
▶3절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이 세 제자들에게 보였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모습을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 이렇게 삼자거두 회담이 거기서 있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종된 애굽에서 선민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명령받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광야교회를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시내산에서 선민 이스라엘이 지킬 율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 속에 싸여 있던 사람입니다. 그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빛 때문에 백성 앞에서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리웠던 사람입니다. 그는 분명히 율법의 대표자로 나타났습니다. /할/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그는 모든 선지자(예언자)의 대표자였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 중에서와 지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과 영광을 목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장차 오실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예언하던 사람입니다.
또 모세는 모압 땅(느보산)에서 가나안을 쳐다만 보고, 거기서 죽어 장사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불 말들이 끄는 불 수레를 타고 죽음을 보지 않고 산채로 승천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예수님보다 1500년 전에 이 땅에 와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홍해바다를 건너 40년 광야생활을 통과해 마침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일들을 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에는 여호수아가 완성하기는 했지만 모세의 역할과 사역은 여호수아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이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을 대표합니다. /깨달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 엘리야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사람입니다. 선지자, 예언자 중에 대표자입니다. 예수님보다 9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구약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들과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만났습니다.
왜? 그들이 나타났습니까? 그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1500년 전에 엘리야는 900전의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부활해서 살아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보여 줌으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신앙의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할/
본문과 똑같은 눅9:31절을 보면 아주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신 것을 말씀할 새' 별세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별세로 번역되었으나 헬라어는 엑소도스, 출애굽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한다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장차 우리 예수님께서 출애굽할 것을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육신의 장막을 벗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영광스런 출발을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 사건으로 출애굽 사건이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적인 사건을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출애굽사건입니다. 그런데 그것과 대응되는 신약의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출애굽 사건은 십자가사건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할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사건은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성도들을 죄악의 도성인 세상에서 구원하는 사건입니다.
이 표현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단순한 죽으심이 아니라 선민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출애굽사건의 완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엘리야와 모세를 보내셔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모세와 엘리야, 곧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임을 시청각적으로 확실하게 가르쳐 주시고자 그들을 변화산에 체험을 주신 것입니다. /할/
▶4절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는 그 산 위에 초막 셋을 세워서 같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비에 머물러 살고 싶었습니다. 신비 체험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과 우리와 만남은 신비하게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비체험은 많이 할수록 좋지만, 신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믿/
오늘 베드로처럼 신비 체험한 장소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신비 체험한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이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신비체험은 좋은 것이고,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누구에게 은혜 받았다고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그 분을 통하여 은혜를 주신 것뿐입니다. 그 곳에서 은혜 받았고 그 곳에서 병 고침을 받았다고 그 장소에 집착하여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주시고 병 고침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만 보아야 합니다. /아멘!/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냥 그곳에 안주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또 이 말은 신앙 생활을 그냥 대충대충 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나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빛을 내고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섬기는 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배경 적인 설명을 깃들인다면 산아래 아홉 제자들과 귀신들린 아이와 그 아버지의 애타는 심령 따위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땅의 행복만을 탐내는 말입니다. 천국도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산밑에 가서 봉사하는 것도 힘드니까 사람들과 부딪혀야 되니까 싫고 그냥 여기 저기 있으면 좋겠다는 소리입니다.
눅9:33절을 참조해 보면,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자고 말하는데,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그러니까 베드로가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눅9:32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졸다가 보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우리는 신앙의 잠을 자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육신의 잠만 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잠도 잤습니다. 베드로는 잠자는 것과 참 상관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철야 기도하실 때도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잠을 잤습니다.
그런 주제에 베드로의 본심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여기는 산 위에,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곳입니다. 이 곳은 영광만이 있는 곳입니다. 베드로는 이곳을 떠나기 싫었고, 이 순간이 영원히 붙잡고 싶었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싫었습니다. 산 아래는 많은 고난과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 아래는 문제 많은 양떼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런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웠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이 예수와 영광을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십자가는 덜 지고 영광은 많이 누리기를 바랍니다. 한국 사람은 요행 심리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탕주의로 벼락부자가 되고 떼돈을 벌려고 하다가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십자가가 없이는 영광의 면류관도 없습니다. /할/
▶5절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이때 하늘에서 두 가지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음성은 예수님이 두 번 들었습니다. 본문에서 한번,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이 음성을 들으셨고, 이젠 십자가를 지려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 음성을 들으신 것입니다.
이 음성은 바로 하나님의 확인입니다. '정말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렇게 사랑하고 기뻐하는 내 아들을 너희를 위하여 지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를 향하여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심하지 말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할/
이 말씀을 특별히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길 십자가의 길을 갈 때 도망가지 말라, 그분이 3일 후에 부활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을 의심하지 말라, 그분이 다시 오신다고 했을 때 그것을 분명히 믿으라'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믿지 못했습니다.
이 음성을 들었을 때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6절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심히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이제야 제자들이 정신이 바짝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외의 대상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려워하고 떨고 엎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할/
▶7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이는 예수님의 다함이 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늘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할/
▶8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①'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요8:9절에 보면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 앞에 세우고 고소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예수를 어떻게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이 돌로 치지 말라 하면 '예수를 율법의 범법자로 고소할 것'이고, '돌로 치라' 하면 '로마 국법에 따라 고소할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이는 사형 권은 로마국법만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들은 기회를 잡은 것처럼 큰 소리로 의기양양해서 묻기를 마지아니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몸을 굽히고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성경에는 무슨 글을 쓰셨는지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지만 학자들은 '아마 십계명을 쓰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모세의 율법을 지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은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돌로 치라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국법도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답변을 보면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사형을 언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다시 몸을 굽혀 손으로 글을 쓰셨습니다. 아마도 그 글을 본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만 남았습니다. 오직 그 죄인 여자만 남았습니다. 돌을 들어 칠 수 있는 적격자 곧 죄 없는 자는 예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예수는 글 쓰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돌에 맞을 여자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여자가 대답하기를 '주여 없나이다' 이때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고소하던 무서운 자리에 오직 예수만 남았습니다. 예수가 남으신 것은 그 여자를 정죄하고 사형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여자를 자유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니 사죄 선언을 하시기 위하여 남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를 대신하여 예수 자신께서 돌을 맞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죄인의 곁에는 오직 예수님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만이 죄인의 구주이기 때문입니다. /할/
②'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사람이 보이면 안 됩니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가 보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 보여야 합니다. /아멘!/
흔히 처음에 교회에 나오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뭐 저래?' '장로가 뭐 저래?' '교인들이 뭐 저래?'라고 실망하기 그리고 사람 때문에 왔다가 사람 때문에 떠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목사도 그럴 수 있고, 장로도 그럴 수 있고, 교인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을 향하여 가는 사람입니다. /믿/ 교회에 와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지 말고 완전하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아멘!/ 오직 예수님만 보여야 예수님의 공동체입니다. /할/
네델란드의 '고리덴 붐' 여사는 나치 정권하에서 학살당하는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가 발각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언제 사형 당할지 모르는 암담한 동굴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 분이 나치 정권이 무너진 후 감옥에서 석방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이 세상을 보았다면 나는 감옥 그 모진 고문 속에서 살지 못 했습니다. 세상을 보면 절망이었고 환경을 보면 낙심천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 보니 희망이 생겼습니다. 열차가 터널을 지날 때 어두워도 참고 있어야 합니다. 터널을 지날 때 어둡다고 뛰어 내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참고 지나면 터널을 빠져 나옵니다. 우리는 환경을 보지말고 예수님만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기고 승리하는 날이 분명히 옵니다.' /할/
▶오늘 본문을 가리켜서 변화산의 성회라고도 말합니다. 한번 간추려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①변화산의 성회는 예수님 중심의 성회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는 곳은 어디나 시기, 질투, 분쟁, 자랑이 있지만 예수님 중심의 모임은 하나님의 은혜요, 평화와 축복과 권능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②이 성회는 기도의 목적으로 모인 성회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 산성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기도 없이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몸부림치며 기도하셨는데 우리는 더더욱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③이 성회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⑴용모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둡고 근심의 빛이 사라지고 기쁨과 화평의 얼굴이 되시기 바랍니다.
⑵입술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인인 흉기를 가지고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나 혀로써 사람을 매장시키고 죽이고 추방하기를 잘합니다. 아름다운 말을 합시다. 선한 말을 합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말만 합시다. /할/
⑶심령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면 토하여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뜨거운 열심히 있어야 하고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④변화산의 성회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회입니다.
⑤변화산의 성회는 마지막으로 예수님만 남는 성회입니다. 8절에 '오직 예수님만 보이더라!' 빛도 구름도 사라졌고, 모세도 엘리야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남아 계셨습니다.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계시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신앙의 대상입니다. 세상친구를 내가 성공할 때, 나를 따르고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그러나 내사 실패하고 몰락하면 추풍낙엽처럼 나를 떠나고 멸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몰락할수록 내가 실패할수록 나를 도우시며 위로해주시며 힘을 주십니다. 다 떠나도 예수님은 우리 곁을 안 떠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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