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79강)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라! (마 16:13-2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26

(제79강)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라! (마 16:13-20)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이 지방은 레바논 산기슭 요단강의 발원지 근방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조그마한 전원도시입니다.
  이 무렵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불과 한 달 정도 남겨 놓고 있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감당하셨는데 이제 갈릴리 지역 전도사역을 마감하고 공생애를 정리하는 그런 중요한 시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차례대로 본문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13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 이후부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시작됩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이 던지신 질문의 요점입니다.
  여기 '인자'란 말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성경학자들 가운데 인자를 설명할 때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들 하지만, 여기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의 메시아 칭호입니다. 물론 단7:13절의 말씀과 같이 '인자'라는 칭호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라는 칭호를 통해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때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물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졌던 잘못된 견해와 제자들의 올바른 신앙을 대조하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어째든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하시면서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참된 고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백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롬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의 구원은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바로 이 고백 위에 교회가 시작되고 구원이 시작되고 믿음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할/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소개합니다.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①예수님을 세례요한과 같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선지자입니다. 아주 청렴결백한 정의의 사도입니다. 순교자입니다. 불의와 독재와 싸운 사람입니다. 그는 헤롯왕이 죄를 지었을 때 그의 면전에서 그의 불의를 지적한 혁명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특히 헤롯왕이 예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②엘리야와 같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입니다. 훌륭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능력이 많은 선지자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몸에 상처를 내며 소리 지르고, 바알 신이 불이 내리기를 기도하였지만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태웠습니다. 또 3년 동안 이스라엘에 가뭄이 닥쳐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을 때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3년 동안 오지 않던 비가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 속에서 엘리야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다음 어떻게 보았습니까? 예레미야로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 때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는데 죄악으로 인하여 무너져 내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눈물로 기도한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레미야의 탄식과 눈물, 찢어지는 듯한 민족을 향한 애정을 본 것입니다.
  눅19장을 보면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민중들은 예수님을 여러 가지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인데,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더러는 선지자 중에 하나'로 본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또 다시 제자들에게 좀 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두 번째 던지는 질문이 예수님의 진짜 질문입니다.

 

  ▶15절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예수께서 이 질문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여기 와서 예배드리고 있느냐?'라고 질문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사대 성인 가운데 하나로, 혹은 위대한 스승으로 본다는데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여기 나와 예배를 드리느냐?'
  오늘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로 보느냐?'라는 이 질문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고백은 다른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질문에 베드로가 중요한 고백을 했는데 그 고백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고백은 다른 사람이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이 질문을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떤 민중의 인기도에 신경 쓰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서울시장출마자들은 온통 인기 순위에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을 듣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께 어떤 고백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중요합니다. 신앙고백도 사랑고백도 입으로 하는 것보다는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열린 마음으로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 들어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지금 베드로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핵심을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성령에 감동되어 대답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분해해보겠습니다. 이 고백이 신학의 주체가 된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①'주는 그리스도시오' 여기 '주'라는 말에는 세 가지의 뜻입니다.
  ⑴존경의 뜻이 있습니다. 선생, 랍비라는 뜻이 있습니다.
  ⑵우리 생명이나 재산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노예가 주인이 부를 때 쓰는 호칭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시대 때 사용했던 용어입니다. 당시 노예들이 자기의 주인을 가리켜서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 '주'에게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우선 주인에게는 당시 노예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처분대로 살려주면 살고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예는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것이어서, 주인이 내 자식을 팔면 짐승의 새끼처럼 팔리고 죽이면 죽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시대의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었습니다. 그것이 당시 '주'의 개념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합니다. 그 말은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하는 뜻입니다. 그 '주'라는 고백은 당시 노예들처럼 나의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일생을 그에게 맡긴다는 뜻입니다. '나의 전 존재, 삶과 죽음,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주권을 주님께 맡깁니다.'라는 뜻이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할/ 순종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전적으로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아름답습니다. /아멘!/할/
  ⑶주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 '아도나이' 하나님을 주로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주라는 말은 이런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주라 부른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②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당시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왕과 예언자나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선지자가 되시고 또한 제사장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또 그리스도와 메시아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할/ 메시아는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구세주'라는 말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라는 말은 '당신은 나의 구세주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부모는 나에게 생명을 전수시켜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멘!/ 신앙인에게는 이 고백이 절대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신앙인을 신앙인답게 만들어 줍니다. /믿/


  ③'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떤 관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장차 심판 주로 이 땅에 오실 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물 위를 걷는 것,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믿어지며 성경 전체가 믿어지기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믿으면 내 안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라' 이 고백을 바로 할 수 있는 자가 복 받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복을 받은 자입니다. /할/
  지금 베드로가 이 고백을 어디에서 하고 있습니까?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가 '가이사랴'라고 불리게 된 동기는, 헤롯 빌립 왕이 로마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도시 이름 앞에다가 '황제, 즉 가이사(Caesar)'라는 명칭을 첨가하면서부터 입니다. 도시 이름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거기에다가 로마 황제를 기념하는 화려한 대리석 신전까지 지어 바쳤습니다. 즉 가이사랴 빌립보는 유대인들이 살던 지역 중에서 로마 황제의 권위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시로 건설한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또 한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판(Pan)신'이라는 이방 신 숭배가 만연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도시가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개명되기 이전의 원래 이름은 '파니아스'이였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신들 가운데서 '판(Pan)'이라는 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이 신은 소위 '목양의 신'으로서 헬라인들에게는 바로 풍요의 상징이었는데, 바로 그 '판 신'이 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대표적으로 숭배되던 우상 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와 갈릴리의 다른 여러 동네를 제쳐놓고 하필이면 그 같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갈릴리 바다 위에 배 한 척 띄워 놓고, 혹은 디베랴 언덕에서 지중해 쪽으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제자들끼리만 모여 있는 오순도순하고도 평화로운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에 불신 세상의 가치관이 그 최고의 영향력을 자랑하던 곳, 세속 사회의 권력과 부가 그 최고의 영광을 뿜어내고 있던 가이사랴 빌립보 한 가운데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질문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최첨단 문화를 자랑하던 그 도시의 눈부신 모습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네들의 모습이 얼마나 더 왜소하고 초라하게 여겨졌겠습니까? 하지만 적어도 가이사랴 빌립보 정도의 세상 영광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당신을 자랑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할 줄 알아야 만이, 온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교회를 그 신앙고백 위에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
  오늘도 주님께서는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 같은 곳에서 우리에게 신앙고백을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보다 불신 부모가 더 높아 보이고, 학교 선생이 더 높아 보이고, 직장의 사장이 더 높아 보이는 바로 그 곳이,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람이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는 법인데 너는 과연 누구를 모시고 있느냐?'라고 물어 보시는 장소입니다. /믿/
  예수님보다 오늘의 매상이 더 중요해 보이고, 내 저금통장이 더 귀해 보이고, 내 가족의 여가활동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바로 그 곳이야말로, 주님께서 직접 우리를 향하여 '네 마음과 정성과 뜻이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시는 장소입니다. /아멘!/ 이런 정신이 갈린 우상의 땅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리켜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할/
  이 고백을 하고 베드로는 일약 수제자로 자리 매김을 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열쇠를 받습니다. 또 예수님은 베드로를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그 대답은 네가 말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신 대답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구두시험에서 만점을 맞았다는 말입니다. /할/ 오늘 사람들은 예수를 성자 예수라고 부르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3대 성인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이 아주 유식한 대답인줄 착각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윤리적인 예수로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병 고치는 예수, 먹이시는 예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정확한 대답이 아닙니다. 오늘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이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우리는 여기서 참된 신앙 고백에서 참된 축복이 나온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하여도 주님이 기뻐하시지만 예수님은 가장 사랑하는 방법은 그분을 제일 정확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는 이것을 믿습니다.' 이런 고백을 예수님이 제일 기뻐하십니다. 주를 모르는 사람은 복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알아도 그 속에 복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압니까? 질병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아는데도 아직도 많은 병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무서운 질병이 나오고 있으며 금세기 말까지 에이즈<AIDS>환자가 1천만 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해마다 몇 배로 늘어나는 수치입니다. 얼만 안 가서 많은 사람들이 이 병으로 죽어갈지 모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경찰서 형무소가 그렇게 많은데도 악한 사람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참된 신앙의 고백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예수 안에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믿/
  오늘 우리 예수님은 참된 신앙고백이란 혈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임하므로 하는 것이라고 17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은 다릅니다. 혈육이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신앙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입니다. 내가 고백해야 하는 문제요, 내가 믿어야 하는 문제요, 내가 선택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된 신앙의 고백은 성령의 감동 감화로 하나님의 그 특별한 선택과 은총을 통하여 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바른 신앙의 고백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영의 눈이 열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할/
  이번에는 고백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고백은 참 중요한 수단입니다. 고백은 나를 공개하는 것입니다.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나를 밝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이때부터 나의 숨겨져 있던 마음이 공개되고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없으면 짝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참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맨 정신으로 못하니까 술을 마시고 가서 사랑을 고백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백은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나의 진심을 상대방에게 전해주고 알려주는 가장 진솔한 전달수단입니다. 이 고백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 생활하는데도 이 세상 만천하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하고 자신 있게 공개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롬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할/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고백하고 공개하면 몇 가지 유익이 생깁니다. 하나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만천하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공개하면 자신감이 주어집니다. 신앙생활에서 자신감을 가진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스스로 조심하게 됩니다. 책임 있게 행동하게 되고 신앙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남들로부터 신앙인으로 인정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해 버립니다. 그러면 내게서 떨어질 사람은 떨어지고 멀어질 사람 멀어지고 새로 친구가 될 사람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의 생각과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음대로 신앙생활이나 소신 있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백하는 일이 중요한 일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베드로의 바른 신앙의 고백을 들으시고 그에게 '네가 복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칭찬하시고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이 18절입니다.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우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굉장히 중요한 본문입니다. 기독교 2천년 사에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온 구절로써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주장하기를 이것은 바로 베드로(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보고 그 뒤를 지금의 교황들이 이어갑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에서는 베드로의 신앙의 고백 위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겠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그 신앙고백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이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4복음서를 통틀어 교회라는 말이 3번 나오는데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여기에서부터 교회의 탄생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가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 세례를 받고 가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몇 가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①주님의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집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너는 베드로'라고 했습니다. 요1:42절을 보면 예수님은 안드레를 통하여 처음 소개받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람어인 게바는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예언이 이루어진 순간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름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은 이름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름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름이 좋을수록 제대로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이름은 베드로'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네 이름대로 될지어다'라고 그 이름에 인 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전환점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카톨릭처럼 오해가 생길 수 있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베드로라는 사람 위에 교회를 세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이 신앙 고백 위에 주님의 고백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반석은 바른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말씀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떤 인간의 철학이 전해져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받아서 전했습니다.
  복 받으라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복에 너무 치우치면 기복신앙이 됩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모든 복이 들어있습니다.
  ▶옛날 영국의 어떤 황제는 궁중교회를 떠나 시골 조그마한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궁중 안에 있는 교회 목사가 황제의 비유를 맞추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사람의 말만 전하므로 작은 개척교회에 가서 죄인의 자리에 앉아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의 반석이요, 이 말씀의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7:24절 이하를 보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그 집을 무너지지 않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반석 위에 내 인생을 세우고, 반석 위에 내 가정과 사업장을 세우고, 반석 위에 우리 교회를 세우고, 반석 위에 대한민국을 세워야 합니다.
  진정한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교회가 바른 교회입니다. 교회가 선언문을 냅니다. 교회가 사회 참여를 하고 데모를 합니다. 교회가 구제사업, 의료사업, 선교 사업을 합니다. 그래도 교회가 아닐 수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큰 사업을 하고 큰 구제를 하고 사회 선교, 세계선교를 한다고 할지라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믿/할/
  ②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사람이 세운 교회는 가짜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세울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에 세상 적인 방법이 들어오면 교회는 위기를 맞습니다. 교회는 민주주의 같지만 신본주의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보다는 두 명의 하나님의 사람의 보고가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셨다는 뜻은 세상의 어떤 세력도 교회를 허물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부가 교회를 막을 수 없고 공산주의가 교회를 막을 수 없습니다. /아멘!/
  ③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내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잊어버리고 있는 교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 예수 한 분뿐이십니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교회를 위해서 우리 모두는 순종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교회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할/
  ④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곳입니다. 주님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여기 음부는 죽음, 또는 사망 권세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어디에도 죽음의 권세를 이길 만한 곳은 없습니다. 이 권세는 왕궁에도 청와대에도 거침없이 들어갑니다. KAL기에도 들어가고 세계적인 휴양도시 괌에도 들어갑니다.
  그러나 죽음의 권세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딱 한군데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교회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세상의 권세,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가 하나님의 교회를 둘러싸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권세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전투적입니다. 죄악 세상에서 전투하며,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세상 안에서 영적 싸움을 싸우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와 싸우고 세상정욕과 쾌락과 싸우고 원수마귀와 싸우고 자신과의 싸우고 피투성이가 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의 면류관을 쟁취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15:55-57절에서 말하기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할/
  ⑤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교회당, 성전으로 생각합니다. 교회당과 교회는 다릅니다. 건물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파나 제도도 교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건물이 없어도 교회는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란 바로 신앙의 고백 위에 탄생합니다. 이런 교회 위에 하나님은 천국 열쇠를 주십니다. /아멘!/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교회는 천국열쇠를 갖고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어두움가운데 있을 때에 새로운 역사를 여는 역사의 열쇠를 갖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교회가 기도할 때 새로운 기적이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
  하나님의 도성인 교회에서 언제나 시대의 사람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비밀을 찾는 곳입니다. 이 천국열쇠는 바로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진 성도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 열쇠는 우리의 건강을 지킵니다. 사업도 가정도 지킵니다. 내일의 찬란한 소망의 보고를 이 열쇠로 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천국열쇠를 베드로에게만 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주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바른 신앙의 고백대로 사느냐에 따라 그 열쇠는 작동합니다. /할/

 

  ▶천국열쇠를 알아보자!
  ①속죄의 열쇠입니다. 요20:21-23절에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②구원의 열쇠입니다. 지상의 모든 인간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③축복 열쇠입니다. 축복 열쇠는 바로 십일조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축복 받아야 하고 또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32,500가지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책입니다. 말3: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④기도의 열쇠입니다. 바른 신앙고백을 가진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천국 문이 열립니다. 마7:7-8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할/

 

  ▶20절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여기 '이에'는 '그리고 나서, 그 때에'를 의미하는 말로, 이는 시각적인 연속성을 강조한 말로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이 있은 바로 그 직후를 의미합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예수께서 '그리스도, 그러니까 메시아라는 사실이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자, 예수께서 즉각 함구령(緘口令)을 내리고 계십니다.
  ⑴아직까지 제자들의 신앙이 주님의 십자가를 전하기엔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시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이 되어졌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고난받는 메시아 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메시아 도래의 선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곧 이어지는 베드로의 실수는(22절) 이 같은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실로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예수의 사역의 본질과 그분이 가르치신 천국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아멘!/
  ⑵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리실 경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할 당신의 사역의 노정에 더욱 더 혼선만 빚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당신 자신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신 것입니다(막3:12). /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 바른 신앙의 고백속에 바른 믿음으로 행하여 천국에 문을 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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