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82강) 엘리야와 세례요한! (마 17:9-1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28

(제82강)      엘리야와 세례요한! (마 17:9-13)

 

  한 때 세계적으로 제일 잘 팔린 책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81년 건강하던 그의 어머니가 병원으로부터 갑자기 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몇 주 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입니다. 믿을 수 없어서 21일 동안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마찬가지 결론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몇 달도 아니고 몇 주요?' 그러자 의사는 포기하라고 말했습니다.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가족들이 모여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기도 후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의사가 포기했다면 하나님이 개입하실 기회다. 더 매달려 기도하자. 의사의 진단서와 하나님의 진단서는 다를 수가 있다.'
  어머니는 먼저 영적인 청소를 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시기 질투 미움 다 버리기로 하고 미워하였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용서를 구할 사람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쓰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입에 말을 바꾸기로 작정했습니다. 불평의 말 대신에 감사의 말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치유에 대한 말씀을 20-30개를 뽑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날마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암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어머니의 몸무게가 늘고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긍정의 힘'이 2004년에 쓰여졌는데, 20년이 지나도 어머니가 간암이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답니다.
  여기서 '긍정의 마음이 믿음이요, 가정이 하나가 되어 기도하면 오늘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멘!/ ◀제목 소개!▶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과 그의 수제자 셋이 변화산에서 내려온 사건입니다. 변화산이란 예수님께서 산에서 변형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정확하게는 어떤 산인지 모릅니다. 본문에서는 '높은 산'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높은 산이라고 하면 보통 '헬몬산'을 꼽습니다. 이 헬몬산은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약 38Km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인데 그 해발이 하도 높아서 여름에도 눈이 덮여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무엇을 목격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장님이 눈을 뜨고 귀신이 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난 지금까지의 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적이고 본격적인 사건에 접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토록 계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단순히 2000년 전에 유대 땅 갈릴리 해변 가를 거닐고 십자가처형을 당한 역사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세상우주만물을 통치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만 왕의 왕이시오,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역사를 심판하실 우리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목격한 예수님은 그들이 같이 먹고 자며 말씀을 들었고, 기적을 보았던 그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변화산에서 전혀 새로운 예수님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가리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매일매일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 교회에 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신들이 변화지 않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참 메시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예수님은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변화산에서 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같이 힘있게 비취었으며 그곳이 빛과 같이 광채가 났다고 했는데 바로 그 모습이 성경의 임재를 통해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변화산에서 참 메시아를 체험했습니다. 그들이 그때부터 새롭게 신앙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예수님을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2제자 가운데서도 특별히 세 제자에게만 그 모습을 보려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한적으로 나타나셨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면 부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한 후에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제한 없이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의 본문 9절입니다.

 

  ▶9절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변형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제자들에게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좋은 것은 이야기해야 되지 않습니까? 축복을 나누어야 하고, 기적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여기에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⑴깊은 진리는 아무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진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주시는 은혜입니다.
  성경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 함부로 깊은 진리를 말하는 것은 피차 해가 되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화의 사건은 초자연적인 일이기 때문에 믿음이 없거나 은혜가 없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이해시키기 어렵습니다.
  제자들이 방금 변화산에서 본 신비로운 광경에 대해서 사람들 앞에서 격양된 말로 그대로 옮겨주면 아마도 사람들은 전부 미친 사람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고 난 다음에 그 사실을 증언한다면 제자들의 말을 수긍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된 모습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⑵예수 그리스도는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다는 진리입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말은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믿어지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도하다보면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10년을 전도해도 믿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굉장히 인격적이고 지성적이고 여러 인간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똑똑하지 않아서 못 믿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보면서 예수님은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내가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똑똑해서 그렇습니까? 남보다 잘나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남보다 죄가 없어서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허물이 큰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믿어지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름 받고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보여지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누가 선택받고 누가 선택받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보면 선택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택받은 백성은 전도라는 방법으로 찾으십니다.
  또한 신비나 은혜는 받은 자 만이 압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은혜 받지 않는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해 보아도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5: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안보일 뿐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죄가 씻김 받고 성령의 인 치심을 받은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느껴지고 만나지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⑶'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뜻은, 기독교의 신비는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신비한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을 세상의 믿음과 다릅니다. 세상의 믿음은 믿을 수 있는 것만을 믿습니다. 10+10은 20이 된다는 것만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10+10=200이라도 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초대교회 유명한 신학자인 터툴리안은 '불합리한 고로 나는 믿는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공중의 별을 보고 네 자손이 이같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75세에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결국 100세가 돼서야 아브라함은 후손 이삭을 갖게 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기독교는 정녕 신비의 종교이지만 신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는데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과 부활 때까지 아무에게도 변화산의 기적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고전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⑷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만들려고 하는데 이 일을 말하면 소동이 일어날까 봐 주님이 함구령을 내린 것이고,
  ⑸유대 정치지도자들이 변화산의 얘기를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반역을 꾸민다고 올가미를 씌워 박해할까 봐 주님이 함구령을 내린 것입니다. 
  오늘 9절 말씀 속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높은 산에서 거룩하고 신령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본질적인 영적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습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거룩한 산에 머물러 있지 않으셨습니다.
  22-23절에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아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셔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신 이유입니다.
  우리의 이상은 천국이지만 현실은 언제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높은 산에서 영적인 깊은 체험을 했다면 반드시 십자가 있는 현실로 내려와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와 가야할 십자가의 길이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능력으로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축복의 길로 가는 길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기에 우리는 십자가의 그 좁은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할/

 

  ▶10절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제자들이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런 굉장한 체험을 왜 말하면 안 되는지 잘 몰랐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메시아가 왔구나' 그런데 그들 마음속에 갈등이 하나 생겼습니다. 구약의 말씀대로 메시아가 왔다면 엘리야가 먼저 와야 되는데 엘리야가 먼저 왔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여기서 서기관은 성경을 가르치는 공인 받은 성경 해석 가입니다. 그러니 이 서기관들이 성경을 가르치는데 '엘라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말4:5-6절을 응용해서 한 소리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의지해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주장을 고수한 채 엘리야가 오지 않는 한 예수님은 메시아 일 수 없다는 교리를 가르쳐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지식에 근거하여 조금 전 산상에서 본 엘리야를 연관시켜 질문한 것입니다. 즉 제자들은 산상에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바로 말4:5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엘리야가 누구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영웅이 있는데 하나는 모세와 또 하나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운 시대에 등장한 인물로써 당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불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자리에 있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서 점점 고갈되어갈 때 하나님은 어둠과 부패 속에서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솔로몬의 죽음 이후에 왕국은 둘로 나누어져 약58년 동안 이스라엘의 역사는 영적 암흑기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극치가 아합 왕 때입니다.
  왕상16:30절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또 31절에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그리고 33절에서는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이때 왕이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불같이 책망하는 정의에 사자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세례요한이 헤롯왕의 불의를 책망한 것 같이 말입니다.
  당시 아합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을 책망했고, 그래서 미움을 받았지만 그는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숭배하는 850의 바알의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나오라고 해서 각기 제단을 쌓고 기도해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신이라는 것을 입증하자고 해서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신 선지자로써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보여준 선지자입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850명을 기손 시냇가에 끌고 가서 죽이는 위업을 남겼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수단으로 3년 6개월 동안 하늘에서 비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1년만 가물어도 어려운데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이 안 왔으니 그 사막의 땅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 어려운 때 엘리야는 갈멜산상에 깊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늘 문을 연 선지자였습니다.
  왕상18:45절에 보면 엘리야의 기도의 응답이 나옵니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3년 전에는 엘리야가 이 땅에 비가 내리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비가 오지 않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시내까지 바짝 마르게 역사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엘리야가 다시 하나님께 비를 달라고 기도하니 하나님이 비를 쏟아 부어주십니다. 이 사건을 약고보장로님은 약5:17절에서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할/
  엘리야는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야 그는 또한 불 수레를 타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선지자였습니다.
  ▶독수리과에 속하는 '뱀잡이수리'라는 큰 새는 평소에는 잘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땅에 내려앉았다가 다른 짐승에게 쫓기게 되면 너무 급한 나머지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날지 아니하고 뛰어서 도망가다가 결국 쫓아오던 맹수에게 잡혀서 먹히게 되는 그런 새랍니다.
  참 어리석고 답답한 새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기도라는 훌륭한 날개를 주셔서 태산 같은 문제가 내게 온다고 할지라도 날아서 태산을 넘어가게 만드셨습니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라도 아무리 넓은 환란의 바다라도 날아서 건너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도의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때로는 뱀잡이수리와 같이 기도의 날개가 있음을 잃어버리고 어떤 큰 문제가 닥치면 오히려 그 역경 앞에서 그만 좌절해 버리는 삶을 얼마나 많이 살아왔습니까?
  이제 어떤 역경 가운데서라도 기도의 날개를 우리가 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서 그 위기를, 그 역경을 이기고 나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똑 같은 인간입니다. 그런 그가 기도했더니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여기서 그의 기도를 분석해 보고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아멘!/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사실 그분은 정말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사역이 너무나 탁월하기 때문에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고, 그의 기도를 통해 비가 오지 않고, 또 비 오기를 기도하니 비가 오는 이러한 사건들을 보면 슈퍼맨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똑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곤을 느끼는 것처럼 피곤을 느끼는 선지자였습니다.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는 것처럼 배고픔을 느끼는 선지자였습니다. 우리가 잠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그도 잠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 즉 예레미야나 이사야, 에스겔이나 하박국 같은 선지자들도 쉽게 지치고 낙담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붙들린 것은 그들의 기도의 능력 때문입니다.
  위대한 선지자들조차도 육신적인 피곤과 싸우면서 기도 생활에 전념했습니다. 기도 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뿌리치고 기도에 열중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일군들은 언제나 기도로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믿/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도 기도하면 엘리야처럼 능력자가 됩니다. /할/ 정말 엘리야의 명성은 가히 신화적입니다. 불 수레를 타고 승천한 사람입니다. 하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한 사람입니다, 850대 1의 싸움에서 당당히 승리한 갈멜산의 영웅입니다. /할/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를 드렸기에 비가 안 온 것은 아닙니다.
  바알을 섬기는 우상 숭배로 영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였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굉장히 귀한 기도의 법칙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에 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위해 기도한다고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약4: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습니다. /할/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기도의 간절 성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만 하면 됐지 왜 간절히 기도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의 모습을 보십니다. 진정 성이 있고, 간절함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왕상18:41-45절을 참고해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 앞에 비 오기를 일곱 번이나 기도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까지 아무 것도 변함이 없었고, 구름 한 점 나타나지 않는데도 엘리야는 하나님을 향해 계속 기도했습니다. 응답이 올 때까지 했습니다. 이런 자세를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아멘!/

 

  ▶다시 한 번 엘리야의 신앙을 정리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신앙인가?
  ①여호와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 자체가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고백은 참 중요합니다. 고백은 나를 공개하는 것입니다.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나를 밝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이때부터 나의 숨겨져 있던 마음이 공개되고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없으면 짝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참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맨 정신으로 못하니까 술을 마시고 가서 사랑을 고백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백은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나의 진심을 상대방에게 전해주고 알려주는 가장 진솔한 전달수단입니다. 이 고백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 생활하는데도 이 세상 만천하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하고 자신 있게 공개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롬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했습니다. /할/
  ②그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입니다.
  왕상17:1절에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엘리야는 자신은 오직 하나님만 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다 멀어져가고 있을 때 유독 엘리야만 나는 하나님만 섬기리라고 외쳤습니다.
  ③엘리야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④엘리야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처럼 죽은 신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엘리야에게 그 비범한 용기와 담대함을 베풀어주신 원천입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 것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엘리야는 마지막 불 수레를 타고 승천하기 전에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에게 갑절의 능력을 주고 떠났습니다. 여기까지 엘리사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무엇을 묻고 있습니까? 서기관들이 성경을 가르칠 때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고 하셨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선지 엘리야'를 보낸다는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엘리야의 심정을 가지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 책망을 하며 회개를 외쳤던 그 엘리야의 심정을 가진 자가 메시아 오시기 전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세례요한을 지칭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1:14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오리라 한 엘리야'는 곧 세례요한이라고 지칭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11-12절을 읽어보면 잘 알게 됩니다.

 

  ▶11-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설명해 주시기를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출생한 주님의 선구자로써 유대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던 광야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촉구했는데 정의로운 삶과 인간관계를 주장했습니다. 남의 것을 늑탈한 것은 모두 갚으라는 등의 합당한 메시지로 힘있게 외쳤습니다.
  눅1: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말씀하신 그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헤롯왕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가로챈 일을 직언 하다가 결국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극찬했습니다. 눅7:28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또 그를 사40:3절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사야가 예언한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위치를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마3:11절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또 요1:27절에서는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얼마나 겸손합니까? 또 세례요한은 요3: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영광의 그늘에 숨겨져야 합니다.
  12절에 엘리야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왔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고난의 삶을 살다가 마지막 최후의 순교를 당함으로 요한의 생애 속에서 그들은 엘리야의 관한 예언의 성취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인자는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여기 '인자'란 말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성경학자들 가운데 인자를 설명할 때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들 하지만, 여기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의 메시아 칭호입니다.
  물론 단7:13절의 말씀과 같이 '인자'라는 칭호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라는 칭호를 통해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셨던 것입니다.
  '인자는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세례요한을 영접하지 않고 임의로 대접한 이스라엘백성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제2의 엘리야인 요한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메시아의 선구자였습니다.
  하나는, 그가 다시 올 엘리야라는 사실은 백성이 몰라본 점과, 또 하나는 고난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백성들을 세례요한에게 행했듯이 예수님이 대망의 메시아인줄 몰라보고 박해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13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늦게나마 제자들이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늦게라도 깨닫는 것이 복이요, 은혜입니다. /아멘!/
  그런데 많이 안다는 것과 깨달음과는 다릅니다. 안다는 것은 머리로만 이해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알고, 느끼고, 결단하는 종합적인 지혜를 말합니다. /할/ 지식을 과거 지향적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미래 지향적입니다.
  깨달음에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우선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고,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고, 매를 맞고 깨닫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무엇을 잃어버리고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사람은 돈 10원의 귀중함을 깨닫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깨달읍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를 바로 깨닫는 성도가 됩시다. 시49:20절에서 시인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깨달음이 복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주어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마땅히 주어질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단잠을, 건강을, 식욕을 복인 줄 모르고 삽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그것을 모르면 잃고 난 후에 알게 됩니다. 단잠을, 식욕을, 건강을 잠시 중단 당해 보아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복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절대 필요합니다. 본문에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늦게라도 깨달았다면 이것도 은혜인줄 믿습니다. /할/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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