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83강) 산 아래서의 사건! (마 17:14-21)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29

(제83강)         산 아래서의 사건! (마 17:14-21)

 

  본문의 배경을 보면 먼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정리하시기 위해 수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얼굴이 변화되어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본문의 변화산의 사건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고 난 뒤 일주일 정도 간격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어디서 변화하셨는가?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높은 산'이라고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산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북방 가이샤랴 빌립보와 가까운 2,700m의 '헐몬산'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전통적인 견해는 갈릴리에 있는 540m의 '다볼산'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변형된 예수님의 옆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눈앞에 광경에 감동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는 허망한 말을 합니다. 또 이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는 음성으로 완전히 공포에 빠져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는 음성을 듣고 제자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 전의 모든 일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전과 같은 모습으로 계셨습니다. 이 사건을 신학자들은 '변화산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산의 종교입니다. 인류의 역사의 시작을 에덴동산에서 시작했습니다. 노아 홍수 후 인류가 재출발한 곳도 아라랏 산에서부터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헌납한 것도 모리아 산이었으며, 그곳은 나중에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신앙의 진원지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내려주신 것도 시내 산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종교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엘리야가 참 종교를 증명한 곳도 갈멜산이었으며,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의 기초를 놓은 곳도 다윗 성, 즉 시온 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곳도 갈보리 산입니다. /할/
  산은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접촉점을 의미합니다. 변화 산의 예수님의 변형은 기독교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확고한 증명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변형이 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변형과 함께 그 자리에 동참했던 모세와 엘리야는 그들 생애에 예수님의 변형과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났으며 엘리야가 불 병거와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한 사건이 변형된 사건입니다.
  변화산의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바로 약속된 메시아라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여전히 메시아 전의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말이 마음에 걸려 이를 예수께 묻자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이 바로 엘리야로 왔음을 암시했습니다.
  이 사건을 베드로는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으며 일생 변치 않고 훌륭히 사도의 길을 걸어가는 데는 그때 변화산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벧후1:6절 하반 절부터 17절에서 베드로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지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할/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와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설교 제목!▶

 

  항상 산 아래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배경을 보면 예수님이 세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 제자들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시몬 베드로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나는 주님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산밑에서 괴로워하며 마귀에게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 제자와 함께 산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바로 그때에 산밑에서는 귀신에 들려 고생하는 아들을 둔 한 아버지가 그 아들을 데리고 산아래 있는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제 아들을 고쳐주십시오, 이놈이 간질병이 심해서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고 도무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발 좀 고쳐주십시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아홉 명의 제자들은 제법 큰 소리로 고함을 치며 귀신을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허탕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이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성경에는 없지만 그 아이 아버지가 제자들을 얼마나 우습게 보았겠습니까? '저것들도 예수님의 제자라고, 왜 그리 능력이 없냐?'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을 저주하시며 차라리 찍어 던지우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또 맛을 잃은 소금을 밖에 버리어 사람들에게 밟힐 것을 경고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오셔서 '무슨 일이냐?'고 하시자 그때 그의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설명을 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꾸짖고 책망하시고 그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아버지가 예수님께 아이를 데리고 와서는 막9장을 보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시고 나서 기도하시니 귀신이 소리 지르고 나가고 그 아이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보면 그 메시지의 초점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귀신들린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의 능력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의 초점은 그 아들을 고치지 못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제자들에게 맞추고 있습니다. 이 불 신앙이 오늘 메시지의 초점입니다. /할/

 

  ▶14절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저희는 세 제자를 말씀하는 것이고, 무리는 산아래 남아있는 9명의 제자들인데, 본문의 배경을 눅9:37절에서는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 쌔' 그러니까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세 제자가 꼬박 철야기도하고 그 이튿날 내려오신 것입니다.
  막9:14절에 보면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우리는 여기서 산아래 광경을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9명의 제자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한 사람'은 귀신들린 아들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못 고치고 쩔쩔매는 것을 많은 무리들이 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이 사람의 신앙의 자세가 되어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피조물의 기본신앙의 자세입니다. 여기서 '꿇어 엎드렸다'는 것은 '존경의 의미가 있고, 항복의 의미가 있고, 모든 것은 죽이든지 살리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게 맡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꿇어 엎드린다는 자세는 늘 깨어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 능력자요, 힘이 있는 자입니다. 본문에 이 아버지는 문제를 가지고 제자들에게까지 왔으나 해결 받지 못했음으로 다시 주님께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할/

 

  ▶15절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이 아이의 간질병은 보통 간질병이 아니라 귀신이 들려 간질병이 든 경우로써 막9:17절에 보면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그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가 나타내는 증상이 간질과 똑같았던 것입니다. 귀신이 역사하면 어린아이는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거꾸러뜨립니다. 저도 어렸을 때 동네 아주머니하나가 꼭 비가 와서 물이 고이면 그 물 속에서 간질 하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거품을 품고 이를 갈며 지랄병을 합니다.
  아마도 이런 자녀를 가져보지 않은 부모들은 이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겠습니까? 그 아들이 또 외아들입니다.
  눅9:38절에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 아들이나이다.'
  아이의 아버지의 신앙이 귀합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을 메시아로 불렀습니다. 생명의 주인으로 불렀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신앙은 고백이 위대해야 합니다.
  신앙이란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덧입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긍휼하심을 덧입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한 시라도 살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사람은 모든 문제를 가감하지 않고 솔직히 주님께 고백했습니다. 이런 신앙이 귀한 신앙입니다. /아멘!/
  마9:21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 아이가 언제부터 그랬느냐고 물으실 때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라고 대답을 합니다. 벌써 고질적이 되어버린 병입니다. 귀신이 근방 들린 사람은 근방 가서 기도하고 찬송하면 잘 나갑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귀신에 잡혀있는 사람은 좀처럼 나가지 않습니다. 귀신이 집을 짓고 거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모는 아이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돈이나 체면, 어떤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무엇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막5장에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에 시달리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한 여자가 나옵니다. 그 여자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막5:26절에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이 불쌍한 여자가 예수님의 뒤에 가서 옷자락을 붙잡고 병이 나았습니다.
  본문의 아이의 부모도 결국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올라가셔서 하룻밤은 꼬박 철야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할 수 없이 남은 제자들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아홉 명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았는데 능력이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귀신을 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귀신은 더 난동을 부렸습니다. 어린아이를 거품을 물고 이를 갈며 넘어지게 합니다.
  그곳에 누가 있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이 그러지 않아도 저것들이 고쳐내나 어디 보자는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사 깨끗하게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교만한 서기관들의 입을 딱 막았으면 얼마나 멋있고 통쾌했겠습니까? 서기관들이 아마도 '귀신을 쫓아낸다고 큰 소리 치더니 아이로 더 망가뜨렸구먼!'하고 빈정댔을 것입니다. /할/

 

  ▶16절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똑같은 배경에 막9:18절에 보면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여러분, 이 제자들이 어떤 제자들입니까? 주님께 다 능력을 받은 자들입니다. 마10:1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할/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에게 권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전도하러 내어보내셨습니다.
  마10: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눅10:1절 이하에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가 전도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눅10:17절 이하에 이렇게 보고합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할/ 
  귀신들도 나사렛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에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합니다.' 그러니까 산아래 아홉 제자들은 이미 찬란한 영적 승리의 체험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무리들 앞에서 서기관들 앞에서 영 말이 아닙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이 산밑에서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을 상실했고, 은혜를 다 까먹어버리고 나니까 이렇게 허수아비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죽으나 사나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산아래서 세상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신앙인이 세속에 빠지면 무기력해 집니다.
  신앙의 능력은 주님 앞에 있을 때 일어납니다. 빌4: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예수님을 떠난 심령은 살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동석하지 않고 예수님을 떠난 삶을 살았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믿/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여기 '믿음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말씀이고 '패역하다'는 말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고는 하면서도 '주인을 향한 섬김이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패역'이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왜곡시킨다' '그르친다' '굽게 한다'는 뜻의 '디아스트레포'입니다. 이 말은 잘못된 삶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믿는 티가 나지 않는 생활이 바로 패역한 생활입니다. 헌신이 없는 생활, 그래서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생활이 패역한 생활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가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믿음이 없는 세대가 된 것은 아담이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⑴불신의 근원은 하나님을 잃은 데서 왔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가치와 의미의 근원이 되시는데 그 근원을 잃어버렸으므로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⑵인간이 하나님을 잃으면 자기 자신을 잃은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할/
  ⑶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거짓되며 믿음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패역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요, 진리에 대한 거역'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은 부모형제를 거역하고 이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패역'은 '거룩에 대해서, 정직에 대해서'의 거역합니다. 살인이 일어나고 범죄와 폭력과 테러가 일어나고 자연은 공해로 죽어가고 지구는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여러분! 얼마나 무섭습니까?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실패도 여기에 있습니다.
  ①믿음이 없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믿음은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 제자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한 이 믿음은 구원받을 수 있는 그 믿음이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능력을 행할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는 구원 얻을 믿음이 없는 것이고 본문의 제자들의 믿음은 역사를 일으키는 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능력을 주신다고 해도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없다면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이 떠날 때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이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막9:23절을 보면 아이 아버지가 주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그때 예수님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이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낙망하며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가 실패합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이 큰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믿음이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영적 원리에 잡혀야 합니다. 
  ⑴매일매일 우리들의 생활 속에 긍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나도 하나님 안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귀합니다. 미국의 수필가 에머슨은 '사람이란 종일 자기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이루며 산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품은 생각에 따라 삶을 이루어 나갑니다. 잠23:7절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큰 생각을 품은 자는 큰 작품을 남깁니다.
  우리들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입으로 시인하는 말의 능력은 더 큽니다. 롬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또한 약3장을 보면 '혀는 키와 같아서 키가 끈 배의 방향을 정하는 것처럼 사람의 혀가 온 몸을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은 돌고 돌아 비밀로 이야기했지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이란 부정적인 말을 하면 그 분위기가 부정적으로 바뀌게 되고, 파괴적인 말만하면 결국 파괴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큰 사람의 화재는 아이디어이고, 보통사람의 화제는 돈 이야기이고, 작은 사람들의 화재는 남의 험담에 있다.'고 했습니다. 예부터 큰 사람은 남의 험담을 하지 않습니다. 험담은 비난입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해를 당합니다.
  ⑵우리의 신앙을 발전시켜 나가려면 부정적인 감정에 항복하면 안 됩니다. 왜 실패자가 되고 왜 무능력자가 됩니까? 항상 부정적인 자기감정에 항복하기 때문입니다.
  ⑶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형편에 처하든지 항상 좋은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으로 상주시는 분이십니다. 히11: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아멘!/
  ⑷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합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원망과 불평대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도 대 수술을 받고도, 교통사고로 인하여 큰 부상을 당하고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지켜주심에 대한 감사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주일 동안에 아니 1년 동안 내내 병원에 가지 않고 약 한 봉지 먹지 않고 건강하게 지냈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감사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예배의 행위입니다. 시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할/
  ⑸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기도를 드리십시다. 막11: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 믿음을 키우십시다. 큰 믿음은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서 능력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실력 있는 사람이 되십시다. 장사하는 사람은 돈 잘 버는 것이 실력입니다. 군인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실력입니다. 정치가는 정권을 잡고 정치하는 것이 실력입니다. 신앙인은 믿음이 큰 자가 실력자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②제자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은밀한 죄가 있었습니다. '패역한 세대여!' 아마 이 9명의 제자들은 세 제자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을 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믿음의 원리를 원망과 불평 속에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죄가 그 속에 있으면 하나님은 외면하십니다. 시66: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할/
  ③왜 그들이 실패했습니까? 제자들이 헌신이 없었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주님께 내어 바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봉사, 헌신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능력으로 연결됩니다. /믿/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22-23절을 보겠습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 문제를 나에게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어떠한 문제라도 하나님은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마19:26절에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할/

 

  ▶18절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주님의 능력은 바로 이것입니다.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정상적인 아이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제 우리도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과 믿음의 능력으로 귀신을 꾸짖어야 합니다.
  막16:17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런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사단을 이길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든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홉 명의 제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황하고 두려워했습니다.

 

  ▶19절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우리는 제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많은데서 물어보기가 부끄러우니까 조용히 예수님을 따로 만나서 '우리는 왜 안 됩니까?'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귀신을 못 쫓았다는 문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왜 안 됩니까? 능력이 있고, 병도 고치고 기적도 일으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안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도전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도전정신이 있어야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 질문에서 우리의 신앙의 태도를 점검해 보는 기회를 삼으십시다.
  ⑴믿음의 사람은 불리한 열등의식을 몰아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너무 늙었어, 아직 나는 젊어서 경험이 없어, 나는 높은 사람들을 하는 사람이 없어, 나는 자본이 없어, 나는 건강이 딸려' 등등 많은 이유와 변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차피 인생은 빈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무엇인가 가지고 나온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삼성의 이 회장도, 현대 가의 정 회장도 빈 손들고 나왔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할/
  여러분! 깜짝 놀랄 사실하나를 말씀드릴까요? 인생길이 가장 위대한 것들은 모두 공짜입니다. 우리가 집도 사고, 옷도 사고, 모든 일용할 물품들을 분명히 값을 치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귀중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귀중한 우리의 생명, 공기, 자연, 시간, 건강 이런 것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다 공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 우리의 눈도, 귀도, 손도, 발도 공짜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도 비용이 필요 없습니다. 모든 위대한 일은 믿음과 함께 시작되어집니다. 믿음의 큰 재산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⑵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이라도 내 영혼에 비타민으로 공급해야 합니다.
  육신이 허약하고 병약한 사람은 의사가 비타민을 권합니다. 우리 영혼의 믿음이 허약한 사람도, 영혼의 비타민을 먹어야 합니다. 기도는 내 영혼의 비타민입니다. 찬양도 내 영혼의 비타민입니다. 간증도, 하나님의 말씀도, 설교를 듣는 것도, 네 영혼에 비타민을 먹는 것입니다.
  ⑶믿음을 금이나 생명처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별로 가치 없는 것들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낭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믿음은 낭비할 수도 있고,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계산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못했습니까?' '내 믿음이 얼마나 될까?' 믿음의 계산을 통해서 우리의 자고한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활력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깨닫는 자가 복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측량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왜 나에게 축복을 안겨줍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뭔가 풀린다고 말하더니 나는 예수 믿고 더 어려움을 당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심으로 네가 하나님께 얼마만큼 '믿음을 보였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 죄 때문에 통곡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일이 있습니까? 주님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해 보셨습니까? 그 영혼이 지옥 음부에 떨어질 것을 바라보고 얼마나 가슴을 조였습니까? 정말 모든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얼마만큼 매달렸습니까? 우리는 진지하게 이 문제들을 한 번 반성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한번은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갈릴리 해변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러자 주님이 일어나서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하십니다.
  여러분!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분량만큼 축복하시고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시간 진실하게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정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믿음을 달아보아야 합니다. ㈁자기 믿음에 늘 도전해야 합니다. ㈂믿음에 자극을 주어야 합니다. ㈃싱싱한 믿음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느 곳인가 나를 도울 믿음의 사람이 있다고 하는 기적을 알아야 합니다. 산  아래 내려오신 주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시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할/

 

  ▶20절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생황에 궁극적인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아멘!/ 성경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그것이 지식으로 끝나면 아니 됩니다. 믿음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못하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겨자씨는 살아있는 씨앗입니다. 작은 씨지만 땅에 심어 싹을 틔우고 잎을 피우면 나무가 자라서 새들이 깃들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 그늘에서 쉬기도 한답니다.
  살아있는 믿음이 귀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형식적이고 흉내내는 믿음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믿/
  그렇습니다. 교회는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얻는 곳입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또 시121:1-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기서 산은 ㈀고난과 역경일 수도 있고, ㈁낙심과 절망일 수도 있고, ㈂좌절과 패배일 수도 있고, ㈃인생의 문제, 즉 요약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불가항력'적인 일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에도 '절망이다, 갈수록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성숙은 인생의 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인생은 성숙해 지고 신앙도 뜨겁게 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교회는 주님 앞에 나와 도움을 청하는 곳입니다. 시편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나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도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에제르'의 '지원하다, 구조하다, 구원하다'는 뜻인데, '어려움이나 위험한 순간에서 구해주거나, 일을 해결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도움의 종류는 '적군의 손에서 구해주는 군사적인 도움과 고아나 과부, 질병에 걸리거나 개인적인 곤경에서 구해주는 비군사적인 도움'이 있습니다.
  도움을 얻는 비결은 바로 기도입니다. 마21:21-22절에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할/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없음'이라고 쓰여 있는데 어떤 사본에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마가복음에 이 말씀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우리는 어찌하여 능치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랬더니 예수님은 막9:29절에서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즉 하나님께서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끝까지 기도드릴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대답이 두 가지입니까? 아닙니다. 기도와 믿음은 똑같은 위치입니다. 기도하면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는 성도는 늘 깨어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와 믿음은 같은 개념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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