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80강) 예수를 따르는 길! (마 16:21-28)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27

(제80강)         예수를 따르는 길! (마 16:21-28)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었답니다. 하나는 무한한 가능성이고, 또 하나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삶이란 하나의 기회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기회들이 지나갈 때 그것은 바르게 선택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발휘함으로 인생의 위대한 성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많은 기회가 옵니다. 그 기회를 바로 선택해서 신앙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은 크게 축복을 주십니다. 마25장을 보면 달란트비유 또는 청지기 비유가 나옵니다. 이 말씀은 요즘 말로 바꿔보면 어느 큰 회사의 회장이 사원 셋을 불러서 자금을 대줄 테니 사업을 한번 해보라고 말한 후 외국에 갔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5억을 또한 사람에게는 2억을, 마지막 한사람에게는 1억을 각각 주었습니다. 회장님은 그들의 기업 능력을 테스트해 보고 회사를 하나씩 맡기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5억을 받은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해서 5억을 남겼고, 2억을 받은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해서 2억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1억을 받은 사람은 용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즉시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서 모험과 도전도 없이 1억을 그대로 금고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습니다.
  드디어 1년 후 회장이 돌아와서 그들을 불러 결산을 합니다. 5억을 남기고, 2억을 남긴 사람들에게 회장은 '수고했어요, 내가 회사 하나씩을 당신들에게 맡길 테니 최선을 다하시오' 그러나 1억을 받았던 사람은 1억을 그대로 가져와서 말하기를 '회장님의 돈을 낭비할까봐 금고 속에 넣어 두었다가 고스란히 가져 왔다'고 하자, 회장은 노발대발하며 '왜 은행에라도 넣지 않았소, 은행에 넣어 두었다면 이자라도 나왔을 텐데 금고 속에 넣어 두었단 말이요, 당신은 사업할 능력이 없소'하면서 그 1억을 빼앗아 5억을 남긴 자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많은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할/ ◀제목 소개!▶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땅위에 많은 사람들은 다음 네 가지를 따라 삽니다.
  ①욕심을 따라 삽니다.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을 합니다. 욕심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양심이 악해지고 행실이 더러워지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도 망신을 당하고 고생을 하게 됩니다.
  ②세상풍속, 세상쾌락을 따라 삽니다. 잘못 가다가는 가정이 파산되고 자신도 파산되고 맙니다.
  ③권력을 따라 삽니다. 지금도 정치권에는 줄서기가 한참입니다.
  ④우상을 따라 삽니다. 우상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따라 살아야 합니까?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아멘!/ 따라합시다. '예수님을 따라서 살자!' /할/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21-23절은 주께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처음으로 언급하셨습니다. 24-28절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은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예고가 나오는데 본문이 처음 수난예고를 하시는 장면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여기서부터 제2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21절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야만 한다고 하십니다. 예로부터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요, 큰 임금의 성'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예루살렘은 본래 가나안 땅에 있었던 밀로(Millo)라는 작은 성읍이었습니다(삼하5:6-10). 그 후 다윗이 즉위하여 헤브론에서 그 도읍지를 밀로, 즉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에 '평화의 성'으로 역사상 그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그 성에 성벽을 쌓고 다윗의 망대(탑)까지 쌓았고 그의 거처도 그 성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은 솔로몬 왕의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의 성전으로 말미암아 선민 예배의 중심지로 명실 공히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 후 히스기야 왕 때에 새롭게 확장이 되었고,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 중에도 예루살렘은 그들의 마음의 고향, 영혼의 고향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이 고향 예루살렘을 향하여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예루살렘 성전은 느헤미야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사의 변천과 함께 예루살렘은 열강들, 다시 말하면 페르시아, 헬라, 로마제국들 사이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보존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인 선민의 죗값으로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도 장군에 의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주후 136년에 히드리얀에 의해서 재건되었고, 637년에 다시 회교도의 손에 들어갔으며, 1099년에 십자군 원정으로 다시 찾게 되었고, 1517년에 터어키 사람들의 손에 넘어 갔고, 1917년에 연합군의 점령 하에 있다가 1948년에 독립하여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상에 나타난 예루살렘은 온갖 역사의 정글 속에서 정치와 종교, 문화와 역사를 가지면서 숨 가쁜 피의 역사 3,000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겠다고 하시던 그 때부터 약 800년 전에 알렉산더 대왕은 예루살렘을 진격하여 칼로 예루살렘을 정복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몇 가지 대조되는 것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33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젊은 알렉산더가 예루살렘을 향했는가 하면 젊은 예수도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청년의 예루살렘을 향한 역사의 향방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습니다.
  역사가 '럿셀 딜롱'은 말하기를 '알렉산더는 왕관의 화려함 속에 태어났고, 예수는 말구유에서 났다. 알렉산더는 왕의 아들로 왔으나,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왔다. 알렉산더는 왕좌에서 경배 받는 자로 죽었으나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조롱받는 왕으로 죽었다. 알렉산더의 생애는 성공이었으나, 예수의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와 예수, 이 두 사람은 모두 예루살렘을 향한 입성의 걸음은 같았는데 예루살렘을 향한 두 사람의 걸음은 예루살렘을 다른 운명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의미가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수십만 명의 생명의 피를 흘렸지만, 예수는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의 정복자'와 '검의 정복자'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알렉산더는 칼로 세계의 왕좌를 모조리 정복하였으나 예수는 사랑으로 모든 세계의 무덤을 정복하신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모든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으나 예수는 모든 사람을 온갖 종류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자유와 평화의 왕자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할/
  알렉산더는 정복자의 화려한 역사를 기록하였으나 예수는 사랑과 평화, 그리고 영생을 주는 구원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요란한 말굽 소리로 예루살렘에 진격했으나 예수님은 조용히 한 마리의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 장소에 십자가를 지시려 가시는 길입니다. 눅13:33절에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그 말씀을 이루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할 필연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구체적으로 '이제 내가 얼마 후면 예루살렘으로 간다. 그곳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붙잡히고 그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흘 후에 다시 부활할 것이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누구인가를 확인시켜주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왔는지를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려 왔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은 외로운 길이고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순히 선한 일만 하기 위해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진정한 목적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데 있습니다. 바로 그 사역이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간단한 한 절이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로써 사명을 수행하는 결정적인 과정들을 아주 정확하게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소를 말하고 계십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을 반대하고 고난을 주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의원들입니다. 당시 모든 법을 다루는 공회원은 모두 71명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고난을 받고'나서 그 다음에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제 삼일만에 살아나리라'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할/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것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후에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때로부터'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하자, 예수님은 이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의 신앙의 올바르게 정립된 뒤에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진 믿음과 그 믿음의 성숙도에 따라서 주시는 은혜도 다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기 전에는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씀하십니다. 참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참된 사명을 위탁하시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믿/
  그런데 보십시다. 이 놀라운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말씀해 주시는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헤매고 있습니다.

 

  ▶22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 당시 제자들에게도 영적인 무지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53장에 기록되어진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들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들이 흔히 생각했던 것처럼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아 왕국을 이룩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 달려서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은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지 아니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편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편견이 있습니다. 각자의 안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자기의 안경을 쓴 대로 듣습니다. 즉 자기의 편견대로 자기의 감정대로 듣습니다.
  목사님이 책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어떤 사람은 '아! 그래, 내가 그런 사람이야, 정말 내가 잘못했어!' 반성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은혜를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니 목사님이 나하고 무슨 감정이 있어서 이렇게 여러 사람 앞에서 내게 모욕을 주느냐?'고 삐죽거리고 시험에 듭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시험 드는 자가 손해를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 좋은 편견을 가지고 설교를 들으십니다. 잘 듣고 깨닫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아멘!/
  본문의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른 신앙을 고백해서 예수님께 크게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지극히 인간적이고 불 신앙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라는 부분의 원문을 보면 여기에는 아주 강렬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위험에 빠지려는 사람을 붙들고 '정신 차려, 죽으려고 그래'와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정신 차리세요, 예수님' 그러면서 꾸짖는 격입니다. 여기 '간하여'란 말은 '꾸짖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책망하듯 마치 선생이 제자를 야단치듯 책망한 것입니다.
  '그리 마옵소서'라는 말속에도 '예수님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는 당신의 길을 반드시 막겠습니다. 절대로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단호하게 예수님의 일을 막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이 땅에 속한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아 왕국이 아니라 영적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오셨습니다. /할/


  ▶우리는 베드로의 말속에서 몇 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①하나님의 일에도 언제나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결코 성령의 역사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나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를 마귀가 그냥 두지 않습니다. 발악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적당히 예수님을 믿으면 마귀가 건드리지 않습니다. 왜? 건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훼방을 놓습니다.
  ②마귀는 하나님을 직접 공경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마귀는 예배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베드로는 마귀에게 시험을 많이 당한 사람입니다. 그는 후에 자신이 마귀에게 당한 경험을 토대로 해서 우리에게 권면한 말씀이 있습니다. 벧전5: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할/
  왜 베드로가 이렇게 마귀에게 넘어 갔습니까? 베드로는 마치 자신이 예수님의 보호자나 되는 것처럼 행동을 했습니다. 이것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 때문이고, 내가 제일이라는 교만 때문입니다. 앞에서 칭찬 받은 것도 머리를 들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23절에 보시면 알게 됩니다.

 

  ▶23절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수단으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마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과 죽는 것은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며 방법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을 인간적인 수단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하시는 일은 그 어떤 일도 막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되는 것이지, 사람의 수단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단아'라고 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교묘하게 이용하여 충동질하고 속이고 파괴하며 예수님의 일은 방해하려는 숨어있는 사단의 세력을 보시고 꾸짖은 것입니다.
  마귀는 양의 가죽을 쓰고 나타났습니다. 마귀는 뿔 달고 오지 않습니다. '나는 마귀다'하면서 오는 마귀는 하나도 없습니다. 가장 교활하게 천사의 옷을 입고 옵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꼼짝없이 넘어갑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세 가지를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①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렇게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고 가로막는 것은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사단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베드로라는 가장 가까운 제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고난 없는 영광과 왕권을 주겠다고 했는데 다시 가로막고 나서는 것입니다. 사단의 집요한 공격은 우리가 죽어 주 앞에 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에 우리는 끝까지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할/
  또 사탄은 언제나 예수님보다 앞서려고 합니다. 나의 생각, 판단, 나의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사탄의 종노릇하기 쉽습니다. 봉사하고 헌신할 때도 예수님보다 앞서지 맙시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참된 헌신이요, 봉사입니다.
  사탄은 항상 예수님은 뒤로 제쳐놓고 앞에 나서서 설치도록 농간을 뿌립니다. 절대로 예수님은 제쳐두고 앞에 나서면 안 됩니다.
  ②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직역하면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단은 베드로를 통하여 교묘하게 덫을 놓고 있었습니다. 마치 길 한 가운데 놓은 걸림돌처럼 거기에 걸려 넘어지도록 작용하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걸려 넘어지도록 온갖 장애물을 길 한복판에 늘어놓습니다. 사탄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가 잘되는 꼴은 못 봅니다. 그래서 넘어지도록 방해를 하고 장난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걸림돌을 치워주십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멀고 험해도 평안히 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니다. 우리는 절대로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다. 고전10:3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할/
  ③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탄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사람의 체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하는 일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에 우선입니다.
  여기까지 사탄의 방법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사탄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 길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참된 제자의 길은 세 가지, 자기를 부인하는 길, 자기를 십자가를 지는 길,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할/
  ①자기를 부인하라! 진정한 자기부인이 무엇일까요? 바클레이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내 유익보다는 주님의 유익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생활의 지배원리와 그 이상으로 삼는 삶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정 하든가? 아니면 주님을 부정 하든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판단이나 경험이 살아 있으면 주님의 말씀을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지식을 믿느라고 주님의 말씀과 그 능력을 믿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단한 자기 부정이야말로 하나님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의 주장이나 자기의 고집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여기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의미는 옛사람의 죽음을 말합니다. 엡4: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은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옛사람이 죽지 않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 옛사람은 내 안에 있는 '교만, 거만, 오만, 욕심, 탐심, 거짓' 등입니다.
  그 다음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 삶,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어떤 여객선이 부두에 닿아서 손님들이 내리고 있는데, 한 아가씨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그만 바다에 풍덩 빠졌습니다. 아가씨는 텀벙거리면서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원들은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뿐 아가씨를 구조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승객들이 선원들을 나무랐습니다.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나 없나. 빨리 들어가 건져내지 않고 뭘 하고 있어' 그래도 선원들은 잠자코 있습니다. 아가씨는 물 속으로 쑥 들어갔다가 떠오르고 다시 들어갔다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세 번째로 떠올랐을 때에야 선원 하나가 풍덩 뛰어 들어 가더니 그 아가씨를 건져냈습니다. 물에 빠졌을 때에 바로 건져내지 않고 어째서 실컷 물을 먹은 다음에야 건져내느냐고  사람들이 질문을 하자 그 선원이 대답합니다.
  '처음에는 살겠다고 악을 쓰며 있는 힘을 다해 허우적거립니다. 이때에는 그 힘이 장사와 같아서 누구도 못 당합니다. 급하다고 들어갔다가는 나도 같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힘이 다 빠져서 손을 들고 완전히 자기를 내게 맡겨버릴 때쯤 되어서 건져내야 됩니다.' /할/
  그렇습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생명을 완전히 그리스도께 위탁할 때'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믿/아멘!/
  ②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이 받아야 할 죄의 대가인 사망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그 십자가가 '자기의 십자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가 각 사람에게 있다는 말씀인데, 오늘 우리의 십자가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란 남이 당하는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자원해서 대신 짊어지는 수고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인류의 죄를 짊어지는 그런 큰 십자가는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맞는, 작은 십자가들은 많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희생은 많습니다. 가령 형을 공부시키려고 자기는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 노동을 하여 형을 출세시킨 동생이나, 타국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을 위하여 젊음과 출세의 꿈과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미개한 그들과 생활을 나누기 위하여 정든 고국을 떠나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냉수 한 모금 실컷 마실 수 없는 미개지로 나간 선교사들, 버림받은 정박아 고아들을 위하여 일 주일에 한번 쉬는 휴식 시간을 포기하고 그들을 돌봐주며 복음과 사랑을 나눠주는 젊은 일꾼들, 이들 모두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당하지 않았어도 될 고생을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남의 고생을 자기의 십자가로 알고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 때문에 겪는 억울한 고통과 희생을 달게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그 어떠한 불이익이라도 감당하고 져야 합니다. '물질, 이해관계, 이권' 등등입니다. 그런데 눅9:23절에 보면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기 '날마다'입니다. 한 달에 한번 고통 받는 것이 아니고, 일 년에 한번 평생에 몇 번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오늘 나의 현실 속에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를 어떻게 질 수 있습니까? 아무나 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받은 사람, 은혜 받은 사람만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③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마치 어린양이 목자를 따라가듯, 맹인이 인도자를 따라가듯, 믿고 조건 없이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복 받는 비결은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할 때, '예하고 따르는 사람이 있고, 아니요 거부하는 사람이 있고, 생각해 보겠습니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탄을 좇으면 그가 지옥 불에 떨어질 때 함께 떨어질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나 돈을 좇아가면 그것들이 무너지고 불탈 때 함께 무너지고 불이 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좇으면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얻게 됩니다. /믿으시면 크게 아멘!/할/
  신앙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아십니까?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자기 십자가를 내팽개쳐 버리고 예수님을 떠나는데서 옵니다. 그 반대로 신앙의 성공은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예수님을 좇는 삶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에 삶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기독교의 역사적인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25-26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쉽게 표현하면 자기 육신의 생명이 아까워서 신앙을 저 버린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육신만 생각하고 영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요12:24-25절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아멘!/
  25절의 분명한 의미는 '육체적이고 세상 적인 생명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갑니까? 지옥 음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믿/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는 썩어질 것을 위하여 시간과 돈과 정열을 둔 자입니다. 사람들은 존경과 인기를 얻기 위해서 또는 좀 더 평안하게 좀 더 안전하게 좀 더 부유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권력과 쾌락을 위해서라면 무슨 대가라도 치러서 얻어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적인 삶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눅15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잘 압니다. 부자가 바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생명을 위해 살라간 자의 대표입니다. 그가 죽어서 어디로 갔습니까? 지옥음부에 떨어져 물 한 방울이 그리워 애통한 자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현세적인 것에 투자한 자가 아닙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달려간 자입니다.
  25절 말씀의 뜻 한 가지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고후4:16-18절에서 사도 바울의 외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아멘!/
  겉 사람은 병들고 늙고 소모되어 가는 존재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너무 관심을 갖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러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의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말씀은 이해하기 위해서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예수님이 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도대체 죽음 앞에서 그처럼 많이 쌓아놓은 돈이며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한마디로 헛된 것입니다. 명예를 남기고 이름을 남겼어도 인간은 결국 관속에 들어가는 존재입니다. 그 관이 금으로 만든 것이요, 돌로 만든 것이요,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습니까?' 돈으로, 권력으로, 아니면 출세한 자식이 생명을 책임져 줍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예수님만이 책임져주십니다. 다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님만 꼭 붙잡고 계시면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믿/아멘!/

 

  ▶27-28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또 하나의 중요한 예언을 하십니다.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마지막 때의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심판 주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도적같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주님이 오늘 오시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오늘밤에 오실 지 내일 아침에 오실 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 어느 때 오시더라도 우리는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나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한 자고 미련한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살전4: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할/
  그리고 본문 말씀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오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오십니다. /아멘!/ 주님이 다시 오시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27절 이하에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세상 법정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절대 속일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 안에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