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강) 실족케 하는 죄! (마 18:5-11)
본문 1-11절까지는 두 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1-4절은 '어린아이의 비유'이고, 5-11절은 '연자 맷돌의 비유'입니다. 지난 시간에 1-5절까지를 상고해 봤는데 5절은 6절과 연결되는 문장으로써 이것은 '남을 실족케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실족케 한다'는 말은 원문에 '스칸달리조'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영어의 '스캔들'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스캔들이라 하면 남녀간에 관계를 많이 생각하지만 스캔들의 본래의 뜻은 '남을 넘어지게 하고 거리끼게 하고 거침돌이 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스캔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관계의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 재정적인 관계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금을 유용했다든지 하면 스캔들에 빠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어린아이와 소자를 실족케하는 자들에 대해 아주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D. L 무디 목사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죄에 빠지도록 만드는 사람은 극악(극도로 악한)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 자신이 잘못해서 넘어지는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에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이 조심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겠지만 동시에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제목 소개!▶
이 세상에 많은 제도와 기구와 조직체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조직체는 교회와 가정 밖에 없습니다. 교회보다도 가정을 먼저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이 세우신 신성한 공동체입니다. /할/
이 신성한 공동체인 가정은 두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하나는 자녀이고 또 하나는 부모입니다. 만약 가정에 부모는 안 계시고 아이들만 있거나 연로한 부모만 계시고 젊은 자녀들이 전혀 없거나 있기는 하지만 따로 살면서 자주 찾아오지 않거나 마음속에 아예 들어와 있지 않다면 건강한 가정은 못되는 것입니다. 아이들만 있는 집은 고아원이고 노인들만 있는 집은 양로원인 셈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돈을 벌면 먼저 노인들을 위해 쓰기 때문에 영국을 '노인의 왕국'이라고 말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돈을 벌면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기 때문에 프랑스를 '젊은이들의 왕국'이라고 말하고, 미국 사람들은 돈을 벌면 먼저 어린이들을 위해서 돈을 쓰기 때문에 미국을 '어린이의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미국은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나 교육시설, 교육방법, 또한 그들에 대한 인격적인 예우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서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할/
우리가 어린이들에 대해서 인격적인 관심을 갖는 근원은 생명의 무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서에서는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핵심부분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다는 면에서 더더욱 우리 생명이 무게가 있는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앞 시간에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큽니까?' 묻는 제자들에게 어린이를 내세우며 어린이가 큰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오늘 본문에 '작은 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를 얼마나 귀중히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어린이를 무시하거나 학대하는 가정은 복을 받을 수 없고 어린이를 소홀히 여기는 교회는 부흥하지 못하고 어린이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국가와 민족은 번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눈높이 생각을 공유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지난 시간에 상고한 구절이지만, 오늘 자연스럽게 본문과 이어지는 문장임으로 다시 한번 집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여기 '또 누구든지'라는 말은, 1-4절에서 '어린아이의 비유'를 마치고 또 다른 문장으로 이어지는 접속사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어린아이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어린아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엡4:14절은 나쁜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는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사람들의 궤슬과 간사한 유혹에 쉽게 빠지는 사람'으로 비유했습니다.
사실 아이들을 보면 세상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잘 속아넘어갑니다. 아이스크림하나에 쉽게 넘어가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리분별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넘어갑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대장부의 신앙을 가져라'고 당부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한 신앙이 아니라 앉은뱅이의 신앙이 아니라 대장부와 같은 듬직한 신앙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좋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을 알아보겠습니다.
①절대 부모를 의지합니다. 신앙은 이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듯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차범근 감독이 표현이 최고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님 손을 잡고 가다가 무섭거나 겁이 나면 그 손은 더 꼭 쥐는 것처럼' 어떤 일을 만나면 더욱 더 하나님의 손을 꽉 쥐고 의지해야 합니다. /아멘!/
②순종심이 있습니다. 지금 어린아이들은 옛날 어린아이들과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따지고 반항도 합니다만 그래도 어린아이들은 어른들 말에 순종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에 잘 순종합니다.
③겸손함이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거나 위장하거나 속이지 않습니다.
④어린아이는 젖을 사모합니다. 때도 잘 압니다. 여기서 젖은 말씀입니다. 벧전2:2절에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시119:131절에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할/
예수님은 5절에서 '어린아이를 내 이름으로 영접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를 영접했기 때문에 귀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했기에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으로'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란 문자 적으로 꼭 어린아이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초신자들은 그래도 순수합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느낍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예수님 자신을 동일하게 생각하십니다. 더 쉽게 말하면 '예수님과 우리는 불가불의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의 말씀이 내 안에, 내가 주안에,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가 가지니' 바로 이런 진리입니다. 요15:5-8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또는 눅10:16절에서도 전도하러 가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야 할 객관적인 대상으로 여기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예수님 자신을 한 몸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단순히 사랑해 줘야 할 불쌍한 존재, 동정해 주고 병 고쳐줘야 할 존재로만 보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실제로 아픈 것처럼 고통을 느끼는 관계를 우리도 보신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거리를 지나가다가 불쌍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돈도 주고, 평생 돌봐 주겠다면 약속할 수도 있습니다. 헐벗은 사람이 있으면 옷을 벗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식처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을 돌보는 것하고 불쌍한 사람, 구제해 주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한 거지를 동정해 주듯이 헐벗은 한 사람을 동정해 주듯이 돌봐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자기 몸에서 태어난 자식처럼 떼어버릴 수 없는 관계를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이 의미가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소자를 영접해야 하는가? 예수님과 소자를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모든 소자들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마25:35-45절에 양과 염소의 심판 비유를 통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곳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예수님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영접할 수 있는 예수님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주리고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가 우리교회에 들어오면 예수님이 저런 소자의 모습으로 우리 교회에 찾아오셨다고 여겨야합니다.
또 내가 소자라고 생각하시는가? 기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소자를 이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내가 연약해지면 귀히 여기기는커녕 더 짓밟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더 귀하게 여기시고 보살펴주십니다. /할/ 그런데 보십시다. 6절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도 죄짓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계십니다. /할/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제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여기 소자가 누구입니까? 앞 절의 어린아이와 여기 소자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진실로 믿고 있는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상 적으로 능력도 없고, 힘도 없는 약한 존재였습니다. 공부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인물도 잘나지 못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무시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자가 의미하는 바는 더 넓습니다. 소자란 롬14:1절의 '믿음이 연약한 자' 또 고전8:11절의 '지식이 약한 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 신앙적으로 어린 성도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이며,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거나 가난한 사람이며 지식수준이 낮은 사람 등을 의미합니다.
한 주석가는 여기 이 소자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자가 바로 우리들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자는 이런 사람입니다.
①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할/
②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를 의미합니다. 나이가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고, 경제적으로 부유해도 초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요 소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40년, 50년 다녀도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 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말씀의 비밀, 믿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 역시 영적인 아이들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는 실족하기 쉽고 상처받고 병들고 잘못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보살핌과 사랑과 관심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새 가족들을 이런 자세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관심해서 영혼을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배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낫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③사회적으로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입니다. 시68:5절에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보호자시고 고독한 자에게 가족을 주시고 갇힌 자를 이끌어 내어서 형통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조지 뮬러'는 이 말씀을 읽다가 고아들을 양육하기 시작했고 돌보았다고 합니다.
모세 율법 책에는 가난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겉옷을 전당잡히면 저녁이 되기 전에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서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돈을 빌리면 이자를 받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떨어진 이삭을 다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곡식을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좀 남겨두어서 가난한 사람이나 나그네가 지나가면서 먹을 수 있게 하고 심지어는 동물들까지도 먹어서 생존케 했습니다.
과수원에서 열매를 딸 때에도 다 따지 말고 좀 남겨두어서 사람이나 짐승들이 먹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가난한 자가 도와달라고 호소할 때에 가난한 자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으면, 너희가 어려워서 내게 기도할 때에 내가 듣지 않겠다고 하나님은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④연령적으로 어린아이이고, 신체적으로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기독교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는 내 아이라고 마음대로 못 때립니다. 아이 혼자 두고 외출하면 신고를 합니다. 아이들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실족케 함'은 '넘어지다'를 의미하며, 마17:27절의 '오해하게 만들다'와 동일함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실족케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①이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자극하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죄는 혼자 스스로 짓게 되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죄는 유혹을 받아서 짓게 됩니다. 유혹이 없으면 죄가 없습니다. 마귀는 광명한 천사처럼 때로는 우는 사자처럼 다가와서 속삭이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해서 넘어지게 만들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꼭 유혹자가 있습니다. '오늘 한번만 주일을 빼먹고 낚시 가자, 단풍놀이 가자'는 유혹 자들이 있습니다. 다윗이 왜 간음죄에 걸렸습니까? 옷을 벗고 목욕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죄'로 생각했습니다.
학문적으로 세상에서는 죄를 지은 장본인을 큰 죄인이라고 하지만 본문은 죄를 짓게 한 그 사람이 더 크게 정죄 받는다고 했습니다.
죄는 무섭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처음부터 큰 죄를 짓지 않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죄를 짓다가 나중에는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기 싫기 때문에 자기의 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합리화합니다. 지식으로 지성으로, 합리화하고 상황으로 합리화합니다. 그러다가 신앙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다. /할/
②다른 사람을 실족케한 죄란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믿음의 본을 보이지 않아서 넘어지게 한 죄'입니다. 신앙을 팔고 예수님을 파는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시 본문의 깊은 뜻을 한번 상고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일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간음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살인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도적질한 죄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실족케 한 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실족케 한 자에 대하여 몇 가지의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본 절에서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으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그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연자 맷돌이란 어떤 것입니까? 맷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여자들이 집에서 흔히 콩을 갈고 밀을 갈 때 사용하는 맷돌이 있습니다. 이 맷돌도 무겁습니다. 그러나 연자 맷돌은 소나, 나귀가 끄는 아주 크고 더 무거운 것입니다.
구약 사사기보면 삼손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는 최후에 드릴라의 간교한 계획에 빠져 범죄하고 완전히 양쪽 눈을 뽑히고 나서 블레셋의 신전 지하에서 연자 맷돌을 돌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연자 맷돌이 바로 그 맷돌입니다. 그런데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는 것은 당시 일종의 사형형벌이랍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형 법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가장 흔한 유대인들의 사형 법은 죄인을 가운데 놓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돌을 하나씩 던져서 돌무덤을 만들어 사형시키는 방법입니다.
스데반집사가 바로 돌에 맞아 순교 당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사람들의 사형 방법 가운데는 아주 무서운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형인데, 이 형은 최고의 형으로써 국가에 반역했다든지 아니면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경우 십자가형에 처하고 가장 극악 무모한 죄를 진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연자 맷돌을 이용한 사형 법이 있는데 부모를 죽였다든지 혹은 사회의 도덕을 문란케 하는 사람들은 연자 맷돌을 목에 매워 문에 넣고는 수장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차라리 그게 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신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남을 실족케 한 죄는 지옥 불에 던 지우기 때문에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 절대로 남은 실족케 하는 자가 되지 말고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귀한 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예수님은 이렇게 실족케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하시면서 계속해서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7절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들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여기서 '화'는 '하나님의 재앙'을 의미합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이 말씀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다보면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일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보면 본의 아니게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다른 사람에게 부덕한 일을 하기도 하고 실망을 줄 때가 없지 않아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빨리 그 사람이 실족하지 않도록 조처를 취해야 합니다. 용서를 빌던가? 원상복귀를 시키던가 좌우지간 그 사람이 신앙에서 실족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의 '하나님의 재앙에 임한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실족케 한 죄를 크게 다루고 있습니다. /할/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이 목회자 세미나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교회 장로님이 계시는데 그 장로님 큰아들이 중,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열심히 교회에서 신앙생활 잘했는데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말썽만 부리고 부모가 애원해도 교회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장로님내외분이 너무나 답답해서 그 아들을 데리고 목사님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학생을 데리고 조용히 서재실에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아들이 맨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나보고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다 멀쩡한 허튼 소리입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라 왜 허튼 소리냐고 물어보았더니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자기 집에 찾아와 나누는 이야기가 '어느 장로는 어떻고, 어느 집사는 어느 교인은 어떻다며 그저 남의 흉만 보고 있더랍니다. 목사님이 어떻고 설교가 어떻고...'
이 학생이 생각하기를 어른들이 예배드리고 나와서는 곧장 욕만 하고 않았으니 예수 믿는 것이 저런 것이라면 괜히 말로만 사람이니 용서니 하지 다 허튼 소리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괜히 모여서 남의 흉은 보지 마십시다. 그 장로님은 그 아들을 실족케 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가 영적인 원리를 잘 알고 신앙생활하면 복을 받습니다.
신앙 안에서 만남이 참 중요합니다. 누구나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먼저 만나야 그 사람도 진실한 그리스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이 진실한 사람을 만나야 그 사람의 신앙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믿/
▶8-9절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읽긴 읽었지만 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경고입니까? '네 손이 범죄케 하느냐? 찍어 내어버리라? 네 발이 범죄케 했느냐? 찍어 내어버리라, 네 눈이 범죄케 하느냐? 빼어내어 버리라! 차라리 그렇게 불구자가 되어서라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성한 몸으로 지옥 불에 던 지우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버릇없는 교만한 손, 그래서 다른 사람은 실족케 하였다면 찍어 버릴 것이고, 탐심과 질투에 찬 눈! 그래서 남을 실족케 하였다면 그 눈을 빼어 버리랍니다.
거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남은 실족케 하는 좋지 못한 버릇을 가진 교만한 발길이라면 발이라도 찍어내어 버리라! 차라리 세상에서 불구인 절름발이로, 장님으로 살더라도 사람을 실족치 않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 이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잘라버리지 마시고 빼어버리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잘 이해하십시오, 사실 모든 성도가 눈으로 죄를 범했다고 해서 눈을 뽑고, 팔로 죄를 범했다고 해서 팔을 자르고 가지 말아야 할 곳, 죄 짓는 곳으로 갔다고 발을 잘라 버리면 우리 가운데서 양쪽 눈을 안 뽑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양쪽 팔을 안 자른 사람이 어디 있으며 양쪽 발은 안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집사님이 젊었을 때, 도박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싸우기도 하고 이혼직전까지 가기도 했는데, 하루는 그 분이 다시는 도박을 안 하리라고 결심하고 부인 앞에서 엄지손가락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하더랍니다. 손을 찍었다고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사님이 언제부터 도박을 안 하게 되었느냐면 은혜 받고 성령 받고 거듭났을 때부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9절의 이 말씀은 문학적으로 적응하기보다는 아주 단호한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손을 찍어 버리라, 발을 찍어 버리라, 눈을 빼 버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죄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강조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할/
▶여기서 우리는 영혼을 지키는 4가지 즉 8절에 손과 발을 지켜야 하고, 9절에 눈을 지켜야 하고, 10절에 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4가지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귀와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을 각종 죄와 유혹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이 6가지를 잘 지켜야 합니다.
①눈을 지켜야 합니다. 눈은 영혼의 창문입니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오지만 죄는 대개 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의 믿음을 가장 약화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눈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우리를 유혹할 때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왜 하와가 사단의 꾀임에 넘어갔습니까? 사단의 달콤한 말 때문만은 아닙니다. 창3:6절에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것은 선악과를 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②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자기 입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항상 '내가 이런 말을 조심해야지'라고 다짐해보지만, 어느새 그 말이 나와서 남의 가슴에 못을 박고, 절망을 심어주고,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탈무드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거짓말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친구에게 '아내 하나는 잘 얻었어!'하는 말과 물건을 비싸게 산 친구에게 '물건 잘 샀어!'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③귀를 지켜야 합니다. 잘못된 말은 물에 떨어진 잉크와 같습니다. 한번 잘못된 말을 들으면 영혼에 쫙 퍼져서 다시 맑게 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인생의 수많은 고난은 대개 말 한 마디 잘못 들어서 생긴 영혼의 질병을 하나님께서 정화시켜 나아가는 과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도 잘 들어야 합니다. 좋은 말을 들으면 우리 영혼도 좋아지고, 나쁜 말을 들으면 우리의 영혼도 나빠집니다. 영혼의 건강은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유혹자의 말은 독약과도 같습니다. 그런 말은 아예 듣지 말아야 합니다. /할/
④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귀를 잘 지켜도 유혹자의 말을 듣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 영혼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교만과 180도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지금 신앙에 심각한 위기가 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멘!/
잠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할/
⑤손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손을 움켜쥐고 삽니다. 그 손을 펼 수 있어야 우리의 영혼이 복된 영혼이 됩니다.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많이 받았지만 손을 펴는데 인색한 삶은 결코 축복 받은 삶이 아닙니다. 열심히 벌고, 열심히 좋은 일에 쓰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항상 남을 돕고 살겠다는 구제의 비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미래에 돈을 벌어서 돕겠다'고 하기 전에 현재의 처지에서 힘써 손을 펴야 합니다. 도울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제가 주는 사람에게는 간증거리가 될 수 있어도 받는 사람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⑥발을 지켜야 합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말고, 들어서지 말아야 할 영역에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들어선 후에 발을 빼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모든 죄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예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합니다.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아까 소자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 세상 적으로 약한 자, 무시하지 말라는 말씀이요, 이 말씀은 동시에 이 소자를 보호라라, 이 소자에게 마음을 써 주라는 뜻입니다.
건강한 자식보다는 잘 사는 자식보다는 보잘 것 없는 버림받은 영혼에 대해 하나님의 관심이 더 많이 간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천사들이'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천사는 지금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서 소자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그의 영혼을 기르십니다. 그러므로 소자 하나를 업신여기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업신여긴 결과가 되고 하나님의 천사가 그것을 하나님께 보고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수호천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①단12:1절에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국가의 수호천사입니다.
②계1:20절을 보면 교회의 수호천사가 나옵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③개인을 위한 수호천사가 행12:15절에서 나옵니다.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베드로가 헤롯에게 붙잡혀 옥에 갇히자 교회에서는 그를 위해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베드로를 인도해서 내어주자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리니 도레라는 계집아이가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문은 안 열어주고 달려와 베드로가 왔다고 말하니 그들이 믿지 않고 '그의 천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를 위해 수호천사를 보내어 지켜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11절은 '없음'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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