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88강) 용서의 비유!(무자비한 종의 비유) (마 18:21-35)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33

(제88강)  용서의 비유!(무자비한 종의 비유) (마 18:21-35)

 

  본문은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용서받아야 할 때 용서받아야 하고, 용서해야 할 때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의 평화가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간곡히 권면하신 기록들이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마6: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리고 막11:25절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또 엡4:32절에서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할/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그 용서의 힘으로 다른 사람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한 구절을 골3:13-14절에서 보겠습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또 주의 기도문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셨으며, 이 주기도문을 다 가르치신 후에 마지막으로 하신 권면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과신을 용서해 주면 먼저 내 마음의 평안해 집니다. /아멘!/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 마음속에 불안한 마음, 증오심, 원한, 독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 사람의 정신생활과 육체활동에 많은 해독을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한 여자가 음식도 잘 소화되고 건강했는데 갑자기 음식을 먹으면 토해 버리고 맙니다. 의사에게 가서 아무리 의학적으로 진단해 봐도 무슨 원인인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심리상태를 조사해 보기로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여러 가지로 묻고 상담하던 중 발견한 것은 '시골에서 시어머니가 아무 날 너에게로 간다.'는 전보를 받고 난 뒤부터 토하기 시작한 것을 발견합니다. 이 여자는 결혼생활로 행복했는데 유독 시어머니만 싫어합니다. 고부갈등이 심한 상태입니다. 그가 미워하는 시어머니가 온다는 전보를 받고부터 음식을 먹는 것마다 토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미워하는 마음은 정신적으로도, 육신적으로도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목장우유를 많이 먹습니다. 지금 자라나는 신세대는 얼마나 날씬합니까? 우유 많이 먹는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쩐지 모르지만 서양 목장에 가면 반드시 스피커에서 음악을 들려준답니다. 이유인즉 소가 성날 때 짠 우유는 아주 해롭다는 것입니다. 유아도 성난 소의 우유를 먹으면 배탈이 나고, 위장이 상할 확률이 크답니다. 그래서 젖소에게 기분이 좋으라고 음악을 들려준답니다.
  산모가 화를 내고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아이에게 젖은 먹이면 아주 해롭답니다. 성이 날 때 우리의 핏속에는 독사의 독보다 더 독한 독이 분배된다고 합니다. 성난 다음에 왜 소화가 안 되는가 하면 위 분비액이 분배되지 못하고 위액 가운데 독소가 분배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의사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을 창조하실 때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육체에 고장이 나지 않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인간관계의 핵심적인 단어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용서 없이는 사랑이 없고, 사랑 없이 용서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랑을 입으며, 인간을 용서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의 문제를 교훈 한 것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이가 나가서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나 용서하지 못하므로 일만 달란트 용서받은 것이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비유의 말씀으로 용서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형제가 범죄하면 일곱 번 용서하오리까?' 그러자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490번의 용서가 아니라 무한정인 용서를 의미합니다. 용서하는 그리스도인,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①용서는 믿음의 얼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두 가지 관계 속에서 성립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만 달란트 용서받은 사람과 같습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은혜입니다. 또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용서받은 사람이 나가서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서 용서하지 못했을 때 일만 달란트 용서받은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복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나타내고, 그 가치와 존재가 증명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은혜로 남아 있고, 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이웃에게 용서하는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예배를 드리기 전에 이웃과 먼저 화해하라(마5:23-24)고 하셨습니다.
  ②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용서하는 근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구원에 대한 믿음이 이웃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같은 믿음은 곧 자기 자신이 구원받는다는 믿음과 일치합니다.
  ③그리스도인의 용서하는 근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함에 그 근거가 있습니다. 옛날 요셉도 그의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과 형제 사랑이며, 나아가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확증입니다. /할/
  ④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을 무조건 용서해 주심같이 우리도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할/ 본문을 같이 상고하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21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때에' 15-20절은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처리 방법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⑴단독으로 가서 권면해 주라, ⑵두 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를 설득시켜라. ⑶교회에 말하라, 당회 제직회 먼저 기도하고 그를 권징조례에 의해 치리하라, ⑷그래도 안 되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출교시키라,
  이 말씀 뒤에 베드로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나와서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용서의 한계를 묻고 있습니다.
  추측하건대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과 생활을 듣고 보는 가운데 복음을 곧 사랑이며, 사랑은 용서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한다면 '몇 번이나 하고 얼마나 용서를 하면 되는 것일까? 어떠한 조건 어떠한 형편에서 몇 번이나 용서를 하면 되는 것일까?'하는 상당히 구체적인 궁금함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고 물으면서 거기에 덧붙이는 말이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라고 덧붙인 것입니다.
  여기 7번까지를 말한 베드로는 당시 문화배경으로 보면 엄청난 용서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용서하는 한계를 세 번이나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삼세번은 많이 찾습니다. 삼세번은 용서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 이상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크고 제일 많이 용서하는 것이 세 번입니다. 유대 랍비들도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교훈 합니다. 구약의 암1: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 하였음이라' 2:6절을 보면 '여러 민족이 죄를 범했는데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세 번까지의 죄는 하나님도 용서하시지만 네 번째는 죄인을 벌하신 다는 결론을 얻어서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관대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살아가는 베드로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 번만 용서하면 많이 해주는 용서이고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베드로가 일곱 번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모름지기 '안식년을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를 사들여와 일을 시키다가도 안식년이 되면 다시 돌려보내야 합니다. 이러한 안식년이나 노예해방 같은 것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인데, 어쨌든 베드로로서는 가만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보니까 일반 랍비들의 교훈에 비해 예수님의 교훈을 그 한계가 더 크고 넓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생각에는 넉넉잡아 일곱 번쯤이면 아마 예수님도 감동하시겠지 하는 마음에서 일곱 번까지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엉뚱하게 나옵니다.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를 계산하면 490번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계산하고 앉아 있는데 이는 곱셈을 통하여 답을 구하자는 문제가 아닙니다. 490번이 아니라 4900번이 된다 할지라도 이 말씀의 뜻은 '얼마든지 용서하라, 끝까지 용서하라'는 무한정의 용서입니다. /아멘!/ 우리 인간은 용서의 한계를 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용서할 수 있고, 저러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이나 말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오직 한계가 없는 용서만을 용서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는 7이라는 숫자입니다. 7은 유대인의 완전수로써 70번씩 7번이라는 말은 형제에 대한 참된 사랑으로 무한히 그리고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을 보면 용서라는 말에는 특별히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①죄를 덮는다는 뜻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죄와 허물을 덮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계산하셨다면 아무도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②치워버린다는 뜻입니다. 죄를 가지고 논쟁해서는 안 됩니다. 죄는 덮어야 합니다. 치워야 합니다.
  ③죄를 멀리 떠나보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되 우리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멀리 하겠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의 요셉입니다. 그는 형들의 질투와 미움을 받아 어린아이에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고 그래서 노예로 팔려간 것입니다.
  얼마나 큰 상처입니까? 요셉은 그 후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 요셉은 어디를 가나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축복하사 당대 최강국인 애굽의 국무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온 땅에 심한 기근이 7년 간 계속되었을 때 요셉을 판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오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들이 팔아버린 동생을 만나게 됩니다. 형들은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이제 죽게 되었구나' 생각했으나 놀라운 일이 버러집니다.
  분노와 복수심이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던 요셉에게 하나님의 마음, 용서의 성품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말합니다. 창45:5절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과연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내 인생을 망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성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요셉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을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왔습니다. 형들은 복수가 두려워 요셉을 찾아가 스스로 종이 되겠으며 지난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요셉의 말은 창50:19-21절에서 보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원수를 용서할 뿐 아니라 그 원수의 자식까지도 책임지고 돕겠다고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할/
  내 인생을 망친 사람, 내 행복을 통째로 빼앗아 가버린 사람을 향하여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입니다. /할/
  두 번째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풍전등화 위기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건져낸 구국공신입니다. 그러자 국민들의 인기가 지금 김연아보다 더 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가 거리에서 울렸습니다.
  이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를 결심하고 엄청난 핍박을 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단 한 번도 사울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은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씩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죽이지 아니하고 옷자락만 잘라갔습니다(삼상24:8-12). 이것이 용서입니다.
  세 번째는 신약의 스데반입니다. 자기를 돌로 쳐죽인 사람들을 보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용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용서하는 마음은 '다 지어버리는 마음'입니다. 미국의 작가이며 평론가인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지우개'를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았습니다. 그는 컴퓨터의 'delete' '지우는 키'를 위대하게 생각했습니다. 만약 컴퓨터 자판에 delete 키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과거를 지워주는 하나님의 용서의 지우개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라는 지우개로 깨끗하게 지우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예전 모습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사43:25절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할/
  이제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비유를 주십니다. 이 비유는 용서의 비유 또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 또는 빚을 탕감 받은 종의 비유입니다.

 

  ▶23절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베드로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용서의 비유를 주시면서 그 주제를 천국으로 전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용서와 천국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들과 계산하는 어떤 임금을 비유로 드십니다. 여기서 종들은 죄지은 모든 인생들을 가리킴이요, 문자적으로 보면 노예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회계는 계산을 매듭짓는다는 말로 여기서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합니다.
  여기 임금은 만유의 주관자요, 심판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주님의 재림 때우리 모두는 심판을 받습니다. 고후5: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또 마16:27절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으며, 히9:27절에서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24-27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본문에 의하면 무려 일만 달란트나 빚을 진 사람이 이제는 빚을 갚으라는 명을 받고 주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상황에서는 자기가 못 갚으면 그 아들이 갚아야 하고 아들과 부인도 갚지 못한 경우에는 자신과 가족이 다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제도 속에서 갚을 능력이 없는 한 빚진 자가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들을 팔아 갚게 하라'는 주인의 명령을 듣게 됩니다.
  이때 그는 주인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조금만 더 참아주면 다 갚겠다고 애걸을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주인이 그가 진심으로 엎드려 애걸하는 것이 불쌍해서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의 채무증서는 찢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순간적으로 벌어진 것입니다. 이 사랑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어쩌면 이게 꿈인지 생신지 자기 살을 꼬집어 볼만도 합니다. 본문에는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 사람은 머리를 숙인 채 백골난망이라고 거듭 아뢰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당시 화폐단위로 보면 1만 달란트는 엄청나게 큰돈입니다. 당시 유대나라 전국에서 로마에 바친 세금이 800달란트라고 합니다.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600달란트, 또 갈릴리와 베뢰아에서 200달란트를 징수, 합하여 800달란트입니다.
  그런데 여기 일만 달란트라는 이 엄청난 양의 부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빚'과 '죄'는 똑같은 원어로 썼습니다. 그런 점에서 죄와 부채는 몇 가지 상반된 것이 있습니다.

  ▶먼저 차이점은 있습니다.
  ⑴죄는 한번 지은 이상 항상 죄지만 부채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닙니다.
  ⑵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으나 부채는 제삼자에게 대신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사점이 있습니다.
  ⑴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부채는 채권자에게 갚아야 합니다.
  ⑵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⑶죄나 부채는 모두 변제될 수 있는 특성입니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죄는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는 것입니다. 사43:25절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할/
  우리는 그만큼 가치 있는 귀중한 값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만큼 고귀한 존재입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단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의 부채입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들을, 공중권세 잡은 사탄에게 종노릇하며 이미 지옥 자식으로 등록되어 있던 우리들을 건져내는 값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일만 달란트는 우리의 죗값과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 본문을 보니 이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나가다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이 데나리온은 일일 노동대가입니다. 그러니까 100데나리온은 백일동안에 노동에 대한 품삯입니다. 종은 이 사람을 만나자 마자 빚을 갚으라고 하며 감옥에 쳐 넣은 것입니다. 그 말씀이 28-31절 이하에 기록되어있습니다.

 

  ▶28-31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자기는 임금에게 천문학적 숫자의 빚을 탕감을 받았는데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나서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흔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앞에서 엎드리어  빌고있는 동관의 모습은 불과 얼마 전의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은 자기의 자화상과 같은 장면이 벌어졌는데도 자기가 엎드려 빌던 때의 형편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장면 앞에서는 나를 먼저 생각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나를 탓하고, 남을 심판하기 전에 나를 심판하게 되면 이제는 아무런 할 말이 없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요, 겸손입니다. /아멘!/
  '감사'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의 언어생활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감사를 연발하다가도 어디에서 좋지 않은 말 한마디 듣게되면 그만 자기가 자기 됨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은혜에 대한 건망증 환자,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만물의 때만도 못한 죄인의 괴수,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죄수가 가장 큰 용서를 받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살고있다는,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인 은혜의 관계를 소중하게 지켜나간다면 더는 누구를 탓할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 돈은 노력하면 얼마든지 갚을 수 있는 액수입니다. 그 동관이 엎드려 빌면서 얼마만큼만 참아주면 갚겠다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동관을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말은 법대로 소송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누가 보았습니까? 그 친구들입니다. 자기는 큰돈을 탕감을 받고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돈을 탕감해 주지도 않은 것을 보고 친구들이 '저럴 수가 있는가?'하면서 그 주인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주인이 그를 다시 불러 호통을 칩니다. 그 사건이 32-34절에 기록입니다.

 

  ▶32-34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복음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첫 번째 부름을 회계에의 호출이었고, 두 번째의 부름은 정죄와 심판에의 호출입니다.
  초림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고, 재림 예수님은 정죄와 심판 주로 오십니다. 여기 '악한 종아'라고 부른 것은 재판장이 유죄선고를 의미합니다. 마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로 '악한 종'이라고 했습니다.
  33절에 주인이 노하여 옥졸에 붙었다고 합니다. 여기 옥졸은 고문하는 자를 말합니다. 영원한 형벌 곧 지옥의 형벌에 붙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은 일만 달란트나 되는 부채를 다 탕감을 받고 용서받고 사랑을 받았는데 자신의 부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작은 액수인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하지도, 연기해주지도 용서해 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책망하는 종의 모습을 말씀하시면서 '왜 우리가 용서해야 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할/

 

  ▶35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 예수께서는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해보라는 의도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데 도대체 누구를 탓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원망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향해 '네 빚은 만 달란트나 되는데 그까짓 백 데나리온 가지고 그렇게 영악스럽게 하느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 누가 항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장 큰 빚을 졌고 가장 큰 빚을 탕감 받은 오직 은혜 속의 자유인임을 생각할 때 그 누구, 그 무엇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출애굽 때의 감격을 잊어버려서입니다. 그 놀라운 감격과 기쁨을 지속할 수 있었다면 감히 누가 하는 일이라고 원망의 소리를 내뱉는단 말입니까?
  지난날에 받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지 맙시다. 이것을 망각하면 곧 문제가 됩니다. 감사로부터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을 때에 관용이 있는 것입니다. 내게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으면 자연히 용서하게 됩니다. 내 마음에 큰 기쁨이 있을 때에 조그만 문제, 조그만 어려움, 작은 부조리나 어려움을 참고 용서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멘!/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가?
  ①우리 모두가 일만 달란트나 탕감을 받은 용서받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탕감을 받은 그 죄를 다 계산일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약속을 했다가도 어긴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또 이웃은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거짓말하고 속이고, 모함하고 멸시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은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내가 용서받은 것의 100/1 아니 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조그마한 것들을 우리는 용서를 못하고 있습니다.
  ②우리에게 심판 날이 남아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와 같이 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입니다.
  눅6:37절에서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고, 약5:9절에서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③우리가 용서함 받기 위해서입니다. 마6: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④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골3:12-14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렇습니다. 용서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과 화평을 누리는 데 힘을 쓰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용서해 주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에게 용서를 베풀어 낙원의 축복을 허락하셨고, 정죄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용서하셨던 분이십니다. /아멘!/
  ⑤기독교는 용서와 화해를 기초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빅토르 유고의 작품인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에는 선하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주인공 장발장이 등장합니다.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죄가 불어나 무려 2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만기 출감했으나 모두 전과자라고 외면하여 잠잘 곳이 없어 방황하다 사제관에서 뜻밖의 따뜻한 영접을 받고 은식기로 식사대접까지 받았으나 그 날밤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순경에게 붙잡혀 다시 사제관에 끌려옵니다.
  그런데 이를 본 신부는 장발장에게 '은식기와 은촛대 모두 내가 준 것인데, 당신은 왜 은촛대는 안 가져갔습니까?' 이 용서에 장발장은 감격하여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착한 사람이 되어 선행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끊임없이 그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형사 자벨 경사가 있습니다. 장발장이 나중에 어느 소도시의 시장이 되었을 때 역시 쟈벨경사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발장의 뒤를 끈질기게 추적하면서 그가 과거 탈옥 범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려 합니다. 그때 대 프랑스혁명이 발생했습니다. 장발장을 존경하는 청년대원들은 일평생동안 장발장을 괴롭힌 악질 경사 자벨을 잡아옵니다. 세상이 뒤바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그 경사를 총살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장발장은 '그 사형을 중지하라'고 시킵니다. 그리고는 그를 풀어 주어 자유인이 되게 합니다. 그때 쟈벨 경사는 장발장을 향해 묻습니다.
  '당신이야말로 나를 가장 죽이고 싶을 텐데 왜 살려 줍니까? 왜 입니까?' 그때 장발장은 '이 세상에는 넓은 것이 많이 있소. 바다가 땅보다 넓고 하늘은 그 땅보다 더 넓소. 그러나 그보다 더 넓은 것은 바로 용서라는 관대한 마음이요'
  용서는 나의 것을 포기하고 서로 화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십자가상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용서는 위하여 주는 것입니다. 탕감하여 주는 것이며, 위하여 기도해주는 것이며, 복을 빌려 주는 것이며, 미움 대신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용서하면 어떻게 됩니까?
  ①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십니다.
35절을 거꾸로 보면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유익입니다.
  ②기도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저는 주기도문을 드릴 때마다 가슴이 덜컹덜컹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야! 이놈아 네가 무슨 용서를 해,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 하지 않았느냐? 하는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기도의 문이 자꾸 닫힙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기도의 폭이 자꾸 넓어집니다. /할/
  ③마음이 평안이 옵니다. 용서하면 편합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으면 똑같이 괴롭습니다.
  ④용서하면 교회는 하나가 되고 성장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화해자로 오셨습니다. 그 화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는 가는 곳마다 평화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 안에 평화의 사신, 이웃과 이웃 간의 평화의 도구로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