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87강) 땅에서 풀고 하늘에서 얻고! (마 18:12-2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32

(제87강)    땅에서 풀고 하늘에서 얻고! (마 18:12-20)

 

  본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14절은 '잃은 양의 비유'이고, 15-17절은 '범죄한 형제에 대한 교훈'이고, 18:20절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얻으리라'입니다. 먼저 잃은 양의 비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성경에는 목자와 양이라는 비유가 심심찮게 나옵니다.
  ①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 인류는 양으로 비유합니다. 겔34:31절에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할/
  ②이스라엘 방백이나 정치적 지도자를 목자도 그 백성을 양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겔34:23절에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③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말씀하고, 모든 사람을 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10: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아멘!/
  ④오늘날의 목사를 목자라고 하고 교인을 양이라 부르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상징하고 그의 백성을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눅15:3-7절을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참고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할/

 

  ▶12-13절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저자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도입 문구입니다. 이 문장은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과 주위를 환기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관중을 끓어 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어떤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백 마리란 숫자는 완전수를 의미하는 말로 그 주인은 완전한 분이요, 동시에 부자임을 뜻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세상 우주 만물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우리가 목자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고 축복인지 모릅니다.
  동시에 그분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 역시 부족함이 없는 자입니다. 시23: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 그런데 '백 마리 중에 한 마리를 잃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 그 당시의 목자들은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지금처럼 목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풀도 넉넉한 것도 아닙니다. 메마른 사막에서 사막으로 이어지는 중동지역에서는 어쩌다 자연적으로 조금씩 있는 풀을 찾아 먹이느라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우리는 구약의 요셉의 형제들이 양을 치기 위해 타관 객지로 떠돌며 고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목자나 양, 똑같이 힘듭니다. 어떤 때는 험준한 골짜기로 가야하고, 또 어떤 때는 맹수를 만나기도 하고 강도를 만나기도 합니다.
  이럴 때 목자는 자기 생명을 걸고, 맹수와 싸워야 하고, 강도와도 싸워야합니다. 더욱이 무서운 것은 폭풍과 벼락인데 이런 대자연의 위험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려면 그만큼 목자가 피나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목자는 풀이 있는 곳으로 양들은 인도하며 계속해서 다음 초장을 찾아 위험한 길을 생명을 걸고 양들을 보호하며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지내는 가운데 양과 목자는 대단히 가까워지고 아주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백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경제적으로 생각한다면 99마리는 그대로 있으니 '그까짓 한 마리쯤' 하고 갈 길만 재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목자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를 생각하며 99마리를 그대로 들에다 두고 찾아 나섰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①한 마리 양의 생명 때문입니다. '저 양 한 마리가 그만 죽겠구나, 어디선가 맹수에 쫓기지는 않는지, 또는 무참하게 낭떠러지에라도 떨어졌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을 꼬'하는 오직 생명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아 나선 것입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찾아 나선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양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②목자는 99마리나 한 마리나 똑같은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양적인 사랑이 아니라 질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절대 사랑의 가치로 보고 계십니다. /믿/
  목자는 깊은 밤 산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헤매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에게 생명을 거셨습니다. 여러분 잘못하면 이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가 대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경제적으로 계산한다면 한 마리 양을 구하는데 드는 고생과 경비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 밤에 그런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더 이익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 적인 가치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사람을 그렇게 취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완전한 곳에 있는 99마리 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에서 길을 읽고 방황하는 상처투성이의 한 마리 양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할/
  지금도 하나님은 평안하게 잘 사는 99의 성도보다는 고난과 역경 속에 헤매는 한 명의 성도에게 관심을 온통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아멘!/
  하나님은 99마리의 가치나 잃어버린 한 마리의 가치나 똑같이 보십니다. 하나님은 부자나 가난한 자를 동일하게 보십니다. 배운 자, 못 배운 자도 동일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구별해서 사귑니다. 높은 사람, 부자, 영향력 있는 사람은 더 귀하게 생각하고 낮은 사람, 가난한 사람, 영향력이 없는 사람은 덜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③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조건 없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은 목자의 실수입니까? 양의 실수입니까? 양의 실수입니다. 목자가 가지 말라고 한 곳에 양이 몰래간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양이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에 가는 양이 이외로 많습니다.
  우리가 고생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실수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교만해서 어리석어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쳐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해서 우리가 잘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목자가 양의 실수에 대해 야단을 치거나 정죄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실수보다도 우리의 허물보다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할/
  ④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리시는 사랑이 아니라 찾으시는 사랑입니다. 사실 양은 순결하기도 합니다만 멍청합니다. 그래서 제 발로 찾아오지 못합니다. 양은 갔던 길도 돌아오지 못하고 제 집도 못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여러분 중에 사랑하는 자가 있습니까? 찾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진정으로 화해를 원하신다면 내가 친히 화해하러 가야지 화해 자가 오기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찾아가셔야 합니다. 찾아가서 손을 잡으세요, 기다리는 마음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믿/
  ⑤우리는 이 비유에서 교회는 민족주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99라는 다수에 비하면 1마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무시해 버려도 될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의 원리는 우리가 다 아시는 대로 다수가결주의입니다. 다수로 위해서 소수가 양보해야 하고 또 희생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신본주의 하나님주의입니다.
  ⑥목자는 잃은 양을 찾고 기뻐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본문은 '더 기뻐하리라' 그러나 눅15장에 보면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탕자라도 못된 짓을 평생 했을지라도 하나님을 찾으시고 그냥 기뻐하고 좋아하십니다. 다시 찾은 양에 대하여 야단치거나 충고하거나 멸시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습니다. 오직 기뻐할 뿐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할/

 

  ▶14절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되는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시16:3절에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할/
  왜 성도가 존귀한 자인가? 상용구절인 출19:6절에 보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또 신33:3절에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 도다' 여기서 간추려보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백성이고, 구별된 자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이기에 존귀한 자입니다. /아멘!/ 
  ①소자하나라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린 생명 하나 하나가 귀합니다.
  ②죄인 하나라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죄인은 하나님을 떠난 자입니다. 우리는 죄인 한사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눅15: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예수님은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 영혼 한 영혼을 건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앉은뱅이 비유를 들어 '복음 중에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할/


  ▶15-17절에서는 범죄한 형제에 대한 교훈입니다. 먼저 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창3장을 보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인간이 따먹었습니다. 죄가 인간 속에 들어오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 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가 인간에게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런 현상이 있습니다.
  ①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분리가 생겼습니다. 사59:1-3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죄가 있다면 기도의 응답도 없습니다. 시66: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내 안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아멘!/
  ②죄는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롬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할/ 죽음에는 육체적 죽음도 있고, 영혼의 죽음도 있습니다. 성경은 육체적인 죽음은 처음 사망이라고 하고 영혼의 죽음은 둘째 사망입니다. 죽음은 죄 때문입니다.
  ③죄의 배후에는 반드시 사탄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죄를 지었다면 그 죄에는 반드시 우리를 조종하는 사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죄가 환경으로부터 오고 상황 따라 온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가 심리학적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죄는 심리학적 현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이 죄라고 말합니다. 먹은 것이 없어서 이 나라가 죄가 많습니까? 먹은 것을 주면 죄가 없어집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배부르면 죄가 더 많아집니다. 배부른 사람이 저지르는 죄는 배고픈 사람이 저지르는 죄보다 더 큽니다.
  어떤 사람은 무식이 죄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배우면 죄를 안 짓습니까? 아닙니다. 배운 사람이 더 기술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못 배워도 죄를 짓고, 잘 배워도 죄를 짓고 배고파도 죄를 짓고 배불러도 죄를 짓습니다.
  그 이유는 사탄이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부자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배운 자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못 배운 자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죄는 예수님의 보혈로만이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죄지은 형제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하시는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죄인은 용서하되 죄는 용납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할/

 

  ▶15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네 형제가 죄를 범하였거든' 여기 형제는 같이 예수 믿는 성도로써 예수 믿는 공동체 즉,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란 완전한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믿습니다. 그러나 보니 교회 안에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오고 문제가 생깁니다.
  그럴 때 형제가 죄를 범하였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본문에서 예수님이 탄력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①방황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고 잘못한 형제가 있거든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개입시키지 말고 단둘이 만나서 그에게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뒤에서 헐뜯고 흉보고 비난하며 소문을 퍼뜨립니다. 그리고 속으로 경멸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하지말고 찾아가 단독으로 만나라는 것입니다. 만나서 뭐라고 합니까? '권고'해 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저지른 죄가 있다면 그 허물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책망으로 충고로 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로 많이 하고 가야 합니다.
  여기 권고란 말은 야단치고 충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사랑하는 입장에서 눈물을 흘리고 같이 아파하면서 권고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같이 기도하고 같이 눈물을 흘릴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위로하고 용서하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 건져주십니다. /할/
  하반 절에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을 것이요' 형제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를 다시 찾은 길이요, 그를 죄의 깊은 수렁에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심정입니다. 권면의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직접 권고해야 합니다. 사람은 실수를 아니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실수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멀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수를 하면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마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스스로 숨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자를 보거든 혼자 찾아가서 친근하게 권면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주는 친절이 절대 필요합니다. 온유한 심정으로 권면하는 것이 한 사람을 살리는 방법입니다. /아멘!/
  본문에서 '형제'는 '믿음의 동료, 신앙의 동지'를 의미합니다. 또 본문에서 '죄'는 하나님께 대한 근원적, 궁극적인 범죄가 아니라 '성도 상호간의 도덕적 범죄'를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죄를 지은 형제와 개인적으로 만나 충고를 하라는 말씀은 죄를 지은 형제를 보호하기 위한 의도이며, 동시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일을 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권고의 목적은 죄를 지은 형제를 심판하거나 책망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바른 의식을 갖게 하고 형제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결코 권고의 목적이 형제를 판단하거나 질타하기 위함이 아니요 형제를 다시 참 형제로 얻기 위함입니다. /아멘!/
  ②16절에서는 형제가 권면했는데도 안들을 경우에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노력하라고 했습니다.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이 말씀은 약점을 잡아서 그 사람이 도망 못 가게 증인을 세우라는 뜻이 아니라 두 세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더 권면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얘기하다 보면 자기가 잘못했는데도 '그것을 자네의 주관적인 생각이 아닌가? 자네가 오해를 했네!' 하면서 발뺌을 하고 회피할 수도 있습ㄴ니다.
  또 그 자리에서 잘 들은척하다가도 나중에는 전혀 다른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단독으로 만나서 일이 해결되지 아니할 때는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해결이 안 되면 제 2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③그래도 강팍하여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때에는 교회의 힘을 동원하라고 1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17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교회가 권고해야 합니다. 첫째 방법으로도 아니 되고 둘째 방법으로도 아니 될 때는 마지막 수단으로 교회에 알려서 공포하게 하여 그를 경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죄를 깨닫지 못하고 듣지 않는다면 마지막 단계로서 교회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확하게 교회의 어떤 조직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교회를 대표하는 기구가 있어서 거기에 고발하고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그를 권면하고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까지 가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을 구원하고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한 화해의 노력입니다.
  만약 교회의 말도 듣지 않았을 때에는 결국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 믿음의 공동체로부터의 축출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완악한 사람에게는 초대교회가 엄격한 벌을 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교회가 어떤 한 범죄자 때문에 깨어진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일이며, 그 공동체 안에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기에 이 사람을 출교(黜敎)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 권징조례 2조에 보면 권징의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진리를 보호하며 그리스도의 권병(權炳)과 존영을 견고하게 하며 악행을 제거하고 교회를 정결하게 하며 덕을 세우고 범죄한 자의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권고해서 안 들으면 권징을 해서 그가 깨닫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체벌이 약해졌습니다만 교회에는 권징조례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당회에서 권면을 하기도 하고 또 성찬식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징계도 있고, 또는 직분을 얼마동안 휴직하게 하는 조례법이 교회 헌법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도 되지 않을 때면 4단계로 출교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말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출교하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끝까지 노력하라,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그 사람은 세리와 이방인처럼 취급하는 마음이 아니라 끝까지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여 그를 찾으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심판이 아닙니다. 건져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요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영생에 대해서 했습니다.
  그러기에 몇 사람이 권고해야 합니다. 이는 첫째 방법에 의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때에 제 이 단계로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범죄한 사실을 알리는 범위를 좁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은 그 사람이 사랑의 권면을 듣지 아니하는 사실을 증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만약에 그가 듣지 아니하면 다음에 취할 방법에 대하여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하간 죄를 지은 사람을 대할 때는 그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해야 합니다.
  이제 18절은 예수님이 허락하신 교회의 치리 권입니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본문의 말씀은 몇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①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입니다. 즉 15-17절에서 죄를 범한 형제가 있을 때 직접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고 그래서 회개하지 않으면 두 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얘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안 들으면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그래도 안 들으면 세리와 이방인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곧 출교시키라는 것입니다. 본 절의 뜻은 죄 문제에 대해 교회가 내리는 결정에는 '하늘의 권위와 능력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②교회의 권위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뜻입니다. 이 특권은 누구에게 맨 먼저 주셨습니까?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마16:18-19절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교회의 권위가 이렇게 놀랍습니다.
  ③어떤 분들은 전도와 영혼 구원문제로 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전도하면 그 영혼의 여기에서 풀려지고 그러면 천국에서도 풀릴 것이고, 우리가 전도하지 못하면 그 영혼이 사탄에게 묶여서 결국은 천국에서도 묶인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④우리가 죄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면 하늘에서도 용서해 주고 우리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인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매우 부담스러운 해석입니다.

 

  ▶19-20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나 본질을 말한다면 '용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 사랑은 한마디로 '용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은 성도가 용서하는 넓은 마음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말씀이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우리는 여기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합력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고 한 사람이 기도하면 이루어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오해입니다. 아닙니다. 혼자서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또 혼자서 하나님을 섬겨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 사람의 합력기도는 교회의 기도, 합심기도가 이런 큰 능력이 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에게 이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기도하면 굉장한 기도의 능력이 나갑니다. 한 사람이 천을 쫓고 두 사람이 만을 쫓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보다는 두 사람의 기도가, 두 사람의 기도보다는 다섯 사람, 열 사람, 아니 전부의 기도가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도 이 나라가 이만큼 복을 받고 사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한국강산에 세워진 5만 교회가 합력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믿/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두 사람, 세 사람의 모임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교회를 향하여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타낸 두 증인,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두 선지자(계11:3,4,10)는 주님의 교회를 의미하는 계시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교회의 힘'은 무엇인가?
  ①모임의 힘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여기 '내 이름으로'는 '내 이름을 향하여'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모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란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임으로 교회 모임의 특색이 '예수, 구원'을 중심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 속에는 모든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 앞에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어른도 모였습니다. 유유상종하는 모든 사람이 모였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예수 이름 앞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바로 예수 이름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이요, 예수 이름은 어둠에 대한 빛이요, 질병에 대한 고침이요, 절망에 대한 소망이요 실패에 대한 재기요 성공입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의 행복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이름으로 모인 그 모임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할/
  ②말씀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왜 힘이 되는가? 그 모임 가운데 주님 자신이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임의 수 그 자체가 힘이 아니라 그 수 가운데 주님 자신이 임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님의 약속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말씀의 임함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그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자라나게 합니다. ㉢우리를 깨끗케 하며 거룩하게 하는 성화적 삶을 살게 합니다. ㉣주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삶을 살게 합니다. ㉤사탄과 싸우는데 죽음도 불사하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늘에 산 소망의 기업을 보장받게 합니다. ㉦그 말씀의 약속대로 축복을 받는 체험을 합니다. /할/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고, 은혜 받는 자는 성령 충만한 자입니다. /아멘!/
  ③기도의 힘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 속에 기도를 응답하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기도하는 개인이나 두 세 사람으로 합심하는 가정의 공동체나 교회는 기도함으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오순절 다락방이 그 체험의 현장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그 결과 그 응답이 기도하던 현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옥에 갇혔던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그 천사의 도움을 받아 베드로의 몸에 매인 사슬이 풀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던 그 집에 베드로가 나타나서 문을 열어 달라고 노크하는 응답을 체험하였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교회 중에 그리스도는 기도응답을 위하여 임재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힘은 기도에서 옵니다.
  루터는 '기도는 우리 영혼의 독소를 빨아내는 거머리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심령의 질병을 기도로써 치료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스펄전은 '기도는 인간들의 불경건과 포악스러운 압제를 이기고, 훨씬 높이 올라간다.'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토레이는 '일에 분주한 것 때문에 기도를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 일이 많을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하여라. 네가 기도하므로 시간이 낭비되는 것은 아니다. 기도는 우리의 시간을 가장 아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할/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회중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이 자리가 우리 주님계시는 자리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최소의 단위입니다. /아멘!/ 여기까지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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