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강) 결혼과 이혼의 성경적인 원리! (마 19:1-12)
사람은 만남이 참 중요합니다. 특히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래서 옛날 유대 랍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좋은 짝을 만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남자에게 제일 좋은 재산은 '좋은 아내와 건강'이라고 했습니다.
잠19:14절에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슬기로운 아내는 좋은 짝을 말하는데, 좋은 짝은 하나님이 주셔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는 것은 20여 년쯤 되지만, 그러나 짝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함께 사는 기간은 5-60년이나 됩니다. 장수하는 분은 더 오래 같이 보냅니다. 그러므로 좋은 짝을 만나서 일평생 행복하게 사는 것은 너무나도 귀한 복입니다. /할/
그런데 서양 격언에 바다로 갈 때에는 '한번 기도하라' 전쟁터로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라' 그러나 결혼식장에 나갈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은 '바다의 항해보다도, 포탄이 터지는 전쟁보다도 더 치열하고 더 위험한 모험'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혼제도를 누가 만드신 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만든 기관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이고, 두 번째는 국가이고, 그 세 번째는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정과 국가와 교회,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이 만든 기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 개의 기관 중에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기관이 가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있기 전에 가정이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서 교회를 먼저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정을 주어 복되게 살게 하셨습니다. /할/
▶먼저 결혼의 유래를 알아보겠습니다.
창2: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①결혼은 인류의 시작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일남일녀를 지으시고 부부로 짝 지워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가 되시고 결혼의 주례자도 되시고 또한 세 가정의 후견자도 되십니다.
부부는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창2:23절에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부부는 한 몸이요, 두 몸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몸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도 생각도 뜻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②이로써 근본 부모가 먼저가 아니라 부부가 먼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있은 후에 가인과 아벨이 있었습니다.
▶다음 결혼과 부부생활입니다.
엡5:33절에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①부부생활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두 몸을 한 몸으로 묶는 끈이 됩니다. 이 사랑의 끈이 없으면 한 몸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두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이혼율이 많은 것은 완전한 사랑의 끈으로 묶지 못하고 불안전한 정욕의 끈으로 결합하였다가 정욕의 끈이 끊어지면 파탄의 비극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욕은 일시적이요,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줍니다. 사랑은 또 오래 참습니다. /할/
②부부생활의 중심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사랑이 가려주는 보자기라면 용서는 씻어주는 물과 같습니다. 사랑의 옷이 더러울 때 씻어서 깨끗하게 해야 되는데 부부사이에 일어나는 단점과 허물을 용서란 물로 씻어서 없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허물과 단점은 쌍방이 똑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둘 다의 문제입니다.
▶한 동네에 박 씨와 이 씨가 사는데 박 씨 집은 날마다 싸움판이요, 이 씨 집은 날마다 웃음판입니다. 여러분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까? 웃음판이 활짝 핀 이 씨 집입니다.
하루는 박 씨가 이 씨 집을 찾아가 화평의 비결을 배우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 때 마침 이 씨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부엌으로 들어가다가 그만 넘어져서 물동이가 깨졌습니다.
이때 부인이 '내가 그만 조심성이 없어서 그만 물동이를 깨어 먹었구나!'하면서 자신을 나무랐습니다. 그때 남편 이씨가 나오더니 '그건 당신 책임이 아니요, 모두 내 잘못이요, 내가 나무를 들이다가 막대기를 남겨두어서 그만 그것에 걸려 당신이 넘어졌구려!' 그리고 나가더니 아주 통통한 양철동이를 사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박씨는 '옳지 화평의 비결은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데 있구나'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멘!/할/
오늘 본문은 남녀의 결혼문제, 부부의 관한 문제, 이혼문제, 그리고 독신문제입니다. 이 문제들은 가정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혼문제를 거론합니다. 이혼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깨는 행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무론 하고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묻자,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NO. 그러면서 몇 가지 원리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①창조적 원리를 말합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②한 몸이 되는 비결입니다.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되는 신비'를 말씀하셨습니다.
③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사실을 들어서 사람이 임의로 마음대로 갈라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제목 소개!▶
이제 마19장에서부터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그 다음 사역 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유대인들의 신앙과 삶의 중심지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고, 위대한 스승들이 있는 곳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분의 생애 가운데 여러 차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는데는 3년 반 동안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엄청난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그 분이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믿/
▶1974년 '생존'이라는 책이 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도 상영된 바 있는 이 책의 내용은 모두 실화였습니다.
1972년 10월 13일,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를 떠나 칠레의 산티아고로 향하던 비행기가 악천 우로 인해 안데스산맥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사고 당시 비행기 속에는 럭비 선수 15명, 응원단 25명 그리고 승무원 5명, 이렇게 모두 45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눈 덮인 안데스산맥은 전문 산악인조차 두려워하는 마의 산맥이랍니다. 사고 직후 수색을 시작한 구조대는 열흘 동안의 수색 비행 끝에 수색 자체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열흘 이상 그 죽음의 산맥 속에서 살아 있을 사람은 없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사고가 난지 67일 만에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놀랍게도 16명이나 생존해 있었습니다. 그 혹한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그들이 두 달 이상이나 생존해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눈 덮인 산 속인지라 먼저 죽은 자의 시체가 전혀 부패하지 않았기에 그 살을 뜯어먹으며 연명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료의 살을 베어먹음으로 하루하루 생존할 있었던 그들에게 생명의 의미와 가치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67일 만에 구출된 16명 가운데 호세라는 청년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학창 시절 교회에 한 주일도 빠져 본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이나 동네 어른들은 모두 저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교회는 다녔지만 하나님의 품에는 거하지 않았고, 신자란 이름은 가지고 있었지만 참된 신앙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눈 덮인 산 속에서 죽음과 싸우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품'에 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수없이 성만찬에 참석했으나, 그저 형식적으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셨을 뿐 그 의미가 내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산 속에서 죽은 친구의 살 조각을 손에 들었을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알았으며, 생명이 무엇이며 십자가 구원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할/
이 고백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사랑하는 친구의 몸을 뜯어먹으면서 살아 돌아온 사람의 고백입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기 위해 태어났지만 주님은 이 세상에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몸이 십자가에 찢겨서 우리를 살리는 하늘 만나가 되셨고, 그분이 흘린 피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영생수가 되었습니다. /할/ 그 예수님께서 지금 저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죽음의 길로 올라가십니다.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마18:21-35절까지의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 지방을 떠나가셨다는 말씀입니다.
문장의 구조를 볼 때 18:21절에서 시작해서 19:2절까지 연결되는 부분 같습니다. 앞장 마지막부분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면 됩니까?'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 즉 무한정한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을 마치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것과 같으니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준다고 해봐야 백데나리온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유를 주시면서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 형제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면 그때마다 용서를 다 받아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셨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예수님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복음 사역을 펼쳐 나가셨습니다. 우리가 마4장 이후 18장까지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하신 예수님을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3대 사역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와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사역'입니다. /할/
'요단강을 건너 유대지역에 이르시니' 이곳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많습니다. 막10:1절을 보면 이 지방이 베레야로 보이지만, 눅9:5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땅을 통과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⑴요단 동편 베뢰야로 가셨다는 학설과 ⑵요단강 서편 사마리아로 가셨다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베레아 방문 설을 더 지지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19-20절을 '베뢰아 전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 사역은 갈릴리에서 출발로 시작하여 마26:6절을 보면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기름부음 '향유'로 끝납니다.
이 기간 동안에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민중들로부터 기대와 환호를 받았으며 유대 교권 주의자들로부터는 질시와 모함과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어떠했겠습니까? 막10:33-34절에서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 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처형당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 삼일만에 다시 부활할 것을 아셨습니다. 오늘 이 기막힌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고 가시는 예수님께서 본문을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첫째 종류의 사람은 육신의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종류의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공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나쁜 동기를 가진 사람들로써 가장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을 던진 바리새인'들입니다. /할/
▶2절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십니다. 그 와중에서도 예수님을 좇는 무리들이 많았습니다.
'큰 무리가 좇거늘' 이 무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는 순간까지도 멈추지 않습니다.
본문 속에 큰 무리 중에는 병든 자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짧은 한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참 많은 문제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질병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불치병에 걸려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건강이 제일 큰 축복입니다. /믿/
몸이 아프면 모든 것이 귀찮습니다. 무서운 병에 걸려 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무서운 질병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본인보다 더 잘 아십니다. 왜 그런가요? 그분이 우리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고장나면 그것을 만든 공장으로 가지고 가면 끝납니다. /아멘!/.
성경에 보면 우리 예수님은 많은 불치병 환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문등병자, 소경, 절름발이, 앉은뱅이, 귀신들린 미치광이 12년 된 혈루증 여인 등입니다. 심지어 무덤 속에 사흘 동안 있었던 시체까지도 예수님은 살려주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에만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에만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믿/
▶3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두 번째 무리는 주님을 어떻게 하면 모함하고 넘어뜨릴까 작정한 무리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은혜 받기 위해 나왔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들이 최고의 종교지도자급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 나온 동기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을 걸고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이런 태도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에 어떤 부정이 있는가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가져야 할 최대의 관심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가대의 찬양은 잘 하지 못하나 목사님의 설교가 잘하나 못하나 그런데 관심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설교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없고 예수님이 없고 성령이 없다면 그것은 설교 학에서 빵점입니다. /할/
바리새인들은 과거에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골탕을 먹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흔히 미국을 이혼 많이 하는 나라로 알고 있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이혼율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1년에 약 5만 쌍 정도가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은 더 많을 것입니다.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새 번역 성경에는 '이유가 있으면' 공동 번역에서는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당시 유대 사상에 주류를 이루는 랍비학파인 힐렐파와 샴마이파가 있었습니다. 비교적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에서는 아내가 간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에 보다 자유주의적이었던 힐렐 학파에서는 아내에게 사소한 잘못이 있는 경우뿐 아니라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 경우까지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혼에 대한 생각은 신24:1절을 근거를 둡니다. 그곳에 '수치 되는 일'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샴마이 학파는 수치를 '간음'으로 해석했고, 힐렐학파는 '수치'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여 모든 종류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지극히 사소한 잘못'까지도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음식이 쉰 것을 대접할 때, 음식이 탔을 때, 또 싸울 때 여자 목소리가 클 때 그래서 남편이 창피하고 수치스럽다고 하면 이혼'입니다.
또 남편에게 아내보다 더 좋은 여자가 생겼을 경우에도 이혼이고, 아기를 못 낳은 경우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제기한 물음은 바로 신24:1절에 대한 '힐렐의 해석에 동의하느냐? 아니면 샴마이 학파에 동의하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가 힐렐학파의 주장을 따른다면 '예수가 도덕적으로 엄격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라고 공박할 것이요, 또 샴마이학파의 편을 들면 그들은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친절과 자비행위를 위선'이라고 몰아세우려는 계획입니다.
그들의 물음에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4-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인류창조의 근본으로 올라가 창세기를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①4절에서 창조의 원리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창1: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②5절에서 '한 몸이 되는 비밀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창2: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③6절에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사실을 들어서 사람이 임의로 나누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올라가다 만난 존재가 아닙니다.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필이기에 하나님이 갈라주기 전에는 사람이 나누지 못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말은 '멍에를 함께 맨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는 한 마리의 소가 멍에를 매고 밭과 논을 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두 마리가 함께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종류가 다른 두 마리와 함께 멍에를 메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원리는 결혼제도에서도 적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6:14절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이 말씀은 불신자와 결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말은 히브리적인 어휘로는 '키두신'입니다. '성별, 혹은 헌신'의 의미가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바쳐서 완전한 소유물이 된 것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의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키두신'이라고 합니다.
성별되어 헌신하는 자들로 목사, 성직자를 들 수 있습니다. 목사나 성직자들은 성별된 모습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결혼이란 남편을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전적으로 바쳐진 것입니다. 즉 제사, 제물, 헌금이 하나님의 절대 소유인 것 같이 결혼하면 그 배우자를 상호 독점적인 소유입니다.
결혼으로 두 사람의 인격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결합된 것은 두 사람이 서로 도와 완성하는 것이며, 인생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행복만이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 고생문제, 자녀문제, 의식주문제 등을 각오해야 합니다. /믿/
▶결혼의 몇 가지의 목적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①창1:28절 말씀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 위함입니다. 인류는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주셨습니다.
②동반자의 관계와 즐거움을 갖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창2:18절에 나옵니다만 사실 부부가 동반자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것입니다. 외로울 때 옆에 있어서 서로 대화도 하고, 사랑도 하는 그 즐거움은 우리 인간의 행복 가운데 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③하나님께서 결혼 제도를 주신 이유는 고전7:1-6절에 나와 있듯이 '간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성적인 충동이 있는데 결혼을 하지 아니하면 그만 그 충동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간음이나 음행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혼제도를 두신 것입니다.
④결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그의 신부'가 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할/
▶7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구약 성경을 보면 옛날에는 전쟁이 자주 일어나서 많은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들의 숫자는 여자들의 숫자보다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옛날에는 가족이 많아야 그만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자녀를 낳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일부다처가 일반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점점 타락하여 아내가 마음에 안 들면 때리고, 괴롭혀서 내버리려고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많은 여인들이 학대를 받으면서 고통 중에 살게 되었는데, 이렇게 학대를 받으면서 고통 당하며 살기보다는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모세는 할 수 없이 이혼증서를 주고 헤어질 수 있게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신24:1절에 모세는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수치 되는 일'이라는 것은 '부끄러운 일, 특별히 부정한 일, 말만 들어도 창피한 일' 그런 일이 있는 것이 발견되어 너희들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이혼증서를 써 주고 내보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은 아내가 그런 부정한 행위가 없는데도 트집을 잡아 때리고 괴롭혀서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쫓는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한 수 더 떠서 여자가 요리를 망친다든지, 낯모르는 남자와 이야기를 해도 이것이 이혼사유가 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참으로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고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허락한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닙니다. 다만 고통 받는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허락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바리세인들은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들고 모세가 허락한 신24:1-4절을 들어 다시 한 번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실로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그들의 최고의 기준이며 원리입니다. 따라서 모든 유대인들은 '모세가 말한 것'이라고 하면 이성적인 판단이 정지된 채 무조건적으로 그 말에 복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큰 분으로써 마5:22, 28, 32절을 보면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모세의 율법에 치우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할/
다시 신24:1-2절을 보면 모세의 교훈에 '수치 되는 일이 있거든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보내라'고 했는데, 여기 '수치 되는 일'은, 즉 '음행, 간음' 같은 일이 있을 때만 이혼증서를 써 주어 집에서 보내라는 것입니다.
당시 종이가 흔하지 않았던 고대에서는 나뭇잎 위에 '이혼 증서'를 적어 주었습니다. 나무 잎이 시들게 되면 그 내용이 희미해져 잘 알 수 없어서 그 후에 작은 돌, 양피지, 종이 순으로 이혼증서의 재료가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도 이혼의 허용은 점차 이혼의 남용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가 많아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의 어떤 랍비는 성전 제단 앞에서 '초혼의 아내와 이혼하는 자를 위하여 매일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혼문제는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미국은 60%가 넘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할/
▶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모세가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리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완악함은 '거칠고, 잔인하며, 완고한 마음, 또는 말라붙은 마음'이란 의미로써 인간의 타락한 심성을 반영해 줍니다.
그 당시에도 어떤 남자들은 아내를 미워하여 내쫓기 위해 심하게 학대(虐待)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그러한 '큰 죄악'을 범하면서 남녀가 함께 기거하느니 차라리 갈라서는 '작은 악'을 허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모세는 이혼을 적극적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차선의 방책으로 묵인한 것이었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결혼 법에는 본래 이혼의 허용이나 그 가능성에 대하여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그 옛날 당시에는 돈 있고 권세 있는 자들은 아내를 둘, 셋씩 가지는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어쫓기도 했습니다. 여성이 대우받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사실 그 당시 음행하는 여자도 극히 드문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여자를 내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세의 권위를 초월한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로 절대적 윤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혼의 조건이 무엇인가? '음행한 연고'입니다. 음행은 부부계약이 해약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할/
▶10절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제자들이 가만 들어보니까 결혼이 보통 골치 아픈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 안하고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막10:11-12절에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 시대의 남자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여성의 인권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이 질문은 바리새인의 질문과 다른 바 없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11-12절에 나옵니다.
▶11-1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결혼 안하고 혼자 능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혼자 살라고 했습니다. 독신은 은사입니다. 독신은 타고난 자라야 합니다. 독신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육체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몸을 가진 자입니다.
②사람이 만든 고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날 때는 불구자가 아니었으나 사는 동안 사람으로 인하여 성적 불구자가 된 것입니다. 즉 내시 같은 사람입니다.
③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해 스스로 독신 생활을 했습니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타고난 자로써 독신생활을 할 만한 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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