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92강)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23-3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36

(제92강)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23-30)

 

  본문은 막10:17절 이하와 눅18:18절 이하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본문을 대조해 보면, 오늘 본문은 간단하게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를 종합해보면 한 젊은 관원이 주님께 달려나와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고 있습니다.
  흔히들 묻는 것처럼 '내 병을 고쳐 주십시오,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내 아들이 죽게 되었나이다'하는 그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면 지금까지 예수님께 나와 무엇을 구한 사람들에 비하면 상당히 수준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는 물질적인 것이나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영생을 묻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가진 바 고민이 영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고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묻고 있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우선 히브리 사람의 개념으로서는 두 가지로 생각하게 봅니다. 먼저 '미래지향적 의미에서의 종말론적 영생'을 말하는 것이고, 그 다음 '현재 마음속에 있는 영생, 곧 평안'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모신 평안한 마음! 영원한 약속을 받고 사는 사람의 안정된 심령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돈도 있고 명예와 지위도 있으며, 존경과 칭찬도 한다는데 나의 마음은 괴로움 뿐 도무지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사람은 예수님께로 나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게 된 것입니다. /할/ ◀제목 소개!▶

 

  먼저 23-26절을 상고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부자 청년의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 청년은 '영생이냐? 재물이냐?' 양자택일의 순간에서 불쌍하게도 재물로 인하여 영생을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비록 젊음이 있고 그가 돈이 있고, 권력과 명예를 가졌다 할지라도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옛날 백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처음 찾아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곳에서 흑인 아이들이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백인들이 눈깔사랑을 주고 그 다이아몬드를 다 가지고 갔습니다. 그 흑인 아이들은 다이아몬드의 진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부자청년도 그 귀한 영원히 사는 영생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잠깐 있다가 없어질 재물 때문에 영생을 포기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보다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발견하면 자기의 허술한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을 농토는 좀 있었는데 못자리를 할 논이 없어서 항상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못자리하기에 참 좋은 논이 나왔습니다. 우리 형님과 어머니는 그 못자리 논을 사기 위해 다른 논을 팔고 키우던 소까지 팔아서 그 못자리 논을 산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13:44절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귀하고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그 보화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한 것은 보화에 비유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라도 소유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기뻐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나라가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이제 어리석은 부자 청년이 떠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 청년의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영적인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먼저 23절을 보면 청년의 실패가 재물이 많아서 그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가졌다는 사람은 천국 가기가 힘듭니다. 왜? 자기의 가진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24절에서 더욱 강조하여 설명하시는데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황금덩어리를 싣고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가라앉고 있을 때 선장이 외치기를 빨리 구명정에 올라 따라고 외쳤지만 이 부자는 금 덩어리가 너무 아까워 구명정에 옮겨 타지 못하고 그 금 덩어리와 함께 바다에 잠겨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이제 본문을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할/

 

  ▶23-2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같은 내용의 말씀을 두 번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했습니다. 아주 고민스러운 말씀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바늘구멍을 가장 작은 구멍으로 생각하고, 가장 큰 동물로는 낙타와 코끼리를 생각했습니다. 여기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의 속어, 관용구로 생각해야 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자본주의국가에서 천국에 갈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인간은 돈을 벌려고 공부하고 사업을 하는데 그렇다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가? 그러나 본문의 비유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사는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천국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고, 부자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성경은 물질을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죄악시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은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이삭도, 야곱도, 다윗도, 솔로몬도 다 부자였습니다. 신11:14-15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가운데에도 부자가 많았습니다. 니고데모, 아리마데 요셉, 삭개오, 마태 등은 모두 부자였습니다.
  기독교역사를 살펴보아도 물질은 악하고 나쁘게 보는 것이 오히려 더 나빴습니다. 초대교회 첫 이단이 영지주의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사람을 제일 높게 보았고, 그 다음 정신적인 사람, 그 다음 물질을 쫓아가는 육적인 사람을 제일 나쁘게 보았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고상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랑이며, 물질을 쫓아가는 사람은 마귀에 속한 악한 사람으로 규정해 버렸습니다.
  육이라는 것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를 주장하고 결혼을 죄악시했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이 육으로 오신 것까지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초대교회의 이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을 귀하게 보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물질을 배워야 합니다. 돈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돈을 귀히 여깁니다. 돈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영국 속담에 '돈이 노크하면 문은 저절로 열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 유명한 사람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든 돈으로 매수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돈은 나쁘게 쓰면 안 됩니다. 돈은 목적을 가지고 벌어서 목적대로 써야 합니다.
  돈은 이용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의 종이 되면 안 됩니다. 돈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경제가 이 모양이 된 것은 재벌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좋은 목적으로 돈을 사용하지 않고 무조건 확대하고 문어발 식으로 나아가기만 합니다.
  은행에서 돈 가져다 부동산 투기에만 열심히 합니다. 성경은 이런 마음을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탐심이라고도 합니다. 골3:5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할/
  탐심의 원래의 뜻은 '더'라는 말입니다.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 탐심 있는 기업, 탐심 있는 부자,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벌어야겠다는 사람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부자가 돈에 욕심 때문에 영생을 거절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진정한 축복 자입니까? 돈을 잘 버는 사람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항상 선하게 쓰는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멘!/
  본문의 부자 청년은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을 듣고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여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이 부자는 아무런 계획이나 준비 없이 그냥 돈을 모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에서 부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에서는 이런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영국 속담에 '돈은 비료와 같이 뿌리기 전에는 아무 효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집안에 비료는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뿌리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돈은 선한 일에 써야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데만 써야 합니다. 돈을 잘못 쓰면 오히려 패가망신이 됩니다. /믿/
  몇 년 전에 이라크의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쳐들어갔습니다. 그 전쟁 속에 영적인 창고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쿠웨이트에 전쟁을 허락했을까?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가 쿠웨이트입니다.
  20년 전 만해도 그들은 돈으로 세계하늘을 다 덮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돈이 많습니까? 인구는 우리나라 지방도시수중인데 세계은행에 맡겨 놓은 정부 돈이 천억 불이 넘었습니다. 개인이 맡겨 놓은 돈도 많습니다. 천 개가 넘는 유전에서 석유가 그냥 솟아오릅니다. 검은 황금이 솟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돈을 바로 쓸지를 몰랐습니다. 엉뚱한데 썼습니다. 그들은 집집마다 여자들을 사다가 바를 만들고 음란과 퇴폐 속에 세월을 보냈습니다. 쿠웨이트는 20세기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그때 전쟁에서 최신 현대식 장비가 많았지만 손 한번 못쓰고 하루아침에 이라크에게 빼앗겼습니다. 죄악이 관영하고 물질에 도취되어 흥청망청하다가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은 좋은 곳에 쓰지 않는 돈을 악마의 옷으로 갈아 입힙니다. 마음을 부패하게 하고 게으르게 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교만, 영적인 교만까지 들어 하나님과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면 그 영혼은 파멸입니다. 심판의 매를 맞게 됩니다. /할/
  본문의 이 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좋은 일에 쓰여질 수 있는 귀하고 선한 기회를 놓쳤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마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어떤 배경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성문이 있는데 아침이 되면 열었다가 저녁이 되면 닫아버립니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먼 길을 오느라고 늦어진 사람, 어쩌다가 시간을 놓친 사람은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위하여 그 옆에 조그마한 그야말로 비상구인 작은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문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낮고 작은 문이어서 낙타를 들여놓으려고 할 때에는 낙타의 등에 실린 짐을 다 내려놓은 후에 그리고 낙타의 무릎을 꿇게 하여 끌어당겨야만 했습니다. 그때 낙타를 끌어당기기가 그렇게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할/
  ▶부자가 왜 천국에 못 갑니까? 요한 웨슬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①부자는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믿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②돈과 세상과 가까이 하다 보니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 속담에 '돈이란 좋은 종도 되고 악한 주인도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6:19-24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우리 모두 부자입니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많으니 부자입니다. 다 잘 삽니다. 그렇다면 천국 가기 어렵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자! 그러면 부자는 어디서부터인가 따져봐야겠습니다. 나머지는 주어야 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예수 믿는 자는 부자가 되면 안됩니다.
  그 부자란 내 것이라고 생각 할 때부터 부자입니다. 얼마를 가졌든지 간에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부자입니다. 그러나 일억이든 삼십 억이든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자' 이런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청지기적인 사람이며 주의 종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할/
  본문의 젊은 부자는 자기 재물을 좋은 종처럼 바로 부리지 못하고 악한 주인처럼 모시고 재물의 지배를 받아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25절을 보세요!

 

  ▶25절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심히 놀랐다는 것을 보면 제자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 사상은 재물과 부를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빈곤은 하나님의 저주로 알았습니다.
  그 실례로 욥5:17절을 보면 부자였던 욥이 그 고난을 당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벌과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가난을 부끄러움과 멸시의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자의 대한 경고는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여기 '심히 놀라'의 원어 적인 의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어안이 벙벙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제자들이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 그런 질문입니다. 또 놀라움과 불만 섞인 물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의 무지를 짚어 봐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녔으면서도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또한 돈에 대한 목마름인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인지를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돈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에 대한 목마름 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해질 수 없고,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자의 것입니다. /믿/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기를 원하는 자들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아멘!/ 충격을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대답을 해 주십니다.

 

  ▶26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대답도 되지만 다른 여러 가지 일반적인 원칙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불가능하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이 말씀은 인간의 본질로 보면 돈의 위력과 유혹에서 벗어난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양을 하고 도덕과 윤리가 탄탄해도 다 돈에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자에게 성령이 임하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돈이라면 조국까지도 배반한 사람입니다. 돈 때문에 나라를 판 매국노와 같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삶이 180도로 바꿔졌습니다.
  눅19:8절의 그의 고백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할/ 주님이 그런 삭개오를 향하여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멘!/
  프랜시스 같은 분도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가난하게 되어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람을 변화시켜 물질을 버리게도 할 수 있고, 물질이 있으나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 천국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할/
  우리는 유한양행의 고 유일한 회장님을 압니다. 그분은 정말 존경할만한 인물입니다. 그 회사는 자식에게 물려주지를 않고 사회에 환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으로서 다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전지 전능 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믿/
  그러나 여기까지 더 큰 의미는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원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임을 공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격려하시며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갖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제자들의 부정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은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구제 받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사람도 하나님은 구원시킬 수 있습니다. /할/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다 부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돈은 많이 벌어서 하나님을 위해 잘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본문의 말씀 때문에 일부러 가난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또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조건과 환경과 돈을 많이 바쳐서 하나님의 선한 일에 다 쓰시기를 바랍니다.
  돈은 꼭 있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편리합니다. 돈이 있어야 윤택한 생활도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도 하고 남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부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①철저한 돈의 노예로서 구두쇠형입니다. 돈이 한번 들어가면 죽어도 안 나오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입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전혀 냉랭한 사람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돈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래서는 안 됩니다.
  ②돈의 위력으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는 사람입니다. 돈으로 사람을 이용합니다. 앞에서도 말씀했습니다 만은 영국 속담에 '돈이 노크하면 문은 저절로 열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돈의 위력을 남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③하나님 앞에 붙잡혀서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잘 관리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부자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부자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제 27-30절은 하나님께 헌신한 자들에게 주시는 영광입니다.

 

  ▶27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가정도, 재산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눅5:1-11절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두 배나 채우고도 남는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만선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자, 베드로가 배도 물고기도 그물도 내버려둔 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할/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버렸습니다. 조금 전에 베드로는 부자 청년이 물질을 못 버리고 아쉬워하면서 떠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에게 신앙의 우월감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도 예수님을 안 떠났지?' 이런 우월감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학자들은 베드로의 질문을 '보상을 기대하는 잘못된 질문'이라고 한 학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사람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엄격한 말씀에 불안을 느낀 제자들이 영생에 대한 확증을 얻고자 제시한 물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질문은 '어떤 선을 행해야 영생을 얻게 되는가?'를 물은 부자청년이 잘못된 구원관과는 달리 '행함'으로가 아니라 '버림'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제자들의 구원관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실로 버림으로 얻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 지닌 신비한 역설입니다.

 

  ▶2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위해 살기로 작심한 사람들에게 열두 보좌에 앉게 해 주시고 열두지파는 심판하는 지위에 있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란, 최후 심판의 때는 예수님께서 심판 주로 오실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실로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만물을 심판하실 심판 주로 예수님께서 앉으신 그 보좌를 예수님의 영광의 중심이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여기 '앉아'라는 말은 '앉게 하라'는 의미로 임명되는 '승진하다'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때 그 제자들은 심판의 영광의 자리에 앉으신 예수님의 보조 심판자로서 역할을 할 것을 의미합니다. /할/
  비록 물질의 부요와 세상의 권력과 명성과 지위는 없을지라도 세상 적으로는 박수 받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주님을 위해 자기 삶을 헌신한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똑같이 축복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난함이 하나님의 나라의 부요와 세상의 고난이 하나님나라의 풍요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귀한 은혜는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다 버리고 주님을 위해 내 삶을 드린 헌신의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여러 배를 받고' /할/ 마가복음에서는 '백 배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채워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늘나라 천국은 우리가 사모하고 갈곳입니다. 우리의 말로 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기쁘고 즐거운 곳입니다. 영광의 광채가 빛나는 곳입니다. 평화로운 곳입니다. 영원한 곳입니다. 거기는 죄가 없는 곳입니다. 거룩한 곳입니다. 회개한 사람이 갑니다. 죄 용서를 받는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나라 천국입니다. /아멘!/

 

  ▶30절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아사 왕의 처음과 나중을 보겠습니다. 유대 제4대 아사 왕은 41년을 치리 했는데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종교를 개혁하고, 전국에 사람들을 풀어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우상을 훼파하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없애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며 율법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행하도록 전 백성에서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완벽한 국방을 위해 허물어진 성벽들을 재건하고 새롭고 튼튼한 성벽을 세웠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은 아사 왕의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유다 나라를 크게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때 구스나라(지금의 에티오피아) 대왕 세라가 일백만 대군과 병거 삼 백승을 거느리고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아사왕도 군대를 정비하여 세라의 백만 대군을 맞아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유다의 병역 58만을 가지고는 거대한 에티오피아의 백만 대군을 감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아사 왕은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히 에티오피아의 백만 대군 앞에서 큰 소리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하14:11절입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아사 왕이 엎드려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사 왕을 도와주셔서 왕이 나가 싸우매 에티오피아의 백만 대군을 다 진멸하여 한 사람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전쟁에서 노략한 물건이 심히 많았습니다. 이렇게 대승을 거둔 유다 군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춤을 추면서 유다로 돌아왔습니다. 유다로 돌아온 아사 왕은 온 국민과 함께 소 700마리, 양 7,000마리를 잡아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사 왕은 더 더욱 하나님만을 잘 섬기기로 작정하고 누구든지 국민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사람은 죽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아사 왕이 하나님을 섬기기로 얼마나 굳게 결심하셨든지 그의 어머니 마아 태후가 아세라 목상을 만든 것을 보고 자기의 어머니인 태후의 위를 폐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 가서 불살라 버렸습니다.
  아사 왕이 이와 같이 일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축복을 부어주셔서 그야말로 유다 민족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려 20년 동안 어떠한 이웃나라도 감히 유다를 넘겨다보지 못하게 되었고, 유다는 점점 더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20년 동안 나라가 부강하고 태평성대를 누리자 그만 아사 왕의 신앙이 시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은 무엇인가 이루어졌을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딴 생각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사 왕도 그렇게 여호와만 찾던 신앙이 꺼져버리고 오직 세상 쾌락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육적인 쾌락을 쫓아 세월을 보내는 아사 왕에게 북방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가 군대를 거느리고 유다를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바아사 군대가 그 옛날 에티오피아의 군대에 비하면 훨씬 약함에도 불구하고 아사 왕은 마음속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 하나님께 기도하기는커녕 곧장 예루살렘 성전으로 뛰어가 성전에 있는 금은보화를 모았고, 또 왕궁으로 돌아와 왕궁에 있는 금은보화들을 취하여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면서 지원병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아람 군대가 북 이스라엘을 치게 하였고, 결국 북 이스라엘은 아람군대와 싸우느라 유다의 공격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당시 유다의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 왕을 찾아와 아사 왕을 엄히 꾸짖었습니다.
  대하16:7-8절에 보면 '왕이여! 어떻게 이렇게 망령된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20년 전에 구스의 백만 대군을 당신의 군대가 많아서 이겼습니까? 무기가 좋아서 이겼습니까? 그 때 왕이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셔서 이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어찌하여 망령되게 하나님의 성전에서 백성들이 헌금해 올린 금은보화와 왕궁의 금은보화를 취하여 믿지 않은 이방나라 아람 왕에게 주고 북 왕국을 치게 해서 이 난국을 모면하려고 합니까?'
  이 말을 들은 아사 왕은 대노하여 하나님의 종 하나니를 옥에 가두고 그의 말에 동조하는 백성들을 학대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 3년 후에 아사 왕의 발에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병세가 아주 심해 백방으로 의사를 불러 치료를 해도 낫지를 않았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주신 병은 아무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습니다. 아사 왕은 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다가 2년 후 쓸쓸히 죽고 말았습니다. 대하16:12-13절이 당시 아사 왕의 최후의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 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아사가 위에 있은 지 사십 일년에 죽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렇습니다, 처움 신앙과 나중신앙을 잘 지켜야 합니다. /아멘!/ 우리가 주의 일꾼으로 일하는 복을 받을 자라도 부름 받은 순서대로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바른 자세를 가질 때 더욱 빨리 장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게 출발했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일찍 직분 받아 충성했다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과 은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떠나 신앙의 자세에 따라 바꿔집니다. 먼저 출발한 사람이 나중이 될 수도 있고, 나중에 출발한 사람이 먼저 달릴 수도 있습니다. /할/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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