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강) 세 번째 십자가 고난에 대한 예언! (마 20:17-27)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17-19절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세 번째의 예언입니다. 그리고 20-28절까지는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28절은 우리 예수님이 오실 목적에 대하여 기록했습니다. 오늘은 27절까지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17-19절까지는 오늘 제목은 여기에서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목적을 세 가지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⑴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⑵죽임을 당하기 전에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서 능욕과 채찍질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⑶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에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더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목 소개!▶
▶17-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벌써 세 번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배우는 우리들도 다 잊어버렸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망각의 은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요한 것은 잘 잊어버리는데 시시콜콜한 것은 열심히 기억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생이 사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중요한 얘기는 단 5%도 하지 못하고 살고, 헛소리들만 한 95%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헛살았다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십자가의 사건을 말씀하셨습니다.
①마16:21절 이하에서 보면,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즉 세상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때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로 보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대답에는 별 반응이 없으십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성령에 감동이 되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을 듣고 매우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러면서 한 번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이 마16:21절에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②갈릴리에서의 말씀입니다. 마17:22-23절에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③그리고 오늘 본문입니다. 이상 세 곳에서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배우게 됩니다.
⑴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왜 왔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신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십자가 위에서 죽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행복하고,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잘 아셨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갈릴리 사역에서 예수님의 인기는 굉장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바다가 잠잠하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근방에서도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때를 아시고 이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때가 이스라엘의 상대 절기 중에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이 있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는 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신성을 발견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의 앞날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아셨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우리의 앞날을 모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축복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아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운명을 안다고 합시다. 예를 들어 '3년 후에 재수가 대통한다.'는 사실을 믿는 다면 이제부터 3년 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놀고 먹을 것입니다. 반대로 3년 후에 큰 재난이 닥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근심, 걱정하다가 미리 죽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오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도바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롬14:7-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할/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주여! 주를 위하여 내 삶이 결정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내 삶의 전부입니다.' 다시 한 번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갈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우리의 삶을 이렇게 분명히 정리되어야 합니다. 나의 결혼의 목적은 여기에 있고, 돈을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자녀를 키우는 목적에 두어야 합니다. /믿/할/
⑵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의 예언성취입니다. 눅18:31-33절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오늘 본문과 똑같은 배경인데 거기에는 한 가지 말이 더 첨가되어 있습니다. 31절을 다시 한번 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예언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혼자 잠깐 생각해 보고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요, 계획입니다. 사53:3-4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리고 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습은 예언자를 통하여 미리 그려 주셨던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이전에 능욕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가 체포되고 십자가를 지실 때 사람들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면류관을 써라'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채찍을 가했습니다.
머리는 가시에 찔려졌고 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모욕하고 저주했습니다. 드디어 십자가 위에 양손, 양발에 대 못이 박히고 옆구리에는 창을 받아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김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고난은 사53:5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고난은 그리스도의 표지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고난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억울하게 누명 쓰는 것은 분하게 여기지 마십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 찬이라는 하나님의 반증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⑶예수님의 그 죽음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로 승리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부활이 있었기에 우리는 죽어도 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요11:25-26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할/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왜 세 번씩이나 강조하셨습니까?
⑴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⑵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제 앞으로 이러한 환난과 어려움이 다가올 때를 위하여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에서 배워야 합니다. /아멘!/
⑶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음에도 부활을 믿고 제자들이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⑷깨닫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깨달았다면 주님께서 자꾸만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반복해서 또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교육이란 반복교육, 재차 교육입니다. 이제 20절로 가겠습니다.
▶20절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여기서 세베대의 집안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그 당시 집 한 채만 있어도 부자였는데 세베대는 두 채나 있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북쪽 시골 가버나움에, 다른 하나는 대도시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겨우 배 한 척으로 고기잡이를 했지만, 세베대는 어업회사 사장으로 상당한 재력가여서 예수님의 사역을 경제적으로 제일 많이 뒷받침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남들보다 앞서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 시대 최고의 인물은 세례요한이었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이미 그분의 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공을 하고 이름을 내는 일이라면 둘째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세베대 집안은 또한 제사장 집안이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가야바의 궁전으로 같이 갔는데, 앞서 걸어가던 젊은 요한은 제사장 집안이라 궁전 문을 그냥 통과했고 베드로는 보초들에게 걸려 들어오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요한이 되돌아가 같이 온 고향 사람이라고 말하자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야고보와 요한은 대단한 집안의 자제들입니다. 권력과 명예를 향한 야망을 품고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인물이 될 요소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례요한이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나는 저 분의 신발 끈을 매어줄 자격도 못된다. 저 분은 흥할 것이고 나는 저 분을 섬기며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야심에 찬 야고보와 요한은 바로 세례요한과 작별하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들은 큰마음을 품고 장차 이스라엘의 최고인물이 되고픈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둘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제일 어렸지만 예수님이 자기들의 야망을 이뤄줄 분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이들은 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을 찾아와 넓죽 절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친척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어머니의 열심히는 대단합니다. 보통 어머니 같으면 장성한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체면을 무릅쓰고 어떻게 하든지 간구해서 아들을 잘되게 해야겠다는 열심히 있는 어머니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대로 잘 본 어머니 상이지만 좀 지나치게 표현하면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어머니입니다. 사실 치맛바람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살로매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그 고난의 길에까지 와서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할/
'그때에' 어느 때입니까?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받아야할 고난을 이야기한 그때입니다. 당시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릇된 매시야 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때 로마의 압제이레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고 고통 받고 있는 자신들은 정치, 군사적으로 해방시키며 과거의 찬란했던 다윗 왕 시절과 같은 강력한 국가를 세워 온 주변국을 통치할 수 있게 해주는 해방 자가 구약에 약속한 메시아를 알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메시아 관을 바로 잡기 위해 예수님은 세 번이나 걸쳐 자기의 메시아 관을 설명한 것입니다.
'절하니' 이는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뜻이기보다는 세상 권력을 쥔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구하니' 막10:35절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즉 자신의 두 아들을 출제시키고 싶어하는 살로메의 모성의 달가운 심정으로 원하는 바른 무조건 허락해 주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살로매는 누구입니까? 요13:25절을 보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친자매로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예수님의 이모가 되며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 사촌이 됩니다.
▶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님이 살로메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뇨?'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계셨으나 우선 그들의 요청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들기를 원했습니다.
'이 나의 두 아들을' 한마디로 당신이 대권을 잡으면 내 아들 요한과 야고보에게 우정승과 좌정승 중요한 권력을 자기 아들들에게 달라고 청탁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권주제 친인척이 문제입니다. 지금 산 자에게는 자기 아들을 위해 명예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 우편과 좌편은 제 2의 권력자의 자리입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보면 살로메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주의 나라'는 주님이 통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나라입니다.
성경에서 천국은 세 가지입니다. ⑴교회도 천국으로, ⑵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우리의 심령을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⑶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살로메가 구한 주의 나라는 예수님을 세상 적인 통치권자로 보고 그 예수가 로마를 쳐부수고 새로 지은 이스라엘국가를 의미합니다. 잘못 알아도 크게 잘못 알았습니다.
살로메는 아들들은 잘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구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바로 구하지 못했습니다. 열심도 좋고, 정성도 좋았으나 기도를 바로 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 어머니가 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신앙의 3대 원리는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것'입니다. /할/ 이제 예수님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무슨 말씀인가? 지금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약삭빠른 태도로는 복된 자리를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누가 주님의 우편에 앉습니까? 약삭빠르지 않고 우직하게 충성하는 사람이 주님의 우편에 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할/
우리는 약삭빠른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약삭빠른 마음은 약삭빠른 도둑보다 훨씬 무서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약삭빠른 생각을 하면서 '내가 참 영리하구나! 내가 잘 살 거야!'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에게 사기 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사기치는 것보다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치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약삭빠른 것'은 '영리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약삭빠른 사람은 잘 살 것 같지만 더 못 삽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약삭빠른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살면 인간적으로는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아멘!/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또 이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성경지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지식이 없으면 성경은 바로 배우지 못하면 살로메처럼 엉뚱한 기도, 잘못된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 다음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고난의 잔이요, 죽음의 잔입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자가 주님의 좌우 편에 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식에서 주님의 잔을 마시는데 마시면서 십자가의 삶을 새롭게 다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이 부패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적절한 십자가가 없으면 그 영혼은 반드시 부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마련하신 잔을 기쁘게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믿/
▶오래 전에 인터넷에서 어떤 발 사진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발이 못생겼는지 마치 희귀 병을 앓는 사람의 발 같았고, 나무 뿌리처럼 생겨 마치 엽기 사진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세계적인 발레리나인 '강수진'씨의 발이었습니다. 명성은 그냥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자에게 오는 면류관입니다. /아멘!/
'고은'이라는 시인은 예수님의 발에 한 여인이 입을 맞추었듯이 그 발(강수진씨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열 아홉 시간씩, 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도록 훈련한 결과 멀쩡하던 발이 괴물 발이 될 정도로 노력해서 얻은 성취입니다. /할/
우리는 십자가는 지지 않고 주님 우편에 앉을 생각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기 위해서 너무 핑계만 대고, 너무 엄살만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자기 욕심만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믿/
그러나 제자들은 십자가의 원리를 완전하게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할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대단한 제자들입니다. 무지는 만용을 낳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은 곧 닥쳐올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때 있을 자신들의 배반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무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할 수 있나이다.' 영적 무지의 소리입니다.
요한의 어머니는 자기의 구한 것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물어보는 뜻도 몰랐습니다. 그 뜻을 모르니 대답도 모르고 한 것입니다. /할/
▶23절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여기서 과연 이라고 하는 단어가 귀합니다. 이 단어는 시인과 양보의 뜻을 지닌 단어로써 어떤 사실을 강조하거나 단언할 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예수님이 마시려고 하는 잔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할 수 있나이다.' 대답한 야고보와 요한의 말에 긍정과 수락을 나타냄과 동시에 반드시 잔을 마시게 될 것이라는 단언적인 의미까지 포함 쳐 있는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의 길입니다. 죽음의 잔을 모르고 대답했으나 예수님은 그들의 미래를 아시고 너희도 이 잔을 마실 수밖에 없음을 말해 준 것입니다.
실제로 AD44년 헤롯왕에 의해 야고보는 12사도 중 제일 먼저 순교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의 쓴잔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일평생을 유배생활로 극심한 핍박 속에서 보냈습니다.
▶순교에 두 가지 정형이 있습니다.
①주님을 위해 자신의 생명의 바치는 외형적인 순교와 ②자신의 삶 전부를 바치는 내면적 순교가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그들의 대답대로 고난의 잔에 동참자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내 좌우편에' 이 말씀은 좌편, 우편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가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받습니까? 주님이 마시고 잔을 마시는 자가 받습니다. 주를 위하여 헌신하고 주를 위하여 충성한 자들이 받게 됩니다. /믿/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다가 당하는 고난의 잔입니다.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란 여기서 계가 깨진 것은 여기 예수님의 고난과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살다가 당하는 잔이 고난의 잔입니다. 이 잔을 많이 마시면 하늘나라에서 큰 자가 되고 적게 마시면 작은 자가 됩니다.
마5:10-12절을 읽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할/
▶24절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나머지 10제자가 두 제자에게 심히 분노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성령 받기 전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성령 충만한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마음이 넉넉하게 됩니다. 본능적으로 살면 '누가 크냐?'고 다투게 되지만 성령 충만하면 나보다 남이 앞서도 괜찮습니다. 때로 남이 큰 실수를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넉넉하게 대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밝은 얼굴이 되고,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되고 지나친 염려와 근심이 없고 한에 맺혀 사는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심하게 매를 맞아도 다음날에는 환하게 웃고 놉니다.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때리면서도 아이들은 때린 후에는 스스로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져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우울하게 되지만 정작 맞은 어린아이들은 하루만 지나면 벌써 잊어버렸습니다. 어른이 그렇게 맞았으면 한이 맺혀서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어린아이들은 어제 심하게 싸우고도 오늘 친구가 됩니다. 어른들은 그렇게 사우면 오래 맺히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느새 금방 잊어버리고 다시 친해집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성령 충만의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이유를 대든지, 어떤 변명을 하든지 원한 맺힌 감정을 품고 사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닙니다. 아무리 대단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 같아도 마음속의 한과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 충만 및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충만한 것이지 결코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에 모든 맺힌 것, 모든 섭섭한 것을 다 버리고 '그것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십자가였다. 그 사람 입장에서 그럴 수 있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넉넉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처럼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아멘!/
본문의 야고보와 요한만 주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탐한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 분노한 열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원하고 또 많은 재산, 명예, 존귀해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까지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입니다. 고전3:3절에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 말씀에 성령의 터치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예수님이 보시고 너무나 딱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권력에 대한 것을 말씀했습니다. 세상 집권자들은 그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강제로 주관합니다.
여기서 대인이란 권력을 쥔 자로써 권세를 부리면서 사람들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권력의 교만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이런 권력을 너희가 탐내지 말고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높은 보좌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26-27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신앙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남을 섬기고 종이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축복 많이 받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축복 받고 그 축복을 남을 위해 쓰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오해하면 사랑이 오기나 집착으로 바뀌어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고 결국 축복이 저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만 높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높임 받으려고 하면 공동체의 하모니가 깨지고 결국 자기 손해입니다. 그러나 남을 섬겨주면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자기에게 축복이 주어집니다. 모든 삶과 인간관계가 다 그렇습니다. 받으려고 하면 결국은 손해뿐입니다. 그러나 주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무수한 것을 얻게 됩니다.
왜 사람들에게 미련이 있습니까?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받으려고만 하면 미련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는 사람은 미련이 없습니다. 더 주는 사람은 더 미련이 없습니다. 다 주는 사람은 미련이 결코 없습니다. 그처럼 미련이 없는 것이 보람이고 행복입니다. 누구에게 행복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주고, 주고 또 주고 자기 몸까지 주려는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믿/아멘!/
특별히 연약한 사람을 잘 돌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높은 자리다툼이 이번 한번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 얼마 전에도 갈릴리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다툴 때가 있었습니다(막9:30-37).
그때 주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린아이는 힘도 없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처럼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도 잘 영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탁 무시합니다.
없는 사람을 무시할수록 축복은 하나씩 깎일 것입니다. 반대로 없는 사람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섬겨줄수록 축복은 하나씩 쌓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우리의 앞날의 축복을 저울질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얻으려고 하는 일'에만 전념하지 말고 '드리는 일'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선교와 구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더욱 풍성한 행복감을 선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마다 '달라!'고만 하지 마시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도울 사람이 없습니까?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 생각나게 하시고 실제로 내 손을 펴서 그를 섬기는 자가 되게 하소서!' /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권력 서열을 정해주고 계십니다. 세상 권력과는 정반대입니다. 이 세상의 표준과 주님의 표준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표준이 세상 적인 의미에서 보면 얼마나 역설적인 진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누가 참으로 위대합니까? 참으로 으뜸입니까? 최고입니까? 한마디로 세상에서 제일 낮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고 기도하는 그 사람이 바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물론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남을 지배하고 많은 사람들을 부리고 호령하는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누구입니까? 남을 위해서 봉사를 많이 한 사람이요, 남을 섬기는 자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자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 사람을 섬기십시오, 섬김은 낮아진 자세부터 시작입니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면 한 사람도 못 섬깁니다. 또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 여러 사람을 위해 종살이를 많이 한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큰 자요 으뜸이 됩니다. /할/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죗값을 담당하시려고 죄인들을 위해 몸과 피를 다 회생하여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면서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예수님이 제일 큰 자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설교만 듣고 가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섬기는 자의 모습, 종의 모습, 희생하는 자의 모습이 있을 때 거기에 빛과 소금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에 적용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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