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강) 부자청년의 교훈! (마 19:16-22)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흔히 '어른이 없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본이 되어 앞서서 길을 인도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로서 '시대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을 탓하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정치인이 타락하고, 교사와 교수가 타락하며 종교지도자가 타락한 시대를 한탄하며 걱정하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앞서 가르치고 행하며 본이 되는 어른의 가르침을 도무지 무시하고 배우려 하지 않는 오만한 사람들의 세상이라고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어느 정당성 있는 도덕적 규범이나 윤리적 척도를 갖지 않고 모두 자기 중심의 편의를 따라 살아가는 무책임한 사람의 습성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이야' 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성 시대'니 '튀는 것이 멋'이라는 식으로 자기만의 세상을 살아가려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회상입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구분 없이 어른이 없고 모두가 저 잘난 맛으로 사는 세상은 스승이 없고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입니다. 어느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행세를 하면서 안하무인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 잘난 맛에 사는 세상에서 혹시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신앙으로 변질되어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바른 신앙을 위하여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마19장은 우리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을 마감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데 네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⑴병든 자들, ⑵바리새인들, ⑶자기 아들을 예수님께 안수기도 받으려는 어머니들과 그리고 ⑷오늘 본문에 부자청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아주 놀라운 사람입니다. 영생이라는 놀라운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보면 아주 이상적이고, 진실한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겉 다르고 속이 다른 사람이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입니다. 좀 더 자세히 이 사람의 모든 것을 알아보겠습니다. /할/
▶16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 '어떤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본문 20절을 보면 이 사람의 신분이 나와 있는데 첫 번째 신분은 노인도 아니고 어린아이도 아닌 한참 때인 청년입니다. 그리고 22절을 보면 재물이 많은 사람, 즉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취급하고 있는 기사입니다. 눅18:18절에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서 보면 관원이라고 합니다. 당시 관원이란 유대 회당의 지도자나 산헤드린 공회원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좋은 조건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젊음이 있지요, 돈이 있지요, 권력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조명해 봅니다.
①그 사람은 청년입니다. 청년이라는 이 젊음 속에는 세상을 살아갈 시간들이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시간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재산입니다. 그래서 서약격언을 보면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부러운 일입니다. 청춘은 인생의 꽃입니다. 젊음이란 힘과 용기와 꿈과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젊다는 말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②돈이 많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큰 부자라고 했습니다.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았는지 혹은 자기가 재산을 모았는지는 몰라도 그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좋은 집, 좋은 자동차, 좋은 의복 그리고 동산과 부동산이 많은 큰 부자였습니다. 이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젊음이 있고, 돈이 있는 이 사람은 분명히 자신만만했을 것입니다. 도도하고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신분이 또 하나가 있습니다.
③젊은 관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고등고시에 응시하여 행정과 사법과에 모두 합격한 행정관이었고, 판사나 검사나 같은 신분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젊은 나이에 관원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이 사람은 누가 봐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지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것으로 끝나기 않습니다.
대게 명예가 있고, 돈이 있고, 젊음이 있으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약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여자 문제가 있다든지 부정축제를 했다든지 하여 생활에 좀 복잡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18절 이하에서 '계명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은 신앙적인 겸손함도 있습니다. 막10:17절에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만 해도 대단한 관심이요 갈망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생은 세 가지 질문에 도전을 받고 이에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입니다.
사람의 가치관에는 물질적, 도덕적, 영적 가치관이 있습니다. 어느 기준에 따라 결정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결과가 달라집니다.
광야에서 오랫동안 방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현대인은 하나님의 '가시적 임재'(可視的 臨在)인 구름과 불기둥의 인도를 잃어버렸습니다. 도덕적이기를 원하면서 영적이기는 거부합니다.
철학교수와 뱃사공 청년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교수가 뱃사공 청년에게 묻습니다. '그대는 철학을 아는가? 수학을 아는가? 지리학을 아는가?' '전혀 모릅니다' '자네는 인생의 4/3을 잃었구먼' 그런데 조금 후에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청년이 교수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헤엄을 칠 줄 아십니까?' 철학교수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청년이 심각하게 '선생님은 인생의 전부를 잃었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헤엄은 절대적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이 중요한지 현대인은 잘 모릅니다. 기독교는 도덕 이상의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이 안되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으나 전부를 잃은 것입니다.
'재산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명에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세상의 필요한 이것들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영생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청년을 보면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그 정도의 신분과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 대게 예수님에 대하여 빈정대거나 시빗거리를 찾으려고 하는데 이 청년은 예수님 앞에 달려 나와 꿇어앉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사람입니까?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보면 흔히 '내 병을 고쳐주십시오, 내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내 아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영생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예수님께 나와 무엇을 구한 사람에 비하면 상당히 수준이 높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믿음의 핵심을 모르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가장 신앙이 본질에 해당되는 영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할/
여러분!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이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그것은 현재부터 시작해서 죽음 이후에까지 이르는 생명입니다.
부자 청년은 그가 이 세상에서 얻을 것을 다 얻었습니다. 건강, 돈, 명예, 직위, 또는 완벽한 삶 등입니다.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야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내세까지, 그러니까 죽음 이후의 영혼의 문제까지도 안전하게 확보해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 청년은 나무랄 때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깊이 보면 그 사람의 질문의 모순을 찾게 됩니다.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이 바른 질문이 아닙니다. 질문이 잘못되면 올바른 대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질문이 왜 잘못되었습니까? 사람들은 흔히들 선한 일 큰일을 해야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오해하고 착각을 합니다.
이 부자 청년이 영생을 갈망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그 출발점이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이 청년은 구원을 어떤 인간의 행위로 얻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보십시오!
롬5:21절에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또 요일5:11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그리고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은 누가 줍니까? 예수님이 주십니다. 요10:28절을 보세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할/
이 청년의 질문은 일반적인 종교에서 부르짖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을 수양하고 도를 닦아야 하는가? 어떻게 착실해져야 하나님 앞에 설수 있을까? 이 사람은 세상 종교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여기서 영생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영생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21:33절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바로 영생의 본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영생의 개념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격의 품에 안겨서 그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영생의 길에 들어간 것입니다. /믿/
영생은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내 안에 들어 오셔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부터 영생의 진정한 축복의 맛을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요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참된 영원히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확실히 압시다. 예수 안에 구원이 있고, 예수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아멘!/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떤 죽음의 세력이 어떤 절망의 세력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왜? 요10: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아멘!/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사업하다가 부도나는 일이 나를 근본적으로 절망케 하지 못합니다. 상황적인 고민을 줄 수 있어도 절망을 내게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요16:33절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또 마28:20절에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할/
영생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영생이나 구원은 본문의 젊은 관원처럼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노력이나 수양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영접하므로 그 영생이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부자청년은 영생을 자기가 선을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자신이 지상의 것을 다 소유했듯이 영혼의 것도 그렇게 소유하고 싶어서 예수님께 나와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은 보면서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1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의 대답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의 대답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은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고 영생의 길로 갑니다. 이렇게 대답해 주셔야 우리가 아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 청년의 수준에 맞게 접근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 청년에게 가장 예민한 부분은 선한 행위입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자기의 선한 행위로 사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방의 대상으로 생각했지 존경과 경외의 대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빨리 눈치 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초자연적인 기적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면서 '당신은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선을 물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도 믿음으로 접근하신 것이 아니라 선의 문제로 접근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은 정말 선하신 분을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그에게 알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시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이 유일하게 선한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선하다고 말할 수도 없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이해 수준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선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왜곡된 신앙 관을 깨우치기 위해 '선'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선행이 완전하다고 믿거나, 또는 앞으로 완전해 지면 구원을 얻으려는 이 관원의 바리새적인 구원관은 잘못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을까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다 지키기에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모든 계명들을 지킬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 청년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계명들을 지키다 보면, 아무리 힘써도 안 되고 애써도 안 됨을 깨닫고, '아이고 주님 안 됩니다. 내가 해보니 안 됩니다. 힘써도 안 되고 애써도 안 되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나를 구원해 주세요'하고 주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할/
구원은 예수님 앞에 나오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계명들을 지켜봐야 자기 부족을 알아서 하나님께 굴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미소를 짓습니다. 아주 자신만만합니다. 18절에 청년이 뭐라고 했습니까?
▶18-19절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리이까?' 얼마나 자신만만한 반문입니까? 우리 주위에는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양심이 바르고 철두철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도하기 어렵습니다. 전도하기 좋은 사람은 좀 허술한 것 같고 자기 부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잘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청년의 질문을 받으시고 모르는 척 하면서 십계명을 얘기하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킬 계명을 말씀하시지 않고 인간이 인간에게 지킬 계명만 골라서 말씀해 주십니다.
①살인하지 말라! 이 계명은 '자신과 이웃에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②간음하지 말라! 이 계명은 '자신과 이웃이 순결에 관한 것'입니다. 순결은 생명과 같이 우리에게 귀한 것입니다.
③도적질하지 말라! 이 계명은 '이웃의 재물에 관한 것'입니다.
④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 계명은 '자신과 이웃의 명예와 신용에 관한 것'입니다.
⑤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계명은 '존속관계에 대한 의무를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율법의 역할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법은 세 가지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①죄를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구나 아 내가 다 죄를 지었구나, 죄를 깨닫게 합니다.
②몽학 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죄를 깨닫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실망을 합니다. 그런데 실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주님께로 나가게 합니다.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노력을 해도 안 되는구나 그리고는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③여기서 율법의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냐? 어떻게 하는 것이 축복 받는 비결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율법을 지켰느냐?'고 묻습니다.
이제 이 청년은 완전히 안심하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래, 이제 됐구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20절을 보세요!
▶20절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더 적극적인 표현이 첨가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라는 말이 첨가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정도는 어렸을 적부터 다 지키는 사람입니다.'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대답입니다. 이 청년이 자신만만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십니까?'라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말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다면 지적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꿰 뚫어보십니다. 이 청년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율법을 다 지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이 청년이 율법을 다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계명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하라, 하지 말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실천하는데 까지라는 말씀입니다. 청년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눔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곧 계명의 완성입니다. 청년은 여기까지를 실천에 옮기고 나서야 '다 지켰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킨다고 했지만 선한 일, 주는 삶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으로 하여금 깨닫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신 것입니다. 다음 21절은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했다면 참으로 잘했다. 그렇다면 네가 재산이 많으니 좀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본 절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늘 성경을 보니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그랬는데 여보 우리도 팝시다. 땅도 팔고, 집도 팔고, 금반지도 팔고, 소유물을 다 팝시다.' 그러지 마세요.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너희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갖다 주어라! 그리고 알거지가 된 다음에 나를 따라 오라' 이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이 부자 청년이 자기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네가 율법을 다 지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율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마22:37-40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할/
중요한 것은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계명대로 살았다고 자신만만한 이 청년에게 정말 '네 이웃은 네 몸같이 사랑하고 있는가'를 테스트하기 위해 또 그가 깨닫기 위해 '네가 정말 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그렇게 주는 삶,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구약에 있는 10계명의 핵심은 두 가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입니다. 십계명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할/ ▶이 청년의 최종모습이 무엇입니까?
▶22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돈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영생과도 바꾸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숭이 잡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호리병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먹이를 넣어둡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그 호리병에 손을 넣고 먹이를 잡습니다. 손을 꺼내려는데 먹이 때문에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손을 빼려고 할 때 사람이 와서 원숭이를 잡는답니다. 원숭이를 먹이는 잡을 줄만 알았지, 놓은 줄을 몰랐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물질을 잡을 줄만 알았지 놓을 줄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온통 배금주의 사상에 물들어 검은 돈이 판을 칩니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세상입니다. 인격도 돈으로 가늠하고, 세상이 돈 짝만 하게 보이는 '생명경시의 시대'입니다.
정말로 인간에게 범사에 유익한 물질이 영생에 장애가 된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먹는 현대판 가롯 유다를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모두 다 돈의 노예인 데 말입니다. /할/
기독교 축복은 '덮어놓고 부자가 되시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막연한 기복신앙은 오히려 참 신앙에 걸림돌이 됩니다. 따라서 성도나 교회가 돈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럴수록 교회는 물질로부터 초연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물질의 비중이 얼마나 큰가?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나님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돈도 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단지 신앙적인 물질 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의로운 재물을 가져야 합니다. 수입도 의로워야 하고 지출도 의로워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부할 수 있는 물질의 선택권을 롯에게 양보하고, 소돔 왕에게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 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14;23)고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여 잃은 재물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전부를 잃고도 티끌 가운데 앉아서도 하나님을 경배합니다(욥1:21). 우리는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의 일천번제의 결과로 받은 전무후무한 축복을 압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부(富)와 편안함이 신앙을 혼탁하게 함으로 솔로몬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할/
재물의 풍요는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30:8-9절에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할/
재물 때문에 오히려 축복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서, 사울 왕, 가롯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게하시, 발람, 아간, 롯의 처'를 생각해 보십시다. 플랜크림은 '돈은 충성스런 종이기도 하지만 무서운 상전이기도 합니다'라고 했으며, 쟈크 앨룰은 '하나님이냐, 돈이냐?'란 책에서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어 거저 주는 삶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노동자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주머니의 지갑을 꺼내려는 그들에게 '그대로 놔두십시오, 당신의 지갑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돈의 히브리 원어는 '탐낸다'는 동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돈은 '축복과 보상'의 원리도 되지만 유혹의 씨앗도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금은 성전의 기물도 되지만 광야 금송아지 신상도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돈이 앉아서는 안됩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가르침이 빛나는 시대입니다. /할/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여기서 청념은 예수님을 통한 '가르침'이 도리어 근심이 되어 차라리 안 듣고 모르는 것만 못하여 '근심하며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 근심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 근심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아픈 심층을 찔렀습니다. 현대인은 지식적으로 알기는 원하면서도 실천하기는 싫어합니다.
그래요! 영생의 조건은 완전한 포기여야 합니다. 완전한 순종이어야 합니다. 참 영생을 얻지 못하면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시몬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삭개오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순종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재산가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죽음 저 편에 있는 영생의 문제가 아닙니까? 그러나 현대인은 언제부터인가 영생보다는 현실이고, 진리보다는 사상입니다.
기쁨이 되어야 할 신앙이 근심이 되는 사람은 없습니까? 진주의 가치를 알았으면 소유를 팔아서 진주가 감추어진 밭을 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①신앙생활에 자만심은 금물입니다. 부자 청년은 자만심에 젖어 살았습니다. 스스로 기준에 만족하며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고는 하였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기준은 아니었습니다. 세속의 가치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행위가 모든 중심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신앙이 이를 닮은 점은 없습니까? 주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의 허물과 경건에 부족함을 고백하며 믿음을 성숙으로 이끄십시오! /할/
②내 뜻과 주님의 뜻이 다를 때 주님의 뜻을 따르도록 하십시오(순종).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사는 길과 죽음의 길을 하늘 아버지의 뜻에 맞추었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내 뜻에 맞지 않다 해도, 내 기대와 다르다 해도, 내게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주님께 등 돌리는 어리석은 일은 없도록 하십시오. 이것을 순종이라 합니다. 내 맘에 쏙 드는 걸 할 때, 순종이라 하지 않습니다. 내 뜻과는 다르지만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모든 기준을 접고 주님의 뜻을 따를 때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제자가 되었답니다. /할/
③세속적인 가치로 신앙을 포장하여 속이거나 속지 마십시오.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에서 판단하실 분은 예수님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에 인정받기보다는 주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청년의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
①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율법은 절대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②부자 청년의 잘못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은 함께 못 섬깁니다. 우선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제일주의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바로 되면 하나님이 그 다음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
▶본문에서 영생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습니다.
①나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라, 나를 포기한다는 말은 나에게 속한 것들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완전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 하십니다. /믿/
②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이 청년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한편으로는 물질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③정말 이웃을 사랑하는 자를 주는 자입니다. 물론 물질로 주면 하늘에 보화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주어야 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주어야 랍니다. /아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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