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95강) 여리고의 두 소경! (마 20:28-3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38

(제95강)        여리고의 두 소경! (마 20:28-34)

 

  사람은 본능적으로 지니는 욕구가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머리가 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을 받으려는 욕망입니다. 예수님은 지난 시간에 배운 마20:20절 이하에서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들에게, 또 크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욕망 자체를 부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으뜸이 되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은 좋지만 으뜸이 되려는 목적이 무엇이며, 첫째가 되는 것은 선한 것이지만 섬김을 받고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첫째가 되려는 것은 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섬김을 받으려고 첫째가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결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대화가 무엇입니까? '누가 크냐, 누가 킹 메이커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누가 일등하고 반장 할 것이냐?' 이것 때문에 치맛바람이 일어나고, 직장에서는 '누가 빨리 높아질 것이냐?'이며, 회사들은 '누가 재벌 순위 랭킹 일 위냐' 하는 논쟁이요, 싸움입니다.
  인간의 반만년 역사는 화살에서 핵무기까지 '누가 크냐'는 싸움입니다. 이 경쟁으로 발전도 했지만 그것 때문에 전쟁의 비극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 간에도 '누가 높아지느냐?' 이것 때문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요한과 야고보는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께 청탁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는 자가 하나님나라에서 으뜸 된다'고 하시면서 오늘 본문 28절의 말씀을 결론으로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2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고, 29-34절은 '여리고 성에서 두 소경을 치료하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여리고의 두 소경!▶입니다. /할/  먼저 28절 한 절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보겠습니다.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본문 한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철학'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섬기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 다음 '많은 사람들은 위하여 대속물이 되신 희생의 삶'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섬김의 삶이요, 희생의 삶'입니다. /할/
  본문은 막10:45절에서도 취급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는데 원문에 보면 '많은 사람의'에서 이 '의'라는 말이 '무엇을 대신하여'라는 그런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을 대신한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이 대속물이란 말은 '교환의 개념이 있는 말'입니다. 그 당시의 노예에게 자유를 줄 때에는 우선 노예를 돈을 주고 삽니다. 몸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그 노예 문서는 태워버린 다음에 노예를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할/

  ▶대속물에 대한 성경적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①출21:30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평소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황소를 기르는데 자기 황소가 그 뿔로 다른 사람을 떠받아 죽였을 때 그것은 속죄하고 피 값을 지불할 때 쓰인 말이 '대속 금, 속죄 금'입니다.
  ②가난한 사람이 돈으로 팔려 노예로 끌려갔을 때, 부자 친척 중에서 그를 다시 찾아 나오게 하는 방법이 바로 그 몸값을 지불해야 되는데 그 돈은 가리켜 '대속  금, 대속 물'이라고 합니다.
  ③레25:25절에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전당 잡힌 것, 또 인질로 잡혀간 곳에서 도로 찾아오는데 지불하는 돈을 의미했습니다.
  ④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도로 찾아내는데 지불하는 돈은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류의 죗값은 청산하시기 위해서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속물이 지불된 공개적인 장소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 주, 대속 자'가 되셨습니다. /할/
  여기서 '대속 자, 또 구속자'라는 말은 잃어버렸거나 빼앗겨 버린 사람이나 물건을 대신해서 찾아내는 사람을 의미하고, '대속 물'이란 말은 그 사람이나 물건을 도로 찾아내기 위하여 대신 지불하는 정당한 값을 의미합니다.
  벧전2: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이것은 '아담과 맺은 공의로운 행위계약'입니다. 창2:16-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사망의 값을 자신의 죄 없는 몸으로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물의 죽음을 통하여 지불된 십자가를 가리켜 '대속의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할/
  ▶섬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여기 섬김은 두 가지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는 이웃과 형제를 잘 섬기는 생활입니다. 섬김은 인격적인 섬김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크리스천의 생활은 섬기는 생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생활과 형제와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생활'입니다. 섬김이란 영어로는 '서비스'란 말로, 여기에는 예배란 뜻도 있고, 봉사 혹은 섬긴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그 분이 왜 오셨습니까?
  ①'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의 모습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사건 자체가 기적이고,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빌2:5-11절을 참고로 한번 잃어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자기보다 높은 사람은 섬기는 것을 쉽습니다. 자기보다 권력 있는 사람은 섬기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래에 있는 사람은 섬기는 것도 어렵습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나타납니다.
  ②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우리 삶의 목표로 세워야 합니다. /아멘!/
  ⑴섬기는 생활은 예수님의 제자된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생각으로 살려고 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으뜸이 된다든지 제일이 되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으뜸이 될 때는 분명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섬기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모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⑵섬김의 삶은 주님 앞에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요12: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우리 시대에 '앨버트 슈바이트' 박사를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그 이유는 하인처럼 섬기는 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생명을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받는 자를 위하여 바쳤습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테레사 수녀는 인도 켈커다에서 길거리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자에게 양심과 옷을 주고 그들을 섬겼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써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지금도 그 존경심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섬김의 삶은 하나님께 존귀함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습니다. /아멘!/

  ▶섬김의 원리가 있습니다.
  ①섬김의 높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듯 중심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듯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가까운 사람을 잘 섬깁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 잘 사는 사람을 섬깁니다. 안됩니다. 어려운 사람, 못난 사람을 하나님같이 섬겨야 합니다. 섬김에는 높이가 있습니다.
  ②섬김의 길이가 있습니다. 언제나 섬김의 자세입니다. 평신도 때, 집사 때 섬기는 자세로 있다가 부자가 되면 섬김을 받으려 하면 잘못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이 섬김의 자세가 절대 필요합니다.
  슈바이처에게 아프리카에서 '행복 하느냐?'고 한 기자가 물었을 때 '나는 봉사할 것을 찾았노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섬기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할/
  그러나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순간 마음은 빈곤해지고 불평과 불만에 싸이게 됩니다. 가장 썰렁한 교제는 섬김의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입니다. 원래 집사란 직분은 헬라어원인 '디아코노스'는 '섬기는 자'를 뜻합니다. /할/
  ▶성 프란시스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난한 자를 섬겼습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지나가던 중 보기에도 참혹한 문둥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문둥이가 그렇게 불쌍하고 안타깝게 보였습니다. 그는 마음의 움직임을 받아 말에서 내려 그 문둥이를 껴안았습니다.
  그런데 그 품에 안긴 얼굴을 보니 그 얼굴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프란시스는 섬기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섬기러 오셨고, 우리들을 위해 대속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섬김의 자세로 살아야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아멘!/

 

  ▶29절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데 여리고 성을 지나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팔레스틴 지방의 최고 오래된 성읍 중 하나로 BC 7,000년 경 세워졌습니다.
  위치는 요단강 서쪽 약10Km 예루살렘 동북쪽 약 24Km 위치한 성읍으로 갈릴리지방과의 연결된 도로이며 예루살렘의 관문 역할을 했던 곳으로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시면서 그곳을 통과하고 계십니다.
  수6장을 보면 이 여리고 성이 기도로 무너졌던 성으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이곳을 전초기지로 삼은 곳입니다. 그런데 헤롯대왕 때 이 여리고 성을 다시 신축했는데 당시 팔레스틴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큰 무리가 좇더라' 그 당시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배경을 보면 이때가 유대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 지방에서 수많은 인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할/

 

  ▶30절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소경들이 길가에 앉았다가' 오늘 본문은 두 소경을 고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두 소경을 고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공관 복음에는 소경 바디메오를 고쳐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내용의 구절인 막10:46절을 보면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왜 이렇게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사이에 기록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것은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와 마가의 초점의 차이입니다.
  마태는 숫자적인 측면에 관심을 두어 '두 소경'에 고침을 받았다는 것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거지 바디매오가 더 많이 알려졌고, 바디매오가 다른 소경 친구를 예수님께 인도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바디메오라는 한 인간에 초점을 두고 기록한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와 그의 친구가 소망 없는 우울한 삶을 살던 어느 날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여리고 성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사렛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러잖아도 한번 만나보기를 소원했습니다. 장님이 눈을 뜨고 문둥병이 낫고 귀신이 나가고 바다가 잔잔해지고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에 가슴이 설레고 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할/ 이 설렘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아멘!/
  ▶여기서 소경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소경은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거지라고 했습니다. 소경들의 특징은 가난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놓고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일할 어떤 적당한 직장이 없습니다. 혹 있다 할지라도 몸이 건강한 사람과 경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소경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구걸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당시 소경들은 부정탄다고 해서 죄인시하고 따로 격리 시켰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두 소경의 신앙을 볼 때 이 두 소경의 신앙이 대단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야! 저 사람은 신앙이 참 좋은 분이다'라고 했는데 천만 뜻밖에도 신앙이 없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도무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서 위대한 신앙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당시 두 눈이 멀겋게 뜬 이스라엘 백성들, 즉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폼 잡던 그들이 오히려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전혀 무지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두 눈이 멀어 세상의 다른 것을 볼 수가 없었으나 영의 눈이 떠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봤습니다. /할/
  당시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장로들,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신앙이 없었습니다. 이들 중에 누구 한 사람도 예수님께 칭찬들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저들이 이방인이라고 멸시했던 백부장과 같은 사람을 보면 오히려 신앙이 대단했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사람이 고넬료입니다. 행10:2절에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가' 누구입니까? 고넬료입니다. ▶그를 진단해 보겠습니다.
  ⑴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이란 '좋은 예배 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 자세를 가리켜 경건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웃 앞에서 경건,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 자기 자신과의 경건'을 의미합니다.
  ⑵가정 복음화를 이룬 사람입니다. '온 집안이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⑶백성을 많이 구제한 사람입니다. 구제는 '착한 행실'을 의미하는데 '불쌍히 여기다', '측은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궁핍한 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왔다는 말입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귀족입니다. 지체 높은 권세자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나라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 유대나라, 피 식민지 백성을 구제한 것입니다.
  ⑷기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여기서 우리는 고넬료의 경건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습니다. /할/

 

  ▶본문의 두 소경을 진단해 보겠습니다.
  ①오늘 본문의 두 소경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길가에서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듣고'입니다. 그렇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예수 소식, 복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믿음이 자랍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깨닫습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생각이 넓어집니다. 자주 듣는 사람이 교회의 일도 합니다.
  주께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시키는지 자주 들어야 하고 자주 살펴봐야 합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실 수가 있다, 내 눈을 뜨게 하실 수가 있다는 그런 간절한 신앙이 저들에게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국가의 문제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내 가정의 문제도, 내 사업의 문제도 내 질병의 문제도 해결하실 수 있다는 신앙을 저와 여러분이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이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기도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믿음 있는 자만이 하는 것입니다.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믿음 없이는 기도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적을 산출할 수 있는 힘이 기도의 힘입니다. /믿/ 기도는 몇 천 번 이야기해도 절대로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 /할/
  이 소경은 복된 소식을 잘 듣는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뉴스에 민감합니다. 특히 소문을 통해 먹고사는 사람은 즉 증권투자가들과 부동산 투자꾼들은 세상 돌아가는 뉴스에 민감합니다.
  그런데 생명을 살리는 영생의 뉴스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생의 소식을 전하는 복음뉴스를 들을 때 절대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멘!/
  두 소경에게는 예수님의 소문이 참으로 좋은 복음입니다. 이 소경들은 때와 기회를 잘 포착한 자들입니다.
  ②'주여' 고백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주여'란 당신이 나의 생명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역사의 주인공으로 알았습니다. 신앙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것이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③주님의 긍휼을 원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히 없이는 우리 인생들은 한시도 살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덧입고자 하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이 외침은 보통외침이 아닙니다.
  여기 '외치다'라는 말의 헬라어의 원 뜻은 '비명'을 말하는데 '그 중에서도 고통에 찬 비명을 표현할 때 미친 사람의 고함과 출산 시 임산부의 외침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할/
  ④메시아 신앙을 가졌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이 칭호는 굉장히 중요한 칭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오신다고 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고, 나를 돕고, 나를 구원하고, 나를 치유하시는 분은 다윗의 계보를 통해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 메시아가 오면 하나님 나라가 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이사야는 사35:5이하에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메시아가 오시면 소경의 눈이 열립니다. 귀머거리의 귀가 열립니다. 벙어리의 혀가 노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11장에도 보면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사람을 예수께로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믿었지만 감옥에 있다가 보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보내어 묻습니다. '신이 정말 오실 메시아입니까?'그러자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라'(마11:5).
  이것이 바로 메시아의 증거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소경이 눈을 뜬다. 메시아가 오면 벙어리가 말한다. 메시아가 오시면 귀머거리가 듣는다'. 소경들이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할/

 

  ▶31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신앙생활에 기도생활에 장애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은혜 받으려면 꼭 방해자가 있습니다. 무리들이 꾸짖으며 시끄럽다고 방해를 했지만 두 소경은 그들의 꾸짖음에도 멸시함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신앙의 길로 바싹 다가섰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것은 순리대로 풀 수가 있고, 양보도 있고, 충고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만은 절대로 타협하지 마십시오, 타협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좇아가면 지금은 망할 것 같으나 하나님은 건지십니다. /할/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한 사람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소경 거지인 그를 동정하기는커녕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세상 사람들의 박수갈채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신앙의 결단은 고독 속에 이루어집니다. /아멘!/
  기독교 철학자 '케엘케골'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결단을 가리켜 이 일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하는 외톨이의 결단'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단에는 아무런 동조자도 없습니다.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신앙의 길에서는 동반자가 아닙니다. 적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결단은 언제나 고독한 결단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길에는 여러 가지 난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난관은 뚫어야 합니다. 삭개오는 뽕나무가 난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난관을 이용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7배나 뜨거운 풀무 불 속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이기고 승리합니다.
  시42:11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할/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소리 질렀다는 것은 목청을 돋구었다는 뜻입니다. 흔히 우리는 소리 지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체면 상하는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를 내는 것은 교양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부르짖는다'는 말이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시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또 렘33:3절에 '너희는 네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소리 지르고 부르짖는 기도를 말합니다. /아멘!/
  ▶대게 사람들은 세 가지 경우에 소리를 지릅니다.
  ⑴공포의 순간에 소리를 지릅니다. 그땐 누가 소리를 지르라고 하지 않아도 지릅니다.
  ⑵아프고 절망할 때 사람들은 신음을 합니다.
  ⑶기쁘고 즐거울 때 사람들은 큰 소리로 환호합니다.
  우리는 큰 소리로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르짖어 소리 지르는 것은 기도와 찬송뿐입니다. 이 소경은 방해가 있을 때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거기서 끝나면 주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석학자 바클레이는 '무엇으로도 예수님을 만나고자하는 두 소경의 고함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소리는 입술의 소리가 아니고, 심장에서 나오는 소리요, 영혼의 고함 소리였다'고 했습니다.
  이들 두 소경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이번 기회가 내 일생에 있어서 마지막 기회입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알았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내 병을 고치리라, 내 눈을 뜨게 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우리도 그런 정도의 배짱은 있어야 합니다.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의 기도가 바로 그런 기도입니다.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아니하시면 나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끈질긴 인내의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인내와 배짱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기도에 대하여 렘29:12-13절에서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할/
  여러분!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바로 지금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불쌍히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자비와 긍휼'하심이 없다면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한 사람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할/

 

  ▶32-33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앞에서 두 소경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자신을 주님께 맡겼더니 주님께서 '내가 무엇을 불쌍히 여길꼬?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서슴지 않고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형편을 몰라서 물으신 것입니까?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왜 물었습니까? 그들의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믿/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환경도, 조건도, 그리고 우리의 요구를 다 아시지만 우리의 믿음의 요구를 시험해 보십니다.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당신은 눈을 뜨게 하실 분인 것을 내가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우리를 축복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이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축복을 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어찌 우리가 축복을 원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할/

 

  ▶34절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민망히 여기사' 불쌍히 여기셨다는 원문입니다. 주님이 한번 만져주시니 그들의 두 눈이 반짝 떠졌습니다. /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희가 예수님을 좇으니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고 고침 받은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그들의 방향이 바뀌어졌습니다.
  눅5:11절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하고 실패자의 모습으로 새벽을 맞아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오셔서 베드로의 배에서 예배를 드리신 다음 그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베드로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순종했더니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리고 주께서 베드로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할/ 
  베드로는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버리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여기서 '좇는다'는 말은 '닮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다 혹은 잘못 믿는다'고 할 때 표준을 어디에 두겠습니까?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느냐'는 것이 신앙의 표준입니다.
  베드로가 저렇게 위대해지고 훌륭해진 것은 예수님을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을 많이 닮을수록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써도 이런 사람을 쓰시는 것이고, 이런 사람이 또한 큰 일꾼이 됩니다. /아멘!/
  오늘 본문의 두 소경은 여리고에서 왔습니다. 다시 여리고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리고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가시는 예수님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한다면 예수님만을 좇아가야 합니다. 다시 세상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좇아 우리의 삶의 방향을 옮겨야 합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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