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97강)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 (마 21:12-17)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39

(제97강)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 (마 21:12-17)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오늘 우리가 앉아 예배드리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회중 한 사람, 한사람이 바로 교회입니다.
  고전3: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묻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일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모신 우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먼저 가장 깨끗하게 청소해야 될 부분은 우리들 자신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종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종교는 마음공부입니다, 신앙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마음이 깨끗해 져서 심령이 새로워질 때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우리들에게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5: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을 깨끗케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누가 지켜야 합니까?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잠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아멘!/
  선한 마음을 지켜야 하고 복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마다 편견이 있고 자기 기준의 안경이 있습니다. 푸른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모든 것이 푸르게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부정적이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고 우리의 마음이 긍정적이면 모든 것이 소망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행복도, 불행도, 마음의 자세에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먹고 하나님을 섬기느냐에 따라 축복도, 은혜도, 받을 수 있고 못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행동의 원천이 됩니다.
  백두산 꼭대기에 천지란 연못이 있습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두만강이고,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압록강이고 북쪽으로 흐르는 강이 송화강입니다.
  이 강들의 근원이 백두산천지인 것처럼 우리들의 삶의 근원이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열쇠가 됩니다. 마음이 곧은 사람은 곧은 인생을 살고, 삐뚤어진 사람은 삐뚤어진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 마음이 즐거운 사람은 즐거운 인생을 살게 되고 슬픈 사람은 슬픈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 봅시다. 마음이 부지런하면 부지런한 인생을 살게 되고 그러나 마음이 게으르면 게으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 불평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불평하는 인생을 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감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또 구약의 예레미야는 '너희의 마음의 밭을 개간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게 씻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할/ ◀제목 소개!▶

 

  마21장 본문에 보면 세 가지의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1-11절까지는 우리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만 왕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무리들을 인하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성결케 하신 사건이요, 그 다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므로 말라죽게 한 사건입니다. 이런 사건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표적을 영어로 sign(사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주변에서도 쉽게 이런 표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네거리에 서 있는 신호등이 표적입니다. 파란 불은 건너가도 좋다는 표적이고, 또 빨간 불은 건너가서는 안 된다는 표적이고, 노란 불은 이제 곧 빨간 불이 나오니 건너가지 말라는 표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표적은 '사건과 기적 혹은 이적'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전을 깨끗케 하신 표적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 영적으로 가리켜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할/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가면서 주님의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12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 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본문은 고난주간 첫째 날인 월요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 가사'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헤롯 왕궁에 가신 것이 아니라 맨 먼저 성전에 가셨습니다. 왜 성전에 가셨습니까? 성전은 예배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처소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을 계시지만, 예수님은 특별히 선택된 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신앙이 바로 성전 중심의 신앙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눅2:4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12살 때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가신 일이 있습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절기를 다 마치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이 다라 오는 줄 알고 그냥 하룻길을 갔는데, 뒤돌아보니 예수가 안보입니다. 그때서야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애타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여기 저기 찾다가 사흘 후에야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이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 /할/
  어렸을 때부터 성전을 사모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성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아멘!/
  창28:20절 이하에 보면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앞에서 서원하기를 세 가지로 했습니다. ▶창28:21-22절을 쉽게 의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⑴나는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절대로 다른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절대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해야 합니다.
  ⑵하나님 앞에 지금 제단 쌓는 이 기둥이 앞으로 성전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성전을 지어 바쳐서 그 성전에서 신앙중심으로 살겠다는 서원입니다.
  ⑶온전한 11조 생활을 철저히 하겠습니다. 야곱은 이 서원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받은 복은 두 가지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에 기름진 복'입니다. 여러분, 성전 중심의 삶이 복을 받습니다. 대상13:14절에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할/
  그 다음 본문 12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를 보게 됩니다. 성전이 시장 터같이 된 것에 분노입니다. 교회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분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 바꾸는 사람들,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21장 이전까지는 한 번도 이런 모습이 안 나옵니다. 사탄을 꾸짖으신 적도 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회칠한 무덤 같다고 저주하는 사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을 내신 일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분노를 '거룩한 분노'라고 합니다. 의는 이루려는 분노입니다. 우리가 내는 혈기나 분노와는 다른 분노입니다. 정결하고 거룩하고 깨끗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이 시장 터로 변한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하신 사건이 오늘 본문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 나옵니다. 요2:13-16절에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성결운동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도 있었고, 오늘 본문의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정결케 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당시의 배경을 한번 조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성막을 배웠습니다. 성막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됩니다. '성전마당, 성소, 지성소'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성전 마당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으며, 여인의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뜰'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곳은 상당히 복잡하고 분주한 곳입니다. 특히 유월절에는 세계 각 국에서 모여든 예배 자들로 말미암아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 이방인의 뜰에서 돈을 바꾸고 제물을 매매하는 시장 터가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반 세겔을 성전세로 유월절 안에 바쳐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유대 온 마음에는 유월절 한 달 전에 돈을 바꾸기 위한 임시 출장소가 세워져 그곳에서 성전 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간이 지나면 성전에 직접 와서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타국에서 모여든 많은 유대인의 순례자들은 직접 성전에 와서 돈을 납부해야 됩니다.
  그 당시는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일반 사회에서는 로마사람의 돈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는 로마의 돈을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나 이방인들이 아무리 정치적으로 힘이 있었다고 해도 종교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만든 것입니다. 세겔이라고 불리는 돈만 성전 안에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오면 로마 돈을 세겔로 바꿔주는 환전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돈을 바꾸는 대가로 두펜스 상당의 구전을 청구하는데 만일 화폐가 반 세겔보다 큰 경우에는 살 돈을 거슬려주는 대가로 두 펜스를 더 첨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반세겔과 4펜스를 내야하는데 여기서 반 세겔은 장년의 하루 품삯이고 4펜스는 반나절 품삯 정도입니다.
  이 수수료는 골분이라고 하는데 그 돈은 환전상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 상납을 하게 됩니다. /이해가 어렵습니까?/할/
  예수님은 유월절 행사가 남용되고 종교지도자들의 착취가 심한 것을 보시고 분노하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비둘기파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든지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부자는 소를, 보통사람은 양을,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나 고운 가루를 드렸습니다. 특히 비둘기는 여인의 출산 후 청결을 지키기 위해서 드리는 제물이고, 또 문둥병자가 완치된 것을 입증하고 허락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제물이 비둘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제물을 검사하는 검사관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모의해서 밖에서 사오는 제물을 반드시 불합격시키고 성전 안에 있는 매점에서만 사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 밖에서 비둘기 한 쌍에 만 원 정도라면 성전 안에서는 그보다 15배나 더 한 15만 원 정도를 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횡포는 큰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당시 정치나 종교가 썩어져 버린 유대사회를 성전 안에서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바로 이러한 비양심적인 착취, 즉 가난하고 불쌍한 순례자들을 억울하게 만드는 행위를 보신 예수님께서 의분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쫓았고, 환전상의 책상을 엎으신 것입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바로 심판주가 되심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부정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냥 두시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할/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분노하심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①예수님은 종교의 이름을 빙자하여 착취하는 자들을 향하여 분노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장사하는 집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교회에서는 드리며 봉사하는 곳입니다.
  ②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을 향하여 분노하셨습니다. 당시 비록 사고 파는 행위가 정당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행위 때문에 거룩한 예배가 방해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경건한 예배를 드려야겠거니와 다른 사람의 예배를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③주님은 하나님의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임을 다시 상기시켜주셨습니다.

 

  ▶13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사56:7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여기서 '내 집'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지 정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성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장사하는 곳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이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그러니까 거룩한 성전이 사기꾼이 집합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강도의 굴혈'이란 말은, 강도들이 사는 굴로써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성전을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지역으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할/

 

  ▶하나님의 성전은 어떤 집입니까?
  ①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집입니다.
  교회의 최고의 헌신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떠한 것이라도 예배를 통하여 주십니다. 베드로는 그의 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밤에 만선에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예배 그 행위자체가 복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요4: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입니까? 원어의 뜻은 '엎드린다. 경배한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한문의 뜻은 '하나님 앞에 예하고 무릎 꿇어 경배한다는 뜻이 예배'라고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예배를 섬기는 것으로 생각해서 영어의 섬긴다는 단어 Service(서비스)를 사용합니다.
  구약의 제사를 생각해 보면 거룩한 제사장의 예복과 제물과 거룩한 예식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믿음이 중심이요, 사랑과 존경심이 중심이 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바른 예배'입니다. /믿/
  ▶예배에는 몇 가지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을 묶어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만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흐르는 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⑴우리들의 예배는 감사가 필수 조건입니다. 감사 없는 기도, 감사 없는 찬송, 감사 없는 헌금, 이런 것들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감사가 빠지면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⑵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예배를 축제의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시66:1절에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할/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기쁨을 가지고 드려야 합니다. 구원받은 기쁨, 하나님 안에서의 새 마음! 이런 기쁨이 찬송으로 기도로 예배로 이어져야 합니다.
  ⑶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고 드리는 '드림'입니다. '우리 예배 보러 가자'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전부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을 드리고, 기도로 드리고, 헌금으로, 내 몸도, 마음도 다 드리는 것입니다.
  수22:5절에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혈기 죽이고, 고집 죽이고, 변덕 죽이고, 아집과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께 깨끗한 양심으로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디모데는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딤후1:3절에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아멘!/
  ⑷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 이 마음이 없으면 온전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멘!/
  여러분,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축복도, 은사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아멘!/
  ⑸주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성일도 '온전히 성수하는 것', 축복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온전한 주일을 지키는 자에게 네 가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건강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의 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의 업이란 '빈손 들고 멀리 하란으로 도망갔지만 돌아올 때는 엄청난 부를 가지고 온 것'을 가리킵니다.
  ▶연합해서 하나가 되는 복을 주시고,
  ▶성결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멘!/
  ⑹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거룩한 전입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122:6-7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⑺준비하는 마음이 귀합니다. 예배를 위하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준비한 그릇대로 복을 주십니다. 준비한 만큼 은혜를 주십니다. 준비는 정성으로 해야 합니다. 입고 나갈 옷도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 찬송, 헌금, 모두 준비해야 합니다.
  ②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교회는 반드시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도는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역자는 입으로만 만인제사장을 외칠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기도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불길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기도소리가 끊어지지 않을 때 교회는 교회 되고, 성도는 성도 되고, 목회자는 목회자 되며, 능력 있는 교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주님을 시원하게 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할/
  기도가 있는 곳에 악한 영은 물러가고 거룩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 세 제자는 황홀한 경험을 하지만 산하에 아홉 제자는 무력함에 빠져 사단을 제어하지 못한 채 큰 봉변만 당하고 있을 때 주님이 오셔서 사단을 내어 쫓아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왜 안되나요? 우리가 무력한 까닭이 무엇인가요?' 그러자 주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명백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성도가 강한 성도입니다. 기도하는 성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메튜헨리'는 '기도 없이 사는 자들은 하나님 없이 세상을 사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바운즈'는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능력 있는 성도, 능력 있는 교회,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교회가 되고 싶다면 오늘 우리 모두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성도는 기도의 향기를 피워야 합니다. 기도하는 심령은 삽니다. 하나님의 집은 병들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와서 위로 받는 곳이요, 치료받는 곳이요,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왜 성전에서 기도해야 합니까? 왕상8:11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했고, 13절을 보면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라고 했고, 16, 18, 20절을 보면 '내 이름을 둘만한 집'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집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며,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자기가 사는 집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해도 성전에 올라가 했고, 성전에 올라갈 형편이 못되면 성전을 바라보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다니엘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유대나라가 망할 때 포로로 잡혀간 젊은이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받아 포로 출신으로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을 빼앗긴 바벨론 조정 대신들의 시기와 질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단6:10절을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야말로 목숨걸고 죽을 각오로 성전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시는 곳, 즉 하나님의 집입니다. 주님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왕상8:29절을 보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했고, 33-34절을 보면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라고 했고, 42-43절을 보면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라고 했습니다. 44-45절도, 48-49절도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들으시고'라고 했습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의 신앙은 성전에서 기도하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전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 그 이름을 두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성전은 중요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에서 무엇을 구했습니까? 왕상8:34절을 보면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했고, 35-36절을 보면 '비가오지 않아 땅이 메마를 때 비를 내리시옵소서'라고 했고, 37-39절을 보면 '기근과 재앙이 계속될 때 기도하거든 응답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4-49절을 보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에 져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이기게 해주시고 돌아오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43절의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라는 말씀과 52절의 '주께 부르짖는 대로 들으시옵소서'라는 말씀입니다. 천재지변도, 재앙도, 전쟁도, 고통도, 질병도 기도하면 들으시고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 솔로몬의 신앙이었습니다.
  ③말씀을 증거하며 성찬예식을 드리는 곳입니다.
  교회의 기둥은 말씀선포와 성찬입니다. 성찬은 최고의 설교입니다.
  ④성도들이 교제하는 집입니다.
  교회는 같은 운명을 지닌 공동체입니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는 곳입니다. 성도들의 진정한 교제가 없다면 진정한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교회의 큰 두 기둥은 봉사와 교제(코이노니아)입니다.
  ⑤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곳입니다.
  주님은 기다리는 집이기에 우리는 이 집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 지 알 수 없으나 기도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할/
  이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곳임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14절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예수님은 그토록 분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소경과 저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니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당시 성전에는 많은 병든 자들과 이방인들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잃어버린 영혼, 절망하는 영혼, 방황하는 영혼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루만져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안수해 주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그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어디에서? 교회에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곳이고 죽어 가는 영혼을 치료하는 곳'입니다. /할/ 그뿐만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무너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곳입니다. 병들어 절망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곳입니다.
  기도하면 오늘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날도 기도하면 성령께서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오늘날도 기도하면 우리의 삶 속에 가로막혀 있는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아멘!/
  15절에 보면 예수님은 교회에는 찬송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5-16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성전에서 어린아이들이 소리를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찬양을 기뻐 받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찬양하라고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사43: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또 시66:2절에 보면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할/ 바울은 히13:15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고전14:15절에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습니다.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해야 합니다. /아멘!/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행16:25절에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할/


  ▶오늘 본문 속에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①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이상하게 보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했기에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또 돈 푼 있는 사람에게는 야단을 치시고 형편없이 천한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고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②어린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양하는 소리를 듣고 분을 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이 찬송을 부푼 것은 주님이 누구인가를 깨달은 자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에게만 부르는 칭호입니다. 이 어린 아이들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고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메시아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영적으로 무지해서 예수를 메시아로 보지 못하고 사사건건 이상하게 보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분하여 예수께 '저희들이 하는 말을 듣느뇨?' 힐문할 때 예수님께서 '그렇다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로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은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시8:2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통하여 구약 예언이 이루어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8:2절을 보십시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할/

 

  ▶17절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쯤 되는 촌인데 그곳에는 나사로와 그의 누이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는 동네로써 '괴로움의 집'이란 뜻을 지녔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 보다 좋은 곳도 많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곳에서 '외로운 자, 고통 받은 자'들과 함께 하시며 쉬셨다가 다음 날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아마도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서 쉬시지 않았는가' 학자들은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가장 처움 하신 일이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사건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까?
  고전3:16-17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눈에 보이는 이런 건물도 성전입니다. 그러나 우리 몸도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성전 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몸은 바로 성전이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라는 것을 명심하시고 항상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더렵혀졌을 때, 우리 주님은 채찍을 드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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