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강) 예수! 예루살렘 입성! (마 21:1-11)
미국 애리조나 선밸리(Sun Valley)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여기는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모여서 사는 은퇴 촌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시내에 어울려 사는 사람들보다 치매발병률이 더 높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나왔습니다.
'이시형'박사가 조사하러 그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정말 지상낙원이었습니다. 55세 이하는 입주 금지입니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팔짱을 끼고 데이트하는 모습도 없습니다. 노점상도 없습니다. 길거리 벤치에 누워 자는 거지도 없습니다. 자동차도 노인들 놀라며 안 된다며 15마일 이하로 가야 합니다. 걸어가는 속도입니다. 모든 시설이 완벽하였습니다. 최신 의료시설에 최고 의사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가 없었습니다. '스트레스가 없었습니다. 걱정이 없었습니다.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치매발병률이 높은 이유라고 밝혀졌습니다. 문제가 있고, 문제와 싸우며 스트레스를 받으며 스트레스를 이기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병이 안 생기게 하는 원인임이 밝혀졌습니다.
최근에 뉴스를 보니 애리조나 지상낙원에 사는 사람들이 다시 유턴(U-Turn)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다시 옛날 살던 마을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스트레스 없는 세상이라는 곳에서 살기 싫다는 것입니다. 부딪치며, 그렇게 뒹굴며, 갈등하면서, 고뇌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생활입니다. /아멘!/ ◀제목 소개!▶
본문은 사복음서(막11:1-11, 눅19:29-44, 요12:12-19)에 다 소개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왕의 대관식'라고 주정학자들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만 왕의 왕이십니다. 한 나라의 왕이 즉위할 때도 온 나라가 떠들썩한 잔치를 베풉니다.
대관식이란 왕의 자리에 오르는 의식 중에서도 가장 극치의 장면으로써 왕에게 왕관을 씌워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양에서는 만조백관이 늘어선 앞에서 왕은 무릎을 꿇고 그 앞에서 추기경이나 대주교가 왕관을 씌워준다고 합니다.
이때 모든 악기가 울려 퍼지고 만조백관의 만세소리에 따라 밖에 있는 백성들은 함께 만세를 부르며 축하를 합니다. 지금까지 제일 화려한 왕의 대관식은 뭐니뭐니 해도 1838년에 있었던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입니다.
그녀는 309캐럿 자리의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루비와 사파이어로 장식한 왕관을 썼으며 그녀가 든 홀은 516.5캐럿 자리의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대관식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왕관도 만조백관도 군악대도 호위병도 없습니다. 다만 나귀새끼를 타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33년의 생애를 사시고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은 예수님의 33년의 생애를 마무리하는 그 시점에서 있었던 그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인 지금,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가까이 왔을 때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을 하셔서 두 제자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나귀와 함께 있는 것을 보거든 풀어 나에게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죽음을 위한 입성이요, 십자가를 지기 위한 입성이요, 그분이 인류의 메시아요, 왕임을 선포하는 입성입니다. /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것은 개선장군이 된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맞이하러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마20:18절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한마디로 말하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간다는 것입니다. 요12: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 옥합을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립니다.
이 사건은 목격한 가롯유다가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이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 그들이 있으면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고 책망을 합니다.
굉장히 신앙이 좋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만 두어라,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그가 준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엄청난 예배입니다.
이 여자가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배의 본질을 설명하는 제일 중요한 본문입니다. 예배는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믿/ 예수님은 많은 사람에 의해서 예배를 받으시지 아니하시고 신앙이 깊은 영적으로 깨끗한 한 여인으로부터 진정한 '죽음의 예배, 십자가의 예배'를 받으신 것입니다. /할/
▶1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벳바게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는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독립기념일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30Km이내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와서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요세푸스 같은 역사가는 당시 예루살렘에 모여든 인파가 최소한 백만 명은 훨씬 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절기 때마다 그처럼 예루살렘에 운집한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해방의 감격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바로의 폭정 밑에서 신음하던 조상들은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 하던 날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광야 40년의 세월 동안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또 만나와 메추라기를 또 바위에서 생수를 먹여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보호하심은 영원히 잊지 말고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②유대인들의 예배정신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성산 혹은 시온산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야말로 정치, 종교, 문화, 경제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의 중심지로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려면 예루살렘에 가서 드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예배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감란 산'은 해발 약 800미터에 위치한 산으로 네 개의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룬답니다. 감란산은 올리브나무가 많아서 올리브 산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감람산에 올라가면 동쪽으로는 요단계곡과 사해바다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유대광야가보이고 그리고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의 전경이 보인답니다. 감람산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산이요, 마24:3절에 보면,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장소입니다.
'벳바게'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한 마을입니다.
'두 제자를 보내시며' 여기서 두 제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으로 보는 사람과 야고보와 요한으로 보는 사람, 혹은 두 눈은 고침 받고 예수님을 따랐던 여리고의 두 소경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할/
▶2절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전지 성을 발견합니다. 저쪽에 보이는 나귀를 보시며 끌고 오너라 하신 것이 아니라 마을로 들어가면 나귀와 나귀새끼가 있을 테니 풀어 끌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때 두 제자가 '예!'하고 마을로 들어간 것도 주님의 전지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나귀를 가져오라고 하셨을까요?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보통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행차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막11:2절을 보면 이 나귀는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나귀는 '당나귀'를 말하는데 제주도의 조랑말보다도 훨씬 등치가 작은 말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①말은 평원을 달리고 전쟁터를 달리는 짐승이라면 나귀는 평화를 상징한 짐승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참으로 '평화의 왕'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써 사랑으로 세계로 지배하십니다.
그래서 눅2:14절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는 천사들이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할/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도 눅19:38절에 보면, 사람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평화는 히브리말로 '살롬'인데 '안전하다, 완성하다, 보답하다'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평화, 평강, 화평, 평안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헬라어로는 '결합하다'는 뜻이 있는데 평화란 원래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정상적인 관계가 되어 있을 때 이루어지는 행복을 말합니다. /아멘!/
②주님께서 타신 것은 말이 아니라 나귀새끼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라고 했습니다. 새끼는 나약함, 무력함, 무능력을 의미하고 아무도 타보지 않았다는 것은 순결과 무경험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말이나 약대를 타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귀새끼 그것도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주님이 쓰시는 사람은 세상 적인 온갖 경험과 지식을 다 가지고 날뛰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은 나귀새끼처럼 힘이 없고 경험이 없고 무능력한 것 같지만 성결한 사람, 깨끗한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시고 부족한 것을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아멘!/
주님은 자신이 최고라고 하는 사람, 쓰지도 않고 무능하다고 믿는 사람을 쓰십니다. 완벽하다고 믿는 사람보다 허점이 많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그런 사람을 쓰십니다.
그 나귀새끼는 주님을 위해 준비된 나귀였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부르기만 기다리고 있던 나귀입니다. 그 나귀는 이런 나귀였습니다.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할/
③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성경에 예언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슥9: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할/
④참된 왕의 모습이 이 어린 나귀 속에 담겨 있습니다.
⑴나귀는 누구도 이끌 수 있고, 누구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나귀는 조그만 어린이들도, 노인들도, 여자들도 모두 끌고 다닐 수 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은 왕이신데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누구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왕이십니다. 죄인이든, 병든 자이든, 버림받은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어린아이까지라도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할/ 이것이 축복입니다.
⑵나귀는 짐을 잘 집니다. 무거운 짐을 싣고 끌고 가는 인내가 한이 없는 짐승이 나귀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끌고 가십니다.
저의 짐을, 여러분의 짐을, 우리 죄악의 짐을, 무거운 걱정 근심의 짐을 홀로 지시고 대신하여 끌어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인생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할/
⑶나귀는 순종을 잘하는 동물입니다. 주인에게 죽기까지 복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내어놓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아버지의 뜻과 말씀을 좇아 죽기까지 복종하신 참으로 나귀와 같은 삶을 살아가신 것입니다.
⑷어린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막'과 '눅'보면 마태복음에 없는 사실이 하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나귀는 한번도 타 보지 않은 나귀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순수하고 순결한 새끼 나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심기 위해 오셨습니다.
⑸나귀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힘이 있지만 언제나 약한 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겸손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라도 사랑하고, 누구라도 이해하며, 누구라도 용서하시는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만 못나도, 조금만 못 배워도, 조금만 가난한 사람을 만나도 얼마나 있는 척하고 군림하며 남을 힘들고 피곤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만 왕의 왕이신 데도 불구하고 겸손의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할/
▶이 나귀새끼는 어떤 영광을 받았습니까?
①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본래 동물은 양이나 염소나 소처럼 번제로 사용되어진 것만 제외하고는 예루살렘에 못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귀새끼는 예수님을 태웠다고 하는 단 한 가지의 이유 때문에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귀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②성경에 기록되어지는 귀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미국의 오사마 대통령이나 전 클린턴 대통령, 러시아의 옐친, 우리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 지금 유엔사무총장이신 반기문씨 등, 이런 사람들이 세계의 모든 정치 경계를 주름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잘 것 없고 볼품 없는 나귀새끼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주님께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등에 모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3절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 말씀을 보면 나귀 주인이 두말없이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까 즉시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명인의 헌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①이름도 없는 충성 자입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사복음서가 다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름이 소개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름 없는 봉사자,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알리기를 좋아합니다. 지금은 자기 PR시대라고 드러내고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대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 사람입니다.
②빛도 없는 충성 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째든 영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하는 이름과 명예와 빛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순교만 해도 영광인데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는 장로만 되어도 영광인데 예수님의 12사도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굉장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주인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③보상도 없는 봉사자입니다. 농촌에 소 한 마리가 큰 재산입니다. 이 나귀도 분명히 큰 재산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쓰시겠다하니 선 듯 내 주었습니다. 그 나귀가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보상을 먼저 계산합니다. 이것이 가면 얼마나 올 것인가? 그런데 이 사람은 아무 계산도 없이 충성을 했습니다.
④무조건적인 충성 자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하자 아무 말 없이 풀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유가 많습니다. 시간이 없고, 형편이 안 되고, 마음이 안 듣고, 적성이 안 맞고 이 핑계, 저 핑계가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쓰시겠다 하시면 무조건적 내 놓아야 합니다. 시간도, 생명도, 물질도, 재물도, 그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도맡아 책임져 주십니다.
⑤참 기쁨을 아는 충성 자입니다. 여러분 참 기쁨은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때입니다.
이런 무명의 헌신 자 때문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이루어졌고, 인류의 구원의 문제의 핵심인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할/
⑥올바른 청지기의 충성 자입니다. 이 나귀 주인을 보십시오.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하니까 바로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그대로 내어놓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올바른 청지기의 자세가 아닙니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바로 주님의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생명, 물질, 명예, 지위도 나의 모든 소유가 천지 만물을 지으신 바로 하나님의 것이다. 나는 단지 이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안다면 우리는 바로 오늘 이 나귀 새끼를 순순히 내어 준 이름 없는 주인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 자신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 생명, 내 건강, 내 물질, 내 지위와 모든 것이 내 것인지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취하시면, 오늘이라도 나를 데려가시면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상을 떠나야만 되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나의 것이라는 소유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 앞에 청지기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믿/
여러분, 건강하다고 교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건강하면서 주님 일을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그 건강을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물질 하루아침에 다 없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위나 권세나 명예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도 하루아침에 다 거두어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도 나의 물질도 나의 권세도 모든 것이 주의 것이니 주님이 원하시면 내가 주님께 드립니다'라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것이 바른 청지기 적인 자세요 정신입니다. /할/
여기서 '주가 쓰시겠다'는 말은 헬라어로 '크레이아'라는 말로 이 말은 '필요 불가결한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쓰려고 택했노라, 내가 너를 쓰려고 불렀노라, 내가 너를 쓰려고 죄에서 구속했노라'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4-5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슥9: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그러니까 나귀를 가지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소 한 마리 가지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사업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연히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재수와 상관이 없고 운명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입니다. 나를 망하게 하실 것도, 나를 부하게 하실 것도 나를 건강하게 하신 것도 나를 병들게 하신 것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입니다.
나를 망하게 하신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나를 병들게 하신 하나님이 다시 건강하게 고쳐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십니다. 내 사업이 잘 되었다하면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할/
본문의 나귀 주인은 슥9:9절의 예언의 응답을 이룬 사람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새끼 나귀를 어머 나귀와 같이 데리고 왔습니다. 다음 어떻게 했습니까?
▶6-8절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여기서 우리는 바른 헌신을 배우게 됩니다. 먼저 바른 헌신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의 명한대로 하여' 당시 상황으로 봐서 제자들이 망설일 수도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나귀주인에게 '주가 쓰시겠다'고 나귀를 달라고 하면 누가 주겠습니까? 이런 의심은 불안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명하신대로 행하니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생각대로' 해야 합니다. /할/ 그 다음 예수님이 그 나귀새끼를 위해 앉으셔야 되는데 안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서 나귀의 안장 위에 깔아 드렸습니다. 이것이 봉사요, 이것이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수에 넘게 헌신하고 봉사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주님이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쇼가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내게 겉옷 밖에 없으면 예수님께 겉옷을 깔아 드리십시오, 그것이 사랑이요, 봉사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8절에 보니 제자들이 옷을 벗어 나귀 새끼 위에 얹는 것을 보고 그 옆에 있던 무리들도 옷을 다 벗어 길에 깔았습니다. 또 길가에 있는 종려나무를 꺾어서 길에 깔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봉사의 본을 보인 제자들을 봅니다. 교회에 중직들이 봉사에 본을 보여야 합니다. 성도들은 목사님 신앙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중직들의 신앙을 보고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중식들의 사명이 큽니다. 하나님 앞에 똑바로 행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책임져 주십니다. /아멘!/
그 당시 옷은 그들의 신분의 계급장이었습니다. 역사는 우리나라도 양반은 색깔이 좋은 비단옷을 입었지만 상인들은 흰 무명옷만 많이 입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거지들은 국가에서 주는 겉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것은 입어야 구걸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겉옷은 일종의 구걸면허증과 같습니다.
또 이 겉옷은 그들이 잠잘 때 담요처럼 깔아 기도하고 의복처럼 젓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겉옷을 길가에 깔은 것입니다. 그들의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겉옷을 길에 편 것은 존경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지금도 외국의 국왕이나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올 때에는 공항에 붉은 카펫을 깔아서 영접을 합니다. 바로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복자가 말 타고 올 때에 허리 굽혀서 절하는 것은 진정한 존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 겉옷을 펴는 것은 진정한 존경입니다. 억지로 동원된 무리도 아니고 강요에 의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누가 권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겉옷을 벗어서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할/
②겉옷을 길에 편 것은 정중한 예의를 표한 것입니다. 만 왕의 왕이시며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이와 같은 예의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께 온갖 예의를 다하여야 합니다.
겉옷은 계급장과 같습니다. 자신의 체면의 옷입니다. 나의 옛 사람의 옷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벗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사장노릇 하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못 태웁니다. 우리가 참으로 정중한 예의를 갖춰 주님을 태우려면 계급장을 떼야합니다. 체면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옛날 이승만 대통령은 정동 감리교회에 나왔을 때 목사님이 '이 앞에 와서 앉으시지요'라고 했을 때, 거절하면서 '저는 여기 대통령으로서 온 것이 아니라 신자로서 왔습니다' 바로 그런 자세 없이는 안됩니다.
③겉옷을 길에 편 것은 최상의 것을 드리는 표현도 됩니다. 우리 주님께는 항상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신앙도 최상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아멘!/
▶9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 당시 유월절 행사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들이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라'
'호산나' 이 말은 '구원하소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소서'라는 말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만세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 날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향해 나뭇가지를 흔들며 불렀던 만세는 '메시아, 구원의 왕을 향한 만세이고 찬양'입니다. /할/
헨델의 메시아 곡은 지금도 유명합니다. 헨델의 메시아 곡이 처음으로 영국 황실에 연주되었을 때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할렐루야!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세'가 연주될 때 그 자리에 있던 국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했답니다. 그 후부터 이 메시아 곡이 연주될 때는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주경학자 베이커는 '호산나'를 '거룩한 만세'라고 주석을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단순히 왕의 후손, 즉 왕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대망 해 온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 왕의 왕으로 메시아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을 찬양했던 그들의 입술이 며칠 뒤에는 갑자기 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저주의 음성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당하셔야 할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들의 환호 소리는 그리스도가 자신들을 해방시킬 정치적인 구원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저주의 함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들은 극과 극의 행동을 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이해관계에 따라 변합니다. 감정에 따라 변하고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그래서 사실 국민 대중의 여론이라는 것은 정확하고 객관적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이 조석변개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양은 우리의 현실에 바탕을 두지 않는 '합당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 합당한 찬양은 어떤 찬양인가?
⑴왕으로 오시는 주를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나오시는 주님은 왕으로 오십니다. 우리 인생의 왕좌에 앉으셔서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시고자 오시는 것입니다. /할/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 우리 인생의 왕좌를 온전히 내어 드리고 그분의 지배 아래 우리의 모든 의지를 굴복시키시기 바랍니다. /아멘!/
⑵구주로 오시는 주를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나오시는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분밖에는 구원자가 없으며, 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고자 하면 그 분을 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 밖에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아멘!/
⑶종으로 오기는 주를 찬양해야 합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는 세속적인 지배자들과 달리 섬기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이에 대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생활이 주님을 본받는 생활이요, 거룩함의 정도는 섬김의 정도와 비례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10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환영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 소동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마2장에서 동방박사가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했을 때, 그 때도 온 성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누가 소동했습니까?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들이 뜻하지 않은 왕의 출현으로 깜짝 놀라 마음에 동요가 되었습니다.
'이는 누구뇨?' 이 말은 예수가 실제로 예루살렘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큰 소동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이 11절에 나옵니다.
▶11절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여기 '선지자'는 신18:15절의 모세의 예언에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라는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허락하신 선지자 즉 예수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왕권 선지자 권, 제사장 권, 여기서는 특별히 왕권을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보다 예수님을 바로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 때문에 그 성이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예수님 때문에 깜짝 놀란 사건들이 많이 터져 나옵니다. /아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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