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99강) 두 아들의 비유! (마 21:23-3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41

(제99강)           두 아들의 비유! (마 21:23-32)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을 받습니다.
  마21:23절 이하에서 22장 사이에 보면 4번이나 도전을 합니다.
  ①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질문을 했습니다.
  ②세금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공격합니다.
  ③부활에 관한 질문입니다.
  ④첫 계명에 관한 질문을 함으로써 끊임없이 예수님을 올무에 씌우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주간 화요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 즉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과 장로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런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와서 '당신이 지금 성전 안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와 같은 일을 하느냐?'며 예수님의 권유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속성을 다 아시고, 두 가지로 답변을 하십니다. 첫째는 세례요한의 예를 들어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아니면 인위적인 인간으로부터의 세례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끝나자마자 본문 말씀에 핵심이 되는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할/ ◀제목 소개!▶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23-27절은 주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고, 28-32절은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 그들을 책망하신 사건입니다.

 

  ▶23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새'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셔서 무화과나무로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막11:27절은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 눅20:1절에서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 새' 시간적인 배경은 고난주간의 화요일입니다.
  여기 성전은 '이방인의 뜰'입니다. 그곳은 유대인이 남자와 여자, 어린 아이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성전으로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전 세계인을 위한 복음전파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와와' 여기 대제사장과 백성들이 장로들은 종교적인 최고의 지위 자들로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자들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들 이외에도 서기관들이 섞여 있음으로 온전한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백성들을 지도하고, 제사를 인도하며 율법을 해석하는 공회야 말로 모든 권세를 갖고 있는 기관으로 그 외 어떠한 권세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가 행한 모든 기사와 이적의 소문을 듣고 공회에서 파송한 '종교진상조사단'과 같은 임무를 띤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삼은 것은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공식적인 도전이었고, 그들의 숨겨진 의도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자'라고 하는 선언을 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예수님께서 그 권세가 '왕의 권세'라고 하면 로마 관원들에게 고소할 조건이 되고 '하나님의 권세, 즉 메시아의 권세'라고 대답하면 그 대답에 대뜸 참담하다고 하여 신성 모독 죄로 공회에 제소할 생각이었습니다. /할/
  ▶권세가 무엇인가?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권세'를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권세는 법적이요 합리적인 데에 있습니다. 중국의 '진짱'이라는 작가는 중국 고대의 우화를 정리하면서 '여우의 진리'라는 재미있는 설화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우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진리란 이것이다'라고 설교를 합니다. 토끼를 만나서는 '너는 내게 복종하여야 한다. 이것이 진리이니라' 닭을 보고는 '너는 나한테 잡혀 먹히고 내 음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리이니라' 개한테는 '너는 내가 닭이나 토끼를 잡아먹을 때에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진리이니라. 이 진리는 성경에 기록되었느니라'합니다.
  이 여우와 마찬가지로, 내 말이 곧 진리요, 내가 힘이 있으면 진리요, 돈이 있으면 진리라고 착각하거나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세상에는 드물지 않게 있습니다. 내 권력이 그대로 권세와 통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허세를 참 권세로 착각합니다.
  권세는 법안에 있는 것입니다. 법을 떠나서는 어떤 권력도 용납되지 않고, 진리를 떠나서는 어떤 권세도 용납되지 않는 법입니다. 반드시 법적이고 합리적이라야 합니다. /아멘!/
  영국의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이라는 저서에서 권세를 이렇게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 '권세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권세와 같은 것이다.'
  오케스트라까지 갈 것도 없이 교회 성가대를 보십시오. 성가대 지휘자는 권세가 대단합니다. 성가대원들은 지휘자가 손을 들고 흔드는 대로 따라 합니다. 모두가 지휘자를 쳐다보면서, 그 손이 움직이는 대로 큰 소리 작은 소리를 내는가 하면 뚝 멈추기도 합니다.
  지휘자의 권세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잊지 말 것입니다. 지휘자는 악보를 따릅니다. 지휘자도 악보를 보고 성가대원들도 악보를 봅니다. 지휘자가 악보를 따라갈 때에만 성가대원이 지휘자를 따라주는 것입니다. 그 지휘자가 악보를 좀더 잘 이해하고 잘 해석하고 작곡가의 의도를 잘 연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손을 쳐다보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법안에 권력이 있습니다. 법을 떠나서는 어떠한 권력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전통적 권력, 전통적 권세가 있습니다. 세습제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카리스마적 권세, 즉 신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고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서 역사 하신다고 할 때에 거기에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오지 않는 권세는 권세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세, 주님의 권세가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첫 번째 권세는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권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시고, 육신을 입으시면서 잠깐동안 이 권세는 감추어집니다. 감추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왕권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먼저, 교훈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모든 교훈의 총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영접하라고 줄기차게 가르쳐 주십니다. /랄/
  그리고, 이적을 통하여 왕권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이 권세입니다. '병을 고치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계시하십니다. 또한 당신의 행위를 통하여 나타내시고 행적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입성하시는 모습을 통하여, 성전을 깨끗이 하시는 것을 통하여 가르쳐주십니다. 심지어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통해서도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확실하게 계시하여 주십니다. /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를 지십니다. 잠시 그 권세가 감추어집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하여 더욱 높은 의미의 사랑의 권세, 구속의 권세를 우리에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할/
  예수님의 권세는 창조주 적 권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알 때에 비로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압니다. 그가 하나님 되심을 바로 인정할 때에 내가 피조물 됨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 진정으로 권세를 영접하는 길이 있습니다.
  두 번째 권세는 구속의 권세입니다. 예수께서는 죄 사함의 권세를 역사 하시고 나타내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순간에 이 권세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죄 사함 받은 감격과 자유로 평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의 권세가 나타나는 순간에도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하는 바리새인과 같이 믿지 않고 의심하고 돌아서는 자는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합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의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내 죄가 그토록 크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값을 지불하시고 구속하실 만한 높은 가치가 나에게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할/
  그 권세는 곧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께서 그 권세를 계시하셨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으니 그대로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멘!/
  탕자가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너는 내 아들이다'하고 반깁니다. 이 때 '내가 아들 될 자격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지난날에 죄를 많이 지었다느니 안 지었다느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겠다느니 저렇게 하겠다느니' 하는 군소리는 다 쓸데없습니다. 또한 생명과 구원, 영생과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권능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권능을 믿는 자에게는 사망도 관계없습니다. /아멘!/
  '엘빈 토플러'의 저서 '권력 이동'에 보면 권력을 이렇게 규정짓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처음에는 완력이라는 권세가 있었다. 힘센 사람이 제일이었다. 다음 단계는 경제력이다. 돈이 많으면 양반이요, 돈이 곧 권력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를 쓰고 돈을 모으려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정신력이, 지식이 권력이다. 기술 있고 지식 많은 사람이 권력을 휘두른다.'고 저술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 권세가 있습니다. 영적 권세 앞에 우리는 모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권, 사랑의 권세는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합니다. 절대충성을 요구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은 우리에게 순교를 요구하십니다. 그 권세를 알고 전적으로 영접할 뿐만 아니라, 나의 잘못된 권세, 이기적인 권세를 완전히 포기하고 부정하고 부인해 버릴 때에 비로소 주의 권세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 본문의 그들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두 가지 질문입니다. 하나는 '도대체 네가 누구한테 허락을 받고 이 성전에서 마음대로 상을 뒤엎고 호통을 치는가? 그리고 네가 누구관데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병을 고치고 이상한 교리를 가르치는가?' 권세에 관한 질문입니다. 즉 당신의 권세가 '정치적인 권세냐? 종교적인 권세냐?'를 묻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질문은 '그 권세를 누구한테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즉 그 권세는 '누구로부터 받은 권세인가? 누가 너에게 그런 권세를 주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지금 그들은 두 가지 올무를 걸어놓고 질문 한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치적인 권세 즉 왕의 권세라고 하면 로마 황제 모독 죄로 로마 관원들에게 고소할 조건이 되고 종교적인 권세 즉 하나님의 권세라고 대답하면 바로 신성 모독 죄로 공회에 제소할 올무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즉답을 피하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시면서 '너희가 나의 묻는 말에 대답하면 나도 너희에게 대답하여 주겠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할/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이 질문은 동문서답도 아니며 대답을 회피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질문은 저들에게 가장 명확한 대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로 하여금 묻는 바를 스스로 깨달아 알도록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믿/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면 정말 제자들이 권위에 대한 진리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질문했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동기가 불순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해답은 네 속에 있다, 너희들이 잘 아는 질문을 왜 나한테 하느냐? 네가 대답해 봐라'는 의도인 것입니다. /할/

 

  ▶25-26절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저들이 질문에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함정에 빠뜨리려고 질문을 했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오히려 저들을 역습했습니다. 이들은 난처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세례는 하늘로부터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능을 주셨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인정된 세례다.'라고 답변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분명히 증언했기 때문입니다(마3:11-12). /할/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고 사람으로부터라고 대답하면 백성들은 세례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확신하는 까닭에 백성들의 분노를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의 여론이 무섭습니다. 26절에 '백성이 무섭다 하여'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위선과 불 신앙을 찾아보게 됩니다. 그들은 가장 무서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상대적인 존재인 인간들의 여론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25절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예수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의 반격을 받자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게 된 모습입니다. 예수 한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계속해서 연구하는 모습은 '서로 의논하여'로 표현했습니다. /할/

 

  ▶27절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서로 의논한 결과 이렇게도 답변할 수 없고 저렇게도 답변할 수 없었던 그들은 모른다고 답변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 모른다는 말은 때때로 아주 편리할 때가 많습니다. 국회 청문회 때도 보면 증인이 항상 '모른다'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들은 몰라서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니라 대답하기가 난처하기 때문에 모른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에 우리 예수님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몰라서 그렇게 대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대답은 '내가 가진 권세는 하늘로부터 온 권세'라는 말입니다. 여기 권세, 권위는 무섭습니다. 권위가 없으면 세상은 무너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권세, 권위가 무너지면 신앙이 무너지고 신앙의 근거가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하늘의 권세입니다. /아멘!/
  우리가 오늘 교회에 온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구원받은 것, 주님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 것들이 누구로부터 온 권위입니까? 하나님께로 온 권위입니다. /믿/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름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명령이라는 권위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의 봉사는 피곤해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늘에 권세 때문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 권세를 위임받았고, 나는 성령님의 위탁을 받았다.' 자신 있게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권세 내 권세'를 믿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할/

 

  ▶28-29절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여기 '그러나' 접속사는 앞의 내용과 연결하기 위한 접속사가 아니라 앞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내용전환을 전개해 갈 경우에 사용되는 접속사입니다.
  한편 이 접속사는 '다음과 같은 비유에 대해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두 아들의 비유'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책망하기 위하여 사용된 비유가 세 번 나오는데 그 첫 번째 비유가 바로 본문으로서 오직 마태만 이 비유를 취급하였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28-30절까지 비유의 내용이고, 그것에 대한 설명은 31-32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맡아들을 불렀습니다.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해라' 그랬더니 맏아들이 아주 기분 좋게 '예! 아버님 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맡아들은 대답만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을 앞세우며 대답을 잘하고 약속이나 맹세도 잘하지만 실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말보다는 실천을 앞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큰아들은 대답만 잘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 자입니다. 듣기는 잘 듣는데 행함이 없는 자입니다. 약1:22절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할/ 그 다음 둘째 아들을 보겠습니다.

 

  ▶30절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둘째아들은 '싫소이다. 안가겠습니다.'해 놓고는 그 후에 뉘우치고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곧잘 들어온 청개구리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우화이기에 우리는 빗나가는 어린이나 심술꾸러기를 보면 '청개구리 같은 녀석, 청개구리 심보'라는 표현을 씁니다.
  오늘 둘째아들이 바로 청개구리 같은 녀석입니다. 여기 포도원을 가진 아버지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고, 맡아들은 선민이라고 자칭하는 유대인을 상징한 것이고, 작은 아들은 이방 사람을 가리킵니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은 예수 믿는 일이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입니다. 즉 봉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시고 오실 예수의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외형적으로 언약이 말씀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며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으나 참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뉘우치고 하나님을 믿어 공경했습니다. 또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제사장을 가리키고 둘째아들은 세리와 창기를 가리킵니다(31).
  28절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십니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신 명령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명령하신 분이 누구인가?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일을 오늘도 지금도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①하나님의 포도원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본문에서 포도원주인은 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고용인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품꾼이나 종들의 노력은 마지못해 하는 노역입니다. 품꾼은 아무런 즐거움이 없이 품삯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종들은 신분상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노역에 임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저들과 다릅니다. 아버지의 포도원이 곧 아들의 포도원입니다. 바로 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은 축복 자입니다. /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 여러분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재벌그룹의 회장의 자녀만 되어도 엄청난 권세가 있습니다. 대통령의 자녀의 신분만 가져도 대단한 권세를 누립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은 이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할/

 

  ▶하나님의 자녀는 특권이 있습니다.
  ⑴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여러분이 책임지고 양육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의 앞길을 책임져 주십니다. 생명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의 의식주를 책임져주십니다. /믿/
  마6:25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마7:11절에서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할/
  ⑵하나님의 자녀는 축복의 상속자가 됩니다. 롬8: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후사란 축복의 대를 잇는 상속자를 말합니다.
  ⑶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보호해주십니다. /믿/ 불꽃처럼 지키십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키십니다.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십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귀합니다.


  ②포도원의 주인인 하나님께서 오늘 일하라고 했습니다.
  내일 일하라고 하지 않고 오늘 지금 일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현재만이 나의 시간입니다. 어제는 이미 활을 떠난 화살이고, 내일은 나에게 없을지도 모를 날입니다. /믿/
  여러분, 현재의 나에게는 지금 해야 할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만큼 중요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하라고 하신 사명을 내일로 미뤄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지금, 현재의 모습이 제일 중요합니다. /믿/
  ▶본문에서 맏아들과 둘째아들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①맏아들과 같이 대답만 해 놓고 약속만 해 놓고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몇 번이나 '주여! 주의 뜻대로 행하겠나이다.' 헌신도 하고 다짐도 하고 맹세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이 이 맹세를 실천하지 못했습니까?
  ②둘째아들과 같이 거절하나 후에 뉘우치고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29절에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일은 진실한 뉘우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잘못이 없는 사람,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온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해도 넘어질 때가 있고, 죄와 짝하며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뉘우치는 일이 귀합니다. 뉘우침이 무엇입니까? 자기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바르게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고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할/

 

  ▶31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에 그들은 '동생이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가 아비를 기쁘게 하였으뇨?'라고 물으신다면 여기에는 둘 중 누구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다만 뒤늦게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그 뜻대로 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는데 이미 그런 아들이 없었기에 아버지의 뜻대로 한 아들을 찾으셨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의 해석은 무엇인가? 여기 두 아들이 다 좋지를 않은데 그래도 조금 더 좋은 아들을 묻고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시키면 '예'하고 적당히 대답해 놓고는 안 하는 아들, 순간, 순간 적당히 대처하는 처세 적이고 기회주의적 사고와 행동, 외식주의와 형식적인 종교생활, 여기에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저 믿는다는 이름뿐 믿음의 행위도 없고 신앙인의 기쁨도 갖지 못한 채 순간, 순간 종교 의식에 적당히 맞추어나갈 뿐입니다. 그래서 찬송 부를 때에 찬송 부르고 기도할 때에 기도하며, 바쁘면 그만두고 한가하면 교회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 사람이 오늘 본문의 맏아들입니다.
  그런가하면 둘째 아들은 역설적입니다. 안가겠다는 대답부터 해버립니다. 이런 아들을 좋은 아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요즈음 현대인들의 생리가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라는 일은 일부러 하지 않고 무슨 일에나 일단은 제동을 걸고 보는 인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들어온 청개구리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우화이기에 우리는 빗나가는 어린이나 심술꾸러기를 보면 '청개구리 같은 녀석' 또는 '청개구리 심보'라는 표현을 쓰게됩니다. 사실은 무슨 일에나 반대 아니면 좋게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은 굉장한 열등 의식의 발로요 심리적 병리 상태입니다.
  여기 첫째 아들은 제사장과 장로,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 그 외식 적인 제사장들, 근사하게 예배드리며 찬송하고 기도하며 제사 드리는 일이야 다 잘합니다. '예, 하겠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소리도 큽니다. 그런데 이래놓고도 뒤에는 딴 짓을 하니 그게 문제란 말입니다. /할/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리와 창기는 죄인의 대표자입니다. 특별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 사람들이 제일 천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리와 창기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히 소외당한 죄인들의 대표자입니다. 모두가 싫어하고 멀리하며 천시하는 이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거론하시면서 '세리들과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참으로 담대하고 용감한, 죽음을 각오한 폭탄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로라 하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그들보다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것은 그 자리에서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장면들을 두고 '슈바이처'는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아예 '날 죽여라'하고 다니셨다'라는 표현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이며 '아멘' 해놓고 가지 않는 위선과 외식의 종교 지도자들, 이들은 결국 이중적인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세리와 창기들은 벌써부터 드러난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며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막달라 마리아나 세리 마태가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소위 종교 지도자라는 너희들은 아직도 위선과 형식으로 굳어진 '아니오' 상태에 있지만. 너희들이 그렇게도 멸시하는 세리와 창기는 뒤늦게나마 철저히 뉘우치고 '예' 하고 갔으니 당연히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할/
  28절에서 맏아들이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여기서 '아버지여'란 말은 아브라함을 존칭하는 말로 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동적으로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여'라는 말은 없습니다. 바로 이방인을 상징한 것입니다. 본문에 말하는 세리와 창기들을 비유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버림을 받았지만 세리나 창기들은 예수님께 나와 회개하고 영접했기 때문에 선민 유대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된 것입니다. /아멘!/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죄인들, 창기들, 세리들, 이방인들'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천국의 주인공이 되어졌습니다.
  31절의 바른 주석은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기 같은 자'입니다. 세리와 창기처럼 거역하던 자라도 깨닫고 돌아서면 하나님 앞에서는 귀한 아들이요, 귀한 상속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할/

 

  ▶32절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당시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의를 외쳤습니다. 즉 옳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군인들이 요한에게 와서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너희는 강포하지 말고 받은 바를 족하게 여기라'
  또 세리들이 왔을 때 그들에게는 '세금을 응징치 말라' 즉 세금을 과대하게 매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금을 많이 매겨서 뜯어먹지 말고 정당한 세금을 매기라는 것입니다. 또 세례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가 바로 메시아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너희는 세례요한의 의의 복음을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 세리와 창기는 죄인의 대표자입니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완전히 소외당한 죄인들의 대표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들과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노라!'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바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의 산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뉘우침이 없고 깨달음이 없는 교만하고 외식주의자들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한 사건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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