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98강)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마 21:18-2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40

(제98강)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마 21:18-22)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쉬시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셨습니다. 그때 길가에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까이 가셔서 열매가 있나 보셨지만 잎사귀만 무성할 뿐, 정작 있어야 할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니 곧 그 나무가 말라죽었다는 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제목 소개!▶

 

  ▶옛날 한 부잣집의 막내 딸 결혼식을 앞두고 주인집에 있는 가축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참석한 회원은 소, 말, 돼지, 고양이, 닭, 개 이렇게 여섯이었습니다.
  소가 의장이 되어 점잖은 목소리로 개회를 합니다. 몇 달이 지나면 우리 집 주인의 귀여운 막내딸이 결혼을 하는데 누가 잔치에 죽어야 하겠소? 이것을 결정하려고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때 말이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어 말하기를 '우리들 가운데 주인을 위해 하는 일이 없는 회원이 희생되는 것이 마땅한 것 같소! 여러분들의 의향은 어떤가요?' 그들은 이 제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그러면 지금부터 각자 자기 맡은 직무의 중요성을 말하기로 합시다.
  소가 맨 먼저 말을 합니다. '나는 주인의 출타 시에 태워 드려야하고 또 며칠 있으면 주인 집 따님을 결혼식에 모셔야 하니 안 됩니다.' 개가 '나는 주인집 도적을 지켜야 하니 절대로 안 됩니다.' 이번에는 고양이가 성큼 올라서서 '나는 주인집 도적을 지켜야 하니 절대로 안 됩니다.'
  이때 닭이 일어서서 '새벽마다 온 식구를 깨워 일터로 보내는 일을 해야 하니 나는 죽을 수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돼지가 일어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주인의 것을 먹고 한 일이 없으니 할 말이 없고, 주인집 따님 잔치에 내가 죽어야 할 것 같소' 그때부터 잔칫집에 돼지를 잡는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십니다. 죄는 무화과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 없는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있었는데, 두들겨 맞기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맞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또한 종교 지도자들을 대신해서 이 무화과나무가 맞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는 모습을 보고 '열매 없는 것은 저렇게 망하는구나' 깨닫고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메시지였고, 또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믿/
  우리 주변에는 나 때문에,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매 맞는 무화과가 많이 있음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나를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내 주변에 있는 것이 깨질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내 대신 자녀가 맞기도 하고. 때로는 내 대신 부모가 맞기도 하고, 때로는 형제가, 이웃이 맞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사업과 직장이 맞기도 하고, 때로는 나라가 맞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깨우치기 위하여서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이로 때려오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부득불 나를 심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열매 없는 인생의 종말이 저렇구나' 깨닫고, 열매맺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
  나라마다 나라꽃이 있습니다. 국화(國花)가 있습니다. 미국은 감람나무가 국화입니다. 영국은 장미, 프랑스는 백합, 일본은 벚꽃, 우리나라는 무궁화가 나라꽃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국화는 무화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화과는 단순히 하나의 나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예수님이 무화과를 저주했습니까?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할/본문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8절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17절을 봐야합니다.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예수님의 숙소가 베다니에 있었습니다. 베다니에는 누가 삽니까?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형제들이 삽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집에서 쉬시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오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안식일에 성전에 올라가기 알맞은 거리라고 다른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조반을 드시기 전인 것으로 보여 집니다.
  '시장하신지라!' 예수님께서 시장 끼는 느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봅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신성을 가지신 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시장기를 느끼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는데 이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하는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도 사실은 인간의 몸을 잃고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환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주님이 '시장하셨다'고 하는 말은 그분이 중보자로써 신성과 인성을 입으시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할/

 

  ▶19절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본문은 마태와 마가는 순서를 바꿨습니다. 마태는 성전 성결문제를 먼저 다루었고,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뒤에 다뤘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본문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먼저 다루었고, 성전 성결운동과 정화운동은 나중에 다루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입니다. 성전정화사건이나 다 영적인 깊은 뜻이 있는데 성전 정화운동은 그 당시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예배의식 종교지도자들은 책망한 사건이요, 본문의 사건은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향하여 주시는 메시지이고, 우리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할/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무화과나무는 당시 팔레스틴 지방을 포함한 지중해 지방의 대표적인 과실수로 매우 소중하게 재배하는 작물입니다. 그 당시는 길가에 있는 과일을 누구든지 따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의 열매는 잎이 피기 전에 열매를 생기고 그 열매 속에 꽃이 들어있답니다. 그러니까 좀 특이한 나무입니다. 보통 나무들은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열매 먼저 맺고 그 열매 속에 꽃이 핀 다음에 잎이 무성해지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교회를 가리키고 성도를 가리키는 나무인데 이것은 신앙적으로 깊은 의미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꽃이나 무성한 잎보다는 열매를 먼저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기대하듯이 오늘 우리 우리들에게서 열매를 원하시는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또 이 무화과나무의 특징은 일 년에 두 번씩 열매를 땁니다. 즉 이른 여름에 따고 또 늦은 가을에 따는 과일 수입니다.
  본문의 무화과나무는 길가에 있는 나무였습니다. 길가에 있는 나무는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근방 눈에 뜨이는 위치에 무화과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는 '가난한 자의 양식'이라고 불릴 만큼 누구나 다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 길 가다가 시장한 사람이 따먹을 수 있는 것이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주고 유익을 주라고 했습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온 세상을 다 품에 안고, 그들을 위하여서 기도하며 또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무화과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열매를 주어서 유익하게 하도록 계획을 하셨습니다. /할/
  그런데 이스라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세상에서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열매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데, 사실은 이 나무를 저주했지만 그 내면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처럼 주후 30년경에 저주가 임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맞는 모습을 보고도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하자 40년 후인 주후 70년에는 직접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때리셨습니다.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점령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학살을 당했는지, 335만 명이 디도 장군의 말발굽 아래서 칼날에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 상상해 보세요. 335만 명이라고 하면 아마 대전시민이 거의 다 죽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엄청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십만 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처참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돌 하나, 돌 위에 층 놓이지 아니하고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40년 전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열매 없으면 저렇게 되겠구나' 깨닫고 회개했으면 이스라엘은 40년 후에 이렇게 비참하게 맞지를 않았을 것이고, 2천 년 동안 나라 없는 아픔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끝까지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다가 말라진 무화과나무와 같은 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우리교회 또한 길가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산 위에 드러낸 동네'에 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모든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을 주시하여 봅니다.
  오늘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는 얼마나 잘 보이겠습니까? '너희는 세상에 빛이고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열매 맺는 삶을 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열매 맺는 삶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길가에 서 있는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 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무슨 말입니까?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무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나무는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가 있고, 또 어떤 나무는 잎사귀만 사용하는 나무가 있고, 그러나 대부분의 나무는 열매를 얻는데 사용됩니다.
  오늘 무화과나무의 가치는 꽃이 아름답거나 목재가 좋은데 있는 것이 아니고 열매 맺는데 그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열매 맺는 책임을 못할 때는 그 나무의 가치는 상실합니다. 주님은 그 나무를 향해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눅3:9절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고, 예수님은 요15:2절에서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고, 또 8절에서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할/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귀한 복음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①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요15:2절을 보세요!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는 좋은 행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의 마음의 바탕이 좋아야 합니다. 신앙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그 마음의 밭이 좋아야 합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앗은 100, 60, 30배의 결실을 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7:16-18절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있습니다.
  ⑴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3: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이전에 행실을 버리고 온전히 달라진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거룩한 모습을 좇아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회개의 참모습이요, 회개의 참열매입니다.
  ⑵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엡5:8-9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여기 '착함'은, 사랑을 기초로 한 선한 행실입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의무를 다하는 삶입니다. '진실'은 속과 겉이 같아야 합니다. 위선, 외식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⑶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유명한 부흥사요, 신유의 종이었던 김익두목사님께서 어느 마을에 전도하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그 마을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을이었는데, 때가 6월 초순 모내기철이라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다가 점심을 먹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들에게 가셔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했더니, 한 젊은이가 아주 당돌하게 나서서 '이 마을에는 전도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왜냐고 물으니까 '며칠 전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바위와 성황당 나무에 떨어져서 바위가 깨지고 나무가 부러지고 다 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위와 나무를 그렇게 때리고 치시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이 안 계시든지, 만약에 계시면 장님이 아니냐, 왜 나무를 꺾고 바위를 깨느냐,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는 전도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때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젊은이는 학교에 다녀 보았는가?' '예. 다녀 보았습니다.' '학교에 가니까 선생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던가?' '예, 막대기가 있습디다.' '그 막대기는 무엇에 쓰던가?' '예, 아이들이 졸고 떠들면 아이들 조용히 하라고 칠판도 탁탁 치고, 또 교탁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목사님이 '이 사람아, 칠판이 무슨 죄가 있겠나? 그 교탁이 무슨 죄가 있겠나? 왜 그것을 때리겠나? 아이들 졸지 말라고, 떠들지 말라고 칠판이나 교탁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안 되면 애들의 머리를 때리는 것일세.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죄 없는 바위와 나무를 치신 것은 자네 깨달으라고, 자네 깨우치라고 죄 없는 바위를 때리고 나무를 친 걸세. 만약에 자네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안 믿으면 다음에는 나무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네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질 걸세.'
  그 말에 이 젊은이가 깨달았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 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당장 그 마을에 교회가 생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할/
  ⑷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갈5:22-23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⑸고전13장의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⑹찬양의 열매, ⑺기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멘!/

  ②열매 없는 나무는 저주를 합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요15장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드시면서 '너희는 가지다 그런데 그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잘리워서 말라져 불에 던지어 타 버릴 것이라'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지 않은 나무를 그냥 오래도록 두시지 않습니다.
  제가 늘 말을 합니다 만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 것이요, 오늘날 교회와 성도를 상징한 것입니다. 나라마다 상징되는 꽃이 있습니다. 미국은 감람나무, 영국은 장미, 불란서는 백합, 일본은 벚꽃, 한국은 무궁화, 이스라엘은 무화과와 포도나무입니다.
  본문에서 무화과를 저주했다함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사명을 선민으로서의 종교적인 사명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이스라엘은 겉만 무성했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열매 없는 교회, 열매 없는 성도는 하나님의 저주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무서운 경고입니다. /할/

  ③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안에 꼭 있어야 합니다.
  요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또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할/ 주님은 열매를 원하십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아멘!/

 

  ▶20절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참으로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은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예수님께서 어째서 열매 없는 나무를 이렇게 무자비하게 저주하셨을까요? 제자들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히 여겨'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놀라워하는 표현입니다.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어떻게 무화과나무가 마를 수 있었는가 하는 감탄과 찬양이 섞인 물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에 의해서 그 나무가 그대로 말라버린 눈앞에 사실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까? 그 이유는 영적인데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한 그루 무화과나무라 할지라도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이러한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여기 무화과나무는 그 당시 유대교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우리의 삶에 진정한 영적인 열매가 없다면 이런 심판과 저주가 있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20절의 제자들은 '아니 어떻게 말씀 한마디 던지니까 무화과나무가 죽는가?' 그들의 놀램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의 세계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멘!/

 

  ▶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여러분, 능력과 기적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본문에 의하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아주 간단한 대답입니다. 믿음이란 하나의 신앙의 용어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에너지요, 힘입니다.
  본문의 말씀과 같이 이 믿음은 산을 옮길 수도 있는 즉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여기서 산은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도저히 내가 해쳐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도무지 내가 해결할 없는 것,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산입니다.
  우리들의 문제, 환란, 시험, 고난도 이런 산에 비유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 적으로나 산이 있습니다. 작은 산도 있고, 중간산도 있고 큰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산이 아무리 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라'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 속에 있는 능력, 예수님 속에 있는 능력과 기적을 나의 삶으로 끌어오게 하는 수단과 방법이 곧 믿음입니다. 막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무슨 말씀인가? '태산과 같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믿음만 있으면 능히 해결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멘!/
  '너희가 믿고 의심치 아니하면' 똑같은 배경을 쓴 막11:22절에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 '하나님을 믿으라'입니다. 그리하면 23절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할/
  우리가 믿을 때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이 결정됩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살리기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주실 수도 있고, 주신 것을 다시 취하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그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을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스탈린도, 레닌도 마르크스'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 소련의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세례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끝났습니다. 신앙은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은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또 본문은 '의심치 말라'고 하십니다. 약1:6-7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할/ 본문은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의심은 불 신앙입니다. 의심이란 말은 '판단이 엇갈린다,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인류 최초로 의심을 품은 사람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들은 뱀이 속삭인 말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가 뱀의 말이 옳은가 판단이 엇갈리기 시작했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의심을 정신질환의 한 원인으로 진단한답니다.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면 그것이 곧 의처증으로 발전하게 되고 아내가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의부증이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의심하고 자식이 부모를 의심하면 그 가정은 불행한 가정입니다. 의심을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의심은 자신의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특히 신앙은 의심은 금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믿고 행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과소 평가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못하는 것, 어떻게 하나님이 할 수 있느냐고 하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모두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전능하신 분이요, 세상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믿으십시다. 그리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내 손에 없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손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아멘!/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할/

 

  ▶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믿음의 원리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믿고 구하면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가 죽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이 산더러 바다로 옮겨지라고 해도 옮겨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산이 바다로 옮겨진다는 것은 정말 믿으세요, 저도 대답하기 참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영적인 귀중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데까지 열어주신 것이고, 믿음의 세계는 그 이상의 것도 바라보아라! 너희들이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의 세계에 있어서는 이런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요, 능력의 세계요, 영의 세계입니다. /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막11: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믿고 기도하는 순간! 이미 응답 받은 것으로 믿어야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도한 대로 된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주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멘!/
  여러분, 어떻게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까? 그 누구라도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는 없습니다. 용사도, 천사장사도 안됩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다.
  기도는 실패의 산을 옮깁니다. 기도는 질병의 산을 옮깁니다. 기도는 문제의 산, 염려의 산, 두려움의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기도는 힘입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푸념이 아닙니다. 기도는 주술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소망입니다. 기도는 비전입니다. 기도는 어떠한 환경도 어떠한 여건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요, 방패입니다. 주님은 막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고, 29절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질병이, 암 덩어리가 녹아집니다. 기도하면 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떠오릅니다. /할/
  ▶아버지가 남의 집에 머슴이었습니다. 8남매를 두었는데 형제들이 모두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6째 아들만은 달랐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쟤는 너무 영리하고 똑똑하니까 초등학교라도 공부를 시키자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도와서 초등학교에 갈 수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그 마을에 교회가 들어왔습니다. 그때부터 초등 학생인데도 교회에 다니면서 새벽기도를 하루도 안 빠지고 13년 동안을 개근했습니다.
  농촌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다음에는 소꼴을 먹이면서 독학으로 계속 공부를 합니다. 서울에 와서는 구두닦이를 합니다. 낮에는 구두닦이를 하면서, 집도 없이 아무 곳에서나 자면서 그 냥 새벽종만 울리면 교회로 달려갑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구두닦이나 구두 통을 보지 않습니다. 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열심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감동이 옵니다. 외국 유학에 대한 감동이 가슴에서부터 물밀 듯이 밀려오는데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그런 감동이 옵니다.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한국의 농촌이 이렇게 어려운데 나는 한국 농촌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나를 이 지상에서 제일 농촌이 잘 되어 있는 덴마크에 가서 공부를 하게 해 달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덴마크의 국왕이 감동을 받아서 유학을 시켜주었습니다. 돈 한푼 안들이고 비행기 값까지 다 보내주어서 거기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 때 마침 우리나라에 새마을 운동을 할 때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농촌을 살리는 새마을 운동에 크게 공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또 이스라엘에 가서 공부를 해서 거기서도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동양 사람으로는 최초로 이스라엘 국립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이 분이 건국대학교 부총장까지 하셨습니다. 이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유태영 박사님이십니다. /할/ 유태영 박사님은 기도로 인생의 가난과 절망의 산을 옮긴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을 붙잡고 나가면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머슴의 아들이라도 육신의 아버지만 보지 않고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고, 먹을 것이 없어도 내 손만, 내 주머니만 보지말고 하나님의 주머니를 바라보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 하심이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환경을 바꾸어줍니다. 기도하면 우리의 영혼을 묶고 있는 모든 어둠의 사슬이 끊어집니다. 기도하면 사단의 올무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기도하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질병이 떠나갑니다. 기도하면 치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38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이 듭니다. 죽을병에 걸린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병이 들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심히 울면서 눈물로 통곡합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히스기야를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히스기야는 질병의 산을 기도로 옮겼습니다. /아멘!/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소원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산이 있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십시다. 그리하면 산을 뚫고 가도록 해주시거나 산 옆에서 피해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않으시고 피할 길을 내어 주십니다.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산 같은 절망을 뚫고 지나갈 수 있고, 태평양 같은 좌절을 건너갈 수도 있고, 하늘처럼 높은 통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믿고 기도하면 그런 축복이 임합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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