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강) 악한 농부의 비유! (마 21:33-46)
어느 날, 사오정이 역사 시간에 자꾸 조니까 선생님이 야단쳤습니다. '사오정! 왜 그렇게 졸아!' '저 안 졸았어요' '그럼 안중근 의사는 누가 죽였냐?' 그러자 사오정이 '제가 안 죽였어요' 하더랍니다.
속이 터졌지만 요새 함부로 때릴 수도 없어서 아버지 모시고 오라고 해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요새 사오정 군이 수업시간에 너무 조는데 집에 무슨 일 있나요? 안중근 의사를 누가 죽였냐고 하니까 자기가 안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오정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예! 걔가 요새 몸이 아파서 가끔 병원은 가지만, 절대 의사를 죽일 아이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할/ 오후시간이라 졸음이 올까봐 웃기는 소리 하나 했습니다. /할/
성경에는 포도원에 대한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두 아들의 비유'였는데 그곳에서도 포도원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두 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는데, '가겠다'고 대답은 철석같이 한 큰아들은 안 가고, '싫소이다'하던 둘째 아들이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다는 비유입니다.
오늘 두 번째 비유인 '악한 농부의 비유'도 포도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기를 모함하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과 백성들의 장로들 앞에서 이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45절 이하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 잡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본문은 '마태, 마가, 누가'에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본 비유는 주님께서 '다시 한 비유를 들어라'고 말씀을 하심으로써 앞(두 아들 비유)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으며 앞에서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을 보충하시기 위해서 덧붙이신 말씀임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할/
특히 4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는 말씀도 앞 비유에서 하신 말씀(31절)의 반복임을 알 수 가 있습니다.
본문의 포도원 비유와 먼저 나온 두 아들 비유는 그 중심 주제는 같으나 차이점이 있다면, '두 아들 비유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주제로 한 반면 포도원의 비유에서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의 비유'는 '유대인들을 두 종류'로 구분한데 비해 '포도원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을 거역한 한 종류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대다수가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는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아들 비유'는 '선지자 세례요한에 대한 그 백성들의 태도와 반응이 중심 내용'이었으나 본문의 '포도원의 비유'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백성들의 태도와 반응을 중심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할/ ◀제목 소개!▶
여러분, 본 비유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실제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틴 지방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땅을 다른 사람에게 소작으로 주고, 그곳에서 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가 1년에 한 번씩 그 소작농들에게 와서 세를 받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답니다.
본 비유를 보면 '포도원주인, 포도원, 농부, 종들, 아들'이 등장합니다. 여기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고, 포도원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농부는 유대인을, 종들을,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보통 비유의 초점은 대체로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외로 여러 가지의 뜻을 한꺼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말씀인가 하면,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며 온 인류의 이야기인가 하면 선지자들을 이야기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며, 마지막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할/
▶비유의 내용을 한 번 간추려 보겠습니다. 어느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울타리를 두르고, 포도즙을 짜는 틀을 만들고, 그 포도원을 지킬 수 있는 망대도 세웠습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짐승들과 도둑으로부터 포도원을 지키기 위해 철망을 울타리에 두르고 원두막을 짓고 또 생산된 포도를 그 자리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포도즙을 짜는 틀까지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포도주는 유명하여 미국, 영국, 등지에서 수입을 해간다고 합니다. 어째든 이렇게 좋은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이 주인은 포도원에 세를 주고 타국으로 나갔습니다.
수확기가 되자 주인은 세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보내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세를 내기는커녕 어떤 종을 잡아서 죽이고, 어떤 종은 심히 때리고 어떤 종은 돌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주인은 '저들이 혹시 착각한 것이 아닐까? 내가 종들을 보낸 것을 모르고 다른 사람으로 오해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들이 그런 능욕을 당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두려운 소문이 나게 해서 다시는 세를 받으러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악한 속셈에서였습니다.
그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가 직접 갈 수는 없고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을 보내겠다. 내 아들이 가게 되면 설마 나를 보아서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종들처럼 때리고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 아들을 포도원에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주인의 상속자인 아들이 하나뿐인데 그 아들을 죽이면 그 유산의 전부가 자기들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그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어쫓아 죽였다'는 이야기가 본문의 비유의 내용입니다. /할/
이 비유를 마치시고 예수님이 질문을 하십니다. '이럴 때 과연 그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고 계십니다. 다시 한 번, 여기 '포도원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한 것이요, 포도원은 이스라엘, 교회, 농부는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 선민들, 오늘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또 여기 종들을 보냈다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죽였습니다. 그리고 외아들을 예수 그리스도인데 실제로 이들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불의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앞으로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갈 것을 미리 예시해 주면서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임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멘!/
▶33절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이 어디에 있습니까?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이 질문에 예수님은 직답을 피하시고 두 비유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가 두 아들의 비유이고, 다시 한 비유가 본문의 비유인데,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할/
이 비유는 사5:1-7절의 포도원의 노래가 그 배경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포도원 주인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을 사랑했고,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만들고, 거기에 산울타리를 세우고 포도즙을 짤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 또 포도원을 지킬 수 있는 망대(원두막)까지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농부들이 마음만 먹으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결코 무슨 일을 맡기실 때 그냥 알아서 하라고 무책임하게 맡기시는 분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을 주실 때 계획과 모든 여건을 준비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각각의 사람들에게 맡는 능력, 달란트를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특권, 축복 받을 성도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이 특권은 두 가지의 성격을 따르게 합니다. 하나는 자유요, 또 하나는 책임입니다. 특권을 주신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속박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신임하시며 자유롭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포도원을 만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하나님 중심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신약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앉아 예배드리는 이곳이 포도원입니다.
'산울로 두르고' 하나님 은혜의 울타리를 두르시고, 하나님이 교회를 보호해 주시는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지키십니다.
'즙 짜는 구유를 파고' 하나님의 주시는 모든 은사를 상징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즙 짜는 것을 포도주를 짜는 압착기인데 성도를 연단 시키는 각종 환난과 시험에 대비한 훈련입니다.
'망대를 짓고' 하나님의 보호, 원수 마귀를 지키십니다.
'농부들' 교역자나 각종 지도자와 일꾼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농부의 특징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지런한데 있고, 열심 있는 것에 있고, 알곡을 거두는데 있습니다. /아멘!/
'세를 들고 타국에 갔더니' 예수님 당시에는 외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팔레스틴의 논과 밭에 투자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를 주고' 우리나라도 땅을 세를 주고 쓰는 경우가 지금도 있습니다. 당시 지주와 소작농과의 계약관계를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정액제'가 있습니다. 소출에 관계없이 금전으로 소작료를 지불하는 방식입니다.
둘째는 '정량제'가 있습니다. 소출의 종류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소출에 정한 향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쌀은 5가마를 두고 나머지는 10가마든, 20가마든 소작인에 먹는 방식입니다.
셋째는 '비율제'가 있습니다. 소출의 비율에 따라서 3:7제, 4:6제, 5:5제입니다. 그 당시 가장 많은 제도가 반반 5:5입니다.
'타국에 갔더니' 문학적인 의미로는 '멀리 떠나 있다. 혹은 여행하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집 주인의 당분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가르칩니다.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그 주인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 주고 타국으로 갔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이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을 맡기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일을 선택하신 사람에게 맡기십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맡겨준 그 사람을 신뢰하십니다. 그리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인내와 사랑으로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인자하신 하나님이신 데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합니다. 그 오해중 대표적인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게을러질 때가 많습니다. 분명 인간보다 앞서서 세계 모든 일을 하나님은 다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십니다. /믿/
▶34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열매를 딸 때는 가르치는 말로 팔레스틴 지방은 보통 7월부터 포도송이가 생겨나기 시작하고 다음날 8월이면 작은 포도송이가 완전한 포도 알이 되어 보통 9월에 따게 됩니다.
본문의 포도원 주인은 열매를 분배받아 오기 위해 종들을 농부에게 보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계속 보낸 것을 비유하는 이야기로써 구약의 선지자들이 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라고 계속 증거 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 의에 열매,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명을 잘 감당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언제든지 내 놓을 수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만일 때가 됐는데도 열매가 없으면 '악한 농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같이 되어 저주받고 버림을 받게 됩니다. /할/
▶35-38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하나님은 당신을 대신해서 구약에서도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농부들은 세를 받으러 온 심부름꾼인 선지자와 종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그 종들은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을 대신하여 왔으니 후한 대접을 하고 주인이 요구한 것을 주었어야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하며 심히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참으시고 처음보다 많은 종들을 보내 보았으나 여전히 포악한 짓만 했습니다. 사실 마지막 세례요한까지 유대인들은 죽었습니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심히 때리고' 이 사람을 예레미야가 당한 짓이라고 했습니다. 렘20:2절을 보면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집 베냐민의 윗문에 있는 착고에 채웠더니'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멸망한 도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선지자였습니다.
렘19장을 보면 흰놈 골짜기에서 자식을 바쳤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이 우상에 빠지고 죄악에 빠지자 하나님은 '오지 병' '위가 좁고 아래가 퍼진 호리병'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예언했습니다. 그것은 '오지 병'을 깨뜨리면 그 병을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것같이 유대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쓸모 없는 백성이 되어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렘19:15절 한 절을 읽어보아야 이해가 쉽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 목을 곧게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그때 '여호와의 집, 유사장'인 '바스훌'이 예레미아를 때리고 착고에 채워 옥에 가두었습니다. '유사장'은 '제사장의 우두머리 직분'입니다. 종교지도자가 폭력을 쓴 것은 그 당시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예례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한 것 때문에 타락한 종교지도자에게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져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자에게는 핍박이 옵니다. /할/
또 본문에 죽인 것은 이사야를 가리킨 것입니다. 히11:37절을 보면 '이사야는 톱으로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다음 '돌로 친 것'은 스가랴 선지자를 말하고 있습니다(대하24:20-21).
이 세 사람만 그렇게 죽인 것이 아니고 이러한 고통을 당한 선지자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여기 본문에서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을 다시 한 번 발견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 농부들의 잘못한 일이나 악한 행동을 다 알면서도 두 번, 세 번, 계속 종을 보내시고 마지막에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까지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고 아픈 인내를 보게 됩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심판의 깊은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악하다고 그때, 그때 심판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이 땅에 살아남을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랑의 하나님은 길이길이 참고 또 참으십니다. 어처구니없는 엄청난 죄를 계속 짓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두고두고 참으십니다.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참으셨습니다. /할/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많이 참으십니다. 그러나 그 인내에도 끝이 있습니다.
이제 그 아들로 보내고는 마지막입니다. 그 이상 더 참지 않으신다는 것은 우리를 알아야 합니다. 일찍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여러 모양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깨워주며 경고하셨고, 어떤 때는 놀랍고, 두려운 사건을 만나기도 하며 깨닫기도 해 주셨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에 그토록 인내하시면서 참으십니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참으십니다. 오는 포도원이 농부들에게도 첫 번째, 두 번째 그 다음 아들까지 보내어 깨닫게 했지만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올 줄을 몰랐습니다.
회개가 없으면 하나님은 심판을 단행하십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회개 없는 백성을 징계하십니다.
37절에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여기 아들은 주인을 대리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도 포도원 주인의 인내로 참았습니다. 그런데 38절을 보면 농부들이 또 모의를 합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 농부들은 착각을 해도 아주 큰 착각을 했습니다. '주인은 아들이 하나밖에 없으니 만약 우리가 이 아들만 죽인다면 결국 노인도 얼마 안 있으면 죽을 것이고, 이 땅은 우리 것이 될 것이다, 누가 알게 뭐냐? 이때야말로 기회이니 그를 죽이고 그 유업을 차지하자'고 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악한 농부들은 완전범죄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아들은 곧 주인의 대표요,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주인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주인에 대한 전면적 도전입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연이 아닙니다. 많은 선지자를 보낸 후 종말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마지막 심판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할/
▶39절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영문 밖에 죽음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되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을 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죽은 자리인 골고다 길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신 사건은 이미 죽은 사건입니다. '이에 잡아' 여기서 우리는 가롯 유다의 배신의 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배경을 마26:47-50절에 나와있습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할/
그 다음 '포도원 밖에 내어 죽였으니라'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까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한 일꾼들은 상속자를 죽이기로 공모하고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고 말씀하시므로, 주님께서 곧 그들의 손에 의해 예루살렘 성밖으로 끌려나가 죽임을 당하실 것을 그 당사자들 앞에서 미리 밝히시고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신이 곧 성문 밖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이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고 로마의 권력 앞에 힘없이 굴복한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주신 것이며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새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대속사역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주님의 비유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묻습니다.
▶40절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주인이 그런 악한 농부들은 그냥 두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주인이 능력이 없다면 모르지만 능력 있는 주인입니다. 그 주인은 세상을 지으시고 운행하시고 다스리시는 능력자이십니다. /믿/
여기 '주인이 올 때'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믿/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종교지도자들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41절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여기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본 비유의 결론입니다. '저희가 말하되' 누가 말했습니까? 예수를 비판하고 올무에 넣으려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하신 것입니다.
여기 '진멸' 당한다는 말은 악한 자들이 고통을 당하면서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옥 불'에 떨어져 이를 갈며 슬피 우는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진리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너무 많이 압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믿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믿은 것이 귀합니다. /믿/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새로 줄지니라' 얼마나 바른 진리입니까? 유대인들은 이 진리대로,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그 복음이 이방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 농부들은 이스라엘을 선택받은 민족이고 본문은 '다른 농부'는 이방 민족을 가리킵니다. /할/
▶4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예수님은 또 다시 구약 시118:22-23절을 인용하여 가르치십니다. 여기 '건축자'란 소위 종교지도자들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종교전문가라고 생각하였으니 건축을 하는데 비유하면 건축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버린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누가 죽였습니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이 죽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암석지대라서 돌을 잘라 집을 짓는데 기준이 되는 모퉁이에다 머릿돌을 놓고 그 머릿돌은 기준을 삼아서 다른 돌을 연결시켜 나가기 때문에 머릿돌(기초 석)을 빼면 집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모퉁이 돌의 비유는 '교회론적인 동시에 기독론적'인 것입니다. 주인은 교회의 기초가 되시고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주로 말미암아 된 것'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빌2:6-11절을 보세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할/
지금 주님께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답변을 들으시고 시118:22-23절을 인용하시고는 '이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잘 기억할 것이다)'고 반문하시면서 4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외치시므로써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이제 새로운 분기점을 맞았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곧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요 포도원의 일꾼된 천국의 백성이라는 기본 틀을 깨뜨리고 그들의 답변대로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천국의 탄생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예인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특권과 그들의 역할을 이제 영구히 철회하신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바로 본문의 포도원 비유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자신을 버림받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로 묘사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용했던 시편의 말씀을 적용해서 포도원의 일꾼된 언약 백성들에게서 배척받고 버려진 쓸모 없는 돌(반석)로 묘사하시고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라고 말씀하시므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금 그들 앞에 밝히셨던 것입니다. /할/
▶4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에게 주는 말입니까? 종교지도자들의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무서운 말씀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그들은 천국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럼 어디로 갑니까? 지옥입니다. 그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긴 것입니다.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문학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순종하고 열매를 맺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은 자입니다. /할/
하나님의 은혜는 합당하지 않으면 합당한 사람에게 넘겨집니다. 최근 빅딜이란 단어를 쉽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실한 기업을 건실한 기업에로 경영권을 넘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 합당한 열매를 위하여 합당한 쪽에다 빼앗아 넘겨주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합당하지 않은 사람의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도로 빼앗아 합당한 사람에게 주는 원리입니다. 마25:29절을 보세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백성 된 특권과 권세도 바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다면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이 되었으면 이제 합당한 열매 맺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되고,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44절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얼마나 무서운 심판입니까? 한마디로 산 돌이신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는 박살이 나고 예수님을 공격하고 대적하는 자 또한 주님의 말씀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돌 위에 떨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지 못하는 그들의 불 신앙이 스스로에게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함을 말합니다.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러 오신 종말의 때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할/
▶45-46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 인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알기는 잘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비유는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두 비유를 통해 드러난 사악한 인물들이 자신들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듣고 아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깨닫고 회개해야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잘못된 자신들의 모습을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완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지금 성전 안에 있으므로 성전 경비원을 불러서 그를 쉽게 체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경우와도 같이 예수님을 의의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들의 반응이 무서워 공식적인 석상에서 체포하지 못하고 훗날 가롯유다의 배신에 의해 겟세마네 동산에 계신 예수님을 밤에 은밀히 체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로 이것은 백성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지도가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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