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101강) 혼인 잔치의 비유! (마 22:1-1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42

(제101강)       혼인 잔치의 비유! (마 22:1-14)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비유 중에 하나입니다. 2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천국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때 '그저 죽어서 가는 좋은 곳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죽음 뒤에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아름다운 본향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면 '천국은 지금 여기 현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천국보다도 왕국이라는 말로 바꿔 이해하면 더 쉽습니다.
  천국이나 왕국이나 개념은 같은데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왕국입니다. 만 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것이 왕국이요 천국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받는 세례를 내세 천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외치신 복음의 제 일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천국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 천국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으로 성경을 가르칩니다. ◀제목 소개!▶

 

  본문은 예수님의 수난 시간 중 둘째 날인 화요일에 일어났던 내용입니다. 이 비유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어떤 임금이 혼인잔치를 배설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임금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임금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잔치는 그의 아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입니다. 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혼인식에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신부는 교회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임금은 잔치를 준비한 다음 많은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본문에는 두 번을 초청했다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세 번째 초청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번만 초청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초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왕이 잔치를 배설하고 종들을 보냈는데 대부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다시 종들을 보내어서 '잔치에 오라'고 초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오지를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종들을 잡아서 능욕하기까지 했습니다. 왕은 다시 분부를 내리시기를 사거리 길가에 가서 만나는 대로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혼인 잔칫집이 가득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고 왔습니다. 그런 자는 바깥 어두움으로 내어 던져 버렸습니다.
  이 비유를 쉽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구원에 큰 잔치를 배설하시고 초청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이 잔치에 무관심하고 거절하므로 결국 이방인들을 초청하되 누구든지 초청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에 응하는 자는 반드시 예복을 입고 참여해야지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그 특권과 영광의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비유입니다. /할/
  여기서 우리가 그 잔칫집을 채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입술에 영혼 구원'을 맡기셨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들켜 사형 당한 '본 회퍼'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본 훼퍼' 목사가 꿈을 꿨는데, 히틀러가 죽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때 '너는 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의 무죄한 피를 흘렸으므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들어가 고통의 형벌을 받아라'고 선고를 했답니다.
  이때 히틀러가 항의를 했습니다. '하나님, 억울합니다. 나는 사후에 이런 세계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후에 이런 세계가 있는 것을 알았다면 왜 그런 죄를 지었겠습니까? 더구나 누구 한 사람도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천국과 지옥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꿈속에서 이 말을 들은 본 회퍼 목사님은 '히틀러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그를 미워하여 죽이려고만 했다.'고 깊이 회개했다고 합니다.
  전도보다 주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일은 이 지상에서 없습니다. 눅15:7절에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전도이며, 우리의 가장 시급한 일이 전도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던 것 중에 가장 귀한 '능력, 보화, 은혜, 보물, 축복'은 이 예수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내 안에 있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입 밖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를 합니다. 이 능력을 믿으시고 열심히 복음을 전합시다. 고전9:14절에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할/
  ▶그렇다면 전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⑴전도는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눅10:17절에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⑵전도는 철저하게 성령 님을 의지하고 전도의 소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⑶전도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저 영혼을 내가 전도하지 않으면 지옥 가는데'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⑷전도는 내가 체험하고 축복 받은 것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⑸전도는 자기자신이 먼저 정직하고 믿음을 보여주는 삶을 살 때 전도가 됩니다.
  ⑹전도는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⑺전도는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 대장이 은혜를 받고 매일 전도하기로 작정하고 매일 한 번씩 나가 전도하는데 하루는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와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는데 비가 안 멎고 어둑어둑해져서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하고 잠을 청하니까 마음이 괴로워서 잠을 잘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우산을 가지고 모자를 쓰고 기차역으로 나가서 우산을 마당 한 가운데 꽂아 놓고 자기 모자를 거기에 다 씌워놓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고 누가 듣든지 말든지 큰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웬 사람이 저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가?'하고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부스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를 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

 

  ▶1절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시라는 말은 이 비유가 21장의 두 비유에 연속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의 악한 농부의 비유에 이어 다시 한 비유로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개역 성경에는 '다시 그들에게'라는 말이 생략되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장로들, 바리새인들, 예수님은 두 비유를 들려주므로 그들의 반응을 보시고 다시 한 번 그들을 책망하는 비유로 하고 계십니다.
  비유법은 그 당시 랍비들의 일반적인 교수법, 실생활에서 쉽고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는 교육법입니다. /아멘!/

 

  ▶2-3절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여기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님은 하나님자신이요, 혼인잔치에 신랑으로 나타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혼인잔치에 초청할 때 먼저 초대한 사람들에게 언제 결혼식이 있는지 구두로 알려줍니다.
  그리고 잔칫날 당일에 주인은 자기 집 종들을 보내어 초청한 사람들을 데려오게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임금도 잔칫날이 되자 이미 구두로 초대했던 사람들에게 종들을 보내 '오늘 결혼식이 있으니 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천국은 기쁨과 축복의 축제인 혼인잔치로 비유했습니다. 성경에는 천국은 혼인잔치에 비교한 곳이 많습니다(사61:10/62:5/마9:15/요3:29/계19:7-9).
  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날이므로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혼인잔치에는 '기쁨이 있고, 좋은 음식이 풍성하고, 인심이 후하고, 사랑이 넘칩니다.' /할/
  당시 결혼식은 평민이라도 보통 일주일씩 잔치를 하는 것이 보통이고, 특히 왕자의 결혼식은 잔치가 몇 주씩 계속해서 벌어졌습니다. 그 당시는 분봉 왕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통할 통치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고을 원님과 같이 한 지역을 맡은 분봉 왕들이 있고 그 왕들 위에 전체적인 대왕이 있어서 분봉 왕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특히 왕가의 결혼식이라면 준비만도 많은 시간이 걸리므로 정확한 시간을 정하지 못하고 준비가 끝나는 대로 종들을 보내어 하객들을 초청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하나님은 그 백성을 택하여 천국백성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또한 초청한 사람들을 데리러 갔던 종들은 구약에 나타난 예언자들과 특별히 마지막 예언자였던 세례요한까지입니다. 오늘 임금님은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풀면서 혼자 즐기지 않고 그 백성들을 초대하여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라는 것입니다. 뇌물을 준비하라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가지고 오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잔치에 와서 함께 즐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즐기라고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기를 싫어하거늘' 왜 이들이 거절했습니까? 기쁨으로 잔치를 기쁨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기쁜 것이 아니라 통제 받는 삶으로 인식해서 싫어합니다. 술도 담배도 오락도, 그리고 주일날 합심하여 교회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천국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4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이 임금은 정말 사랑이 많습니다. 보통 임금 같았다면 '그놈들 괘씸하다. 잡아다 볼기라도 때렸을 텐데' 하나님으로 비유된 본문의 임금님은 다시 종들을 보냅니다.
  첫 번에 보낸 종들이 인상이 안 좋았습니다. 이번에는 매너가 있는 종들을 보내자 그렇게 생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아주 메뉴까지 설명하면서 간청을 합니다.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모든 것이 풍성하게 완벽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와서 같이 즐기기만 하자는 것입니다.
  여기 '모든 것은 갖추었으니' 복음 적인 해석은 예수님 안에서의 죄 사함과 영생의 길이 준비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현저하게 예수님의 보호와 안도함까지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학자들의 해석은 요14:1-3절에 나오는 완전한 천국을 예비해 놓으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오늘 본문의 임금님의 비유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오라고 부르십니다. 한 절이 애타게 부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지를 않습니다. 그들이 초청을 거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5-6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그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①그들은 초청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 잔치를 소홀히 여겼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예언을 무시했습니다. 귀를 막고 두지 않았으며 마음을 달고 강퍅하게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돌아갔습니다.
  하나님보다는 현실이 좋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축복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축복이 좋았습니다. 야곱과 에서를 비교해 보자! 야곱은 보이지 않은 영적 축복을 탐내었고, 에서는 보이는 팥죽 한 그릇에 영적인 축복을 팔았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복된 초청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교회에 나와 보아라 예수님을 믿으라' 간절한 마음으로 전도하면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인상을 씁니다. '야유! 저 예수쟁이 또 잔소리 시작하네'
  사람들은 천국 잔치에 초대하는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초청이 얼마나 귀중한 초청인가를 미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초청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하나님이 불러 주신 가라지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초청입니다. 영생을 결정하는 초청입니다. /믿/
  ②그들은 보이지 않는 내세보다 보이는 현실이 더 중요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잔치를 거절한 이유는 밭에 가서 농사짓는 일 때문입니다.
  눅11:16절을 보면 거기에서도 하나는 밭을 샀으므로 가지 못한다고 농사일 때문에 또 한 사람은 소를 다섯 마리나 샀는데 시험해 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사업하는 일 때문에 예수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장가를 들었으므로 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향락주의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한 자입니다.
  사실 농사는 아무 때나 짓는 것이 아닙니다. 때를 따라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줘야하고 열매가 열리면 열매를 따야합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게으르면 그 농사를 망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농사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일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인생이 전부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이 최우선되어야 복을 받습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두 번째 사람은 사업차 여행을 떠난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사업차 분주한 분도 많습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술대접하느라 분주하고 주일날도 이 정치인 저 정치인과 손잡으려고 골프장에서 바쁘게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이 사람은 어떻게 보면 가장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거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영원한 세계에 중요성을 몰랐습니다. 야고보 장로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약4:13-14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은 생명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도, 재물도, 명예도, 모두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큰 착각입니다.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오라하면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가야합니다. /할/
  ③부류의 사람은 남아 있는 사람으로서 초청하려온 종들을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보통 결혼식이면 자기가 안가겠다고 거절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천국을 비유한 혼인잔치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통하여 당신의 아들이신 메시아를 우리에게 보내기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이 메시아가 온다는 메시지를 띄우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 사실을 전할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메신저들을 죽였습니다. 마지막 세례요한까지입니다.
  심지어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 위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 것도 사업을 하는 것도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지장을 받는다면 본문의 나오는 사람들과 똑같은 존재가 됩니다. /할/

 

  ▶7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여기 성경에 보면 임금이 어떻게 했습니까?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군대를 보냈습니다. 군대를 보내어서 어떻게 했습니까? 동네를 모조리 불살랐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마23:37-38절 이하에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과 똑같은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산에 올라 기도하실 때 죄악으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멸망의 광경을 내다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주후 70년 예루살렘 거리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로마의 황제가 보낸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을 불태웠습니다.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을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도시 전체를 불사르고 유대인들을 죽이고 그리고 끌고 가 노예를 삼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전쟁이 주후 70이 바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불 신앙으로 가득 찼던 그 성읍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의 거리에서 얼마나 많은 무신론자들이 활보하고 있습니까?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것처럼 언젠가는 예수님의 재림 시에 이 죄악된 도성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믿/
  우리는 여기서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천국초청에 지체하지 말고 응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돈 버는 일도 그 다음입니다. 농사짓는 일도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그 다음입니다.
  이 초청은 우리의 영혼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초청입니다. 천국의 초청은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형벌과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교회에서 형벌과 심판이 있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목사가 점잖게 넥타이 매고 공갈친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절대 공갈이 아닙니다. /아멘!/
  그 다음 8-10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이제 임금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자격에는 맞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바로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은 버리고 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들을 통하여 천국잔치에 주인공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아멘!/

 

  ▶8절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청해도 안 오니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호의를 너무 거절하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호의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 '합당치 아니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호칭이 효력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회개한 이방인과 죄인들을 조합한 새로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에 상속자의 권리를 찾게 됩니다.

 

  ▶9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사거리는 이방민족을 가리킵니다. 먼저 청함을 받은 유대인은 합당치 않음으로 이방에 가서 청해오라는 것입니다. '만나는 대로' 무슨 말인가? 이제 가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10절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누가복음에서는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에 채우라'고 했습니다. 사거리에는 평범한 사람들도 있고, 잡배들도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도 있고, 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있고, 병든 사람도 있습니다.
  종들은 거기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데려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은 ①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구원을 독차지한다고 자만했던 유대민족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멸시 천대했던 이방인들과 죄인들과 세리와 창녀들이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②구원은 어떤 사람에게 주어졌습니까? 선한 사람에게만 주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악한 자들에게도 선한 사람과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얼마나 기쁜지 몰랐습니다. 만약 구원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에게만 저는 구원을 못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할/
  자기가 의롭다고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나는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나는 행하는 것마다 죄 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의롭고 거룩하게 보이지만 깊은 내면에는 말할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이렇게 생각하게 죄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나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인 나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내가 지은 모든 죄도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한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당시 초청만은 사람들이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는 주인이 예복을 준비해서 입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니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11절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이요, 의의 옷입니다. 우리가 군인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군복을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로 압니다. 또 군복으로 육군인지 공군인지 해군인지도 알게 됩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천국이 유니폼이 있습니다. 의의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그 의의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의의 세마포 옷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옷입니다. /믿/아멘!/

 

  ▶12절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친구여' 이 단어의 원어를 보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불평하는 일꾼에게와 가롯유다에게 사용된 말입니다.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남들은 다 왕이 주는 예복을 입었는데 자기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의 행위로, 자기의 지식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가라지, 염소라고 했습니다. 또 마7장의 '주여, 주여'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13절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혼인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그 사람들 중에도 예복을 입은 사람들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졌습니다. 12절에 '주인이 한 사람을 보고 왜 예복을 입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 말했는데 이것은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이 한 사람 뿐이라고 오해하면 안됩니다. 예복을 안 입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지목해서 따지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아니한 사람에 대해서 그 주인이 너무 가혹한 형벌을 내립니다.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예복을 안 입었으면 그저 나가라고 하면 될텐데 그 사람을 지옥에 던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복문제는 단순한 옷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예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구원론의 문제입니다. 예복을 안 입으면 단순히 쫓겨나는 게 아니라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복은 예수를 중심으로 믿어 구원받은 자가 입고 있는 옷입니다. /할/
   그리고 이 옷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찬양은 노래가 아닙니다. 찬양은 소리도 아닙니다. 찬양은 구원받은 자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 곧 찬양입니다.
  그런데 예복을 보면 상당히 역사적인 뿌리가 있습니다. 잔치를 하면 주인이 그 집에 초청된 사람에게 예복을 주는 풍습이 고대로부터 있었습니다.
  창45장에 보면 요셉이 그 형들을 만나서 사실을 다 밝히고 정식으로 형들을 대접했습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요셉이 자기 모습을 숨기고 형님들을 대했지만 이제 형님과 화해하고 자기가 요셉이라는 것을 밝히고 예의를 갖추고 자기 형님들을 자기 나라에 온 귀빈으로 대우를 하면서 형들에게 양식과 옷을 한 벌씩 주었습니다.
  이 옷은 이제는 요셉을 만날 수 있는 옷입니다. 이제는 궁중에 출입할 수 있는 옷입니다. 이 옷을 입고는 총리가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올 수 있는 옷입니다. 그런데 이 옷을 요셉은 하나밖에 없는 자기 동생에게는 다섯 벌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그 동생이 사랑스러워서 다섯 벌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주는 예복을 입고 초청을 받았을 때는 반드시 그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석해야만 주인에게 예의가 될 뿐 아니라 곧 주인의 의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할/
  그러면 이제 예배와 관계해서 보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바로 혼인잔치입니다. 주인이 베푼 혼인잔치에 우리가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초점이 되는 문제는 '내가 예복을 입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고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과연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파트너가 되기에 합당한 신부인가? 예수가 나의 신랑으로서 내가 어울리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신부냐?'는 것입니다. 그 조건에 핵심적인 것이 바로 예복이라는 것입니다.
  예복에 대하여 계19:6절 이하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그러니까 어린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고 그 혼인에 참석할 사람들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했다는 것인데 깨끗한 세마포가 예복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의 옷입니다. 그런데 이 예복의 원료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로 지어진 옷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옳은 행실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계19:9-10절에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그러니까 '옳은 행실'은 '예수의 증거를 받은 행실'입니다. '나도 예수의 증거를 받았고 당신도 예수의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또 설명하는 말이 뒤에 나옵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은 예수의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 예수의 증거가 대언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대언의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의 예복을 지으신 분입니다. 성령이 우리 예복을 확인하시는 분입니다.
  엡1: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어리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에 인치는 역할을 하십니다. /할/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성령이 도장을 찍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증하신 이가 성령이십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예복을 지어주셨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인시켜줄 영은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예복을 입혀주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 쳐주셔서 보증해주신 영입니다. 그 영이 우리에게 예복을 주셨는데 성도들의 '옳은 행실'의 실체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행위를 옳은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할/
  ▶예복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①'수족을 결박하여'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라야 진정한 자유인이 됩니다. 요8: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멘!/
  ②'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어디입니까? 지옥음부입니다.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곳입니다. 유황불은 불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질식합니다.
  ③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저주스러운 삶을 묘사한 말입니다. 실지로 지옥 불에 떨어지면 앗 뜨거워 이를 갈게 되어 있습니다. 지옥은 무서운 곳입니다. 무서우면 치가 떨립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14절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청함을 받은 자입니다. 택함을 입은 자입니까? 여기 청함을 받은 자는 일반적인 전도를 받고 교회 뜻을 밟는 사람입니다. 또 '택함을 입은 자'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청함을 받은 자가 있었고, 택함을 입은 자가 있었습니다.
  가롯유다를 보겠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마지막 밤입니다. 그는 예수님은 포옹하고 손등에 키스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의 종말은 어디입니까?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모두 택함을 입은 자가 됩시다.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삽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생활을 하십시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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