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강) 세상 마지막 때의 징조들!④ (마 24:40-51)
우리 말 중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방심하고 지내다가 큰일을 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기우'라는 말도 있습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자꾸 생각하며 쓸데없이 걱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 기우와 '설마 하는 방심'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하겠습니까? 방심입니다. 왜냐하면 기우는 마음속에서 끌탕을 해서 그렇지 큰 피해는 없습니다. 하지만 방심은 마음이 잠시 편할지 모르지만 자칫 잘못하면 큰일을 당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고 한탄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에 대낮 강도가 들었습니다. 마침 그 집 식구들은 모두 밖에 나가고, 노모 한 분만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강도는 그 할머니를 살해하고 금품을 털어 갔습니다.
나중에 귀가해서 그 참혹한 사건을 확인한 식구들은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살인 사건이 우리 집에서 일어날 줄이야'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좀더 신경을 써서 노모를 돌보는 사람을 두었거나, 철저한 보안 시설을 갖추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는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 중에 특별히 '종말에 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공중혼인예식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은 것처럼 늘 종말이 있음을 늘 기억하고 준비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멘!/
'설마 종말이 있으려고?'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큰일납니다. 종말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그 날이 인류 역사의 종말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라도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내 인생에 종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죽음으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종말을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 신앙 자세를 가리켜 흔히 '종말론적 신앙'이라 부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종말론적 신앙을 회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공관복음서인 막13장, 눅21장, 마24-25장에서는 마지막 종말에 관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소 계시록'이라고도 부릅니다. 요한계시록과 같이 길고 자세하지는 않지만 종말에 관한 비유와 증조들을 기록했습니다.
종말에 대한 성경의 예언은 어떤 논쟁이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의 확실성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세상 마지막 때의 징조들'을 배우면서 주님 재림의 준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예수님께서 초림하실 때 구약의 예언이 완전하게 성취되었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구약의 예언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완고하게 이를 거절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 재림의 징조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났건만 무지한 인생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롯의 시대의 사람들도 '내일 아침에 이 성에 불과 유황이 떨어진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허! 그 영감 미쳤구나' 하며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노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머지 않아서 이 땅에 홍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노아가 아무리 외쳐대도 사람들은 오히려 조롱을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노아 때도, 롯의 때도 그들의 예언처럼 심판이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합니다만 종말에 대한 성경의 예언은 어떤 논쟁이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확실성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때를 맞이할 준비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첫 번째 중요한 주제는 성령 충만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 노릇을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주제는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주의 종말의 때에 참된 크리스천들에게 어떻게 살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벧후3:10-12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묻고는 잘 들으십시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의 참된 주제는 주님이 언제 오시는가가 아니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깨어 있으라'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42-44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깨어 있다는 것은 경성하여 미리 준비하고 있는 삶을 뜻합니다. 입시 때가 되면 두 종류의 학생을 보게됩니다. 한 학생은 입시 날짜가 다가올수록 깨어서 시험을 대비합니다. 도시락 두 세 개 싸들고 밤 12, 1시까지 열심히 공부합니다. 반면에 또 이런 학생도 있습니다. 시험 때가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락게임에 빠지거나 놀이에 빠져 정신이 없습니다.
이 두 학생의 차이는 언제 판명이 날까요? 시험 발표 날에 웃고 우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비단 대학입시를 앞둔 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곧 오실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믿/아멘!/ ◀제목 소개!▶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뉘어집니다. 40-44절은 '말세에 사는 성도들아 깨어 있으라'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45-51절은 '말세에 사는 성도들아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라'는 경고입니다. /할/
여기서 한 가지 설명하고 지나갈 게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혼동해서 사용하는데, 종말과 말세라는 말을 구분해서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종말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시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헬라어 알파벳 마지막 문자를 사용해서 오메가 포인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말세는 마지막 때의 일정한 기간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기간이 말세입니다.
그래서 1세기에도 말세, 지금도 말세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종말이 아주 가까운 시기라는 점에서 지금 이 시대를 가리켜 '말세지말'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 보고 이 시대 상황을 관찰해 보면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는 '종말의 필연성'입니다. 여러분, 거듭 말씀드립니다. 종말은 분명히 있습니다. /믿/ 또 하나는 '종말의 임박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은 분명히 있을 뿐 아니라,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 징조의 강도가 점점 더 강해지고, 그 빈도가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진, 전쟁, 난리, 재난, 기근, 적 그리스도와 이단의 극성, 기후 변화, 전재지변, 인간성의 타락 등, 이런 현상들은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최근에 그 강도가 빈도가 더 심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멘!/
▶40-41절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17:34-35절과 똑같은 배경입니다. 여자가 매를 가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풍속입니다(출11:5). 우리 어머니들도 옛날에 맷돌을 갈아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여자가 맷돌을 가는 것은 집안 식구를 먹이기 위해 음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꼭 농장에서만 일한다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일터에서 일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고, 또 밭은 교회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을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⑴앞에서 말한 '노아 시대에 구원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대비시키는 문장'입니다.
⑵주님이 오시면 분류작업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⑶휴거의 상황을 묘사한 말입니다.
여기 '그때에'는 '주님이 오실 때'를 의미하고, 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는 앞에서도 말씀을 했습니다만 여기 밭은 농장도 되지만 직장, 사업장, 또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는 열심히 삶의 현장에서 살아야 합니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를 심으리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멘!/
한때 이장림 파는 92, 10, 28일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직장도 얘들 학교도 다 버리고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시지 안았습니다. 우리가 필히 깨달을 것은 주님 재림만 너무 강조하지 말고 묵묵히 신앙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님 재림에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영적으로 참 부흥한 교회입니다. 뜨거웠습니다. 아주 믿음의 역사가 있었고, 사랑의 수고가 있었고, 그 다음에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너무 기다리고 기다린 나머지 많은 오류를 범한 교회입니다. 주님 재림에 빠진 나머지 남자가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쫓아 다녔고, 여자가 가사를 돌보지 아니하고 은혜 받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예수님 재림이 박두했는데 이 세상 썩어질 직장에 나가면 뭐하고 돈벌면 뭐하냐'는 식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밥 줘! 밥 먹고 학교가게' 그러면 '얘가 그렇게 믿음이 없냐? 예수님 곧 재림하실 텐데 학교는 무슨 학교냐?'
이런 신앙은 정말 위험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밭에 나가 일을 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할/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여기서 데려감을 당한다는 말은 휴거, 공중으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살전4: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휴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휴거가 뭡니까? 공중으로 들려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성경 사전에 보면 휴거란 현재 진행 중에 있는 물체가 갑자기 변화를 일으켜 위로 끌려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신학적인 용어인 휴거는 예수님 재림 시 진실된 성도는 하늘 나라로 데리고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이 말하는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내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릴 때에 땅에서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무덤이 열리지 않습니다. 예수 믿어 죽었던 사람들이 주님의 호령소리와 천사장의 나팔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살아나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아멘!/
휴거의 사건은 고전15:51-53절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여기 분명히 죽었던 성도는 썩지 아니한 것으로 다시 살고, 또 살아 있는 성도는 홀연히 순식간에 변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순식간에 변화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변화됩니까? 성경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즉, 죄도 없고 온전하게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영화로운 몸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가라고 했는데 우리의 죄와 육신의 정욕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공중에서 오시는 순간 우리는 모든 악에서부터 놓임을 받으며 주님과 똑같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여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데 됩니다. /믿/
어떤 사람이 데려감을 당합니까? 믿음으로 산 자가 데려감을 당합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자가 데려감을 당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내버려둠을 당합니까? 신앙으로 살지 않고 인본주의로 산 자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의식적, 형식적으로 믿는 자, 신앙생황을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니고 제 생각대로 한 자들은 버림을 당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난한 사람입니까? 병든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아멘!/
▶42-43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말세를 준비하는 최고의 신앙자세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있으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합니다. 아무리 말세에 산다고 해도 신앙 안에서 정신차리면 천국이 보입니다. /할/
심령이 잠자는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고, 그저 그렇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도 감격이 오고 기쁨이 오고 감사가 나옵니다.
깨어 있는 성도는 예수님이 어느 때 오셔도 준비를 잘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기쁘게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깨어 있지 아니하면 주님이 '도적같이 오실 때' 당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아멘!/
'어느 날에 주님이 오실 지 우리가 알지 못함이라'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다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여기 '도둑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도둑처럼 오신다는 겁니다. 이 말은 윤리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갑자기 닥치는 '불가예측성'을 가리킵니다.
쉬운 말로 하면 도적이 들어오는 시간을 안다면 도적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 미리 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재림의 문제를 도둑이 드는 것에 비유한 말씀들이 신약 성경에 많습니다. 살전5:2, 벧후3:10, 계3:3, 계16:15절 등입니다. 이것은 재림의 예기치 못한 홀연성에 초점을 맞춘 말씀입니다. /할/
▶44절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재림비유에 결론입니다. '이러므로'는 '이런 까닭에'라는 의미로 깨어 있지 못함으로써 큰 화를 당한 자들의 어리석음을 보았듯이 너희들도 그런 전철을 밟지 말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예비하고 있으라' 깨어 있으라,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왜? 생각지 않을 때에 주님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재림은 준비하는 신앙의 최고의 신앙입니다. 군대 생활할 때 높은 사람이 한번 지휘검열 나온다고 하면 몇 날, 몇 일을 준비했습니다. 대통령이 지방순시를 나가도 준비해야 합니다. 하물며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할 때 준비도 없이 어떻게 갑자기 맞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 예비하고 있으라, 준비하고 있으라, 지금은 자다가 깰 때요, 이렇게 살 때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다. 주님이 지금 오셔도 괜찮겠는가? 주님 오실 때 우리가 할렐루야하며 만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부끄러워 숨겠습니까? '깨어 있자! 예비하고 있자!' /할/
이제 45-51절을 보겠습니다. 충성된 종과 불순종한 종은 반드시 분류되어 행한 대로 상과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45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이요, 집사람들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여기 종은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를 비롯하여 직분을 받은 자들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맡아서 때를 따라 말씀의 양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지혜 있는 종이 누구인가'라는 말입니다.
'때를 따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때를 따라 하늘의 양식을 먹어야 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주의 종들에게만 주는 교훈이 아닙니다. 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항상 충성된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한마디로 여기서 주인을 향한 종의 자세는 충성입니다. 이 충성은 종의 본분이며 의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나 헬라어원에도 이 '충성'이라는 단어는 '믿음'이라는 말과 뜻이 일치합니다. 한자로는 충성이란 '마음에 중심의 말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가 충성할 수 있고,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자가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고전4: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맡은 자란 청지기'란 뜻입니다. 고전4:1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하나님은 아무리 재주가 있는 자식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요소가 결여되면 그는 쓸모 없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습니다. /할/
앞으로 배울 마25장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이윤을 남긴 충성한 일꾼들에게는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했으나 게으름을 피운 종에게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시고 저주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을 골라 기름을 붓고자 할 때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용모와 신상을 너는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중심이 무엇입니까? 충성심과 믿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관청이나 회사나 공장에서 사원을 뽑을 때 무엇을 보는지 아십니까? 두 가지를 봅니다.
하나는 '저 사람이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가?' 실력을 봅니다. 그 다음에 '그가 믿을만한가?' 바로 충성심을 봅니다. 여기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가?'는 그 사람의 재능과 전문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조건이 아무리 구비하였다 할지라도 둘째 조건인 성실성이 없다면 그 사람은 채용할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일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도 이렇게 충성심을 보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할 때 몇 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적은 것부터 충성해야 합니다. 적은 것이란 남이 보이지 않은 구진일 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일은 해도 생색이 나지 않은 그런 일입니다.
②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잠시 동안 충성하는 것은 쉽습니다. 며칠 동안 충성하는 것도 쉽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변함 없이 충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롯유다는 끝까지 충성하지 못하고 자기 스승을 배반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제자 중에 데마라는 이도 끝까지 충성하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③어떤 환경에서도 충성해야 합니다. 송죽의 절개는 따스한 봄날 녹음방초 우겨진 여름날에 아는 것이 아니라 눈보라가 휘날리는 엄동설한에 비로소 송죽의 절개를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잘되고 잘 나갈 때는 누구나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 때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옛날부터 나라가 어려울 때에 충신이 난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십시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가 충성하면서 조심해야 될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①남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했는데 하나님과 성도로부터 책망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입니까? 자기의 충성을 앞에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일 좀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설치는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히 행하는 봉사를 더 기뻐하십니다.
②우리가 충성할 때 사람의 판단에 좌우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습니다. 봉사하다가도 남에게 판단을 받을 때 분명한 믿음이 없으면 좌우로 흔들립니다. 굳게 주만 바라보고 일하십시오, 그리하면 축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③그리스도인의 충성은 오직 하나님의 판단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그 사람은 승리잡니다. /할/ 본문에 보니까 충성하는 자에게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꾼은 슬기로워야 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할 일과 안 할 일을 분별합니다. /아멘!/
▶46절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주인이 올 때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것을 보시고 지혜롭게 행하시는 것을 보시고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주님이 선언입니다.
여기서 복은 '모든 소유'를 맡기신다고 47절에 말씀하셨습니다.
▶47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여기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보시고 필요에 따라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멘!/ 이제 48절부터는 악한 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48절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여기서 '악한 종'은 게으른 종입니다. 불 신앙과 불순종에 빠진 종입니다. 더 세밀한 의미는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자입니다. 주인이 오신다고 했는데 믿지 않은 자입니다. 이 사람은 깨어 있지 않은 자요, 준비하지 않은 자입니다. 행여나 오늘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가 자기를 한 번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할/
또 '주님이 더디 오시리라' 그의 이러한 생각은 매우 교만한 것이며 잘못된 판단입니다. 사람이 마음에서 생각하는 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공개된 사상보다 오히려 마음속의 생각이 우리의 삶에 더 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잠23:7절에서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악한 종은 잘못된 마음의 생각을 했습니다. 상대편의 생각을 묻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해버렸습니다.
'나름대로의 판단!' 그것이 바로 신앙의 원수입니다. 오늘날 신앙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습니다. 주님은 '깨어 있으라,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이 종은 주인의 말을 믿지 않고 나름대로 '더디 오시리라'고 판단해버렸습니다. /할/
▶49절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악한 종의 태도입니다.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무엇을 말합니까? 그는 친구들을 때렸습니다. 폭력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잔인한 것을 뜻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집의 사람들을 돌아 보라 하셨는데 악한 종은 사람들을 탄압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챙겼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 중에 하나가 남을 압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특별히 보살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악한 종이 남을 때리고 억압한 것은 분명히 주님의 뜻을 거스리는 악행입니다. 악한 종들은 자기의 이해관계 때문에 남의 삶을 마음대로 짓밟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도 남을 압박할 권리가 없습니다. /할/
또 '술친구들로 먹고 마신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취해 빠진 자입니다. 술 취하면 방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다.
▶50절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이 구절의 의미는 36, 42, 44절에 언급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예기치 못한 불시에 오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람은 불시에 들이닥친 재림의 때를 알지 못한 것은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
▶51절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악한 자의 심판을 말하고 계십니다.
①'엄히 때리고' '두 동강이 내다'는 뜻으로 절단하거나 톱으로 잘라 두 동강이를 내거나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잔인한 형벌을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재림을 준비하지 못하고 방종한 생활을 일삼던 악한 종은 혹독하고 무서운 심판과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②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받는 벌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③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옥의 형벌을 의미합니다. /할/
그렇습니다. 45-51절까지 '두 종의 비유'를 보았습니다.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의 비유입니다. 주인이 일을 맡기고 멀리 갔다 옵니다. 지혜 있는 종은 항상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들이닥치면 칭찬과 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악한 종은 주인이 나중에 오겠지 하며 방심한 나머지 허랑방탕하게 지냅니다. 그러다 주인이 갑자가 들이닥치면 혼 구멍이 난다는 겁니다.
▶지혜 있는 종은 충성된 종의 모습입니다. 충성된 종의 모습은 임종의 순간까지 자기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을 수행하는데 있습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자기 위치에서 일합니다. 사업가는 사업가로서, 회사원은 회사원으로서, 공무원은 공무원으로서 본분을 수행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칼빈은 공부하다가 죽을 각오로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설교하는 도중에 주님이 오실것을 소망하면서 설교했습니다. 예웰 목사님은 설교하다가 죽기를 바랬는데 그 소원대로 설교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불의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천국의 수레가 다가오는 바로 그 순간까지 후계자 엘리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할/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개인의 종말이 먼저 옵니다. 우리는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일하다가 죽는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다가 인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농부는 밭에서 일하다가 죽고, 주부는 집에서 아이를 보고 맷돌을 갈다가 임종을 맞이해야 합니다. 학생은 배우고 공부하다가 죽어야 하고, 스승은 연구하고 가르치다가 죽어야 합니다. 사업가는 열심히 경영하다가 죽고, 공무원이나 회사원은 열심히 사무를 보고 공직을 수행하다가 죽어야 합니다. /할/
여러분, 우리가 아직 이 세상이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행복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행복은 부산물입니다. 행복만을 위한다면 당장 천국 가는 게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곳도 천국만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갈 사람들이야 이 세상이 전부니까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하지만, 성도들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 한시도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맡은 종이요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됩니다.
우리가 맡은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마는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예배와 전도'입니다.
바른 예배자로 삽시다. /할/ 그리고 선교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같은 말입니다. 가까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요, 더 나아가 온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입니다.
예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면서 남긴 유언적 지상명령이 곧 선교입니다. 행1:8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할/
여러분! 종말이 가깝습니다. 우리 인생도 얼마 남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종말이 가까운 이 때에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요? 신앙 관리 잘 하십시오. 구원의 확신을 날마다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명 관리 잘 하십시오.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 잘 감당하고, 오늘 주님이 부르셔도 할 말이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그래서 언젠가 주님이 오시는 그 날, 아니면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날 당당히 천국을 들어가시고, 잘 하였다고 칭찬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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