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로마서강해/제21강 의롭다 함을 얻은 자의 축복(5:1-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 10. 10:47

제21강 의롭다 함을 얻은 자의 축복(5:1-2)  

우리 교회가 역사가 상당히 오래 되서 분위기가 고색창연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특히 처음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그런 말씀을 많이 하세요. 승동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 어머니의 아늑한 품속에 있는 것같고 고향에 찾아온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다 좋은데 건물이 낡아서 여름철이나, 겨울철에 참 안좋아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요. 우리 임마누엘 성가대 얼마나 좋습니까? 정말 보배 가운데 보배입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테이프를 들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렁찬 소리가 모기 소리 만하게 들려요. 그리고 남자 파트는 아예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마 음향 시설이 제대로 안되서 그런 줄 압니다. 여러분 제가 부탁드리는 것은 생업에 더욱 열심히 종사하셔서 물질로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많이 봉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것도 좀 바꿔놓고 음향시설도 좋은 것으로 할 수 있는 분들이 자진해서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누구든지 마음에 감동되시는 분들은 열심히 노력하셔서 돈도 많이 버시고 물질로도 많이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 남한과 북한 사이에 고위급 회담이 처름 열렸을 때입니다. 그때 북쪽의 대표들이 우리 나라에 왔습니다. 먼저 우리 나라의 대표들이 평양을 방문했고, 그 답례로 북측의 대표들이 서울에 왓습니다. 승용차편으로 서울에 들어오면서 북측 대표 한 사람이 창밖을 계속 보더니 똑같은 소리를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런 소리입니다.
"정말 수고 많이 했겠네. 진짜로 수고했겠어."
우리측 대표가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도대체 무엇울 수고했다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이 창밖으로 서울 시내를 달리고 있는 수많은 차들을 가리키면서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전국에 있는 그 많은 자동차들을 서울로 올려오느라고 얼마나 수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힌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측 대표 한 사람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되받았다고 합니다.
"말도 마세요. 사실 그 정도는 약과올시다. 저 빌딩 숲이 보이지요? 이거 전국에 있는 것을 서울 시내로 다 옮겨오느라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줍니까? 아무리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아무리 진실을 그대로 가르쳐줘도 믿지 않으려고 드는 사람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골치 아파요.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롬 1:1부터 시작해서 4장 마지막 절까지 계속 반복해서 가르쳐준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롬 5:1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어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의롭다 하리라."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받아들여야지요. 왜 그것을 믿지 못하고 내게 무슨 공로가 있어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받아야지요.
앞 장에 있는 4:5 말씀을 읽어봅니다. 여러분 4:5을 보세요. 이제는 더 이상 잊어버리지 마세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 아니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치 못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까? 믿음! 우리의 믿음 한 가지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큼은 잊지 말고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우리 마음이 괴롭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꽉 막혀서 기도조차 제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래가지고 내가 구원받았을까?"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한 가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꼭 한번 해보세요. "하나님!"하고 불러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을 부를 때 마음속으로 부르지 말고 하나님을 부르는 그 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해서 하나님을 불러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여러분 마음속에 힘이 솟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조금 힘을 얻게 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외칩니다. 틀림없이 아무리 큰 절망 가운데 있었을지라도 우리 마음속에 소망이 싹트게 될 것입니다. 자! 배운 것은 한번 실습해야지요? 좋은 것은 실천해야 합니다. 저를 따라서 여러분이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속으로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를 자신이 들을 수 있게 따라해보세요.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 여러분이 힘들고 어렵고 괴로울 때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 하나님을 불러보세요. 이것은 제 이야기라 아닙니다. 행 2:21에 보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무엇을 얻는다고 했습니까?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발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해도 분명히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도리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엄청나게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놀라운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세 가지로 일깨워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롬 5:1∼2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그 결과 첫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가 또 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안에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무엇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소망 가운데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복인지 모릅니다. 성도님들이 이것만큼은 붙들어야 할 소중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설교의 황제라고 불렸던 영국의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본문의 이 말씀을 제일 앞장 세워서 메시지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은혜스럽고 귀중한 말씀이기 때문인 줄 압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 판에 꼭 새기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첫번째로 누리는 복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본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관계가 되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과거에는 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제가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믿지 못한 것이지, 하나님과 원수질 일은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말씀한 바를 알아야 합니다. 롬  8:7 말씀을 찾아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약 4:4에서 똑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못하고 내 중심으로 사는 것,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명예를 위해서 사는 것, 내 육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과거에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여러분이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180도로 바뀌었는데, 우리의 신분이 바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분입니다.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되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저 단순히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누가 들어갑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회목제물이 되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잡으시고, 또 한 손으로는 우리의 손을 잡아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 사이를 이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1절 하반부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누리자"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된 이 사실을 아십니까?" 사도 바울은 그렇게 묻지 않앗습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게 묻지도 아니했습니다. 믿는 것,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 마음속에 기쁨이 없고 마음속에 감사가 없고 마음속에 즐거움이 없고 마음속에 평안이 없는 사람은 예수를 잘못 믿는 것입니다. 내 처지야 어떠하든지 간에 나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만 생각하면 기쁘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즐겁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행복하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마음속에 평안이 임하는 사람, 그것이 예수 믿는 재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재미를 우리가 삶 속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매일의 삶 속에서 누리고 있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사정이야 어떻든지 간에 환경이 어떻든지 간에 그것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면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날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놀라운 복과 특권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이 교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두번째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이 두번째 누리는 복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2절 상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보좌 앞에 이제는 담대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대단히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말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옛날 구약 시대의 성막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방인들은 감히 그 성막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밖에서만 쳐다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만 성막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막 안에는 들어가지만 성소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성소의 뜰만 밟을 수 있었습니다. 성소 안에는 누구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와 그 안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지성소 사이에는 아주 굵은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지성소 속에는 제사장이라도 감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 한 사람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일년에 단 한번 대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은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되어 있었는데, 옷 밑에 방울을 달았습니다. 대제사장이 걸을 때마다 딸그랑딸그랑하고 소리가 나도록 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간 뒤 딸그랑딸그랑하는 소리가 들리면 아직도 대제사장이 살아 있다는 증거고, 만일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는데 딸그랑딸그랑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이 싫어서 치셨다는 의미입니다. 제사장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지성소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언제 갈라졌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하시고 "다 이루었다!" 운명하시던 그 순간에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굵은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다 찢어졌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는 너희가 들어와도 좋다"고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 어떻게 나아가야 합니까? 쭈그리고 앉아서, 주저앉아서, 엉금엉금 눈치보면서, 무서워하면서, 그렇게 주저하면서 나아갑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그 다음에 뭐하는이라고 했습니까? "서 있는." 서서 담대하게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 4:16을 한번 찾아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은혜스러운 말씀입니까? 또 이번에는 엡 3:12을 한번 찾아보십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놓지면 안됩니다. 이렇게 귀한 말씀을 어떻게 놓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 앞에 주저하지 않고 담대히, 당당히, 어깨를 좍 펴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매주일 낮이 되면 2층에 있는 제 방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사내가 있습니다. 좀 안 왔으면 좋겠는데 귀찮을 정도로 자주 들어옵니다. 보무도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누군인지 아세요? 저희집 막내아이입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제낍니다. 그리고는 쓱 한번 둘러보고는 그냥 나갑니다. 몇 번씩 들락날락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가 아닙니까? 이제는 거리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교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교리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하면 죽음 앞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앞에 떨 수밖에 없습니까? 그러나 믿음에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은 지금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2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소망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3:23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죄 때문에 감히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소망 가운데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기쁨과 즐거움과 소망속에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데반 집사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7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성난 군중이 그를 향해서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머리가 터졌습니다. 살갗이 찢어졌습니다. 피가 터져나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때 스데반 집사님이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성난 군중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자기 자신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행 7:55∼56을 제가 읽어봅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 집사님이 그 고통 속에서도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을 때 고통스러움 속에서도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무슨 기도를 드렸습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원수를 위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잠들 수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이 복과 특권이 누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지 롬 8:18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나그네와 같은,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만일 장차 우리에게 영원히 주어질 영광이 약속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다릅니다. 주어진 약속이 있습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기쁨과 소망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제가 이야기 하나 하고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3살 난 소년이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수술이 잘못되었습니다. 수혈을 하는 가운데 에이즈에 감염된 피를 수혈했습니다. 그래서 에이즈에 감염되고 말앗습니다. 에이즈에 걸리면 문자 그대로 아 이제 다 살았다, 인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년도 자기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자기의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티없이 맑고 밝은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계속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잘 지냈습니다. 이 사실이 기자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라디오를 통해서 또 신문을 통해서 전국으로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년에게 와서 위로하고 선물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이클 잭슨도 그 소년을 찾아와서 위로하면서 선물을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당시 대통령이었던 레이건까지도 그의 병실을 찾아와서 위로하면서 그에게 좋은 선물을 주고 갔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에이즈에 감염된지 5년을 더 살다가 18살에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얘야, 이제는 내게 너에게 더 이상 줄 선물이 없구나. 너에게 어떻게 해줄 도리가 없구나. 미안하구나. 이 못난 아빠를 용서해라."
그때 이 소년이 죽음 앞에서 오히려 자기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아빠, 저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선물을 받앗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보다 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아빠는 제게 예수님을 소개해주셨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얻게 되었잖아요? 저는 지금 죽어도 예수님이 계신 그 천국으로 가는 것이 분명하잖아요? 그러니 아빠는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제게 위대한 선물을 주신 분이시랍니다."
죽음 앞에서 오히려 자기 부모를 그렇게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어느 기독교 잡지에 실려서 수많은 기독교인을 울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죽음까지 뛰어넘어서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이 놀라운 특권이 누구에게 주어졌습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 교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교리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지금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에 분명히 서 있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 교리에 여러분이 분명하고 확고하게 서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귀중한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기고 이 말씀을 붙잡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비록 험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삶 속에서 매일매일 예수 믿는 그 즐거움, 그 행복, 그 기쁨, 그 재미를 누리시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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