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강) 가롯 유다의 배신! (행 26:14-25)
이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좋은 이웃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형제, 좋은 친구, 좋은 이웃과 좋은 지인'들은 모두 좋은 이웃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에게 평생 함께 해주고 때로 용기도 주고 나를 보호해주는 좋은 이웃들입니다. 이런 이웃들이 없으면 살아가기가 외롭고 힘듭니다.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을 보십시오. 남한에 오직 혼자뿐입니다. 그래서 명절 때면 가장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삶의 터전을 다 이루었어도 이 고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고아들을 보십시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겠습니까? 다 이루었으면 뭣합니까? 봐주고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고향, 내나라, 부모, 형제, 이웃, 친구는 참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웃과의 관계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내가 도움을 주는 관계로, 내가 도움을 받는 관계로 늘 관리해야 합니다. /할/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마리아가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주님의 죽음을 준비한 사건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마리아와는 아주 대조적인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가롯유다입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하나로써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함께 먹고 자고 생활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은 30냥에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 넘겼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마리아의 헌신과 가롯유다의 배신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할/
지금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행동을 했습니다. 한사람은 자기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사람 가롯유다는 십자가를 보는 순간 팔아버리기로 결정하고 은30에 자기 선생을 십자가에 내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 예배 자와 거짓 예배 자를 보게됩니다. 교회 나온다고 모두가 교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두다 예수를 믿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교인 안에는 가롯유다가 있습니다. 마리아 옆에는 언제나 가롯유다가 있기 마련입니다. /믿/
본문에서 마태는 마리아의 충성과 가롯유다의 배신을 대조하면서 본문은 기록했습니다. 26:2절을 보면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미리 예언했고, 본문에서는 그의 배신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할/ ◀제목 소개!▶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4-16절은 가롯유다의 배신과 17-25절은 유월절 잔치에 대해서 나옵니다. 먼저 14-16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4-16절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여기 '그때에'는 어느 때입니까? 마리아가 예수님께 옥합을 깨어 드린 직후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간 그 때를 가리킵니다.
먼저 가롯유다라고 할 때 '가롯'이라는 말은 유대의 한 동네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그 당시 이름은 조상들이 유명한 이름을 따서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이름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여자 이름 중에 마리아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름을 구별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의 마리아 등등 그의 출신을 중심으로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롯유다도 앞에 가롯이 성이 아니라 그의 출생지역으로 가롯 출생의 유다라는 의미입니다. /할/
본문의 배경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 가야바의 집 뜰에 모여 모의를 하고 있을 때(3-5),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해 흥정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넘겨준다는 것은 예수님을 잡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체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은30'을 달아 주었습니다(14-15).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새벽녘에 내려오는데 가룟유다가 대제사장의 군졸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리고 군호를 짠 대로 예수님께 입을 맞추므로 그가 예수님인 것을 알게 해 주었고 대제사장이 보낸 군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갔습니다(47-50).
예수님은 그 후에 대제사장 집에서 심문을 받고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구형 받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됩니다. /할/
▶여기서 가롯 유다를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인물인가?
⑴그는 머리 회전이 굉장히 빠른 사람입니다.
그가 12제자의 제정을 관리했습니다. 보통 회계는 계산이 빠른 사람들을 세웁니다. 그가 얼마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었을 때 당장 그것을 값으로 환산해 내는 머리회전이 그만큼 빠른 사람입니다.
그 옥합의 가격을 300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그 300데나리온을 가지면 가난한 사람, 얼마를 구제할 수 있고, 또 자기에게 들어온 수입이 얼마나 될 것을 컴퓨터처럼 착 계산해 낸 사람이 바로 가롯유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일수록 이리 붙고, 저리 붙고 배신을 잘 합니다. /할/
⑵그는 열심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일에 열심을 품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가롯유다는 열심당원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셀롯당이라고 표현했는데 즉 열심당원입니다.
그 당시 열심당원들은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력으로라도 대항하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가 또 얼마나 열심히 많은가를 그의 출생지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11명 모두다 갈릴리 출신입니다. 그런데 가롯유다만이 고향이 달랐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11제자는 다 같은 지역출신인데 비해 가롯유다만이 멀리서 따라왔다는 것은 그만큼 굉장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⑶돈을 너무 좋아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솔직히 돈을 좋아합니다. 성경 안에 보면 돈을 좋아하다가 잘못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바로 돈에 눈이 어두워서 피를 나눈 동생 요셉을 팔아 넘겨버렸습니다. 삼손과 드릴라의 관계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데릴라가 삼손을 넘겨주었습니까? 사랑하지 않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사랑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삼손을 팔아버린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또 엘리사의 종이었던 게하시는 나아만을 속이고 엘리사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뇌물을 먹었습니다. 또 수7장을 보면 아간이 나오는데 그도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속이고 지도자를 속였습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돈을 좋아하는데 정상적으로 좋아해야 합니다. 도적질을 한다거나 공금을 횡령하면서까지 돈을 탐내면 그 사람은 도적이 됩니다.
요12:6절에 가롯유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한마디로 물욕에 눈이 멀어버린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두 형제가 길을 가다가 큰 금 덩어리 두 개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우애 좋은 형제는 서로 큰 것을 양보해가면서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두 형제는 금 덩어리를 싸서 등에 지고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에 올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형이 그 금 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깜짝 놀란 동생이 '아니 형님! 어째서 그 귀중한 금 덩어리를 강에 버리십니까?' '아우야! 오늘 우리는 하늘의 도움으로 큰 재산을 이룰 금 덩어리를 얻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금 덩어리 때문에 나는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구나!'
그러면서 그의 마음의 괴로움을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동생이 없었다면 지금 저 금덩이라도 내 것이 되었을 텐데' 자꾸 그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금 덩어리 보다 동생이 소중하기에 버리게 되었단다'
이 말은 들은 동생도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형님! 잘하셨습니다. 저도 금 덩어리를 버리겠습니다.' 그리고 즉시 금 덩어리를 강물에 던지고 두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
⑷가롯유다는 한번도 주님을 사랑해 본 일이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가롯유다가 주님을 사랑했다던가 주님이라고 고백한 사건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냥 구경꾼이요, 옆에서 비판하는 사람이 가롯유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언제든지 그 분을 배신할 수 있고, 뚝하면 그 분을 비판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
이번에는 당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왜 순순히 가롯유다의 배신을 받아주었습니까? 민란을 피하고 비밀히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물론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속한 병력도 있었고,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 예수님의 인기가 엄청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저항할 것이고, 까닭 잘못하다가는 민중의 붕괴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 쪽의 어떤 사람과 공모를 하게 되면 민란을 피할 수 있는 명분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이렇고 저렇고 해서 우리는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명분을 찾고 있을 때, 가롯유다의 배신사건은 그들에게는 천만 뜻밖의 너무나도 귀한 기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값을 흥정했는데 은30냥으로 떨어졌습니다. 은 30냥은 당시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었습니다.
출21:32절을 보면 남의 집의 노예를 자기 집 소가 받거나 어떻게 하다가 과실로 죽이게 되었을 때 바로 은30 세겔을 지불하게 했습니다. 본문에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 지금도 금, 은은 저울에 달아 팝니다.
가롯유다, 그는 한마디로 축복의 기회를 저주의 기회로 만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축복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가롯유다보다 더 실수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축복의 기회를 선택했고, 가롯유다는 축복의 기회를 버리고 말았습니다.
⑸그렇다면 가롯유다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해답이 요13:2절에 나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충동은 마귀에게서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롯유다를 이처럼 배신자의 모습으로 가게 했던 근본적인 배후 세력을 보게됩니다. 누구입니까? 그것은 가롯유다 뒤에 있었던 마귀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사단의 개입때문입니다. 눅22:3-4절에는 가룟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 대제사장과 군관들에게 가 예수님을 넘겨줄 방책을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요13:27절에는 만찬석상에서 예수님께 떡 조각을 받은 후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가롯유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계속 찾아와 유혹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마귀의 괴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벧전5: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행1:18절에 가롯유다의 비참한 최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마귀의 종노릇을 하면 결과적으로 마귀는 이런 보상만 허락할 뿐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귀는 우리에게 화려한 환상을 약속합니다만 그러나 결과는 가장 비참한 결과만을 안겨줄 뿐입니다. /믿/아멘!/
이제 17절부터는 유월절에 성만찬을 준비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17절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자기의 때,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새 언약을 세울 때가 가까이 온 줄 아시고 유월절을 제자들에게 준비시키셨습니다.
출애굽사건을 회상해 봐야 합니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실 때에 가족별로 수컷으로 흠이 없고 일년 된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고 그 어린양의 피를 그 집의 문 좌우 설주와 인 방에 바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애굽 전역을 두루 행하는 죽음의 사자가 이 어린양의 피를 볼 때에 그 집을 습격하지 않고 '넘어 가리라'(passover)는 약속과 함께 애굽의 전지역은 초상집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 어린양의 희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게 될 것을 예표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죽음의 사자가 임하지 못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
유월절의 어린양은 피의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순종한자의 가정에는 죽음의 사자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순종한자의 가정에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생명이 넘쳤습니다. 기쁨 가운데 가정 안에서 어린양의 고기를 먹었습니다.
이는 희생물 자체에 구원의 효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구원의 근거가 있었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
주님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오셨지만 예수님이 여러 번 예언하신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사건과 유월절을 지키는 사건을 서로 일치합니다.
2절에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유월절과 무교절은 복합된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루저녁이지만, 무교절은 한 주간입니다.
유월절은 사망의 권세가 뛰어 넘어간 저녁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애굽의 마지막 재앙이 임하던 열 번 째 사건의 순간,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고센 땅에는 집집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목요일 오후에 양을 잡아 성전에 가지고 가서 그 피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그 날 밤에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양고기를 먹습니다.
양고기를 먹을 때 유월절 식탁에는 소금그릇이 반듯이 있다고 합니다. 소금그릇은 이스라엘이 종살이 할 때 흘렸던 눈물을 상징한 것이고, 또 바다의 짠물을 연상시켜서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신 사건을 기억하는 의미랍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의미는 소금은 언약을 의미하는데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임을 잊지 말라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할/
또 유월절 식탁에는 쓴 나물을 곁들어 먹는데 이것도 노예시절에 진흙으로 벽돌을 구우며 고생했던 그 쓴 기억을 회상하기 위함입니다.
무교절은 그때부터 일주일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떡과 쓴 나물을 먹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요, 무교절은 성결을 강조하는 주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의 영적 의미는 구원은 단번에 받으나 성결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행사를 위해 사방에서 10만의 인구가 살던 예루살렘에 200-250만 명이 모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여관은 말할 것도 없고, 민박도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유월절을 어디에서 준비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할/
▶18절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막14:12-15절에 보면, 이 사건을 더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그러니까 물동이를 이고 가는 그 사람을 따라가서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물을 길러 가는 사람을 따라가 보니 다락방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아무에게'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벌써 정해진 어떤 특별한 사람인데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그 어떤 사람을 지칭한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서 '우리 주님께서 이제 유월절 잔치를 네 집에서 지키실 것'이라고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한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는데, 이 사람도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정성을 들여 집과 음식을 제공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준비한 사건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할/
▶19절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제자들이 순종하고 그 집에 가서 유월절을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월절 속죄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아야 합니다.
출애굽 때 양의 피 즉 '속죄의 피'는 죽음의 사자가 죄를 보지 못하도록 덮고, 감추는 역할을 했습니다. 유월절, 옛 언약에서 죽음의 사자가 임하지 못하도록 사용된 속죄 물은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만찬에서 새 언약을 세우는데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속죄 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의 피도 죄를 감추고 덮어 죽음의 사자가 임하지 않도록 하는 효력이 있게 하셨다면, 흠 없는 자신의 몸을 사람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 물로 드린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얼마나 능력 있게 하셨겠습니까? /할/
그러므로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새 언약이 세워짐으로 모든 언약을 파하셨습니다. 옛 언약은 새 언약의 그림자입니다. 빛이 오면 그림자는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오직 당신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세우신 새 언약 위에서 우리에게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영원한 생명력이 주어지게 하셨습니다. /아멘!/
▶20-21절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드디어 예수님의 만찬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이것이 그 유명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장면입니다. 성찬은 구약의 유월절을 기념하는 예식에서 바꿔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주인공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5:7절에서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 만찬 식에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굉장히 중요한 두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는 본 절에서 나와 있는 '가롯유다의 배신에 대한 예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만찬 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가롯유다의 배신에 포커스를 맞추려고 합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아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먹다 말고 이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할/
▶22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여기 '심히 근심'했다는 말은 심히 두렵고 떨림이 왔다는 표현입니다. 감히 스승을 누가 팔 수 있습니까? 그래서 '각각 예수님께 여쭤 보았다'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내니이까?'라고 말한 것은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유다는 예수를 이미 팔려고 하는 계획을 다 세우고 와서 '내니이까?'라고 오리발을 내밀고 잇습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질문입니까?
▶23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참으로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알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세밀하게 말씀하십니까? 지금 가롯유다에게 최후로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야구 용어에 '적시타'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을 쳐야 할 때 알맞게 쳤다는 말입니다. 영어에는 '타이밍'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손바닥이 맞는 것처럼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사건이 들어맞는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3장에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바로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할/
가롯유다는 시쳇말로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비록 그가 자기 스승을 팔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포착하고 회개했더라면 창자가 터져 죽는 불행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버티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롯유다의 불행한 사건을 부면서 '더 늦기 전에 돌아서서 회개해야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할/
①더 깊이 빠지기 전에 돌아서야 합니다. 가롯유다의 문제가 무엇인가? 그가 따라 다닌 것은 예수님 이였지만, 늘 만나고 내통한 것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과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따라다니기만 했고, 교제한 것은 사탄입니다. /믿/
먹을 가까이 하면 자연히 검어지기 마련인 것처럼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과 인격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정몽주의 어머니는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좋이 씻을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고 노래했습니다.
정몽주의 어머니는 이런 마음으로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검고 더러운 까마귀들이 싸우는 곳에 희고 깨끗한 해오라기야 너는 가서는 안 된다. 성난 사나운 까마귀가 너의 깨끗함 흰 빛을 샘하고 미워할 것이니, 맑은 강물에 정성 들여 깨끗이 씻은 네 몸을 더럽힐까 적이 염려스럽다'는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노름꾼을 자주 만나면 노름이 되고, 술꾼을 자주 만나면 술꾼이 되고, 사기꾼을 만나면 그도 사기꾼이 되고, 말꾼을 만나면 그도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누구와 만나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죄와 유혹의 수렁이라면 빨리 돌아서야 삽니다. /아멘!/할/
②완전히 실패하기 전에 돌아서야 합니다. 돈을 잃어버리거나 사업에 실패하는 것,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인생을 실패하는 일'입니다.
가롯유다는 돈을 맡아 본 회계입니다. 그런 그가 도적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가롯유다는 모든 면에서 실패한 자입니다. 그는 돈을 맡은 관리자로서도 실패한 사람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도 실패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실패한 사람입니다. 결국 그는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고, 땅에 떨어져 창자가 터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때 베드로도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날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늦기 전에 돌아섰고, 유다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유다는 천추 만세에 저주받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 인생 길에도, 신앙 길에도 완전히 실패하기 전에 돌아서야 삽니다. 폭발할 걸 뻔히 알면서도 지뢰밭을 밟는 행위는 자살 행위입니다. /믿/
③주님께서 포기하기 전에 돌아서야 합니다. 불과 유황불로 멸망을 당한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그런 성입니다. 가롯유다도 역시 주님께서 포기하신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가롯유다를 가리켜 24절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24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여기 '화가 있다'는 말은 '저주가 있다'는 뜻입니다. 가롯유다는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화가 있는 인생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버린 자이기 때문입니다. /할/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판 사건은 4복음서에서 다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 사건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믿/할/
눅15장에 나오는 탕자를 보세요! 아버지를 떠난 탕자 역시 모든 것을 포기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버렸고, 가정을 버렸고, 아버지를 버렸고, 형제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잠깐동안 행복했습니다.
수중에 돈이 있을 동안만은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그는 불행했습니다. 돈주고 사는 성공도, 행복도 일장춘몽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얻은 행복과 성공은 영원합니다. /아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아들은, 인간들을 가리킵니다. 탕자는 허랑 방탕하여 소비자의 인생을 살다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 말은 그가 돼지만도 못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마치 돼지만도 못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사1:3절에서 외치기를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고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하고 떠나는 사람은 소나 나귀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온 세상은 물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노아는 당시 사람들에게 120년 동안 외쳤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만든 방주의 문이 닫히고 홍수가 세상을 뒤덮게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후회했습니까? 어떤 부흥사는 지옥에 가면 여기 저기서 '껄, 껄, 껄'하는 소리가 시끌벅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회개할 껄, 그때 예수를 잘 믿을 껄, 그때 교회 잘 다닐 걸, 그때 그 사람을 용서할껄' 하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1:5절을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고 이사야는 자기 동족을 향해 절규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포기하시기 전에 우리가 살길은 뒤 돌아서서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믿/
▶24-25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여기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시는 말씀입니다.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그 인자가 되시는 주님은 사53:7-9절에서 예언한 것처럼 인류의 죄를 위하여 어린양같이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자는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롯유다가 받는 벌입니다. '화'는 저주와 심판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이 죽음 뒤에 받듯이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할/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으니라' 예수님은 가롯유다의 운명이 비참해 질 것을 아시고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낫겠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멘!/
25절에 보면, 이때 놀랍게도 가롯유다가 제일 먼저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소리지르기 시작합니다.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소리칩니다. '도둑이 제발 절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언제나 문제가 많은 사람이 변명의 소리를 많이 지릅니다. 그리고 남의 말을 많이 퍼뜨리고 이말, 저 말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제일 구린내가 많이 나는 사람입니다.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은 오히려 더 조용합니다. /할/
본문의 예수님의 대답이 다 놀랍습니다. '네가 말하였노라' 다른 제자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가롯유다는 얼마나 긴장이 되고 쇼크를 받았겠습니까? 가롯유다는 한마디로 축복의 기회를 저주의 기회로 만들어버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런 사람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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