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115강) 옥합을 깨뜨린 여인! (마 26:1-1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51

(제115강)       옥합을 깨뜨린 여인! (마 26:1-13)

 

  중세기 최대의 강해 설교가인 '킴벨 몰간' 목사님은 말하기를 '마26장에서부터 28장은 복음서 중에 가장 중심적 부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마25:46절을 끝으로 감람산 설교가 끝이 나고 마26장에서부터 마침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본격적인 수난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26장은 75절까지 굉장히 긴장입니다. 우선 35절까지를 보면 중요한 사건이 네 가지가 나옵니다. 1-5절까지는 '예수님의 수난(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네 번째 예언'이 나오고, 그리고 6-13절까지는 이 시간의 중심 주제인 '향유를 부은 여인'이 나오고, 그리고 14-16절을 보면 '가롯유다의 배신'이 나오고, 17-35절은 '성찬식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수난절을 예비한 세 가지의 준비가 나옵니다.

  ⑴베드로를 중심으로 해서 유월절 성만찬을 준비했습니다.
  ⑵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기 위하여 배신을 준비를 했습니다.
  ⑶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식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제목 소개!▶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감람산의 설교를 다 마치시고'로 풀이해도 이해가 가능합니다. 특히 25장에서 비유 셋을 말씀하셨는데, 달란트 비유, 열 처녀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 말씀을 다 마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일반적인 설교는 마25장으로 끝이 납니다. 이제부터는 설교보다 더 큰일인 속죄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죽음만이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본 장부터는 '예수님의 피로 사인한 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할/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큰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절정은 십자가에서 죽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은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만도 당신의 죽음을 네 번이나 예언했습니다. 첫 번째 예언은, 마16장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이 고백을 들으시고 그때부터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17:22-23절에서 두 번째로, 그리고 마20:17-19절에서 세 번째로 예언하시고, 본문 2절에서 네 번째로 당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할/

 

  ▶2절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은 온통 기적의 삶이었습니다. 많은 무리들에게 천국복음을 선포하시며 가시는 곳곳마다 인산인해의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각양 병든 자를 치료하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셨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바다의 풍랑도 잔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계속적인 관심사는 오직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주님의 십자가 밖에 구원의 방법이 없었기에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예표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될 때 어린양의 피로 속량을 받은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은 택한 백성 전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속죄의 피로 쏟으시기 위하여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도 천국을 소망 삼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멘!/
  ▶독일의 '본 히퍼' 목사님이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류가 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감옥에서 동료 죄수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런 그가 사형장으로 끌려가 처형당하던 날 그는 벧전1:3-4절 말씀을 동료들과 함께 읽고, 마치 신랑을 맞으러 가는 신부처럼 소풍가는 어린 학생이 도시락을 싸들고 기쁘게 떠나는 것처럼 사형장을 향해 걸어갔다고 합니다. /할/
  벧전1:3-4절에 무슨 말씀이 있는가?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아멘!/
  본 히퍼 목사님은 이 말씀을 읽고 당당히 죽음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나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영원히 살러간다'고 했다고 합니다. 천국의 확신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도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할/
  그렇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천국을 소망 삼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 되고 유월절이 지나면 죽음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예언처럼 이제 죽음을 향해 가고 계셨고, 죽음은 긴박하게 예수님의 주위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할/

 

  ▶3-5절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대 제사장의 아문에 대제사장을 비롯한 산헤드린 공회원 72명이 모였습니다. 여기 '아문'이란 공회원 공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국회의사당과 같습니다.
  여기에 모여서 무엇을 했다고 합니까?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그러니까 예수를 어떻게 잡아서 '처리할까?'를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궤계'란 '교묘한 속임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속임수로 죄를 덮어 씌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여서 계획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민요가 날까 두려우니 명절에는 말자'고 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명절 중 최대의 명절입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유월절에는 보통 200만에서 350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 많은 무리 중에는 예수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잘못 건드렸다가는 민중 데모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용할 때 죽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는 의논이 맞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죽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롯유다가 배신하여 그들에게 가서 '조용할 때 몰래 잡아 주겠소' 했더니 가롯유다의 의견에 따랐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갔을 때가 밤 0시가 좀 넘은 조용한 시간에 예수님이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잡아갔습니다. 잡아다가 밤새도록 재판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밤에 재판을 하지 않는 것이 그 나라의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밤에 재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재판도 불법재판입니다. 사실 재판이 아니라 일종의 고문입니다. 밤새도록 재판하여 아침 9시에 빌라도의 판결이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침 9시에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계획대로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째든 본문 3-5절을 보면 대제사장들이 아문에 모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더 놀라운 일이 하나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한 여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려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입니다. /할/

 

  ▶6-7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자주 가셨습니다. 거기에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날이 다가오는 이때에도 거기에서 쉬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시몬은 전에 문둥병자였으나 주님께 치료받은 사람으로써 주님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집주인 이외도 12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 유지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일이 떳떳한 일이며 자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할/
  부끄러운 일은 드러내 놓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럽고 착한 일이라면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사회와 이웃을 위해 떳떳한 일이라면, 여러분, 우물쭈물 마시고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서둘러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이 여자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요12:3절을 보면 '베다니의 마리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동생이며 마르다의 동생입니다.
  눅7:36절 이하에 보면 또 한번 향유를 부은 사건이 나오는데, 그때는 예수님의 사역 초창기로써 '바리새인 집'에서 식사대접을 받고 있을 때 '죄인이었던 한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 위에 향유를 부은 그런 사건입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인데, 그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기쁜 나머지 헌신한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의 여자의 이름은 나사로의 누이동생 '베다니의 마리아'입니다. 이 여자는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다가가 순식간에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본문에는 머리에 부었다고 했고, 요한 복음에서는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었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그 향의 양이 순전한 나드 한 근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가롯유다는 요12:5절에서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했습니다.
  이 향유의 값은 300데나리온으로 쳤습니다. 당시 화폐가치로 치자면 장정이 일년 치 봉급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놀라운 행동입니까? 같은 천만 원도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에게는 가치가 다릅니다.
  이 여자는 평범한 서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향유의 가치는 여자에게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풍속 가운데 혼수 중에 가장 귀한 것이 옷과 향유입니다.
  아마 마리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딸에게 혼숫감으로 이 귀한 향유를 물려주었을 것이라고 주석 가들이 주석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부은 이 향유는 그녀가 가진 것 중의 최고로 귀중한 것입니다. 그 귀중한 것은 예수님께 바쳤다는 것은 최고의 사랑의 극치를 나타낸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던 최고의 하나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그렇게 했다면 세상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에게 그런 행위를 했다면 그것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예배의 위기입니다. 진정한 예배가 없다고 뜻 있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저 극장에 있듯이 성가대가 얼마나 찬양을 잘하나 살핍니다. 목사가 설교를 얼마나 잘하나 살핍니다. 김 집사가 왔나 안 왔나를 살핍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보다 보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그런 예배 분위기 속에서 무슨 사건이 이루어지고 어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백날, 천 날 그런 예배를 드린다해도 하나님은 끄덕도 안 하십니다. /믿/
  마리아, 이 여자가 드리고 있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의 생명의 주인에게 나의 최상의 것을 아낌없이 쏟아 버리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은 마리아만이 압니다. 헌신한 사람만이 예배의 기쁨을 압니다. 사랑은 쏟아 부은 자만이 사랑의 감격을 맛봅니다. 헌신한 만큼 감격이 있고, 희생한 만큼 감격이 있고, 포기한 만큼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사건은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아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할/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마리아처럼 최상의 것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그 하나님을 최상의 하나님으로 믿는 자'입니다. 그러나 드리는 헌신도 없이 앉아 있다면 이 사람은 '그 하나님을 시시한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도 적극적으로 오십니다. 내가 최선의 것을 드리면 하나님은 최고의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무관심으로 드리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무관심으로 대합니다.
  솔로몬은 잠8:17절에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독일의 본 희퍼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마리아는 옥합을 깨드렸습니다. 옥합을 깨뜨리지 않으면 향유를 부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가 부어 드린 향유는 인도에서만 나오는 순전한 '나드 향'입니다. 최고급 향유입니다. 여기 '순전한'이란 말은 '믿을 수 있는'이란 단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순전'이란 말은 '믿음'이란 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아멘!/
  제 아무리 큰일을 하고 큰 봉사를 해도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하고 믿음으로 해야합니다. 마리아는 순전한 나드 향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드리기 위해 깨뜨리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옥합을 깨지 않으면 향유를 부을 수가 없습니다. 참된 예배는 깨지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옛 사람이 깨어져야 하고, 우리의 부정적인 사고를 깨뜨려야 합니다. 사람마다 옥합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옥합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믿/
  옥합이 깨지면 속 사람이 살아나고 생명이 흐르며 성령의 능력이 샘솟습니다. 또한 치유가 일어나고 모든 어두운 세력들이 물러갑니다. /믿/ 예배는 향유가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들의 심령 속에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미련 없이 깨뜨렸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깨뜨려 드리는 헌신의 상징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만 오만가지 것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깨뜨려야 할 옥합은 깨뜨리지 않습니다.
  본문의 마리아는 미련 없이 깨뜨려 받쳤더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함께 전파되어 이 여인의 일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할/
  마리아가 주님께 기름을 부은 것은 그 당시 유대 풍속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귀한 손님이 오면 제일 먼저 대야에 물을 떠다가 발과 손을 씻겨줍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더 귀한 손님이 왔을 때는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시23:5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바로 그 관습에서 나온 성경구절입니다.
  그 다음 왕이 즉위할 때 기름을 붓고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장례식 때 시신 위에 기름을 붓는 관습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부은 의미는 예배의 행위요 신앙의 행위입니다만 그 행위를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의 왕으로 오심을 상징한 것입니다.
  이 신앙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네 번이나 예고했는데 깨닫지 못하였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예견하고 이해하고 깨달았습니다. 이 얼마나 대견한 믿음입니까? /할/
  이제 마리아의 헌신을 보면서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보겠습니다.

 

  ▶8-9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요12:4절을 보면 가롯유다가 나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롯유다의 잘못을 찾아내야 합니다.
  ①다른 사람의 의로운 일을 시비하고 나섰습니다. 그럴듯한 논리겠습니다만 남의 일을 간섭하고 시비하는 사람은 자기 할 일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이 하는 좋은 일은 질투하는 사람은 그 질투심 때문에 늘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②영적 가치를 돈으로 계산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생명은 귀중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보십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여러분, 지옥 갈 영혼들은 구원해 내는데 필요한 돈이라면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물질입니다. /아멘!/
  지금 세계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사들이는 마약 때문에 썩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약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들은 어서 빨리 구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롯유다 같은 발상이나 정신이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③가롯유다의 동기가 불순합니다. 요12:6절을 보세요!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리아는 순전한 마음으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롯유다는 불순한 마음으로 향유를 현금화하여 구제한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속으로는 딴 주머니를 찾습니다.
  문제는 그토록 말과 이론에는 정연했던 가롯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고 외쳤던 그 가롯유다는 결국 은 30냥에 눈이 어두워 자기의 스승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가롯유다의 논리라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낭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마리아의 낭비 때문에 그의 신앙을 본받는 무리가 많고 또 세상에는 그런 낭비 때문에 어둠이 걷히고 있는 것입니다. /믿/
  이제 마리아의 헌신과 가롯유다의 행동을 보고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해 주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마리아에 대한 평가입니다.


  ▶10절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리아가 한 일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12절을 미리 한번 읽겠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할/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참된 예배는 오직 십자가를 향하여, 예배의 중심은 십자가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향유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최고의 것을 예수님께 드렸더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연결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배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 예배입니다. /아멘!/
  오늘 여러분의 마음 속에 십자가를 향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신 주님의 그 사랑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십자가에 대한 보답이요, 십자가에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1: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은 그래서 평생동안 갈6: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한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함께 전하고 기념하라고 13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가롯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한마디로 24절에서 보면,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리아에 대한 주님의 평가와 가롯 유다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정 반대의 평가입니다. /할/


  ▶좋은 평가를 받은 마리아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의 이야기는 사복음서에서 동일하게 다루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부활의 내용이 아주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4복음서가 모두 기록하였다면 이 하나의 사건도 네 사람의 성경 기자들이 복음의 핵심인 죽으심과 부활을 기록하듯이 모두다 그 기록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유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면서 동시에 그 복음을 받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함축한다면 '아낌없이 드리고자 하는 성도들의 신앙자세가 될 것'입니다. /아멘!/ 마리아는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가?
  ①주님을 사모하는 열정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시간도 바칠 수 있고 재능도 바칠 수 있고 또 재물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당신을 사모하는 심령'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시51: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여인이 바친 것은 값비싼 향유였지만 그것은 물질로 표현된 것뿐이고 그의 중심에 주님을 뜨겁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드렸던 것입니다. /아멘!/ 
  우리들에게도 이런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관이 아니고 예수 공동체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야 하고, 예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으로 바꾸어야 하고, 예수님의 사상이 우리의 사상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이 곧 우리의 길이어야 하고, 예수님을 마음 깊숙이 사모하고 사모하면서 예배드리고 기도를 하고 헌금도 드리고 봉사도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②주님께 드리려는 열정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거룩한 소비'라고 어떤 목사님이 표현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어떤 행위도 '거룩한 소비요, 거룩한 투자'입니다. /할/ 그러나 가롯 유다는 그 여인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그 비난의 소리를 중단시키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의 행동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함께 전하고 기념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할/
  성경에 보면 마리아의 헌신이 막13장에서는 300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하였는데 이 300데나리온이란 돈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어떤 제자가 밝혔듯이 거의 5,000명을 먹일 수 있는 돈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여인이 옥합을 깨어 자신의 발에 붓는 일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히려 이 여인의 행동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같이 전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소비라면 '거룩한 소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소비에 대한 바른 가치관이 있어야 만 여기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드림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드림입니다. 마음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재능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내 생명까지도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③주님께 헌신하려는 뜨거운 열정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물론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기쁨과 즐거움을 목적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더 기쁠까?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즐거울까?'를 찾는다면 어쩌면 슬픔을 안고 돌아오게 될 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희생하는 마음이 없이 나의 즐거움이나 기쁨을 우선시 할 때 돌아오는 것은 슬픔과 원망뿐입니다. 알아주지 않을 때 슬프고 원망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앙생활에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까? 내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종으로써 헌신하는 자세가 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기쁨이어야 올바른 신앙입니다. /아멘!/
  다시 말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헌신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노라면 우리는 기쁨을 안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126:5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여인이 오랫동안 모으고 모은 향유는 자신이 시집갈 때 사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귀한 것을 그대로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것을 모두 드리려는 헌신의 심정이었습니다. 이 헌신이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이란 첫째 타산적이지 않습니다. 주석가 바클레이는 본문을 해석하면서 '경제 세계와 사랑의 경제 세계는 다르다'고 이 여인의 헌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상식의 세계는 사려 분별의 지시에 따르지만 사랑의 세계는 마음의 깊은 지배를 받는다. 인생살이란 상식으로 된 영역도 있지만 때때로 사랑의 소비를 할 때도 있다. 사랑의 선물이란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보다 또 그 능력보다 훨씬 크게 나타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할/ 
  헌신이란 둘째 기회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놓쳐버린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때때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은 받지만 그것을 행하지 못할 때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환경과 인물과 시간과 감동은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현명한 생각으로 예수님이 들으랍시고 그 여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면 더 좋겠다'라고 제안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가난한 사람들은 항시 우리 중에 함께 있지만 이 사람의 좋은 기회를 택하였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11).
  ▶필라델피아에 '죤'이라는 13세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벽돌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진창길이 되어서 몹시 불편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죤은 결심하였습니다. 이미 그의 눈에는 벽돌로 포장된 길과 그리로 들어가는 많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죤은 7센트의 임금 속에서 날마다 벽돌 한 장씩 자기 공장에서 사서 깔기 시작 했습니다. 이 길고 넓은 길을 죤 혼자서 완성 하려면 2년이 걸리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1개월 내에 일어났습니다. 이기적이며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어른들은 그 죤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길뿐만 아니라 낡은 교회당을 헐고 다시 신축하기로 결의를 하고 그 일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아멘!/
  이 소년의 이름이 '죤 와나 메이커'로써 미국에서 큰 백화점을 경영하는 성공적인 '비즈니스 맨'이었고 YMCA 건물을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이 지어 주었는데, 그는 서울 종로 2가에 있는 YMCA도 그가 기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헌신적인 주님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교회와 하나님의 사업과 자기사업에 대 성공을 가지게 된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믿/
  ▶미국에 '4센트 짜리 교회'라는 이름이 붙여진 교회가 있는데, 여기에는 네 살짜리 어린 아이의 솔선 적인 봉헌 이야기가 있습니다. 낡은 교회당의 신축을 위해 모든 교인들이 집회시간에 모여 헌금시간을 가졌는데, 모금할 액수가 너무 많아 모두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답니다.
  그 때 겨우 네 살 밖에 안된 어린아이가 강단 앞 계단으로 올라가 목사님께 가서는 고사리 만한 손에 쥐고 있었던 1센트 짜리 동전 4개를 목사님 앞에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이 돈은 우리 엄마가 사탕 사먹으라고 주신 돈이지만, 이 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목사님께 드리는 거예요'라고 말하고서는 강단을 내려갔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헌금하는 어린이에게 큰 감명을 받은 어른들이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기 차를 구입하려던 돈, 자신이 가장 아끼던 것을 헌금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4센트 짜리 예배당이 웅장하게 세워졌다고 합니다. /할/
  여러분, 오늘 이 마리아의 '거룩한 소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들도 동참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이제 11절에 보면 예수님은 세상에 가난한 자들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11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난한 자를 돌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마리아의 한 행동을 그런 관점에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한 이 행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보다 우선한다는 뜻입니다.
  결론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도운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요, 십자가를 세우는 일입니다. 2천년 교회사를 보면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갔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마리아의 헌신을 배워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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