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로마서강해/제18강 믿음만은 붙들어야(4:9-1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 10. 10:48

제18강 믿음만은 붙들어야(4:9-12)  

오늘은 전세계 교회가 종교개혁 제 479주년 기념주일로 지키고 있는 참으로 뜻 깊은 날입니다. 그 옛날 오순절 성경 강림에 의해서 신약의 교회가 탄생했다면, 바로 이 종교개혁에 의해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개신교가 탄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은 우리가 개신교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주일입니다.
지금부터 479년 전인 1517년 10월 9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마틴루터는 그 당시 로마 카톨릭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조목조목 적어서 모두 95개 조에 이르는 항의문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성경을 가르치고 있던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정문에 있는 게시판에 그것을 크게 게재했습니다. 이것을 발단으로 해서 종교개혁 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우리는 마틴 루터가 그때 작성한 95개 조의 근본 정신을 세 개의 "오직"이라고 하는 말로 정의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오직은, "오직 믿음"입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오직 믿음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 교황청에서 발급하는 면죄부를 산다고 해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서 재정이 부족하니까 그 재정을 충당하려고 사람들에게 면죄부, 곧 속죄표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든지 그 면죄부를 사면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다 용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조상들을 위해서 면죄부를 사게 되면 면죄부를 사는 바로 그 순간에 연옥에 있는 조상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허무맹랑한 괴변을 로마교황청에서 늘어놓았습니다. 안 그래도 평소에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와 로마 카톨릭이 가르치고 있는 교리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마음이 괴로웠었는데 교황청에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하자 마틴 루터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면죄부같은 것을 사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가 "오직 성경"입니다. 왜 로마교황청은 성경에도 없는 짓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의 표준은 오직 한 가지 성경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가 "오직 예수"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시는 분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쓸데 없이 로마의 교황이 자리를 차지하느냐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끼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부가 끼어들어서도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하나님과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오직, 다시한번 말씀드리면 첫째로, 오직 믿음, 둘째로, 오직 성경, 셋째로 오직 예수. 이 세 가지 오직이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이 되었습니다. 점차로 많은 사람들이 루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로마의 교황청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루터의 성직을 박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카톨릭에서 루터를 출교를 시켜버렸습니다. 파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루터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불굴의 신앙을가지고 끝까지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좋다. 너희가 나를 파문하느냐? 그러면 나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희를파문하노라." 자기가 직접 작사 작곡한 찬송을 부르면서 싸웠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이 찬송을 힘차게 부르면서 로마 카톨릭이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에 대항해서 진리를 위해서 힘껏 싸웠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 유럽으로 계속해서 번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녹스 같은 사람, 불란서에서는 요한 칼빈이 계속해서 종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들엇습니다. 그 뒤 1세기 동안 신교도들은 구교도들에 의해서 말로다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엇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1648년 베스트팔랴조약에 의해서 개신교는 신앙의 자유를 드디어 획득하게 되엇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바로이 개신교입니다.
오늘 뜻 깊은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해서 그옛날 믿음의 선조들이 부르짖었던 이 세가지의 근본정신,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이 세 가지를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오직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좀 못살아도 괜찮아요. 멸시받고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믿음만은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을 놓치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죽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믿음 만큼은 우리가 꼭 붙들고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오직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이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성경을 더욱 사랑하시고 성경을 가까이 하시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과 더불어 나날이 살아가시는 귀한 모습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오직 예수입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를 바라볼 필요 없습니다. 장로도 바라볼 필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님을 푯대로 삼고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증인으로 내세웠던 두 사람,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은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할례와 같은, 요즘 말로 하면 세례와 같은 종교의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역시 믿음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한 절 한 절 읽어나가면서 강해식으로 말씀을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9절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 행복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다윗이 누렸던 행복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다윗이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이 자기 마음속에 죄를 품고 있을 때 얼마나 괴로웠습니까? 그것 때문에 온종일 신음을 했습니다.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듯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몸 속에 있는 진액이 다 빠져버리는 듯한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나단 선지자의 도움을 받고서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자복하고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사죄의 은총을 다윗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다윗의 모든 불법을 다 사해주시고 그의 죄를 덮어주시고 가려주셨습니다. 다윗의 죄를 하나님은 더 이상 인정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의롭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죄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참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을 때 그 감격, 그 기쁨, 그 행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본문 9절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누린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라도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느냐? 이러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이 누린 이 행복은 다윗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보다 훨씬 이전의 아브라함도 똑같은 사죄의 은총을 누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9절 하반부가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대저라는 것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사죄의 은총을 똑같이 누렸습니다.
여기서 이제 이러한 질문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할례 받기 이전이냐, 그렇지 않으면 할례 받고 난 이후냐?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을 10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언제냐는 것입니다. 할례시냐, 그렇지 않으면 무할례냐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은 할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다윗이 누렸던 행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죄의 은총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할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무할례자인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이것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창 15:6에 나타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리고 나서 그 두 장 뒤인 17장에 들어가서 비로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에 의해서 할례를 행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먼저고 성경상 두 장 뒤에 아브라함이 바로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그 두 사건 사이에는 적어도 14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는 아직도 이삭과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전이었습니다. 그뒤에 15장에 보면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17장에 들어가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할 때 이스마엘이 13살 때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의 나이 13살에다가 어머니 하갈의 뱃속에 있던 1년을 합치면 14년의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14년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결과지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 그 자체가 의롭다 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이런 질문이 들지 않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면 됐지, 그뒤에 또 할례를 명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본문 11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하나의 표요, 인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표로 주신 것이 할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할례 자체가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봅니다. 여러분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보세요. 그러면 중간 중간에 표지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전 1㎞"라고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 표지판 자체가 대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1㎞를 더 가야지만 대전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할례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의롭다 하심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표로서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인이라고 했습니다. 금반지를 사면 금반지를 담은 상자에 보증서가 있습니다. 순도 99.99% 그리고 그 금반지를 판 금은방의 이름이 적혀 있고 붉은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금반지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보증서입니까? 보증서는 금반지가 없으면 백 장이 있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금반지가 있을 때 보증서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할례라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표요, 인으로 주신 것이지 그 자체를 행한다고 해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주시고 나서 그뒤에 또 할례를 명하셨겠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11절 하반부부터 12절까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1절 하반부를 보세요.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난 뒤에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할례 받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서 아무런 분깃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이 할례 받고 난 뒤에 의로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할례 받지 못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할례 받지 않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예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처럼 후예된 우리들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우리들에게 활짝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12절을 보세요.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역으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뒤에 계속해서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번에는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큰일날 뻔했습니다. 아브라함과 할례 받은 유대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할례 받지 못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섬길 이유가 없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할례를 받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할례 받은 유대인들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의 조상도 되고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의 조상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야 받든지 말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12절 하반부가 우리들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할례야 받든지 말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그 사람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처럼 그 사람도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은 다 놓쳐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는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 믿음을 우리가 놓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천국에 가보니까 천사가 천국 문에 섰는데 손에 아주 큰 책을 들고 있습니다. 이 천사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할 때마다 일일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책을 펴서 과연 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봅니다. 이제 그 목사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호기심을 가지고 천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몇 점을 받아야 합니까?"
천사가 답변했습니다.
"100점이요. 거기서 1점이 모자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목사님이 난감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온 삶이 있기 때문에 목사님은 용기를 내서 천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비록 부족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양무리를 치기 위해서 내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부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천사가 몇 점을 주었을까요?
"1점이요."
1점을 주었습니다. 목회하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썼는데 천사가 준 점수가 1점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또 목사님이 한참 생각하다가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천사가 이번에는 몇점을 주었을까요?
"1점이요."
이번에도 1점을 주었습니다. 합쳐서 2점밖에 안됩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얼마나 실망을 했겠습니까? 한참 뒤에 머리를 짜내어 또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목사의 삶이 비록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내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천사가 몇 점을 주었을 것같습니까?
"역시 1점이오."
있는 머리 없는 머리 다 짜내서 이야기했는데 3점밖에 안됩니다. 그래서는 천국에 들어갈 재간없습니다. 결국 이 목사님은 절망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깊은 절망속에서 목사님은 자기도 모르게 외쳤습니다.
"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제가 이 천국에 들어갈 재간이 없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천사가 "100점이요!"하고 큰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천사가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무슨 소리를 듣고 100점을 주었겠습니까? 예,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소리가 목사님 입에서 나오자 마자 천사가 100점을 준 것입니다.
물론 꾸며낸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천국은 내가 잘나서, 내 힘으로, 내 공로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생각해보았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일했느냐, 안했느냐? 그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느냐, 살지 못했느냐? 그것을 따지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도 역시 믿음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학생은 공부하면서 살아갑니다. 농부는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장사꾼은 장사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성도는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믿음 한 가지로 사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 이 한 가지만을 꼭 붙들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뜻 깊은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해서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더 깊어지고, 커지고, 돈독해지는 귀한 은혜가 다 있게 되시기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일한 것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지도 못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를 보시고 저희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것은 내 공로가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여겨진 것을 우리가 하시라도 잊지 말게 해주시옵소서. 이것을 생각하면서 늘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 잊지 말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믿음이 없이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우리들의 믿음이 지금은 겨자씨 만큼 작다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시옵소서. 그리해서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우리의 믿음이 주님 앞에서 더욱 돈독해질 수 있도록 우리 승동의 모든 가족들에게 하나님이여,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감사하옵고 예수님의이름으로 기도하옵나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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