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강 이 행복을 아십니까? (4:1-8)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제가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5절 말씀을 우리 다 같이 한목소리로 읽어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말씀을 오늘 다 암송하시면 좋겠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무엇을 의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까?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께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마다, 또 구원의 감격이 식어질 때마다 이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원의 기쁨을 다시금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원리를 우리들에게 계속 반복해서 강조해주었습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몇 구절을 찾아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1:16을 찾아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계속해서 1:17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조금 뒤로 넘어가서 3:22 말씀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넘어가서 3:26입니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8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또 30절 말씀을 보세요.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원리를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또 강조해주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겠습니까? 그만큼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만큼 말을 했으면 이제는 깨달을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되나? 율법을 지켜야지, 할례도 받아야지. 그래야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따지고 보면 현대판 유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분명히 말씀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가 뭔가 행해야만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죄악투성이의 자신을 바라보아서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오래 믿었지만 마음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죄악투성이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시선을 돌리세요. 자신을 바라보지 마세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분문 속에서 다시 한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원리를 우리들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사도 바울은 두 사람의 증인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증인은 한 사람으로 부족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존경하고 있는 두 사람, 아브라함과 다윗을 증인으로 내세웠습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사람이 만일에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변명할 여지가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원리는 너무나도 분명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봅니다. 첫째가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도 따지고 보면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다음 두번째가 3~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믿음, 오직 믿음 한 가지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 세번째가 6~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다윗의 예를 들어서 다시 한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원리를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분문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일한 것도 없고, 아무 공로도 없고, 경건치도 못한 나같은 죄인까지도 하나님께서 사랑해주시고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 의롭게 해주셨다는 이 사실, 이 감격, 이 행복을 느끼시고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번째로, 아브라함도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봅니다.
1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무슨 뜻입니까? 지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얻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아브라함도 육신으로는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이 더욱 분명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만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 인간 중 아브라함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자기 행위를 내세우면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아브라함도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행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와 똑같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똑같이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 아브라함조차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본래 어디 태생이었습니까? 갈대아 우르 사람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거기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수 24:2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분명히 우상을 숭배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주권적으로 선택해주셨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부터 예수 믿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말대로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시고 그를 귀하게 사용해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로 선택해주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그리할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100% 완전하게 순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너의 친척을 떠나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본토를 떠날 때 누구를 데리고 갔습니까? 조카 롯을 데리고 갔습니다.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자기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갔습니다. 그래서 중도에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을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만 했습니다. 데라가 죽고 나서야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때도 조카 롯을 뿌리치지 못하고 데리고 갔습니다. 뒤에 아브라함이 롯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드디어 아브라함 일행이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제일 먼저 아브라함이 당했던 시련이 무엇이었습니까? 기근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의 꼬락서니를 한번 보세요. 자기 아내 사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애굽 사람이 나를 죽이고 당신을 빼앗아가면 안되니까 이제부터 당신을 내 아내라고 하지 말고 내 누이라고 합시다.” 얼마나 비굴한 사람이었습니까? 떳떳치 못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곧이곧대로 듣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대신에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물질을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팔아서 부자가 된 셈입니다. 뒤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사라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려주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떳떳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뒤에 아브라함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아브라함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손의 복을 분명히 약속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꾀를 써서 그것을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사라가 권하는 대로 사라의 여종 하갈과 동침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야 마땅하건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앞당기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은 아랍 족속이 되었습니다.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신앙, 아브라함의 순종은 불완전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했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아브라함이 육신적으로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감히 아브라함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두번째로,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지 생각해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3절에서 구약 성경 창 15:6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것을 입증해주었습니다. 여러분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던 바로 그것이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어디에 살았습니까? 소돔 성에 살았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적군이 침입해 들어왔습니다. 롯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이끌고 적군을 추격했습니다. 밤중에 기습작전을 펴서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롯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 적군이 보복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방패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셔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상급이니라.”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은 저에게 상급이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저에게 무엇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보시다시피 저에게는 아직도 아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서 기르고 있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저의 상속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난 너의 씨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때 아브라함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입니까? 아브라함은 이미 나이 많아 늙었습니다. 아내 사라도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 많은 늙은 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원리는 똑같습니다. 우리의 행위를 보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믿음, 적은 믿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 한 가지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분문 4~5절에서 더욱더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알기 쉽게 설명을 해봅니다.어떤 사람이 땡볕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을 했습니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받습니까? 품삯을 받지요. 이 품삯은 은혜입니까? 아닙니다. 당연히 노력한 대가로 받는 것입니다. 일한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을 시킨 사람은 마땅히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어야 할 빚일 뿐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는 그와 같은 식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은혜로 얻는 것이지 내가 잘나서 내가 일해서 내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얻습니까? 5절 말씀을 암송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을 아니했습니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공로가 아닙니다. 품삯을 청구할 권리조차도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경건치 아니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죄만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어떻게 해주신다고 했습니까? 의로 여겨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어떠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일을 아니할지라도, 내가 비록 경건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나를 의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을 내가 알지 못해서 안타까워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한심한 모습을 바라보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라도 5절 말씀을 잊지 말고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는 일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저는 경건치도 못합니다. 죽을 죄만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자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저를 건져주시옵소서.”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내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우리를 의롭게 해주십니다. 이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큰 위로와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로, 다윗의 예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6~8절에서 다윗의 예를 들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원리를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은 이스라엘의 성군이었습니다.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실수와 허물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해서 동침했습니다.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어디 그것뿐이었습니까?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자기의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전쟁터 최전방에 보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그러고도 마음이 편했을까요?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시 32:3~4을 보면 이런 말로 자신의 아픔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다윗이 죄를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서 종일토록 신음했다고 했습니다. 뼈마디가 다 녹아내리는 것 같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이 자기를 억누르는 듯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진액이 다 말라버리고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아픔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죄악으로 인해서 고통 당하고 있을 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나단 선지자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직시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다 회개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조건 없이 다윗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죄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다가 죄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게 되었을 때, 자유함을 받게 되었을 때 다윗의 그 기쁨,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오늘 본문 6절에 보니까 바울이 그것을 어떤 단어로 표현했습니까?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불행한 사람에서 행복한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용서, 사죄의 은총을 받는 일보다도 더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윗은 일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행위로 보면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느낀 행복을 오늘 본문 7∼8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시 32:1∼2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모든 불법을 다 사해주셨습니다. 깨끗하게 다 씻어주셨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다윗의 모든 죄를 가려주셨다고 했습니다. 덮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다 가려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려고 합니다. 가려주고 덮어주지 못하고 들추어내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모든 죄를 가려주셨습니다. 덮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죄를 하나도 인정치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다윗이 그런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6절에 보니까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 사실을 아십니까? 아브라함의 행복, 다윗의 행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행복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일한 것이 없습니다. 경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의 모든 불법을 다 사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가려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고 오히려 우리를 의롭다고 하나님은 인정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인 저와 여러분이 주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가슴이 뜨겁게 박동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 설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행복을 여러분께서 아십니까? 다윗의 행복이 바로 우리의 행복이고, 아브라함의 행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와 은혜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일한 것이 없습니다. 경건치도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하나 내놓을 것이 없는 저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의 보잘것없는 믿음 그 한 가지를 보시고 저희들을 의롭다고 해주시니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마련해주신 의를 감사한 마음으로 믿음의 손을 내밀어 받는 것이오니, 주여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의심치 말고 기쁨으로 받아 누릴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셨기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줄 알고 겸손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고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을 깊이 맛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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