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강 세 개의 질문(3:27-31)
사도 바울은 롬 1:1에서 자기 자신을 우리들에게 세 가지로 소개해주었습니다. 첫째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두번째로,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복음을 위하여 특별히 택함을 입은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문자 그대로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1:16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한다. 그 이유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복음이 어떻게 해서 우리들에게 기쁘고 복된 소식이 된다고 했습니까? 1:17에서 그 이유를 우리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도저히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친히 새로운 한 의를 마련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 의를 다 받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기쁘고 복된 소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왜 우리에게 나타나야만 합니까? 사도 바울은 3:23에서 그것을 말씀해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방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들조차도 다 죄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의 영광된 자리에 결코 이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의를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 의를 우리에게 나타내주셨습니다. 범죄한 우리 인간이 정죄받아야 마땅한데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오히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정죄하셨습니다. 내가 서야 할 그 자리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고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죄 값을 그 아들로 하여금 다 지불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 예수를 믿는 우리도 의롭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자기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한 복음을 우리가 과연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문답 형식을 통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유도해나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첫번째 질문이 27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믿음의 손을 내밀어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에 불과한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이 2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유대인의 하나님이 되시거니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도 역시 하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믿음 뿐이고, 이방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길도 역시 믿음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질문이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 원리가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을 폐하고 이루어진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해주신 것은 율법을 제쳐놓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오히려 다 응하시고 의롭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여러분 자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는 자꾸 무엇인가 내세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인 동시에 너의 하나님도 되시고 그의 하나님도 되시고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 되시는데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않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를 값 없이 의롭다 하신 것은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을 폐하시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시고 나를 의롭게 하셨는데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너무나 값싸게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이 사도 바울처럼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세워지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27절 말씀에 첫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구원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있는 사람은 어디 손을 들고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바울처럼 “있을 수가 없느니라”고 하는 똑같은 대답을 우리가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보시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얼마나 추악한지 벌써 잊어 버리셨습니까? 제가 다시 한번 일깨워 드리겠습니다. 3:10~18에 있는 말씀입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눈에 비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바로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악투성이의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감히 무엇을 내세우고 무엇을 자랑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느니라.”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27절 하반부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합니다. “무슨 법으로냐.”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무슨 원리에 의해서냐? 행위로냐? 네가 잘나서 그러냐? 너에게 공로가 있어서 그러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친히 다 이루어주시고 우리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믿음의 손을 내밀어서 받을 뿐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시고 “너희는 그저 믿음으로 받아라”고 하시면 “할렐루야! 감사합니다”하고 받으면 될 텐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믿음이 가지를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행위 문제가 계속해서 솟구쳐오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내가 일을 해야만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일종의 교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랑거리를 만들고자 하는 심리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람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속에 평화로운 천국이 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세리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통곡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어떠했습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불의한 짓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간음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일주일에 이틀씩 저는 금식합니다. 십일조도 하나님께 잘 드립니다. 그리고 저기에 있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물론 바리새인이 거짓말로 기도한 것은 아닌 줄 압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추악한 인간의 모습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자랑거리를 내세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님은 비유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다른 죄는 손가락으로 다루시지만 인간의 교만에 대해서는 소매를 걷어 붙이고 다루신다.” 우리 인간의 교만을 얼마나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지를 잘 표현한 말인 줄 압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28절에서 우리 인간에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28절 말씀을 우리가 같이 한목소리로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여러분, 구원받은 십자가 상의 강도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큰 악을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강도가 구원받은 것이 그가 잘나서였습니까? 자기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믿음으로 구원받았을 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강도가 무엇을 내세우고, 무엇을 자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그에게는 감사와 찬미가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구원문제에 관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감사와 찬미가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랑하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피로 속죄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29절에 있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예나 지금이나 이방 종교에는 신이 많이 있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다 신입니다. 바다에는 바다신이 있고, 또 산에는 산신이 있습니다. 바람부는 것도 역시 신의 활동으로 보았습니다. 모든 자연 활동이 다 신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종교에서는 신들의 계급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유일신관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일신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유대인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저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은 되시지만, 너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방인을 미워하고 멸시했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는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는데 니느웨에 가기가 싫어서 다시스로 도망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요나였습니다. 왜 이 요나가 니느웨에 가기를 싫어했습니까? 자기의 사명이 실패할까봐 두려웠습니까?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자기의 사명이 성공할까봐 오히려 두려웠던 것입니다. 자기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저들을 받아주실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자기들만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그때 그때 이방인들에게도 역시 똑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그는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여리고 태생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의 직업은 기생이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다 죽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족보에 이름이 올랐습니다. 누구였습니까? 기생 라합입니다. 또 한번 물어봅니다. 그도 역시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불쌍한 시어머니를 잘 봉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성군이었던 다윗 임금의 증조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누굽니까? 모압 여인 룻입니다. 이번에는 남자를 예로 들어봅니다. 그는 아람 나라의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의 몸에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그를 깨끗하게 고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아만 장군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때 그때 이방인들에게 똑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이방인들을 무조건 미워했습니다. 잘못이지요. 요 3:16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만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유대인이 어디 있고, 헬라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이방인들도 모두 다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이 왜 그다지도 중요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30절에서 그 이유를 우리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할례자도 유대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할례자, 즉 유대인도, 또 무할례자, 즉 이방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에 구원의 길도 역시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길도 믿음 뿐이고, 이방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역시 믿음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이미 여러 차례 반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롬 1:16 말씀을 우리 같이 한목소리로 읽어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한 구절만 더 찾아봅니다. 롬 3:22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를 다 받아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시 우리는 다 이방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이 여기시고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지불하고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습니다. 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영원한 기업을 우리에게 잇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 모두의 하나님의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역시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가 미워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을 우리도 역시 사랑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비방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좀 못한 일이 있더라도 감싸주고, 위로해주고, 세워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아니겠습니까? 주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상대방에게 단점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감싸주고 덮어주고 사랑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번째 질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세번째 질문은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원리를 계속해서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무시되느냐?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천번만번 고쳐 생각해도 대답은 “No!”라는 것입니다. 아주 강한 부정입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은 율법을 폐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복음과 율법이 서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을 세우신 분이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율법을 폐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굳게 세워줍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이 원리가 어떻게 율법을 굳게 세우는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율법은 법대로 우리를 처형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모든 죄를 간과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었습니다.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죄인 된 나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아들을 대신 정죄하셨습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시고 자기 아들을 대신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나의 모든 죄 값을 다 지불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를 의롭게 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 없이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율법이 폐하여지는 것이 됩니다. 율법이 완전히 무시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 대신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응해주신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한 것은 범죄한 인간인데 하나님은 인간 대신에 자기의 아들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서 율법이 얼마나 탄복을 했겠습니까?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만 놀랐겠습니까? 하늘의 천군 천사들까지도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서 너무나도 경탄한 나머지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폐하다니요? 천만에요.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해주신 것은 율법을 폐하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응하시고 율법의 체면을 최고로 세워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생각해본 본문의 말씀을 다 같이 한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전한 이 복음을 여러분이 과연 제대로 이해하시는지를 보기 위해 문답 형식으로 교독을 해봅니다. 제가 묻습니다. 여러분이 대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시는 분은 다시 롬 1:1로 돌아가야 합니다. 낙제입니다. 제가 벌을 세우겠습니다.
제가 27절의 첫번째 질문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대답 부분을 여러분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있을 수가 없느니라.”
제가 또 묻습니다. 여러분이 대답하세요.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절을 한목소리로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제가 29절의 두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대답하세요.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절은 같이 읽겠습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마지막 31절의 세번째 질문을 제가 던집니다.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자가 누구입니까? 겸손하게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사울 임금을 생각해보세요. 그가 겸손할 때 하나님은 그를 택해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자고할 때 하나님은 그를 싫어서 버리셨습니다. 자랑하려고 하지 마세요. 높아지려고 하지 마세요. 마음을 비우고, 겸손과 낮아진 심정을 늘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의롭게 해주셨습니까?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나 대신 모든 죄 값을 지불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지불해야 할 것은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나님이 우리 대신에 자기의 아들을 정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러분이 죄의식에, 정죄감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해주신 일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의 손으로 든든히 붙드시기 바랍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이 우리의 머리 정수리에서 발꿈치까지 깨끗하게 씻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위로와 평강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게 된 것은 결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언제나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머리숙인 우리 모두가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든든히 붙들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옵소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평화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의 마음, 겸손의 마음, 온유의 마음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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