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1218 고요하고 평온하게(시 131:1-3)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0. 8. 09:20

 

111218 고요하고 평온하게

성경본문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131:1-3)

 

  2005년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니퍼 윌뱅크라는 아가씨가 결혼식을 앞두고 실종됐습니다. 작은 마을이니까 발칵 뒤집혔지요. 어떻게 된 거야? 사람들의 의견이 이건 틀림없이 신부가 납치 된 것이다.” 이렇게 모아졌습니다. 경찰에 수사를 의뢰 했습니다. 대도시가 아니고 작은 마을의 일이라 이것이 TV에 보도가 되면서 미국전역이 경악했어요. 결혼을 코앞에 둔 신부가 납치되다니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도로변 대형 광고판에 사람을 찾습니다.” 얼굴과 함께 몸무게, 사이즈, 나이 이렇게 붙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실종되었다던 신부가 제 발로 나타났어요. 깜짝 놀래가지고 어떻게 된 거냐?” 물어본즉 어느 날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지면서 고향 생각도 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더래요. 결혼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에 다가와서 자기도 모르게 하던 일을 놓고 나가 버린 거죠. 결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랬다 하는 거죠.

 

  성경은 특별히 구약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문제는 아내에게 있어요. ‘도망간 아내’,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떠나 도망간 아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일서 2 15-17절 말씀을 보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 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고 잠깐 지나가는 것이다.’ 예레미야 9 23-24절에 보면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이 세상 가운데 사랑과 공의를 이루시는 분인 것을 깨달아라. 이것을 자랑하라. 나는 이것을 기뻐하노라.’ 이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에 가치 있게 의미 있게 자유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여러분, 지혜와 부와 힘 그 자체가 잘못 된 게 아니에요. 모두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이지요. 순서가 바뀌었다는 거예요. 당연히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게 살 수 있고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그 지혜를 아름답게 쓸 수 있고 부를 주시면 그 부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순서가 바뀌었단 말이죠. 그래서 이것을 보여주시려고 예수께서 우리와 같이 인간의 조건 속에 어린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이지요.

 

  오늘 시인은 이렇게 기도 합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사람들 앞에 칭찬받고 자랑할 만한 일들, 지혜, , , 이런 것을 내 인생의 목적으로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마치 엄마의 젖을 먹고 배가 불러 그 품속에 편안히 잠든 아기와 같이 그렇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이미지가 여기 한 장 그림으로 표현되어있어요. 젖을 먹고 배부른 아기가 엄마 품에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 이예요. 가장 편안하고 아늑한 곳이기에 어지간히 시끄러운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 있어요.

 

  제가 얼마 전에 어떤 두세 살 난 아기를 보았는데 그 아빠가 아이를 높이 들어 올리는 거예요. 아빠가 애를 높이 들었나 놨다 하는데도 애가 전혀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깔깔거리면서 그 아빠 손끝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에 대단한 믿음이다. 어쩌면 저렇게 아빠를 믿을 수 있을까?’ 싶었어요. 얼마나 재미있어 하는지 아빠한테 더 높이 띄워 달라고 아우성 이예요. 보는 사람은 겁이 나는데 대단한 믿음이에요.

 

  어린 아기로 태어나서 자라난 예수님의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잘 나와 있어요. 누가복음 2 52절을 보면 어린아이 예수를 이렇게 말합니다. ‘키와 지혜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스러운 존재로 커 나갔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잘 보여 준 것이지요. 자 그런 예수가 청년이 되어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 순간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늘이 열리고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내 아들이요. 내가 저를 기뻐하노라.’  우리의 인생이 삶의 고비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드디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으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셔요. 많은 사건 가운데 풍랑 만난 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실려 있는데 자세히 읽어보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이고, 직접화법을 쓰고 있어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고 계셨어요. 예수님도 피곤하셨던지 배 뒤끝에서 정신 없이 잠이 들었어요. 아마 포대자루 같은데 몸을 파묻고 깊은 잠에 빠지신 거죠. 갑자기 풍랑이 일어납니다. 얼마나 배가 요동 치는지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고기 잡으며 살았던 어부들도 당해낼 수 없었던지 막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찾습니다. 배 뒷전에서 잠들고 있는 예수님을 뒤흔들어 깨웁니다. “선생님 큰일났습니다. 배가 뒤집히게 됐습니다. 우리를 살려 주십시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눈을 떴어요. 상황이 심상치 않아요. 얼른 일어나셔서 바다와 풍랑을 향해서 소리를 지르십니다. ‘잠잠하라! 조용하라!’ 그 순간 놀랍게도 그렇게 요동치던 파도가 잠잠해지는 거예요. 소리를 지르면서 두려움에 떨었던 제자들에게 이 사건은 더 놀라운 사건이에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사건이에요. 풍랑이 잠잠해진 이후에 주님이 말씀하셔요. ‘너희가 어찌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책망하셨어요. 배는 다시 건너편을 향해서 유유히 나아갑니다. 사람들이 모두 수근수근 합니다. 아니 도대체 저분이 누구시기에 바다와 풍랑도 복종한단 말이냐. 이게 마가복음의 상황이에요.

 

  그런데 마태복음을 보면 마태복음을 읽는 교회는 마가복음 교회보다 훨씬 배운 사람들이 모인 교회인 것 같아요. 분위기가 많이 달라요. 경건한 표현을 많이 써요. 직접화법을 쓰지 않고 간접화법을 쓰고 있어요.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가시는데 풍랑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신다.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합니다.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요.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여유 있습니까? 사실 여유 있는 게 아니지요. 다소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하고 있지요.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예수님이 그 얘기를 듣고 일어나셔서 풍랑이 요동치는데 마가복음에서와 같이 먼저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지 않고 그 흔들리는 와중에서 제자들에게 먼저 말씀하시는 것으로 나와 있어요. ‘너희가 어찌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할 말씀 다 하시고 나서 돌아서서 풍랑을 향하여 명하시니 잔잔해 졌다. 분위기 차이를 아시겠죠? 오순절 교회, 순복음 교회 같으면 막 와글와글 하고 시끄럽지 않습니까? 막 부르짖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경건을 쫓는 장로교회는 죽을 때 죽더라도 격식을 차리면서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요. 우리가 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교회이던지 마태복음교회이던지 순복음교회이던지 장로교회이던지 오늘 성경이 말하는 것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 그 인생은 어떤 풍랑 속에서도 결코 뒤집히지 않는다.’ 겉으로 불같이 뜨겁든지 점잖든지 고백만큼은 둘 다 우리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다’, 똑같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왜 인생의 풍랑이 일어납니까? 풍랑이 일어나는 원인은 여러 가지 이지만 대부분 우리의 무지와 불신앙과 불순종 까닭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감사하게도 어디로부터 비롯된 고난이든지 간에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주님을 바라보게 하세요. 그 일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하세요. 실로암 맹인 이야기를 아시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눈멀어 거지꼴을 하고 살아가는 그를 보면서 말합니다. 저렇게 눈멀고 병들게 된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아니 하시고 생각의 방향을 바꿔 놓으셨어요. 오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분, 문제를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지요.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어가실 일을 미래지향적인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이 모든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지요. 고난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에요.

 

  구약의 역사를 보면 사울 왕이 있고 다윗 왕이 있어요. 둘 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사울과 다윗의 인생은 너무나 달랐어요. 사울은 왕위에 오른 후에 점점 교만해졌어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울은 키가 크고 잘 생기고 멋있는 청년이었고 겸손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왕위에 앉은 다음부터 점점 교만해졌어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했기 때문이에요. 블레셋과의 전쟁이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선지자를 불러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고 말씀을 듣기 전에 자기가 먼저 제사를 드려 버렸죠. 자기 판단을 따랐어요. 그럴 때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뭐라고 얘기 합니까?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이 더 귀하게 여기시지 아니합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순종을 배우지 못했어요.

 

  반면 다윗은 사울 왕이 그를 잡아 죽이려 하는 10여 년 세월 동안 끝없는 고난 속에서 낮아지고 다듬어 졌어요.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갔기에 훗날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 중심은 바뀌지 않았어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 진 것이다.’ 하는 것을 기억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에 ! 주님!’ 하고 감사함으로 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젊을 때 순종해야 마지막 순간에도 순종 할 수 있어요. 위기를 당했을 때 하나님께 엎드리는 사람, 그는 평소에도 순종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차를 타고 다닐 때 항상 안전띠를 맵니다. 멀리 고속도로를 달릴 때만 아니라 잠깐 가까운 거리를 가더라도 안전띠를 해요. 몇 년 전에 한국대통령이 방문하니 여기 나와있는 분들이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어느 계열사 사장이 대통령 방문 때에 바쁘게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차와 부딪쳐 가지고 아주 크게 다쳤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속도를 많이 내지 않는 시내에서 갑자기 운전기사가 밟은 브레이크에 앞 의자에 세게 부딪치고는 그만 몸 반쪽을 못 쓰게 됐잖아요. 그 다음부터는 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안전 띠를 합니다. 안전띠를 안 하다가 다치면 여러분의 책임이에요. 하나님 보고 왜 나를 지켜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물을 자격이 없는 거예요. 우리 신앙의 안전띠는 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거예요.

 

제 나이 40 이었을 때가 제 인생의 밑바닥이었어요. 모든 상황이 완전히 바닥이었어요. 그때에 제가 불렀던 간절한 노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주제가는 무엇입니까? 잊을 수 없는 노래가 무엇입니까? 저는 주만 바라볼찌라라는 노래를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불렀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 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는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 볼지라

 

 이렇게 노래를 부르다가 나중에는 가사를 바꿔서 불렀어요. ‘가 아니라 로 바꿔서 불렀어요. 내 인생 속에 들어오시고 내 고난 속에 들어오시고 내 문제 속에 다가오셔서 나를 만지시는 주님을 간절히 소망했기에 로 바꾸어서 불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