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821 말씀을 받아 (살1:1-7)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0. 8. 19:50

 

110821 말씀을 받아 (살1:1-7)

 

성경본문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에게 교회는 그 어머니다' 고대교회의 '키프리안' 이라는 교부(敎父)의 말입니다. 그만큼 교회는 중요하죠. 가장 행복한 사람은 부모의 뱃속에서부터 찬송을 들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나고 인생의 고비마다 기도의 응답으로 진학하고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고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교회는 중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건강한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건강한 교회가 되느냐? 성경에 모델이 있어요. 그게 초대교회에요. 잘 배우고 잘 깨닫고 잘 전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몇 년 동안 고등학교 교사로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저의 모교로 갔어요. 7년 만에 제 모교를 갔는데 전쟁이 따로 없더라고요. 우리 후배들을 가르치는 건데 수업이 안 돼요. 다 엎드려 자더라고요. 깨우는 게 제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가르칠 의욕을 잃게 되더라고요. 견디다 못해 사표를 내고 학교를 옮겼습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남자 고등학교로 옮겼는데 옮기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 이렇게 공부를 안하니 서울 가면 애들이 더하지 않을까?' 했는데 웬걸, 전혀 달랐어요. 강남의 신설학교로 갔었는데요, 교장 선생님부터 선생님과 학생들이 하나가 되어가지고 비전으로 똘똘 뭉쳤어요. '우리는 신흥 명문 고등학교가 되겠다!' 학생들이 의욕이 넘쳐 열심히 배우려고 눈빛이 반짝반짝하고 있으니까 수업준비를 안 해갈 수가 없어요. 안 해가는 정도가 아니에요. 어떻게 하든지 더 효과적으로 전하려고 애를 써요. 제가 세계사를 가르쳤는데 세계사 교과서는 여섯 개 단원으로 나뉘어져 있고 단원마다 단원개요가 한 페이지 분량으로 단원의 흐름을 설명하고 있어요. "이번 시험은 단원개요를 다 외워서 쓰는데 있다." 주입식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지만 때로는 효과적일 때가 있어요. 기본적으로 아는 게 없으면 뭐가 안 되잖아요. 그래서 단원개요를 다 외워서 쓰게 하는 거지요. 얼마나 기억력이 왕성한지 다 외워서 쓰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여섯 개 단원을 좍 써서 내게 했습니다.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고 또 성적도 좋았어요. 그래서 동작지구 고등학교 3학년 모의고사를 보면 우리 학생들이 세계사에서 늘 일등 했어요. 저는 제가 잘 가르쳐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학교를 강북으로 옮기고 나서 똑같은 방법으로 가르쳤는데 꼴등하는걸 보고 '아, 학생들 수준을 잘 분별해 가지고 가르쳐야 되겠구나' 했습니다. 문제는 선생님도 일류여야 하지만 학생들도 일류여야 되고 같이 맞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죠.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나와 있듯이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3주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세 번 복음을 전했다 했어요. 그런데 그 복음을 듣고 헬라인과 귀부인 가운데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복음을 붙드는 사람들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거부하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왔어요. 반대하는 유대인들은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사도바울 선교팀 일행을 핍박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견디다 못해 사도바울이 도망을 가게 되는 거지요. 베뢰아라는 다른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거기까지 사람을 보내서 이들을 핍박하므로 사도바울이 배를 타고 피신해서 지금 고린도에 와있는 거예요. 고린도에서 쓴 편지에요. 사도바울의 열세편의 편지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진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 전서에요.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몇 달 만에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복음을 위해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불붙는 마음이 일어났어요. 복음을 통해서 자기 인생문제 해결의 열쇠를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제가 서울 소망교회에 부목사로 처음 갔더니 거기는 다들 볼링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같이 하려고 갔습니다. 그야말로 처음 가서 공을 만지작거리니까 "먼저 코치한테 한 달간 교육을 받고 와서 해야 된다" 그러더라고요. 그런 말을 들어서 기분 좋을 사람은 없잖아요. 얼마나 요란하게 하길래 한 달간 코치한테 교육을 받아야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하는가. 그러나 한 달을 훈련 받고 나서 같이 하면서 크게 느꼈어요. 군대를 졸병으로 가는 거하고 장교로 가는 것은 크게 다르잖아요. 볼링하면 잘하면 170점이 나오는데 한 달 코치한테 자세부터 시작해서 훈련을 받으니까 아예 170부터 시작을 하더라고요. 그 동네는 170이 최하 점수에요. 종종 200도 넘기는 거예요. 재미가 있고 발전하는 기쁨이 있잖아요. 왜? 자세가 바르게 돼야 뭐든지 발전하거든요. 기본을 다지지 않고 하면 막 들쭉날쭉 하는 거지요. 200점을 넘는 건 평생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기본훈련을 하고 하니까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만큼 기본이 중요한 거예요.

 

데살로니가교회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좋은 소문을 사방에 퍼뜨리는 교회가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 말씀을 바르게 듣는 교회였기 때문이죠.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몰라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행히 한국교회는 백여 년 동안에 아주 놀라운 부흥을 기록했는데 그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는 성경에 기초한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가 들어왔을 때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선교사들이 성경을 부지런히 번역합니다. 성경을 읽힙니다. 예전에는 '사경부흥회'라 그랬어요. 사경부흥회라는 말은 성경을 깊이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하는 부흥회라는 뜻이지요. 글을 알지 못하면 문맹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려니까 여러 가지 그림이나 석상을 동원해서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 카톨릭이였지요. 사람이 어리석어서 눈에 보이는 그림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봐야 할 터인데 사람이 어리석으니까 그저 눈에 보이는 상에 매달리는 거지요. 그래서 미신에 빠지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잖아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말씀 기초 위에 있었던 거지요. 이거는 전통적인 유교가 준 좋은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데살로니가의 회당에 가서 사도바울이 단 세 번, 세 안식일에 복음을 전했는데 그 복음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어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했다'. 십자가의 형벌로 죽은 인생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셔야만 하는 이유를 구약성경을 들어서 증명했다. 그 말을 압축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했다' 그런 말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또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하지 않아요.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해요. 하나님을 떠나 버렸어요. 성경은 이것을 원죄라고 말해요. 죄의 결과로 우리는 살았으나 죽은 자 같이 고통가운데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 속에서 헤매며 죽어가게 된 것이지요.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지요. '예수가 그리스도다' 이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어요. 오직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셨어요. 이거는 하나님이 드러내신 것이기 때문에 ‘계시’라고 그래요. 우리가 요한계시록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사도요한을 통해서 말세에 될 일의 비밀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계시록이라고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건 계시에요.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었던 거예요. 이성으로 알 수 없었던 거예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고 하나님만이 이루신 것이고 하나님만이 보여주실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걸 어떻게 알겠어요?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의 능력으로는 믿을 수 없으므로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방법도 하나님이 제시해 주셨어요.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우리의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들을 때 믿음이 생긴다.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어떤 분들은 '나는 믿음이 없어. 저 사람은 잘 믿는 것 같은데 나는 믿음이 없어.' 아니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말씀 그 안에 생명이 있어요. 그 말씀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을 들을 때 내 안에서 믿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볼링을 배울 때 처음부터 기초를 분명히 하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확하게 배우면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과 같아요. 골프도 마찬가지지요. 구력은 오래됐는데 자기 마음대로 치면 좋은 성적이 나올 수 없는 것과 같아요. 그러면서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는지 모르겠어.' 하는 건 자기를 속이는 거예요. 제대로 배우질 않았잖아요.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올바로 들으면 그 말씀이 생명력이 있어서 우리 가운데 믿음을 일으켜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을 활짝 열고 듣고 있는가. 에베소서 2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 우리가 구원받았어요. 이것을 우리가 믿을 때 구원을 받게 됐어요. 그런데 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해요. 내가 막 몸부림 쳐가지고 믿겠습니다, 해서 믿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내 안에 심겨지면서 믿음을 자라나게 하는 거예요. 말씀에 대해서 늘 마음을 열고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끝내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그 말씀이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곧 말씀이시다' 이렇게까지 말해요.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다'라고 외치는 말씀이 됐어요. ’선포한 말씀‘이 됐어요. 그리고 성경으로 ’기록된 말씀‘이 되었어요. 그리고 오늘은 강단을 통해서 설교되어지는 말씀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어디서 만나느냐? 강단을 통하여 오늘 내게 들려지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내가 만나는 거예요. 인격적으로 만나는 거예요. 단순한 지식이 아니고 목사의 인격을 통해서 나에게 전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거예요. 여러분, 말씀을 지식으로만 듣지 마세요. ’하나님이 오늘 저분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신다.‘ 그것이 말씀을 듣는 올바른 자세에요. 그럴 때 말씀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여러분, 교회에 많은 것이 중요하죠. 건물도 의식도 다 중요하지만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다 헛일이잖아요.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해도 말씀을 듣고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건 세상을 얻은 거예요. 사람이 변하고 나서야 모든 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말씀이에요.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어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도 살펴 하나님의 뜻대로 고쳐나가신다' 약속하셨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있는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저 십자가를 믿는다가 아니에요.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내가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 믿는다는 건 예수를 본받아 따라간다는 표현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게 아니에요. 내 안에 예수께서 살아계시는 거예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두 사람이 사랑하면 결혼하고 한 지붕아래 사는 거잖아요. 같이 산다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연애할 때의 그 마음으로 살아야 되는 거지요. 둘이 하나가 되어 사는 거잖아요. 그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이잖아요. 그 사람의 뜻이 내뜻이잖아요. 그게 연애의 본질이잖아요.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를 믿고 따라간다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나와 하나가 되어 그분이 내안에 살아계신다' 왜 이렇게 해야 되느냐? 이유가 있어요.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정치가들의 비리가 드러나잖아요. 신문에 보도됩니다. 드디어 검찰에서 조사를 합니다. 가끔 어떻게 되요? 나중에는 이 사람이 견디지 못해 자살하잖아요. 희한해요. 신문 방송이 떠들고 국민들이 분노하고 그러다가도 그 사람이 죽었다 그러면 그날로 그냥 끝이에요. 더 이상 얘기도 안 해요. 왜 그렇죠? 죽은 사람에게는 죽었으므로 죄값을 물을 수 없어요.

 

죄는 크든지 작든지 죄값을 치러야 되요. 죄값은 죽음이에요. 사단은 모든 죄인에게 합법적인 권리를 요구해요. 죄인은 사실상 사단에게 속해요. 사단이 권리를 요구해요. "넌 죄를 지었으니까 너는 마땅히 저주를 받고 벌을 받아야 된다."라고 요구해요. 우리가 그걸 이겨낼 힘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의 몸과 생명과 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으셨어요.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는 이제부터 어떤 죄의 공격이 들어와도 '나는 죽었다' 얘기해요. 나는 죽은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라는 말씀을 분명히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거예요. 예수 믿고 살 때 일어나는 신비한 변화에요. 이걸 알아야 되요. 예수 믿는 것은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내가 이 비밀을 알고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거지요.

 

또 하나, 우리가 회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살던 것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요. 이거는 회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수를 믿어도 우리는 늘 죄를 범하게 되요. 그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손을 깨끗이 씻고 때때로 목욕을 하듯이 회개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우리의 일상 속에 늘 회개가 있어요. 또 하나의 회개가 있어요. 억울한 일을 당했어요. 분명 저 사람이 잘못했어요. 세상 법으로는 저 사람이 잘못했고 당신은 아무런 죄가 없어요. 억울한 일을 당하고 피해를 당했을 때 분노하고 원통해하고 괴로워하는 건 세상 기준으로는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잘못하는 거예요. 육신적으로 반응하는 것, 그건 잘못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이미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지요. 영적인 해결책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고 어렵게 할지라도 그것을 은혜로 이겨낼 수 있는 거예요. 영적인 반응이에요. 로마서 8장 13절에 보면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육신적으로 반응하면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것이다’ 이제까지 이러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되요.

 

하나 더 수준을 달리하는 회개가 있어요.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높은 보좌 우편에 앉아서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우리들에게 주셨다' 그랬잖아요. 예수 이름의 권세를 모르고 이 세상에서 내 노력과 수고로 땀 흘리며 애쓰며 살아가는 것, 그건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예수 이름의 권세와 비밀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 그걸 회개해야 되요. 여러분, 예수 믿고 산다는 건 놀라운 능력이에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로 이걸 발견한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환란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자, 성경은 지도에요. 인생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길을 잘 그려놓았어요. 그러나 지도를 품에 안고 있다고 해서 저절로 목적지엔 가는 건 아니에요. 그걸 따라가야 되요. 순종해야 되요. 활용해야 되요. 여러분 가정에 가면 책이 많이 있잖습니까. 공부해야 되는 사람들은 책을 보면 강박관념이 있잖아요. '아 이걸 다 읽어야 되는데' 저도 밤낮 그랬거든요. 밤낮 그 앞에서 인상을 찡그리고 말이지요. 그래가지고는 절대로 읽을 수 없어요. 어떻게 해요? 우선 한 권 펼쳐서 읽는 거예요. 저는 여러 권을 동시에 읽습니다. 이거 읽다가 졸린 것 같으면 또 다른 걸 읽고 왔다갔다 읽습니다. 그러다 은혜 받으면 관계되는 또 다른 책을 끄집어다가 읽습니다. 마음이 끌리는 데로 읽습니다. 그럴 때에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 오해가 있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게 어렵다 생각해요. 아니요. 불순종이 훨씬 더 어려워요. 불순종이 훨씬 더 마음에 고통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도 순종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거예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아시잖아요. 아람 왕이 사랑하는 장군이에요. 그런데 그에게 병이 있어요. 그는 나환자에요. 화려한 갑옷 속에 감추어진 진물이 흐르는 고통이 있어요.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끌려온 한 여종이 주인의 아픔을 알았어요. 그래서 여주인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 선지자가 계신데 그분을 한번 만나기만 하면 고침을 받을 텐데" 그 이야기를 듣고 여주인이 자기 남편인 나아만 장군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금은보화를 준비해가지고 결국 이스라엘에 가서 엘리사를 만나지 않습니까. 엘리사에게 사람을 보내서 "제가 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엘리사가 뭐라고 합니까? 나오지도 않고 종을 보내서 말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해라"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아만이 분노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왔는데 친히 나와서 아픈데 손을 얹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해서 고쳐줄 줄 알았더니 뭐라고? 이 개울 같은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고 우리나라에 이거보다 더 큰 강이 얼마나 많은데" 분노하지 않습니까? 그때 옆에 있는 종이 참 기가 막힌 말을 합니다. "주인님, 아니 왜 그러십니까? 이거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해야만 병을 고친다고 해도 하실 분이 세상에 이렇게 쉬운 해결책을 냈는데 왜 분노하십니까?" 가만히 듣고 보니 진짜 그래요.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었을 때 그는 아기의 새 살 같이 회복되었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감당할만한 시험과 고난을 주셔요. 우리가 마음을 열고 주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놀라운 응답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제 가까이 아는 사람 중에 사업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저한테 와서 이러더라고요. "만약에 새벽기도 백 일에 사업이 일어난다면 새벽기도를 나갈 텐데" 그러더라고요. 나오세요. 나와 기도하세요. 꼭 응답하셔요. 일주일만이라도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셔요. 우리의 순종은 작은 것 부터에요. 한 시간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 오늘 제가 여기에 왔습니다. 오늘도 한 주간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것하고 허겁지겁 마음이 정돈되지 못한 채 막 나오는 것은 다르잖아요. 하나님도 인격이신데.

 

첫걸음부터 바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건강한 교회를 원하세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교회를 원하세요. 왜? 이곳에 교회를 세우셨을 때 하나님은 분명 뜻이 있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손에 손을 잡고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아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다 연약합니다. 부족한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고 '주님! 말씀하십시오. 깨닫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겠습니다.' 이미 시작 된 거예요. 충분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날마다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 소문을 따라 나아갈 때 데살로니가 교회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온 그리스에 좋은 소문을 퍼뜨렸던 것과 같이 우리는 건강한 교회로 아름다운 교회로 좋은 소문을 내는 교회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