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828 아브라함의 자손 (갈 3:1~9)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0. 8. 20:26

110828 아브라함의 자손 (3:1~9)

성경본문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한국 교회의 교인수를 8백만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5년 통계에 의하면 일본의 교회는 총인구 127백만 명 가운데 39만 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퍼센트로 따져 보니까 0.3% 밖에 안 되는 것이죠. 교회 수는 약 8천에 못 미칩니다. 교회당 평균 교인수는 64명이고 예배 출석수는 41명이라고 합니다. 원래 일본교회는 한국교회보다 역사가 조금 더 오래죠. 천주교를 포함해서 얘기해도 일본은 임진왜란 때 이미 세스페데스라고 하는 폴투갈 종군 신부가 일본군을 따라서 우리 나라에 들어왔죠. 천주교가 벌써 들어왔죠. 그리고 순교자로 말해도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우리 나라도 천주교 순교 역사가 있습니다마는 일본은 훨씬 더 오래 전에 더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도 더 오래고 순교자도 더 많은데 오늘 일본 교회가 이렇게 0.3% 밖에 안 되는 데는 뭔가 분명 이유가 있지 않느냐.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얘기합니다만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해석은 일본의 문화를 아시죠? 일본 사람들은 서로 절대 폐를 끼치지 않는다. 또 받은 바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된다. 도덕에 매여 있죠. 복음이해가 도덕을 넘어서지 못했어요. 또 일본의 신이 무려 8백만이 된다지 않습니까. 이렇게 많은 신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신이 없다는 말하고 똑같아요. 절대신이 없어요. 신 앞에서 죄의식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알고 보면 모든 것은 다 인간관계에요. 친구간에 부부간에 또 상사와 부하간에 수많은 예절로 표현된 그런 인간관계, 그것을 잘 하면 삶에 문제가 없다라고 이해한다는 데 있죠.

또 일본의 기독교가 들어올 때 우리 나라보다 먼저 개항을 했죠. 일본은 1854년 미국에 의해서 개항되면서부터 기독교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우리 나라는 1876년 개항하면서부터 서양사람들이 들어오게 되고 뒤따라서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지 않습니까. 근대화 역사를 가지고 얘기한다면 일본은 승승장구하는 그런 역사가 있었고, 반면에 우리는 짓밟히고 나라가 망하고 기근과 가난과 깊은 전쟁에 빠져들었고 또 그 전쟁도 6.25 전쟁 같이 한 동족이 이념으로 갈라져서 서로를 죽이는 엄청난 비극 속에 있었던 거죠.

제가 사실은 르바란 연휴에 읽은 책도 쌓아놨지만 혹시 좋은 DVD가 뭐가 있나 해서 얼마 전에 개관한 한국문화원에 가서 도서카드를 하나 만들고 찾아봤더니 <한국전쟁 10부작>, 작년에 KBS에서 만든 영상물이 있더라고요. 그것을 가지고 와서 한편 보다가 내리 다 봤습니다. 말로만 듣던 전쟁과 이제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롭게 발굴된 수많은 영상물로 본 전쟁의 실상, 그리고 전쟁의 시작부터 완결과 그 이후의 모든 일을 종합적으로 보면 너무너무 비참해요. 여러분이 지금 살아 앉아 있는 게 기적이에요. 여러분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면 여러분은 없는 거 아니에요.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런 전쟁 속에서 사람은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거죠.

일본 기독교와 우리 나라 기독교의 시작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아주 대조적이에요. ‘우찌무라 간조라고 우리가 익숙하게 듣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1861년생이고 1930년에 세상을 떠난 분이에요. 그는 아주 엘리트죠. 동경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삿포로 농과대학을 들어가는데 당시에 삿포로 농과대학은 일본이 개항하면서 근대화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계획 중에 농업을 발전시켜야 되겠다고 해서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립 농과대학의 클라크 박사를 일본에서 초청합니다. 1년 계약으로 그를 초청해서 삿포로 농과대학을 만들어서 이들을 인물로 키우는 거죠.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거죠. 우찌무라 간조가 그 학교에 2기생으로 들어갑니다. 그랬더니만 이미 1기생들이 있는데 1기생들이 예수를 다 믿어요. 클라크 박사가 와서 농업기술을 전수할 뿐만 아니라 농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의 개조다, 그리고 미국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를 믿고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해서 1기생들을 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바꿔놨어요. 그리고 그는 1년 만에 떠나갔어요. 떠나가면서 한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품어라. 그게 그가 던져주고 간 말이에요.

우찌무라 간조가 들어갔더니 클라크 박사는 이미 떠나갔고 자기 1년 선배들이 기독교로 철저히 무장을 해가지고 이제 신입생인 자기들을 다 예수 믿게 하는 거예요. 아주 강제로 예수를 믿게 하는 거예요. 우찌무라 간조의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라고 하는 글을 보면 굉장히 고민하고 있어요. 이제까지 자기가 섬겼던 수많은 신들을 포기하고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오 신이여, 나를 구해주십시오. 나를 이 핍박과 억압에서 건져주십시오하는 일기가 있어요. 그런데 선배들의 강요에 못 이겨서 할 수 없이 예수 믿겠다고 서약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약을 하고 반 년 만에 자기가 세례를 받게 되는데 강제로 서약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반 년 사이에 자기는 자원해서 세례를 받게 되요. 그런데 자기 동기들, 특별히 7명의 그룹은 나중에 일본 사회 각 분야의 최고 엘리트들이 되는데, 똑똑한 사람들이에요. 자기들끼리 교회를 구성해요. 그래서 자기들이 이제 신앙을 가지기로 결정했으니 우리가 온전히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자기들 안에 규율을 만들어요. 주일날 오전에도 모이고 저녁에도 모이고 수요일 저녁에도 모이고, 그리고 목사가 없으니까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일주일에 한 명 목사를 정해요. 그 사람이 알아서 다 예배를 인도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그 사람의 인도를 따라 가는 거예요. 정말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엘리트의식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는 열여섯 살에 삿포로 농과대학에 들어가서 억지로 서약을 하지만 반 년 만에 세례를 받고 회심을 경험하게 되죠. 그는 나중에 미국에 유학을 하게 되고 또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칠십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년 동안 <성서연구>라고 하는 책자를 만들어서 신앙을 보급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거리를 두고 제도화된 교회를 많이 비판을 하게 되죠. 그래서 우리 나라에는 무교회주의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나와 있습니다. 상당히 일본 교회의 초기의 상황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에요.

그런데 반면에 동시대에 우리 한국에서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는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서상윤이라고 하는 분이에요. 그분은 평안도 사람입니다. 14살에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상인이 되었어요. 10대에 벌써 상인이 되어서 큰 돈을 잃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재기를 해서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와 조선이 무역하는 고려문이라고 하는 일종의 국제시장에 나아가서 장사를 하게 되요. 그는 홍삼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만 그가 열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급하게 그들이 알고 있는 영국 선교사에게 그 소식을 알립니다. 맥인타이어라고 하는 영국 선교사가 쫓아와서 서상윤을 당시 그곳에 있는 영국의사에게 데려가서 그를 고치게 됩니다. 손을 쓰지 않았으면 영락없이 죽었을 그를 정성껏 치유해서 고치게 되요.

, 생명을 얻었어요. 그리고 회복되는 그에게 성경을 전해줘요. 한문성경을 전해줘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서 성경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요. 그리고 그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로스와 맥인타이어 두 선교사를 도와서 성경을 번역하게 되고 번역된 우리말로 번역된 그 성경을 몰래 숨겨가지고 국경을 넘어 들어옵니다. 붙들렸어요. 성경을 다 뺏겼어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돌아가서 또 다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요. 그리고는 황해도 해주 옆에 소래라고 하는 마을에 가서 성경을 전하게 되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게 1884년이에요. 1884년이라면 언더우드, 아펜셀러가 들어오기 1년 전이에요. 벌써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자생적인 교회가 이루어졌던 거죠. 언더우드는 들어와서 얼마 있지 않아서 벌써 이미 세례 받은 한국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또 선교사들에게 세례 받기를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서상윤이 그들을 서울로 이끌어 와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게 하죠. 그리고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1887년에 열네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시작한 것이 새문안 교회가 되는 거예요.

일본교회의 출발과 한국교회의 출발은 모양이 많이 달랐어요. 하나는 엘리트로 출발했어요. 복음이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는 상인으로부터 시작했어요.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고 시작했어요. 그리고 성경을 보급하면서 시작했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신앙형태를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율법과 믿음, 그렇게 말합니다. 이걸 조금 더 다르게 표현하면 율법주의와 복음주의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에요. 로마서 7 12절에 보면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했어요. 율법은 거룩한 거예요. 그러나 율법주의는 다른 거예요. 율법주의는 그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 그게 율법주의에요. 그런데 오늘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갈라디아서 3 10절에 보니 율법의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 그런데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율법의 저주 가운데 매여있다. 그런데 그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셨다 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중학교를 시골에서 다녔잖아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가니까 영어를 공부하더라고요. 그런데 영어선생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저희 자라날 때 수업분위기는 완전히 선생님 손 안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생님 나름대로의 자기의 교육철학과 교육방침대로. 그런데 우리 영어선생님은 시골 애들은 하도 공부를 안 하니까 초장에 아주 정신을 바짝 들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셨는지, 또 더구나 영어공부가 어려우니까 기초를 잡아놓지 않으면 애들이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군대식으로 다루기로 작정을 하신 것 같아요. 30cm 자를 항상 들고 들어오셔서 물어서 틀리면 뺨을 내리칩니다. 아주 공포 그 자체였어요. 그런데요, 저는 한 번도 안 맞았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의 은혜에요. 글쎄,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6학년 졸업식만 남겨놓은 겨울방학에 제 친구가 어느 날 와서 그러는 거예요. 우리 큰 누나하고 결혼하려고 하는 큰 매형 될 사람이 자꾸 영어를 가르쳐준다고 하는데 너도 좀 같이 하자고 그러는 거예요. 자기 혼자 일대일로 공부하기 쑥스러우니까 같아하자고. 그래서 별 생각 없이 그러자고 하고는 셋이서 같이 공부했어요. 한 두 달을 같이 공부했는데, 이 매형 될 사람이 작은 처남의 마음을 사야 되니까 열심히 가르쳐준 거예요. 우리가 1학년 들어가기도 전에 유니언 영어교과서 절반을 공부하고 들어갔어요. 절반을 공부하고 들어갔으니 영어수업이 거저 먹기 아니겠어요. 그런데 옆에서 맞는 소리가 막 나는 거예요. 애들이 공포에 질려 있는데 저는 오히려 선생님이 칭찬하시더라고요. 너는 어떻게 잘 하냐. 미리 공부했다는 얘기는 안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덕을 많이 봤어요. 제가 좀 유약하고 그랬는데 이렇게 되니까 선생님들이 자꾸 칭찬하고 그래서 중학교 시절이 행복했습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였죠.

보세요, 영어를 공부하는 것은 꼭 필요하고 중요한 거예요. 율법과 같아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거예요. 그러나 영어를 제대로, 문법을 제대로 잘 하는 것은 어려운 거예요. 이건 혼자서 할 수 없는 거예요. 천재가 아닌 한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날마다 가서 수업시간에 맞아야 되는 거예요. 이건 율법의 저주에요. 그야말로 영어의 저주에요.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데 전 알기도 전에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좋은 기회를 만나서 다 공부하고 들어갔어요. 성경이 바로 이걸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 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우리에게 오히려 아브라함이 받는 복을 주셨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받는 복은 뭐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은 우선 잘 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에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아브라함을 부르시고는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너는 이제 나를 따라오너라. 네가 나를 따라오면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 그리고 너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복을 받도록 하겠다.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인생을 이렇게 책임지시겠다고 어느 날 나타나신 거예요. 이게 바로 아브라함의 복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을 따라갔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어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나를 따라오라. 그리고 저 가나안 땅으로 가라. 성경에 보니까 아브라함이 갈 길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갔다고 했어요. 그러나 성경을 좀 꼼꼼하게 읽어보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신 것 같아요. 아브라함이 그걸 다 훤히 알아서 따라간 게 아니에요. 왜 그러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때로는 기근이 오니까 아브라함이 걱정스러워서 먹고 살려고 애굽으로 피난했다가 망신을 당하고 하나님이 건져주셔서 돌아오기도 하고, 또 소돔과 고모라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휘말려 들어가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나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걱정이 있었어요. 내가 낯선 땅, 이방 땅에 와서 이렇게 사는 게 정말 제대로 잘 한 결정일까. 하나님이 내게 말씀을 하셨지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고 그 아들을 통해서 큰 자손을 이룰 거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 자손들을 통해서 세계 모든 이방이 다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아들 하나도 없는데 그게 정말 제대로 되는 일일까.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어요. 또 전쟁을 겪고 나서는 너무나 두려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면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창검이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을 밤에 사막으로 이끌어내어서 밤하늘의 별을 보게 하셨어요. 시청각교육을 하는 거예요. 밤하늘의 별을 보게 하시면서 저 무수한 별을 보라. 내가 너의 자손을 저렇게 많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걸고 다시 한 번 약속해 주셨는데 그때 놀라운 변화가 있었어요.

창세기 15 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믿었다고 했어요. 믿었다. 그전에도 믿는다고는 했죠. 그런데 늘 흔들리는 믿음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날 그 시간에 분위기가 좋아서 그랬는지 믿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의 말을 듣고 믿는 것을 보시고 그것을 잘했다고 칭찬하셨어요. 그걸 성경에는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의롭다 칭하셨다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성경에서 의롭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바르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롭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의롭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잘하십니다이게 의로운 거예요. ‘하나님 하십시오이게 의로운 거예요. ‘하나님만 따라가겠습니다이게 의로운 거예요. 그래서 칭의 라는 말은, 하나님이 의롭다 칭한다는 말은 잘했다고 칭찬하는 말이에요. 뭘 잘했느냐? 무슨 도덕적 행위를 잘 했느냐? 그 이전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인정했다, 그것을 칭의 라고 말해요.

그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무 기뻐서 아브라함과 다시 한 번 언약을 맺습니다. 아랍 사람들이, 중동 사람들이 맺는 언약의 방식대로 짐승을 가져다가 둘로 쪼개요. 그리고 하나님이 불로 나타나셔서 그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셨어요. 그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 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는 이 짐승이 두 쪽이 나듯이 이렇게 두 쪽이 날것이다. 그러니 이 언약은 절대로 깨질 수 없는 언약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사실 일방적인 언약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걸고 내가 너를 위해서 이런 언약을 지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아무 능력이 없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지 않고 너는 지켜보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불로 지나가셨어요. 영원한 언약을 삼으셨어요. 그리고 이 언약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할례를 행해서 몸에, 살에다가 칼을 대고 피를 내게 하고 그 언약을 몸에 새긴 거죠. 할례, 남자들의 포경수술은 그저 하나의 의학적인 행위라고 볼 수도 있고 많은 민족들이 그렇게 행했지만 유대인들은 그걸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내 몸에 새긴 것이다. 거기에서 피가 나죠. 피는 생명이죠. 생명을 걸고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언약이다 라고 받아들인 것이죠.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을 아브라함이 기억합니다. 그러나 또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눈에 보이지 않자, 후손을 주신다고 했는데, 아들 하나를 약속하셨는데 아들을 어떻게 주시려나. 기다려도 소식이 없으니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하갈이라고 하는 애굽에서 얻은 여인을 통해서 아이를 얻었어요. 이스마엘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셔요. 그건 내 방법이 아니다. 네가 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급한 마음에 육신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얻었구나. 그래서 오늘 갈라디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의 두 아이가 있죠. 이스마엘과 이삭이죠.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방법으로 얻은 아들이죠. 육적인 아들이에요. 그러나 이삭은 결국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시간에 100세가 되어 죽은 것 같은 그 몸을 통해서 얻은 아들이죠. 이건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은 아들이죠. 죽은 것 같은 그 몸을 통해서 어떻게 아이를 얻겠어요? 얻을 수 없죠.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얻은 영적인 아들이죠. 이게 이삭이죠.

아브라함이 믿음에 있어서 아들을 얻는 과정에서 자기의 방법을 동원해서 아들을 얻으려 하다가 실패했어요. 그게 이스마엘이에요.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얻은 아들이 이삭이에요.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내가 죽은 것 같은 이 몸을 통해서도 생명을 주시는 분이니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실 때에, 히브리서에 보면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을 가졌느냐 하면, 이 아들이 설령 불에 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시리라 하는 부활을 믿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순종했다. 이게 바로 아브라함의 신앙이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신앙 속에도 율법주의가 있고 복음주의가 있었어요. 자기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었어요. 이건 율법주의에요. 그러나 나중에는 자기의 능력을, 자기의 모든 시도를 다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응답을 얻는 그런 복음의 열매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죠. 그리고 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뒤따라가는 우리 모두는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거죠. 우리가 핏줄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죠. 영적인 자손이죠. 아브라함은 우리 신앙의 모델이죠.

오늘 성경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된다. 그것을 다시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성령의 약속을 받는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는 것이 오늘 무엇이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같이 사시는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도 예수를 믿은 이후에 그 안에 율법주의가 들어왔어요. 교회에. 그래서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하는 잘못된 길을 간 거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애가 타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들이여, 당신들이 처음 예수를 믿게 된 것이 당신들의 율법의 행위로 얻은 것이냐? 그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 아니냐. 이렇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왜 이제는 육체로 마치려 하느냐?

신앙생활이란 뭡니까?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거예요. 그럼 예수께서 우리 안에 오신다는 말은 뭐냐? 이제 우리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거예요. 내가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신 거예요.

6.25전쟁영화를 DVD로 보면서 느꼈던 것은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은 능력이 있고 없고 관계 없이 권력 속에 살아야 되죠.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자유 대한에 태어났기에 오늘 이런 자유를 누리고 있는 거죠. 율법의 행위로 예수를 믿은 게 아니에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그 복음이 우리들에게 들려져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됐어요.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은혜 가운데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됐어요. 그래서 이제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열심히 믿는 게 아니에요. 더 본질적인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주님이시다.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과 같이 사는 거예요.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신분과 수준을 착각하지 말라고. 아주 중요한 얘기에요. 좀 멋있게 사는 분이 있죠. 그런 분들은 수준이 높은 분들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그러나 신분하고 혼동하면 안 되요. 제가 지난번에도 구겨진 화폐얘기를 했어요. 화폐는 아무리 구겨져도 그의 본질적인 화폐가치는 바뀌지 않아요. 좀 구겨졌을 뿐이에요. 그러면 바로 펴면 되고 먼지는 털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허물 속에 살아요.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이 신분의 변화는 절대로 흔들리지 말고 붙들어야 되는 것이죠. 다만 성령께서 이제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셨으므로 이젠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그저 우리 노력으로, 열심으로, 우리 방법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 늘 물으면서 사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의도는 뭐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과 같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서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누리듯이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의 그 복이 흘러 넘쳐서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는 것이죠. 증거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로 인생을 보내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일터를 주시고 교회를 세우실 때에는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다 있는 것이죠. 그것을 물으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다고 예수 믿는 것이 남은 하루에 세 끼 먹는데 나는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 것이라든지, 반대로 굶으면서 사는 그런 게 아니죠. 생활의 모습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께서 내 주인이 되셔서 나를 통하여 주시는 크고 작은 모든 일상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며 사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부부가 더불어 사는 것, 이것을 진정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 또 부모형제자녀가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셔서 이 지역사회를 위해서 하시고자 하는 아름다운 일들이 많이 있어요.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 교회의 일이에요. 또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일이에요. 이러한 일들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럴 때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영적인 자손으로, 아브라함이 누리는 그 복을 오늘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